사제가 선동의 언어를 사용할 때 [헌변 회장 임 광 규 변호사]

  • 등록 2008.05.31 23: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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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광야의소리 http://www.aware.co.kr 에 있는 헌변의 회장 임광규 변호사의 글입니다.


사제가 선동의 언어를 사용할 때
-사제의 시야는 영원의 진실성을 향해야 하는데-


임 광 규 베네딕도 (신관동본당) [헌변 회장]



지난 부활절 서울교구 주보 중 “빛과 소금” 난에 “교리로 보는 세상이야기 -노동은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 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사제가 쓰신 글이고 더구나 “정의평화”에 관한 직책을 맡은 신부께서 쓴 글이라서 살펴보았습니다.

“고용의 유연성 확대 정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차별의 고통으로 내몰고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 정책 관련자들뿐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데, 특히 인간노동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노동과 자본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보완하는 관계이지만 ‘노동은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비정규직이 더 적합한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 사용자들은 비록 비용이 늘더라도 정규직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는 등의 논리를 사회교리로서 가르치려고 하는 글입니다.

그 신부님이 쓴, “노동이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문구는, 가톨릭문헌에서 인용한 곳을 적지 않았습니다. 이 문구나, “인간노동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문구는 가톨릭교리의 원칙이 아니며 선동의 언어들입니다.

선동도, “진실성을 향해,” 사실을 밝혀내고, 이성에 따라 사회과학적 검증의 노력을 하던 끝에 나온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기도 모르게 사회주의 교의(socialist dogma)와 사이비 경제학적 해석(pseudoeconomic constructions)에 물든 채, 선동의 문구를 쓰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노동이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말이 “자본(가)보다 노동(자)가 우위라는 것” 인지, “물질보다 인간이 우위라는 것” 인지, 무슨 뜻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구호나 선동이란 원래 암시적(suggestive)인데, 무책임한 정치인이나 선동적인 시민운동가들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동의 문구를 분석하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제를 사랑하고 따르는 순진하고도 오도되기 쉬운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이란 땀 흘리고 아낀 저축이나, 부모의 저축을 상속한 구매력(購買力)을 기업에 사용하는 돈입니다. 돈이 있다고 편히 놀면서 지내거나 사치에 쓰려는 돈의 경우가 아닙니다. 기업인은 이 구매력을 대차대조표에 올려놓는데, 대변(貸邊)에 기재됩니다. 이 구매력을 가지고, 원료를 사고, 공장부지나 사무실의 임차보증금에 지출하고, 일 할 근로자를 고용하여 매달 월급을 주고, 그 근로자의 건강보험료, 국민연금보험료, 산재보험료, 실직보험료의 상당부분 내지 절반도 이 대변의 자본으로 지출합니다.
자본이 부족하면, 기업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본과 합치거나, 자기의 자본이 앞으로 부족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은행에 설명하고서 신용을 걸고 빚을 내어 이들 비용으로 지출합니다. 이 빚도 대차대조표의 대변에 기재됩니다.

기업은 세상 사람들의 먹고 자고 입고 사는 소비자의 필요(必要)에 봉사하여야 하고 소비자의 까다로운 기대(期待)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즉 소비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렇게 자본을 쓰고 빚까지 내어 지출하여도 수입이 모자라, 빚을 그 이자와 함께 갚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더 자본을 대지 못하면 사업을 접고, 대신 가산(家産)을 내다 팔아 갚아야 합니다. 패가망신의 위험(risk)이 기업하는 사람들의 어깨를 항상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런 기업이 바로 일할 의욕을 가지고 그 가족의 부양을 위하여 직장을 가지려는 사람을 고용을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없으면 고용이 없고, 자본이 없으면 기업이 없습니다. 아무리 상속재산이 많은 자라도, 그 돈만 믿고 기업을 시작하였지만 고용된 근로자에게 일할 맛을 주지 못하거나 세상사람들(소비자들)에게 필요와 만족을 주는 경쟁에서 더 잘하지 못하면 그 상속된 자본은 속절없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공짜 자본을 타고 난 사람이 고용된 노동자들을 멋대로 괴롭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스토리는 아주 흔한 선동의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현대에만 있는 가짜 선동의 스토리가 아닙니다. J. 러스킨같은 시장경제를 비방하는 중세길드의 낭만적 찬미자들이나, 에밀 졸라같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인 악이라고 설교를 하는 사회주의 소설가들이 겉멋들은 지식인들의 박수를 받아 왔습니다.

