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안녕하세요. 이 게시글은 현재 집필 중인 글의 일부분입니다. 이 글을 바탕으로 김광일 기자가 4번에 걸쳐 유튜브 방송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무명이기도하고 또 조금 긴 글이지만 참조할 부분은 있을 겁니다.
한국의 사회주의 문재인 정권 들어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험들을 숱하게 많이 겪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함박도를 북한에 빼앗기고도 말 한 마디 안 했다. 대한민국 영토를 북한에 스스로 갖다 바쳤다는 의혹이 들 정도다. 헌법과 법률을 어겨가며 탈북자를 강제송환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북핵 위기 당시 종전선언이나 한반도 비핵화와 같은 북한 정책을 그대로 주장했다. 뿐 아니라 유엔제제를 거스르면서 석탄 석유를 북한 선박에 환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럼 문재인 정권은 빨갱이인가? 아닌가?고영주 변호사는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했다가 명예훼손이라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6.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희생된 나라에서 공인에 대해 합리적 정황들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라는 견해를 표명한 것에 대해 법원이 명예훼손이라는 법을 적용해서 유죄판결을 내린 것도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법 적용의 범위를 넘어선 정치적 판단으로 법원이 이를 판단할 수도 없다. 그러면 왜 이런 소가 제기되었고 또 이런 법적용을 통해 유죄판결을 내리게 되었을까? 문재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하나의 위장전술이고, 이런 얼토당토 않는 위장전술에 대해 판검사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판검사들이 권력의 개라는 사실은 아무리 민주화되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잘 입증하고 있다.이렇게 문재인 정권에 대한 사상문제가 제기되자 문재인은 빨갱이가 친일유산이라고 방어막을 쳤다. 일본이 민족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탄압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빨갱이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라고 답하면 되지 왜 엉뚱하게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끌어들여 물 타기하는가. 문재인의 이런 두리뭉실한 답은 자신에 대한 빨갱이라는 국민들의 질문에 즉답을 피하는 대단히 비겁한 행위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본질을 흐리는 위장막을 친다.이제는 이 위장막을 걷어내고 그들의 본질을 드러내야할 때가 되었다.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 그러나 상황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과거보다는 훨씬 정밀하게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가 독립운동을 안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민주화 운동을 안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독립운동 세력 중에서 그리고 민주화 세력들 중에서 빨갱이들을 도려내야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 들어 이제 그들은 거의 커밍아웃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군부독재와의 투쟁을 위해서 마르크스의 투쟁이론을 차용한 것이 무엇이 문제이고,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와 손잡은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어리석은 자문을 걷어내야 할 때가 되었다. 문재인은 노무현 비서실장 출신이다. 노무현과 그의 세력은 폐족이라 불릴 정도로 완전히 정권을 망쳐먹었다. 그는 그 실패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을 뒤집고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말 뒤집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민주당 대표가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이승만과 박정희 묘소 참배였다. 그리고 대선공약에서는 지지층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탕평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이승만, 박정희 세력의 제거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천안함 문제에 대해서도 그랬고, 임정문제에서도 그랬다.그는 상황에 따라 편한대로 말을 바꾸면서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상대에게 가능한 한 부담을 안 준다. 사람들은 이에 홀딱 속아 넘어가서 그를 ‘젠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갑철은 그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갑철은 본질을 꿰뚫어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갑철은 고영주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그런 문재인을 사기성이 농후한 공산주의자로 간주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세력이 약할 때는 언제든지 스스로 머리를 숙여 적과도 손을 잡는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했던 야비한 자들이지 않았던가. 말이 좋아 통일전선전술이지 그것은 바로 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원래 사기꾼들이 더 젠틀해 보이는 법이지 않겠는가. 어쩌면 생김새도 그의 성격을 그대로 잘 표출하고 있었다. 웃을 때는 거의 미이라나 뱀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도 완전하지 않다. 중요한 그의 면모 하나를 더 보태야 완벽해진다. 강남 성 혐오 폭력 여성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다음에 태어나면 여성으로 태어나지 말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머리까지 나쁘다는 게 드러났다. 즉 서갑철에게 문재인은 최악의 인물이었다. 서갑철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제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졌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더 극단적 사회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보았다. 서갑철은 일면식이 없음은 물론이고 털끝 하나 피해를 입은 일도 없는 노무현과 문재인 같은 사람에 대한 싫은 정도나 혐오감이 증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큰 놀라움을 느꼈다. 