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한국불교는 광기와 결탁했거나 이에 먹힌 듯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종교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듯 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중들이란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맨 정신에 중이 될 인간은 그리 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기부정이 강합니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광기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자기부정이 없는 불교는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광기를 부정하고, 광기의 부정이 자기 본성을 찾는 길이며, 이가 곧 각에 이르는 요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자기부정을 상실했습니다. 자기부정은커녕, 자기부정 대신 자기긍정에 도달했고, 자기긍정이 지나치다 못해 이젠 타자부정에까지 이르르고 말았습니다. 타자부정에까지 이르른 한국불교라면, 더이상 종교로써의 기능은 상실했다는 의미일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더는 불교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한국불교가 거리로 나왔습니다. 종교탄압에 분노해서, 이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어린 경찰관이 자기차를 검문했다고 경찰청장은 종교를 탄압했고, 물러나야 한다고 합니다. 헌데, 종교탄압의 실체가 없고 이 정권은 선거라는 정당한 헌법적 절차를 거쳐 정권을 창출한 정상 권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부정당하지도 않았는데 타인을 부정하겠다고 거리로 나섰으니, 지나친 자기긍정이요 타자부정입니다. 지나친 자기긍정에 오히려 타자부정은 거꾸로 선 불교입니다. 오늘날 불교가 이리 된 데에는 맑스 레니즘, 즉 공산이성을 근대이성으로, 최첨단한 근대이성으로 받아들인 까닭입니다. 공산이성은 철저하게 타자부정에 기반하는 이성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성이기 보다는 증오, 정서에 가까운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어찌해서 한국불교가 공산이성을 최첨단한 근대이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학습하게 되었는지 하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공산이성을 최첨단한 근대이성으로 받아들인 한국불교는 더이상은 자기부정을 때려치고 타자부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기저에 자비가 아닌 증오를 밑바탕에 깔고 말이지요. 타자부정에 이르른 한국불교는 더이상 각(覺)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제 각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게 되어버린 것이니까요. 타자부정 속에서, 각이란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일 뿐입니다. 각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게 불교인가요. 한국불교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다고 하는 게 옳은 일일 듯 싶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드러나 현장이 그러하니 아니라고 하는 건 솔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