전세계의 경제사(經濟史)를 보면, 지난 200년간 일반평민들의 생활수준의 유례없는 향상은 세 진보적 부류 즉 저축하는 사람들, 자본을 투자하는 기업가들, 자본의 새로운 사용방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이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루는 경제방식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자본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의 예가 근대역사상 유아사망률의 급격한 저하입니다. 왕이나 귀족이 신분의 힘으로 농노를 거저 또는 싸게 부리고 평민에게 강제노역을 시키는 “신분(身分)”의 제도로 부터, 누구나 자본과 신용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그 책임을 지는 “계약(契約)”의 제도로 바뀐 까닭입니다.

이 계약의 시대에 들어 와서는 자유(自由)로이 선택하는 대중소비자(大衆消費者)에게 봉사하는 기업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소비자만족(consumer satisfaction)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아니 최상의 기업들끼리도 경쟁이 붙으면 그중에서 가장 최선을 다 하는 기업을 빼 놓고 나머지는 도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절박한 환경에서, 다른 기업들보다 좀 더 소비자를 사랑하는 기업가들이 성공의 영예를 갖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경쟁 속에서 사기 치는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과 덜 버는 사람의 차이가 전자가 악당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선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자본, 자본가라는 용어를 선동과 혁명의 언어로 쓰기 시작하고, 질투와 증오의 철학(philosophy of jealousy and hatred)이 순진한 대중들을 선동하게 되면서, 자본주의, 자본, 자본가는 상당히 모욕적인 의미로 쓰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의 빛과 소금 난에서, 물질보다 인간이 우위라는 의미로 노동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고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초보적인 이치를 굳이 글로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본은 인간의 의욕을 가능케 하는 요소이며, 노동을 도와주고 가족을 부양케 하는 것이지, 노동과 제로섬으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보완관계입니다. 그런데도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암시로 사용되었다면, 이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사회교리의 양머리를 보여 주고 틀린 사회주의 논리의 개고기를 제공하는 암시가 됩니다. 게다가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인간노동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는 문구가 무엇을 암시하려는 것인지도 애매하지만, 이 시대의 사용자 근로자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과격한 개혁내지 혁명을 하는 게 좋다는 암시 같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은 해 묵은 이야기이지만, 사회교리를 내세웠으므로, 다시 짚어 보려는 것입니다.

왕이나 귀족이 생산활동 즉 기업을 하지 않던 시대나 정부(집권세력)가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주의와는 달리, 시장경제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부유함이 다른 사람들의 빈곤의 원인이 아닙니다. 기업가, 자본가, 과학기술자들의 부유함은 대중(소비자)의 필요와 만족을 증진하고 대중에게 갚 싸고 양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바친 성공의 대가임과 동시에, 대중(노동자)을 고용하여 넉넉하게 해 준 성공의 훈장입니다.

그런 이치가 사회과학적으로 특히 분명해 진, 이 시대에 와서도 빈민들의 가난의 이유가 타고 난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며, 그런 착취를 막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세속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무과제라고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습니다.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정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주민들이 더 많은 기계생산의 혜택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생산성 높은 기계의 균등배분이 하나님의 뜻처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기계들은 자본의 축적과 기계에 대한 투자를 하게 한 자본주의 때문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주민들의 기계활용의 혜택은 자본주의의 채택 외에는 달리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 자수성가한 수많은 사람들은 빈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축이 어떤 것인지, 근면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앞서 가면서 부유해 진 선량한 많은 기업인들을 어떻게 본받을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종이에 어떤 말이나 숫자를 써 넣고 있는 자칭 지식인들은 자기의 논리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만심이 높아서, 자신이 경영에 관하여 기업인들보다 못지않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수성가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자식으로 아르바이트 하지 않고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도서관에서 일생을 보내다시피 한 사람입니다. 그의 책상머리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것이 발상되었고, 공산당선언이라는 선동이 나왔습니다.

레닌은 시장경제가 어떤 기능을 하는 지 전혀 배운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직업적 혁명가로서 1917년 이전에 서부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곳 회사에 취직하여 장부에 숫자를 기입하고 서류나 철하는 하잘 것 없는 사무직의 경험을 한 일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업에서 하는 일이란 그런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러시아에 잠입하여 선동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혁명가들과 직업적 개혁가들이 아주 잘 하는 게 있는데, 질투와 증오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으로 인민대중에게 화끈하게 호소하는 운동에서 아주 잘 합니다.