정치적 성향이 그 사람에 대한 호오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어느 학자가 발표한 말이 생각났다. 상당히 의미 있는 결론이라는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길지도 않은 시간에 다시 유사한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신이 서갑철에게 다시 일할 기회를 준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역겨운 일은 역으로 대단히 감사한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하겠다? 그러면 이 정도에 흥분할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10.26 이후 ‘서울의 봄’이라는 시기를 맞았음에도 민주정부가 구성되기는커녕 전두환의 군부독재가 연장되었다. 그 군부세력 시절, 민주세력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한 투쟁에 온 힘을 결집해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노태우를 후보로 하는 군사정권과 대망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진영에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후보가 되려고 해 당이 쪼개져 당시의 대통령선거는 3자구도로 흘렀다. 이 때 민주진영은 대통령선거 직전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후보 단일화를 기원했다. 그러나 결국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하고 노태우에게 당선을 헌납하고 말았다.적어도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단일화를 이루어냈다면 비록 서갑철은 이들 두 사람의 부족한 부분은 자신이 짊어져야할 업보라 생각하고 정치판 한 귀퉁이에서 정치를 업으로 삼으려고 작정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가 물 건너갔고 이로 인해 서갑철은 그의 머리에서 두 사람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서갑철은 87년 이후 언젠가부터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던 학생운동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목격했다. 서갑철은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 보다 못하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도 투쟁인지라 투쟁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 이론을 차용한 것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변호할 수 없는 부분을 변호하려 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자본주의 성장은 저곡가, 저임금 정책에 많이 의존했다. 즉, 노동자의 착취에 많은 부분 의존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깊은 공감을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돌파하는 것이 계급투쟁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회적 여건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기에 세상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적어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인내심은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계급투쟁은 너무 도식적이고 살벌하지 않은가.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마르크스는 그의 이론 전개하기 전에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제는 틀렸다. 왜냐? 모순을 돌파하고 싶어 하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존재에 의식을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준비가 목적이 된다.”고 계급투쟁의 허상을 한 마디로 압축해 설명했다. 예를 들면 모택동 시절의 ‘문화혁명’과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조차도 그들의 이론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 들어서도 혁명은 끊임없이 이어져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갑철은 마르크스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고 마르크스주의의 맹점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철과 같은 사람도 경직된 한국사회에서는 빨갱이로 분류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은 공산사회를 북에 이고 있고, 이들과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동족상잔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국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당시의 사회발전 추동력의 핵심은 군부의 개발 정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경쟁적으로 권력과 결탁했다. 그곳에서 검은 거래들이 오고갔다. 일반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자본에게 임금이 착취당하니 노임만으로 살기 힘들었다. 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부정부패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자리에 가기 위해서 빽을 쓴다든지, 뇌물을 상납한다든지 했고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정한 행위를 했다. 일반 학교에서 조차 뇌물이 횡행했다. 학부모로부터의 촌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부정부패가 유일한 삶의 생존방식인 것처럼 보였다. 어렵다 보면 어느 쪽이든 약한 일방이 희생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방의 희생으로 어려움을 벗어났다면 희생자에 대한 보답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정의가 일체 없었다. 한국의 근대화주도 세력들은 보답은 못해도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데 그 조차도 거부했다. 오히려 냉전적 대치상황을 면죄부로 활용해서 더 파렴치하게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한국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너무도 잘 들어맞았다. 대학은 또 어떠했는가. 