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자유의깃발님께서 시대유감님의 글에대한 반박글 입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라는 제목으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5.18의 실체를 밝힌 책으로 인해, 5.18에 대한 재조명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에서는 민주화 운동으로 또 다른 한편에선 폭동으로 불리우는, 극단적 이질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5.18이다. 뭐 정권이 바뀌지않았더라면 이같은 논쟁은 계속 수면아래서 잠자고 있었을테지만, 정권교체로 인한 진실규명이란 점에서 본다면, 언젠가는 밝혀질 필연적 사건인데.. 그런고로 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네티즌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와중에, 평소 존경하는 시대유감님의 한 편의 글이 나를 당혹하게 만든다. 물론 경제분야에 정통한 분이기에,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상황과 관련한 걱정과 방향제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경제를 말해야 할 때임에도, 30여년이나 지난 5.18에 대한 왈가왈부를 그리 탐탁치 못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보는 이들에게 참으로 불편함을 주는 표현방식과, 다양성을 그리 중요시한다던 말과는 달리 몇몇 이어지는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글에 이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잠시 시대유감님의 글을 보자. 경제에 관한 부분의 글은 생략하고, "이건 아닌데.."싶은 결말부분의 글만 옮겨온다. "나는 안보라든지 대북논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진행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중요성도 인식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지금 한미관계나 한국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형성되는 한국의 안보전력은 상당부분 경제관계에 의존되어 있다..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한국도 무너지고 안보도 작살 날 수 밖에 없다.. 그 때가서 뭘로 반공 하려고 하는가? 주둥이로 반공 하려는가! 생각 좀 하고 살자.. 좌파들은 경제담론을 장악하고 그들의 사특한 의도를 관철시켜 나가는데, 5.18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어쩌고 하는 개소리, 영웅 전두환 저쩌고 하는 개소리가 반공이며 애국이라며 지껄여봐야 뭘 하겠는가! 그런 개소리들은 결국 우파를 궁지에 몰며 좌빨들의 신명나는 세상만 보장할 뿐이다.. 오죽하면 조갑제 선생까지 나서서 한마디 할까? 내가 보기엔 그런 개소리 하는 작자들이야 말로 세작이 아닌가 싶다.. 몇몇 논객들을 보며 짜증 나서 한마디 해 봤다.." 주장처럼 현 상황에서 경제에 대한 중요성과 비중은 매우 높은게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 가장 큰 이유(어쩌면 이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이기도 한 경제이니 말이다.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한국도 무너지고 안보도 작살 날 수 밖에 없다"는 시대유감님의 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경제는 "투철한 대북인식"이라는 국민 사고에는 앞자리를 내줘야 하지않을까? 경제는 국가안보 몰락의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흐리멍텅한 국가관과 왜곡된 역사에 휘둘리는 사고는, 대한민국 침몰의 핵이라 하겠다. 아니 그런가? 또한 아무리 주장이 옳다하더라도, 북한군 특수부대의 잠입논쟁과 이에 필연히 따르는 전두환에 대한 평가 등에 "개소리"라는 말을 주저없이 쓰고, 이런 주장을 하는 네티즌들에게 "세작이 아닌가 싶다"라 말함은, 과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가? 경제에 대한 논의가 시급한 때에, 30년이나 묵은 곰팡내나는 역사책을 보기에 따분할런지는 모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같은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 것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왜 그 주장들이 개소리이며, 그런 이들이 세작이라고 의심이 드는가? 이건 명예훼손에 다름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만이 아닌, 진실을 밝혀 우리 후세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하려는 국민 모두에 대한 명예훼손. 아무튼 2007년 화려한 휴가의 감독인 김지훈씨의 말이다. "역사 속에서 보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도 소통돼야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광주 쪽 분들을 많이 만나보려 했다. 그 분들이 느끼는 각양각색의 느낌이 취합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승격됐지만, 광주만의 역사로 인식돼 왔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5.18의 전국화를 원했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되길 바랬다. 이 영화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에 주안점을 둔 것은, 이러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였다" 5.18이 광주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역사로 공인받기 위해 화려한 휴가를 만들었단다. 그렇다면 이 5.18에 대한 진실은 더욱 규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투철한 대북인식을 경제보다 낮게 평가하고, 올바른 역사 규명을 바라는 이들에게 세작운운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라 하겠다. 진중히 생각해 봐야 할 것같다. 시대유감님에 대한 유감은 여기서 끝내고, 지금 한창 논쟁이 되고있는 북한군의 광주 잠입에 대한 글을 올린다. 이 글은 예전 "앨리스"님이 썼던 것인 바, 판단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 5.18 광주봉기의 북한군이 개입했던 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발언요지 1.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가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 (1986년 1월 6일 하기 훈련을 위한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한국에서 명명하는 특수8군단> 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 및 대대장 대대정치지도원을 위한 군사 정치 일군 상학에서 발언) 자료출처 : 김정일의 사촌동생 김선일.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는 발언은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 출처가 있다. 2."두 아들을 남조선 혁명에 바친 부모님들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제부터 국가가 아들들을 대신해서 부모님들을 모시겠습니다" 출처 : 대대장 여운학. 함장관은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되었다가 죽은 124부대원 중 한사람인 함장근의 동생. 특수8군단 최고의 여단이 17저격여단 4대대 출신 # 광주와 관련된 김정일의 발언 1."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반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982년3월. 북한 특정여단 53.16.43.17.19.818.59여단들의 북부지구에서 벌인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 출처 : 현장. 자료보관:지도국 각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 2."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습니까.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습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1981년 6월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1군단 지구를 시찰하면서 군인들이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장을 비판하면서 한 발언) 자료출처 : 인민군 각 사여단 참모부에 발송된 사상투쟁 교양자료 3."