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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5 ‧ 18>(전 4권) 33년 만에 밝혀진 5 ‧ 18의 진실!!!

  • No : 69816
  • 작성자 : 김효선
  • 작성일 : 2013-05-16 15:34:13
  • 조회수 : 2236
  • 추천수 : 1

 

 

 

33년 만에 밝혀진 5 18의 진실!!!

 

<역사로서의 5 18>(4)

 

재미 사학자 김대령 지음

 

(1)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2) 5 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3)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 18비화들

(4) 5 18재판 법리의 모순

(각권 정가 15,000)

 

 

 

<민주화운동>이란 이름의 판도라 상자 속에 꼭꼭 감춰왔던 5 18광주사태의 진실이 드디어 밝혀지다!!!!.

O. 5 18광주사태 관련 모든 증언들과 기록물들이 201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인에게 공개되었다. 본서는 이 기록 유산을 바탕으로 쓰여진 광주사태의 진실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이다.

 

O. 광주사태는 온갖 거짓선동과 유언비어로 시작되었고, 그 거짓말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한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광주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광주인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밝히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O. 북한은 해마다 5 18광주사태를 국가적 행사로 기념하고 있고, 수많은 5 18영웅들과 480명의 시신 없는 <5 18인민영웅 묘지>가 있다. 이는 북한이 당시 남한에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개입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O.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5 18광주사태가 자유민주주의를 타도하고 북한의 <민족민주> <인민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횃불을 드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O.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무장봉기로 국가 전복을 꾀한 세력을 <헌법제정기관>이라 규정하고, <헌법제정기관>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국가를 수호한 것을 <국헌문란 행위>라고 판결함으로써 <헌법과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이제 광주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거꾸로 뒤집혀진 현대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국회청문회>가 다시 열려야 한다.

<역사로서의 5.18> 각권 띠지

 

1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

 

 

<5 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의 판도라 상자 속에 꼭꼭 숨겨왔던 5 18광주사태의 실상, 33년만에 그 진실이 밝혀졌다!!! 광주사태 유관 단체들이 5 18 광주사태 관련 모든 증언과 기록물을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그 진상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우리 이제 그 명칭을 제쳐 두고 그 진상부터 알아볼 용기를 내자!!

 

 

1()

 

5 18 광주사태는 거짓선동과 거짓 유언비어로 시작되었고, 그 거짓말은 현재까지도 계속 주장되고 있다. 광주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광주시민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방화범이 소방관에게 방화 책임을 뒤집어 씌웠던 지금까지의 5 18담론 방식으로는 광주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광주시민들의 명예도 회복될 수 없다. 진정한 치유와 명예회복은 우리 모두 보다 정직해져서 진실을 인정하고, 진실을 증언할 용기를 가질 때 가능해진다.

 

25 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

 

북한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5 18 광주사태를 국가적 행사로 크게 기념하고 있다. 그 이유는?

5 18 광주사태는 대한민국의 체제인 <자유민주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북한의 체제인 <민족(인민)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민주화 투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왜 인민민주주의 국가인 북한에 수많은 <5 18영웅묘지>가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2()

 

5 18사태 초반 경찰이나 계엄군과 대치하고 시위할 때에는 시위대들은 전부 민낯으로 시위를 했는데, 경찰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갑자기 복면을 한 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광주사태의 전개상황을 보면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제 수많은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으로 그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3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 18비화들 ()

 

 

5 18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수호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민족민주>, <인민 민주주의>를 위해 <횃불>을 밝히며 투쟁하자는 뜻을 분명히 선언했다. 그것을 위해 5 20일 전국적인 무장봉기 계획을 사전에 세워 놓았으며,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려 대중을 선동, 동원했던 것이다.

 

3()

 

5 18 당시 구례 천은사에 있던 김현장은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란 거짓 선동문을 작성, 전주의 <문정현 신부>에게 전해 주었고, 그는 천주교 소유의 윤전기로 1만 부를 인쇄, 전국 성당에 뿌려서 거짓 유언비어들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당시 유포된 대표적인 거짓 유언비어들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 한다>, <계엄군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어를 끄집어내서 던졌다> 등 새빨간 거짓말들이었다.