근대화 과정에서 인재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이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사람들로 인해 대학진학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크게 공적 기관 진출과 기업과 같은 사적 기관 진출로 가닥이 잡히는데 권력지향적인 사람은 고시를 준비해서 공적기관으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각 기업체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본업인 학문의 전당이라는 본래 목적을 버리고 고시학원과 취업학원으로 변모했다. 이로 인해 대학은 교양과 학식이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속물들을 양산하는 공식 기관이 되었다. 학문적 소양을 기르는 것이 본업인 대학생들조차 사적인 만남에서 학문적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을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천시하거나 잘난 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지식인층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서양의 이론을 비판 없이 차용해서 자신을 치장하는 지적사대주의가 횡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교수라는 자리가 학문적 성과에 의해서 주어지기보다는 학맥의 도제관계에 의해서라거나 혹은 아파트 한 채 값을 살 수 있는 거래관계에 의해서 더 많이 주어졌기 때문이다.그런 차원에서 80년대 한국사회에서 사르트르라는 실존주의자가 꽤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서갑철은 절대로 사르트르를 인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그러면 도둑질로 번 돈이랑 땀 흘려 번 돈이랑 다를 바 없겠네?”라며 사르트르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그런 통찰력에 도취되어 그것을 즐겼다. 너무도 어리석게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그 때문에 대단히 고립되고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우월감과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심각한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부지불식간에 사회에서 고립되어갔다. 그때 그를 위로해준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1991년 노태우 정권 말기 분신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한 김지하였다. 당시 그는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도 주사파의 전형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 매체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예전에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를 비극적 혁명투사로 만들어 국제 선전전에 이용하려고 했다고. 즉 그를 가능하면 사형시키려고 했고 그리고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했다. 뒤에 어느 한 선배가 술집에서 지하가 감옥에 있을 때 죽었어야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지하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를 배신자, 변절자로 몰아갔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김지하의 극렬한 반감을 짐작케 할 수 있는 고백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와 유사한 몇몇 사건들이 발생했다. 노무현의 자살과 노회찬의 자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시체팔이’가 자행되었다.이런 김지하를 알고 나서 갑철은 아무리 외로워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적어도 한 명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지하는 그에게 그 삭막한 시기를 견디게 해준 소중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개발독재가 요구한 경제성과 신속성과 획일성과 임기응변으로 인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창의성과 자유가 묵살되고,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누가 무슨 말을 했다면서 떠벌리고 다니는 지적 사대주의 그리고 부정부패로 물든 천민자본이 횡행하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그래도 사회주의는 아니지 않았는가. 노태우가 물러나고 김영삼이 삼당합당을 감행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IMF를 맞고 김대중에게 대통령을 넘겨주게 되었다. 김대중은 자신의 약한 명분과 세력보강을 위해 재야인사를 계속 수혈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 재야인사들이 거의가 의식화된 공산주의자 내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왜 유독 김대중만 그런 일을 했을까? 서갑철은 김대중도 빨갱이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규정했다. 그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김대중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의 온실이 되었다. 그렇게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때 서갑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은 그들이 잘해서 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상대방들이 못해서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노무현을 대통령이 되게 한 일등공신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이인제였다. 이인제는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이회창이 대선 후보가 될 것 같으니까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대선 경선에 합류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가할 자격이 애초 없는 사람이었다. 즉, 그는 민주당에 뿌리가 없어 허울 좋은 대세론만으로는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게 하는 이벤트에 들러리만 섰다. 대세론이라는 근거 없는 말잔치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인물이 정몽준이었다. 정몽준도 당시 제 3지대에서 대선 출마를 준비 중이었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지지율이 10% 미만이었다. 그런 피라미에게 정몽준이 후보 단일화라는 이벤트로 그에게 전국적 인지도를 선사했다. 노무현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대선 경선에 참여하기 전부터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제 3지대 후보라고 해도 그 정도 판단력은 있었어야 했다. 즉 노무현은 애초 단일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마 지겠는가 하고 단일화에 응했다. 