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筆者)는 남다른 취미가 있다. 작은 걸망속에 물병과 김밥과 작은 목탁, 향을 담아 죽장(竹杖) 짚고 혼자서 큰 산의 폐사(廢寺), 폐암(廢庵)의 터를 찾아 다니기를 좋아한다. 죽장은 잡초 우거진 숲길의 뱀들을 쫓기 위해서이다. 예전에는 어엿한 중생제도와 수행의 도량이었을 사찰과 암자가 무슨 연유로 졸지에 폐사, 폐암이 되고, 쑥대밭과 칰넝쿨, 그리고 온갖 잡초가 우거져 귀기(鬼氣)조차 느껴지는 황폐한 곳이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황폐한 폐사, 폐암의 터에 좌선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예전의 활발했던 사찰과 사암의 환경을 떠올린다. 수많은 승려들, 신도들이 눈에 보이듯 하고,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 하다. 필자는 폐사지를 향해 향을 피우고, 불호(佛號)를 부르는 정근을 하고, 망자들을 위해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떠나온다. 그 취미길에 필자는 가끔씩 무릉도원(武陵桃源)같은 좋은 환경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폐가(廢家)들을 만난다. 그 폐가들중의 어느 마을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곳은 진달래꽃이 무성한 환상적인 아름다운 산골마을이었다.
중국을 위시하여 우리나라를 포함한 한문권(漢文圈)의 나라에서 환상적인 마을을 달리 표현하여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하였다.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환상적인 마을을 보았다. 그는 잠이 깨어서 꿈속의 마을을 그림으로 그렸고, 그곳을 일명 무릉도원이라 했다. 그 해 봄날, 필자는 혼자서 산속에서 폐사, 폐암의 터를 순례하듯 하고 하산하고 있었다. 어느 골짜기에 무수히 피워가는 진달래꽃이 너무 아름다워 혼자 보기에 너무 아쉬웠다. 그런데 파흥(破興)이 되는 것은 진달래 꽃밭속에 큰 부락을 이루었을 동네가 온통 폐가들이 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폐가들은 죽음같은 정적속에 공포를 느끼게 해주고 남음이 있었다. 필자는 폐가들에게서 불행의 기운을 느끼었다. 필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폐가들을 향해 향을 피우고, 서서 합장하여 불호를 외우며 폐가들의 주인들을 위해 왕생극락과 생축(生祝)까지 해주었다.
폐가들의 마을 한쪽에는 무성한 대밭이 있었다. 필자는 귀신에 홀리듯이 대나무밭 속에 들어갔다. 대숲에는 놀랍게도 제법 큰 집이 역시 폐가가 되어 있었다. 여러 채의 집 규모로 보아서 지주(地主)의 집 같아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그 폐가를 대나무들이 장악해 있었다. 필자는 대숲의 폐가에 들어섯을 때, 갑자기 감전 되듯이 온몸이 한기(寒氣)와 전율로 소스라쳤다. 참극(慘劇)이 벌어진 곳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필자는 합장하여 큰소리로 관세음보살, 불호를 외워 공포를 내쫓고, 이어서 폐가들의 주인들을 향해 기도했다. 독자, 여러분은 상상해보시라. 무릉도원같은 아름다운 산골마을이 폐가들로 가득차있고, 대나무밭 속에는 큰 폐가가 있고, 인적이 오래전에 끊긴 채, 귀신이 사연을 속삭이듯 바람에 대나무 잎들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폐가들에 대한 사연을 누구에게 묻고 싶어도 골짜기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들이 바람에 운집하고 있었다. 멀리서 뇌성이 은은하게 울려오는 것 같더니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순식간에 사위는 어두워졌다. 비가 곧 닥친다는 느낌에 폐가들을 떠나 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폐가들에서 벗어나 길을 재촉하였다. 비는 더 빨랐다. 지척을 분간못할 지경으로 어두워졌다. 뇌성번개는 천지를 뒤엎을 듯이 위용을 드러내었다. 비는 금새 폭우로 변해버렸다. 금새 필자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인가를 찾아 허겁지겁 뛰는 필자의 눈앞 어둠속에 집 한 채가 외롭게 서 있었다. 담이 쳐지고, 미니 솟을 대문이 있고, 그 안에 안채인 것 같은 건물이 한 동(棟) 서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염치불구하고, 폭우를 피할 요량으로 대문을 두리리며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대문 안에서는 대꾸하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대문을 미니 대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마치 길손에게 들어오라는 것같았다. 살펴보니 대문은 애초에 안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하나 뿐인 안채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연신 주인을 부르며 다가서니 섬돌 위에 하얀 남녀 고무신 두 켤레가 각각 단정히 놓여 있었다. 필자는 섬돌 위의 신발을 보고 방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하고 계속 소리쳐 주인을 찾았다. 뇌성번개속에 폭우만 자심해질 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필자는 방안 쪽을 향해 큰소리로, 마루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가겠다, 고 사정야기를 말하고 허락을 구했다.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필자는 아무 대꾸가 없지만, 마루에 앉아 비를 피했다.