이런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을 따라 “노동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해 본 나라나 사회 치고, 억압과 가난의 수렁에 빠지지 않은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사이 사회주의자들이 변명하는 것처럼 결코 사회주의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와 레닌의 교시대로 제대로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르트(Barth), 브룬너(Brunner), 니버(Niebuhr), 틸리히(Tillich)등 개신교의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아무리 비난하고 사회주의를 아무리 지지하여도, 경제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업경영의 본질을 겪어 보지도 못한 채 떠드는 소리로 남을 것이며, 사회주의는 인간의 협동을 붕괴시키고 빈곤과 억압 그리고 혼란만을 가져 오는 체제라는 역사현실의 증명 앞에서 판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직책을 맡은 신부님은 부활절에 쓴 글에서, 구체적으로;
“정부의 합리적 지원 없이는 정규직 전환으로 인한 생산비용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직업훈련과 고용지원, 중소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 사회안전망 강화 등의 정책을 통하여 비정규직의 수요를 줄여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라고 정책권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합리적 지원이 무엇이고 불합리한 지원이 무엇인지는 그런 글을 쓴 분 자신도 모를 것입니다.

정부의 직업훈련이나 고용지원은 그런 정책권고가 없어도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회안전망강화라고 썼는데, 이것은 자본가들과 기업들이 부담하는 의료보험, 산재보험, 실직보험, 국민연금보험의 각 부담금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이란 국민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여 납부하는 세금으로 하는 것이지, 땅에서 공짜로 솟아 나는 돈으로 정부가 인심 쓰는 게 아닙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쓰셨는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중소기업에게 돈은 거저 주거나 싼 이자로 장기 대출해 주자는 것인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요컨대, 국민들이 땀 흘리고 번 돈을 쓰지 못하게 하고 세금으로 거두어들여다가 그 돈을 중소기업을 위하여 주지 않으면 인센티브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이치를 알면서 그런 정책권고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신용보증기금이니 기술신용보증기금이니 하는 국민세금의 뭉치 돈을 써서 부도난 중소기업을 대신하여 물어 준 것이 어마어마합니다.

정부의 지원이란 절대 공짜가 아니고 아주 비싸게, 그것도 별도의 손해까지 나게 하면서, 그에 더하여 비싸게 치이는 것입니다. 별도의 손해란 것은 정부가 지원을 하는데 반드시 따르는 간섭 때문에 생기는 손해입니다. 정부의 계획이란 시민들 개개인의 선택과 계획을 못하게 하고 대신 정부의 계획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이 스스로 착상하여 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빼앗아 가고, 정부(정확하게는 권력을 장악하게 된 집권자)의 중앙계획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부의 계획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하기는 돈 안드는 정부의 지원이 있기는 있습니다.
예컨대, 영세민을 위하여 집세의 상한을 정하여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집을 지어서 세를 받겠다는 사람이 줄어들어 버려, 종당에는 대부분의 영세민이 싼 집세의 셋집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또 예컨대, 비정규직을 금지시키고 어기면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 지원도 돈 안드는 지원입니다.

어느 기업이 250만원짜리 한계생산성(근로자 1사람이 새로 기업에 들어와 일하여 기업에 최소한 250만 원 이상의 순수입-수익-을 올려 주는 것)을 기대하고 근로자 1명을 채용한다고 봅시다. 100만원의 초봉을 주고, 그의 의료보험료기업부담금, 국민연금기업부담금, 산재보험료, 실직보험기업부담금, 퇴직금충당금 등등 60만원 가량을 지급하고, 해당직원 사무실임차료나 자동차보험료, 교통비나 수당 등등 50만원 가량을 부담하고 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일은 변화가 많아서 6개월 후 그 직원의 생산성이 90만 원 정도로 낮아지더라도 그 근로자를 그만 두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아래서는 그 직원 때문에 매달 160만원의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기업의 대차대조표에서 대변의 자본 대신 부채가 그만큼 늘어나서 엄밀하게 지적하면 망할 가능성에 그만큼 더 가까워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낫습니다. 회사에 들어와서 마이너스 생산성을 제공하는 사람도 흔합니다. 저 사람 월급만 축내도 좋으니 회사에 나오지 않고 그냥 집에서 있었으면 하는 사람도 어느 회사에나 복수로 존재합니다.
해고하면 법정에서 오늘의 법을 해석하는 판사가 “사장에게 욕하고 동료에게 스트라이크 하자!”고 한 정도를 가지고 징계해고 한 것은 너무 심하다면서 복직시켜 주는 판결을 합니다.