아무리 인지도가 낮아도 노무현은 거대 정당 민주당 후보다. 그러므로 정몽준이 여론조사에서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정몽준은 당시 정말 바보짓을 한 거였다. 물론 여기에 민주당의 공작도 있었다. 민주당 의원의 일단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정몽준 정당으로 이적한 것이 그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만약 정몽준이 단일화에 응하지 않으면 도로 탈당하겠다고 정몽준을 압박했다. 정몽준은 그 압박에 굴복했다. 그렇게 피라미 같은 노무현이 전국적 인지도를 획득하자 정치 초년병인 이회창이 아들 병역문제 하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좌파들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세에 밀려 실로 어이없이 허물어졌다. 그런 점에서 이회창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바보 3인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의 심장을 사회주의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는 민주화의 과정이 아니라 사회주의화의 과정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사회주의 정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이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이 사회주의자임을 증명하는 것들은 부지기수다. 그래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단 하나만 들겠다. 언젠가 그는 농민이 왕의 권력을 누리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사적 유물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리고 노무현 시대의 특징이 하나가 있다. 이제 그들은 민주투사로 위장하지 않고 ‘진보’라고 차처하고 나섰다. 이 또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 혹은 빨갱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장할 필요가 요구되는 하나의 과도기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념적으로 상당히 커밍아웃한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진보의 뜻이 무엇일까? 왜 그들은 발전이라는 말 대신 진보라는 말을 쓸까? 진보란 역사는 법칙 즉, 변증법적으로 발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라는 말 자체는 거의 나는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커밍아웃하는 발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한 기업이 이 말을 그 뜻도 모르고 기업 상품 로고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무식함을 증명하는 통탄할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사람들은 마치 개혁이 진보라고 착각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의 등장은 그 사회의 몰락의 징조로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법칙적 존재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퇴보하는 것이 더 법칙에 부합한다. 사실 변증법적 퇴보라는 것은 반발심에서 한 말일 뿐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변증법적 발전과 변증법적 퇴보로 거대한 세상을 양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그래서 기실은 역사는 우연적 산물 즉,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 그 발전의 동인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영화가 아니라 소설로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그 글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사회주의의 등장은 역사적 진보가 아니라 퇴보일 수밖에 없는 유력한 증거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공산사회로 가는 과정에 있는 모든 체제를 말한다. 잘 아시다시피 공산주의 이론은 마르크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은 ‘계급투쟁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조아에 의해 착취당한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항상 그런 것으로 간주해서 그 두 집단을 서로 교류가 불가능한 계급으로 분류한다. 사소한 피해를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는 피해 망상적 증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그것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해도 한 번 정도의 폭동이 일어나는 정도이다. 이것만해도 예외적인 현상인데 그것을 폭력혁명으로까지 이어가는 것은 더욱 더 예외적인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마르크스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산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예외적인 현상인 폭력혁명이 필수라고 했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유토피아 같은 공산사회로 가려고 하는 이런 경향은 과대 망상적 징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수단이 폭력혁명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지나친 권력집착적 과잉행동 성향도 아울러 보게 된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최근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다들 기억하실 거다. 강남에서 한 정신병자에 의해 한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갑철이 그 사건에 대해 구체적 관심을 가지지 않아 그 전말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공산주의의 폐해를 설명할 적당한 사례를 찾던 중 서갑철 손에 걸려들었을 뿐이다. 그 전모를 잘 모름에도 서갑철의 머리에서 이 사건이 떠오른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해 문재인이 피해자에 대해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라.”는 얼토당토않은 코멘트를 했던 것 때문이었다.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한 사례를 문재인이 제공해준 것이다.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 내부 사정을 잘 몰랐기에 그와 유사한 fiction을 구성해서 그의 견해를 전달했다. 