필자는 마루에 앉아 걱정스럽게 폭우와 뇌성번개를 쳐대는 하늘을 보는데 마치 옆자리에 버락이 치듯 우르르 쾅! 하면서 바람과 함께 번개가 연속 번쩍였다. 번갯불속에 바람에 의해 방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바람에 방문이 열렸는데, 누가 방문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필자는 방문을 닫아 주기 위해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방문이 열려 닫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방문을 닫으려니 또 번개가 번쩍였다. 그 번갯불이 어두운 방안을 환히 비추었다. 필자는 번갯불에 비쳐진 방안을 보고 하마터면 놀라 비명을 지르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방안은 인간이 사는 방안이 아니었다. 방안은 계단식으로 영단(靈壇)을 모셔놓은 곳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신위와 색바른 사진들이 무수히 모셔져 있었다. 번갯불에 비친 어느 남녀의 사진은 한스럽게 필자를 노려보는 것같았다. 그 외딴집은 귀신을 모신 일종의 사당(祠堂)과 같은 집이었다. 필자는 옷깃을 정제하여 그들에게 합장 배례하고, “비를 피하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의 인사를 무수히 올리고, 난 후 그들의 왕생극락을 위해 ‘나무아미타불’의 불호를 부르는 정근을 했다.
날이 개인 몇 시간 후 필자는 인근 마을의 촌로(村老)로부터 폐가 마을의 사연과, 망자들의 영단을 모신 외딴집에 대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무릉도원같은 마을 사람들은 대다수 가난했지만, 공맹(孔孟)의 가르킴과 불도(佛道)의 해탈법을 믿으며 행복하게 사는 마을이었다. 비극의 발단은 김일성의 남침에서 빚어진 또 하나의 동족상잔 비극이었다. 김일성은 노동자 농민들을 이용하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었다. 첫째,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둘째, 지주계급의 땅을 빼앗아 무상분배 해준다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 토지무상분배라는 당근에 미친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죽창과 곡괭이, 낫 등의 무기를 들고 우선 대밭속의 지주집에 쳐들어가 십여명의 대식구를 참살해버렸다. 공산주의자들은 또 죽창을 든 사람까리 서로 고발하게 하여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무릉도원같은 마을은 하루아침에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급기야 마을은 마침내 비만 오면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이 흐느끼는 귀곡성(鬼哭聲)이 들린다하여 남은 사람들은 떠나가고, 마을은 모두 폐가가 되어 버렸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의 신위와 사진을 모신 곳이 외딴집이었던 것이다. 서로 다정하게 인사하든 한동네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의 환상주문에 속아 하루아침에 죽창을 든 악귀나찰이 되어 고귀한 인명을 도륙을 낸 것이 어찌 필자가 목도한 마을 뿐일까. 인민군이 들이닥친 방방곡곡에서 고귀한 인명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도륙 되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 아닌 붉은 완장의 손에 죽어간 인명은 부지기수인 것이다.
혁명을 마쳤다는 북한 땅은 어떠한가? 개인에게 ‘무상분배한다는 토지’는 정부가 몰수하고, 백성은 예전보다 더 가혹하게 소작료적인 배급을 받을 뿐이다. 그 배급이라는 것은 일주일 뿐이어서 배급을 받아놓고 먹으면서도 배급이 끊기면 마지막이다는 근심에 쌓여 하루하루를 연명한다고 한다. 사료를 받아 먹기위해 주인에게 갖은 아양을 떨고 복종해야 하는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언제나 태부족한 배급을 받으면서 그나마 배급이 끊기면 어쩌나, 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 뿐이다. 또 평등한 세상이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수령님의 가족은 물론 노동당, 군(軍) 등의 특별계급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민을 혹사, 착취하는 것이 아닌가. 주거제한으로 평양사는 사람 다르고, 일생을 산간오지에서 살도록 제한된 운명은 혹독한 일제시(日帝時)에도 없었든 지옥악법이라 할 것이다.
끝으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인생을 깨닫는 것이다. 지난 날, 무릉도원 같은 아름다운 마을들의 사람들이 김일성의 희대 사기극으로 부지기수로 억울하게 비명횡사를 당했으면 두 번다시 반복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영악한 짐승도 자신이 겪은 불행은 반복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한국전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물론이요, 아직까지 한국전에서 입은 총상의 병고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북한이 노다지”라는 DJ의 선동력에 광분(狂奔)하여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꿈꾸는 자들이 나날히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좌파척결, 대한민국 정체성 수호의 사명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내세워 좌우동거를 하기 때문이다. 좌우동거든 무엇이든 사대강정비(四大江整備)라는 용어로 단군이래 최대 사업을 시작하면 역사적 위업이 달성되고,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이 활성화된다고만 생각하는가? 봉추선생이 낙봉파(落鳳坡)에서 운명을 맞이하듯, 사대강에서 정치생명은 종언을 고할 수 있다고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좌파들이 운명의 전고(戰鼓)를 울리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의 유일한 활로는 촌각을 다투워 좌파척결을 하는 것이다. 좌파척결이 없는 한 대한민국의 안정과 미래희망은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오늘의 무릉도원 같은 마을들을 다시 폐가들이 되는 역사반복, 재연 시킬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이 법 철(bubchul@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