 

45 18재판 법리의 모순 ()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대법원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국가기관의 총을 탈취, 도청을 경비하던 국군과 경찰을 공격, 사살하고, 쫓아낸 후 도청을 점거하여 <해방구>라고 선포한 세력을 <헌법제정기관>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국헌문란 행위>라고 판결, 사실과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4()

 

5 18 광주사태 당시 총을 든 시민군의 주력부대는 중고등학생들과 어린 구두닦기 등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순세력이었다. 이들은 헌법상 투표권도 없는 자들이었고, 특히 당시 그들이 외친 구호는 대통령과 총리의 퇴진 등 <헌정 부정> 행위였음에도, 이들의 결집은 곧 <헌법 제정하는 기관>에 해당하므로,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곧 <국헌문란 행위>였다고 판결한 것에 동의할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본문 제 4권 제 13장에서)

 

*황석영과 <님을 위한 행진곡>*

 

“5.18을 주제로 한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와 남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테마는 둘 다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 관련자 박형선의 누이 박기순과 전남도청을 TNT로 폭파해서라도 사수하려다가 사망한 광주사태의 주동자 윤상원과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최초로 노동계에 위장 취업했던 박기순은 광주사태 이전인 1979년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미혼여성으로 사망했고, 박기순을 따라 노동계에 위장 취업했다가 광주 운동권의 샛별로 부상하여 광주사태 주역으로 활동했던 윤상원도 미혼남성으로서 1980. 5. 27. 새벽 자신이 차고 있던 수류탄이 터지면서 전남도청에서 사망했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1983, 황석영 등에 의해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치러졌다. 이때 황석영이 이 두 남녀를 주제로 넋풀이를 하였는데, 그 주제곡이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고 지금 통합진보당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이다.

 

황석영은 광주사태의 선전선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3월 김일성의 부름으로 밀입북하여 1991년에 북한에서 5 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쓰면서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해설까지 삽입했다. 남한에서는 2007년에 5 18영화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대한민국을 조롱하고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는 신성한 국군을 정면에서 원수로 취급하는 영화이고,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친북세력들에게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부추겨서 미국에 의한 남한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성공시켜서 남한에서도 북한식 사회주의체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본서 제 4권 제 13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래 가사 중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앞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바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하고 인민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다 죽은 동지들이 내세웠던 이념의 깃발은 여전히 펄럭이고 있으니, 산 자들은 이 땅에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그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그들의 뒤를 따라 끝까지 싸우자>란 내용인 것이다.

책 뒷 표지 문장

 

 

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뒤 표지 문장)

 

광주사태는 하나의 <광대놀이>였다. 시민군 선전조로서 유언비어 나팔수 역할을 했던 황석영의 극단 명칭도 <광대>였다. 시민군 선전대에는 홍성담 등 미술패뿐만 아니라 광주의 광대패가 총동원되어 온갖 악성 유언비어들을 급조하여 퍼뜨리며 무장봉기를 선동하였다. 5· 18 광대패에게 있어 유언비어는 하나의 선동수단이었다. 심미진 역의 한혜진이 총구를 전직 대통령에게 겨누는 영화 <26>은 급조된 허구로 구성된 또 한 편의 광대놀이다.

지난 30여년 간 허구가 5· 18 담론을 지배한 이유는, 허구가 광주사태 발단의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1980518일 정오 무렵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승용차를 타고 여수 돌산으로 가고 있을 때 광주역전에서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 맞아 죽었다고 외침과 더불어 5· 18 광대놀이의 막이 올랐으며, 황석영의 광대패는 그 유언비어를 시민군 선전대의 선동소재로 삼았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놓고 복수를 선동하였다. 광대패가 그 유언비어를 계속 뻥튀기한 것이 영화 <26>이 펼치는 복수극의 서막이다.