아마도 그러면 일반인들이 사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훨씬 구체적으로 피부로 체감하게 될 것이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날이었다. 어느 한 젊은 여자가 우산을 쓰고 번잡한 시내를 바삐 가다 의도치 않게 지나가는 한 남자의 몸을 건드렸다. 그러나 바쁜 나머지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그 남자가 따라와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화가 잔뜩 나서 그랬을까? 그 남자의 너무 거친 기세에 기가 눌려 그 여자는 그 남자를 한 번 흘겨보고는 황급하게 도망치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그 남자는 그 정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여자를 찾아 헤맸다. 운이 나빴을까? 그 번잡한 도심에서 오래지 않아 그 여자는 그 남자의 눈에 띄고 말았다. 그 남자가 다시 그 여자를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여자에게서 끝까지 사과를 받으려고 했을까?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발견한 뒤에 그 여자를 불러 세우지 않고 그 여자의 눈에 띄지 않게 그 여자의 뒤만 밟았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 굳이 그 여자에게서 사과를 받으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 여자는 약속 장소인 듯 시내 골목의 어느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일행이 도착하지 않은 듯 오래지 않아 다시 그 음식점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그 여자 뒤를 밟은 그 남자는 그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화장실 문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여자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문곡직하고 품속의 칼을 꺼내 그 여자를 찔렀다. 이 ‘묻지마’ 살인의 수사결과 그 남자는 정신분열 병력이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일반적 상식으로 정신분열 증상은 그 전에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 남자는 아마도 별로 심각하지 않은 그 여자의 가해를 대단히 심각한 가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피해망상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를 해소하기 위해 폭력혁명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피해망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자신은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생각이 가해자를 반드시 응징해야하는 일에 정당성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과대망상적 증상이다. 모두가 다 잘사는 유토피아 즉, 공산사회가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 즉 심각한 과대망상과 겹쳐진다. 그리고 사소한 실례를 한 그 여자를 응징하는 도구는 칼이라는 무서운 무기였다. 폭력혁명의 폭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권력 집착적 증상까지 보태면 사회주의자들은 앞에서 예를 든 위험한 정신병자보다 더 무서운 정신병자라는 것을 단번에 실감하게 된다. 국민 모두가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속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성남민예총 행사에 김일성 뱃지가 등장했다. 당시 자유한국당 한 의원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은수미 성남 시장은 이를 두고 ‘철 지난 색깔론’이라고 했다. 은수미의 이 발언은 철저한 위장론으로 이 위험한 정신병자가 대로를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정신병동의 문을 열어주는 위장된 완치 증명서를 발급하는 행위와 같다. 너무도 부끄럽게도 우리사회는 아직도 백주 대낮에 김일성 뱃지를 달고 혁명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 즉 색깔론을 야기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후진사회로 이념전쟁이 현재진행형인 사회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개혁 혹은 인간중심주의나 인권 혹은 민족적 통일 중심주의로 착각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제기하면 ‘막말’이라거나 ‘꼴통 보수’ 혹은 ‘철지난 색깔론’으로 치부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주의자를 사회주의자로 말하면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갑자기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진중권이 문재인 정권을 신적폐 혹은 신보수라고 비판하며 보수 편을 들고 나섰다. 이를 보고 일부 보수 인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서갑철은 진중권의 이 말 뜻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20년 전부터 운동권 내부에서 나온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이었다. 아무리 진중권이 문재인 정권을 비판해도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의 전략 즉 사회주의자들의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진중권 같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보수로 전향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사실 진중권은 좀 멍청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그가 사회주의자들의 똘마니 같은 역, 즉 삐끼 사회주의자 역을 도맡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서갑철은 그가 인간적으로 좀 안 돼 보였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만약 극좌인 문재인이 신보수라면 그 때 진보에 해당되는 정치집단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발생된 뒤일 것이다. 벌써 보수진영에 대한 교란작전이 진행되고 있다. 참으로 큰 위기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공산주의는 이념이라는 이론적 서술 즉, 객관적 가면 뒤에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후진적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병적 징후를 숨기고 있는 대단히 위험한 정치적 개념이다. 왜 이런 병적 징후들이 범람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거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사회적 환경이 반드시 존재한다. 