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출처 : 광주평록 1983년 판 # 광주사건 과정에 대한 남한 측 관계자의 진술 "확실한 단서를 잡지 못해서 정확히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 현장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충돌이나 봉기군의 저돌적인 행동과정에서 절실히 개입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 개 대대정도의 역량이 내려왔었다면 당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돼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는 불가능 했다고 본다. 왔으면 바닷길이고 서해안으로 침투했을 가능성이 크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의심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윤전중장비와 각종 총기를 다루는 수법이나 방산 업체에 대한 습격. 총기 탈취. 방송국. 교도소를 비롯한 국가기관 전복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노출되었다. 군복무를 했다고 해도 일반 봉기군의 능력으로 정부군을 상대해서 그 만큼 고도의 수법을 요하고 체질화된 행동이 필요한 특수적인 일을 수행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상당히 이상한 점들이 많이 발견됐다. 신원이 해명되지 않는 사람들과 병원에 실려 온 시체들을 부검하면 정면에서 맞아죽은 사람보다 뒤에서 맞아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진압군이 시위대의 등 뒤에다 대고 사격한 일은 장담하지만 없다. 이런일은 매우 심중하고 민감한 일이다" "진압군의 중장비가 쉽게 탈취당하고 봉기군의 수중에 장악되는 현상들이 많았다.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훈련되고 전문성이 필요한 일인데 북한 특전사들이 아니고 여기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훈련경험이 제한된 사람들이 한 짓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못한 문제점이 너무 많다. 작년(2005년)에 미국에서도 광주사건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러 사람이 왔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광주문제는 당시 정권의 책임소재에 대한 차원을 떠나서 본질적인 사안을 많이 놓치고 있다. 책임한계에 따른 한두 사람의 피해는 둘째 문제다. 북한에서 남한을 적화통일 할 경우 광주봉기에서 자취를 감췄던 영웅들이 수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럴 경우 때는 이미 늦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이 문제는 시급히 밝혀지는 것이 옳다" #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했던 북한군 관계자들의 증언 A씨 현재 북한군 중장. "내가 알기로는 봉기군 쪽에서는 3분의 2정도는 못 왔다고 본다.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이 인명피해가 많았다. 괴뢰군(국군)쪽에 들어 있던 우리사람들한테 직접 맞아 죽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혼잡한 판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괴뢰군 애들 군복입고 논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다. 우리도 그쪽에서 움직였으면 인명손실이 적을 수도 있었지만 임무니까 어쩔 수 없었다" A씨 "각자 분담된 임무에 따라 조별로 행동했으니까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다. 담당했던 대생물이 다르고 임무성격도 틀렸다.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 대충 짐작으로 일개 대대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을 포함해서 세명만 돌아왔다" A씨 "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남조선 사람들하고 일체 말을 못하게 하는 것 이었다. 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 A씨 "그쪽 애들 장비가 우리보다 좋았다.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괴뢰군 애들의 전투능력은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겁이 좀 많아 보였다. 괴뢰군 애들보다 남조선 인민들의 정신이 더 좋았다. 시위대쪽에서 죽는 숫자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그들이 계획대로 잘 따라 주었다" B씨 현재 북한군 대좌.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 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일이 였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 죽었을 뿐이다. 시위대들이 많이 죽지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하였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조장시켜야 하고 적당하게 죽여야 되는 것이 임무였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광주에 나가서 절실히 체험했다" C씨 2003년 당뇨병으로 제대.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우리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오래전 일이라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2006년9월 증인 발언 아들 호위사령부 중대장으로 있는 문제로 탈출실패) C씨 "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랄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D씨 "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네 패거리 싸움식이였다. 우리가 정면에 나설 경우 전면전으로 갈수 밖에 없게 되고 그러게 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되어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D씨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백 프로 죽었다고는 장담하기는 어렵다. 긴박한 상황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처리 된 것으로 안다" # 광주사건과 관련한 김선일의 발언 "형님 생일날(김정일 지칭) 큰아버지가(김일성)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나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광주사건에 대해서 알았다. 형님은 성공한 작전이라고 말했지만 큰아버지는 정말 아쉬워했다. 우리 쪽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훈장을 내신하고 영웅으로 배려해주라고 형님께 지시하셨다. 광주의 일로 김대중 선생의 힘이 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처 : 김선일 "광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입니다. 수렁님의 노고를 덜어드릴 수 있다면 지구를 깨는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수령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무조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수령님의 전사들입니다" 출처 : 김선일 # 5.18광주봉기 전후의 북한 수뇌부 상황자료 (출처 : 대남사업부 관계자) 1979년 10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과 12.12 전두환 정권 수립으로 남한에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자 김일성은 오랫동안 대남 공작을 총괄하다 퇴임하여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일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한편 김일성은 표면상으로는 1980년 초(2월6일)에 남북한 총리회담개최. 남북 간의 직통전화 개설 등의 평화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남한 내의 혼란스런 정세를 이용하여 내부 교란작전을 구상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김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있던 장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김중린의 증언을 사적인 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연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 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 蔘?.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