그래서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은, 정규직의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柔軟性)을 막고 있는 현재시점에서 상당수 비율의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정규직까지 정규직으로 바꾸라고 하면 기업들은 기업을 확장할 기회가 있어도 확장하지 않고 정규직의 고향 동생, 조카를 취직시켜 주는 기회를 닫게 됩니다.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취업이 더 줄어드는 것입니다. 창업사장이 어느 정도 나이가 늙으면 아들더러는 애비처럼 생고생하지 말고 공무원이나 전교조 교사가 되라고 권하고, 골치 아픈 기업 활동을 접고 기존 정규직더러는 다른 곳에 취직처를 찾으라고 통고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보통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정부가 이런 식의 고용지원을 해 주면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런 정책을 택하는 나라의 경제가 쇠퇴하는 예외 없는 현상을 전문가들은 훤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용의 유연성을 높이는 개혁을 하여 기업들이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좀 더 채용할 인센티브를 열어 놓자고 하면, 유연성은 필요에 의하여 해고를 할 수가 있게 하는 것이므로, 근로자를 함부로 해고해서는 안 된다고 난리가 납니다.

사회주의를 하면 나라가 반드시 거덜이 나는 이치를 아는 데는 현실을 직시하는 지적정직성(intellectual honesty)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어리석은 점이 많아서, 책상머리의 책갈피보다 현장(現場)을 보고서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대문시장의 비좁은 점포, 재래시장의 법적 대는 모습, 샤프트를 깎고 있는 선반공의 집중된 시선,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혼자 트랙터로 밭가는 농군, 이마트에서 손님에게 기쁨을 주려고 애쓰는 판매원, 신용점수가 안 나와 더는 대출이 힘들다는 통고를 받는 순간의 기업사장의 글썽한 눈물, 평생공부의 의지를 가지고 취직만 되면 일을 잘 해 보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취직이 안 되어 헤매다가 민노총의 파업을 구경하게 된 청년의 쓸쓸한 뒷모습,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크게 해외수주를 받아 콜라 파티를 열게 된 열띤 청년사장의 모습 등등이 바로 현실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자료와 데이터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지적정직성입니다.

최근에 미국 시라큐스 대학의 아더 C. 브룩스 교수가 “누가 진정, 이웃을 돌보는가(Who really cares?)" 라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보수주의자(conservatives)란 “나를 도와 주는 것은 남이 아닌 나의 책임이다.”라는 사람을 말하고, 진보주의자(미국의 경우 liberals)란 “나는 정부에게 도와 달라고 할 권리가 있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연구보고서는, 미국의 경우, 진보주의자 가족의 평균소득이 보수주의자 가족의 평균소득보다 6퍼센트 높지만, 보수주의자 가족의 평균 자선기부가 년 1,600달라로서 진보주의자 가족의 평균 자선기부 년 1,227달라보다 30퍼센트가량 높다는 조사결과가를 내 놓고 있습니다. 2004년 존 케리 후보를 택한 진보주의적 주민들이 많은 주들은, 조지 부시 후보를 택한 주들의 주민들보다 소득대비 자선기부 비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부시가 60퍼센트 이상 득표한 10개주의 소득대비 자선기부 비율은 3.5퍼센트였는데, 부시에게 40퍼센트 미만의 표를 준 가장 진보주의적 주들에서의 그 비율이 1.9퍼센트였다는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정부가 소득불평등을 줄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아이디아를 거부한 시민들이 그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보다 평균하여 4배 이상의 자선기부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연구보고의 발표입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법을 잘 지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어서 더 행복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데 비하여, 진보주의자들은 경제체제의 불의를 강조하고 선량한 사람이 희생자가 된다고 강조하는 비관적인 경향이 있다는 조사결과의 보고도 하고 있습니다. 진보주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체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희생당한다는 점과 남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적 반복의 언어를 영어에서는 “by rote” 라고 합니다.
자본보다 노동이 더 우위라느니, 정부가 지원을 더 해 주어야 한다느니 하는 문구를, 많은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by rote” 로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진한 많은 청소년들이 “by rote” 로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by rote” 로 천주교회는 마리아교라고 반복합니다. 그래서 선량하고 순진한 많은 개신교 크리스천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야의소리 nabucomas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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