때문에 이런 병적 징후에 대해서 비판하기보다는 그런 병자를 만들어낸 환경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신병자들이 광풍과도 같은 혁명을 통해 만든 나라들은 전부 이상한 나라들이었다. 레닌 스탈린의 소련이 그랬고, 모택동의 중국이 그랬고, 지금 북에서는 여전히 듣도 보도 못한 김일성 이후 3대의 일인지배체제가 그렇다. 이 같은 나라들은 거의 거대한 정신병동과 다름없이 운영되었고 또 운영되고 있다. 볼턴이 그의 회고록에서 문재인을 정신분열증 환자 같았다고 했다. “미국이 북한의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거절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영변 해체는 북이 비핵화로 가는 의미 있는 첫 걸음이다.”라는 문재인의 발언을 두고 한 말이다. 이를 두고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을 한 것은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말이다. 즉, 자기가 보기에는 결론이 양립불가하니까 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문재인 입장에서는 결론이 양립불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 속의 문재인의 본래 의도는 미국이 받았어야 한다는데 방점이 찍힌 것으로 미국이 잘한 것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이런 어법은 문재인이 상대를 속일 때 자주 사용되는 문재인 특유의 어법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문재인의 사드에 대한 발언이다. “국가 간의 안보에 관한 일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환경평가를 등한히 했다는 절차적 하자가 있다.” 사드배치를 인정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애매한 화법이다. 사정을 모르는 제 3자가 들으면 볼턴이 느낀 것처럼 정말 화딱지 나는 발언이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과 같은 사람은 절대로 독대하면 안 된다. 반드시 배석자를 두어야 한다. 뒤돌아서서는 반드시 말의 5% 정도는 비틀어서 그 만남을 자기중심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기꾼들은 사기를 쳐도 화끈하게 치는데 문재인은 사기를 쳐도 이렇게 상대의 눈치를 보며 야비하게 사기를 친다. 참 밥맛없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볼턴의 이 말이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다. 문재인의 이런 스타일은 실현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면서 상대를 기만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 불가능한 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은 아니라도 그렇게 되는 길목에 접어드는 과정의 증상인 과대망상증을 이미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5%를 뒤집어 말하는 문재인의 말버릇은 자신의 이 어려움을 돌파하는 그 만의 특유의 기술이다. 그런 점에서 볼턴의 이 말은 맞는 말은 아니지만 크게 잘못된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공산주의자들이 정신분열증 환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바보도 아닌 볼턴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문재인과 그 정권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이런 정신분열적 상황을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정신병자들이 활개를 치는 사회가 됐을까?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낙후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경제적으로 풍족하니까 국민들 모두는 지금 한국이 대단히 발전된 사회로 착각하고 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낙후된 사회로 한국이 대단히 불균형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발전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생각을 기준으로 좌파들에게 빨갱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우리나라에는 빨갱이가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인영이 통일부장관 청문회에서 과거 그가 주사파였다는 문제제기에 많은 세월이 흘러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아마도 노회찬이 민노당도 사민주의로 보아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민노당도 의회주의의 틀 안에서 활동하니까 사민주의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럴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장막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그들이 의회 속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혁명노선을 버리고 의회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조국이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하는 것은 무척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사민주의에는 사민주의 좌파와 우파로 또 구분된다. 사민주의 우파는 복지로 혁명노선을 포기한 경향이 강하지만 사민주의 좌파는 모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이라 보고 그들이 사민주의 세력에 포함된 것은 과정적 전략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그들이 사민주의 정당에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말하는 것은 하나의 위장전술로 엄청난 거짓말인 것이다. 노회찬의 말과 다르게 민노당은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당 강령으로 채택했던 정당이다. 그들 중의 일부는 소수세력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민노당을 포기하고 민주당의 좌파로 자리매김하자는 노선을 깊이 고려했던 적도 있었다. 박근혜 때 통진당을 해산하자 그들은 결국 선택의 여지없이 이 노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문재인 정권의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은 이들 급진 사회주의 세력이 민주당 내 좌파로 편입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재인 정권이 온갖 무리를 범해가며 분권주의를 포기하고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위장막을 쳐도 문재인 정권을 사회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는 결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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