방화사건으로 물적 및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소재는 누구에게 있는가?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소방대원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가? 만약 그 방화사건이 고의적인 방화였고, 방화범이 사전에 준비한 것이었을 때는 그 책임의 소재는 방화범에게 있지 않은가? 본서는 무장봉기로서의 5· 18사건은 사전에 기획되고 준비된 것이었음을 명쾌하게 입증한다.

 

 

25·18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뒤 표지 문장)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만큼 광주사태는 잘 알려져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 전개과정을 잘 모르는 이유로 5· 18 영상물의 조작을 꼽을 수 있다. 갑이 각목으로 을을 때릴 준비를 해놓고 있다가 때린 후에 자기는 항쟁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당한가? 갑이 그 사건 영상물을 편집할 때 고의적으로 그 사건 전개 순서를 뒤바꾸면 영상 관람자를 현혹시킬 수 있다.

영상물은 조작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설명이 편파적이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521일 오후 1시 반경 전남도청 인근 거리에서 발생한 시민군 장갑차 사건이다. 그런데 장갑차를 타고 금남로를 질주했던 인물의 이름은 꼭꼭 숨겨지고, 당시 다섯 살이던 그의 아들이 아빠 영정을 들고 있는 사진은 광주의 비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유명하다. 최근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영화‘26의 모티브 역시 이 사진이었다. 아이 아빠가 장갑차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꼭꼭 숨겨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록에서 조사천 씨 부인 정동순씨는 그날인부들이 집으로 놀러 와서 점심을 같이 먹은 남편은 인부들 임금을 주어야 하는데 공사를 맡긴 사람한테서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과 인부들은 동구청 뒤에 산다는 사장집에 가던 길에 총에 맞았다고 말한다. 영화화려한 휴가에서는 조씨가 도청 앞 집단발포 현장에서 우는 아들을 피신시키려다 총에 맞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사실을 숨기는 거짓말이다. 전자에서, 그날 그 시각 집단발포가 있었다는 주장과 바로 그때 조씨와 인부들이 임금을 받으러 동구청 쪽으로 가던 길에 조씨가 총에 맞은 것이라는 설명은 부합하지 않는다. 후자에서, 어린 아들을 보호하려다 총까지 맞는 아빠가 자기 아들을 시민군의 차에 태워 금남로로 데리고 왔다는 것인가?

공사 임금을 받으러 갈 때 장갑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는가? 그 사건을 광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면 공사 임금 받으러 가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가 된다. 민간인이 장갑차를 타고 도심지를 질주하다가 생긴 사고를광주학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올바른 명칭이 아니다. 만약 사고 장소가 동구청 옆이었다고 말하려면, 그곳은 총을 든 시민군이 있었던 곳이며, 조씨의 총상도 카빈소총에 의한 총상의 특징인 맹관 총상이었음을 아울러 말해야 한다.

왜 그가 갑자기 장갑차를 탔는지는 수수께끼지만, 누가 그를 선동하였느냐 하는 질문은 그냥 덮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무장봉기가 먼저였는가? 희생자 발생이 먼저였는가? 비극의 상처들은 치유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덮어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진실을 밝힘으로써 치유되어야 하므로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진실을 덮고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을 낳는 것이다. 시민군 중 다수는 가면을 쓴 주동자들의 선동에 이용당했을 뿐이기에 반드시 누가 주동자들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비화들

(뒤 표지 문장)

 

1994514일 정동년 등 321명이 전두환 전 대통령 등 35명을 내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서울 지방검찰청에 고소했는데, 그 고발사실 요지는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야기하였으므로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한국 현대사의 한 사건인 광주사태가 김대중의 내란이었느냐, 아니면 전두환의 내란이었느냐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가 있었다. 광주사태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는 5· 18 사건의 핵심은 무장봉기인데, 고발인들은 이것은 전두환이 사전에 계획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정동년 등 고발인들은전두환 사전계획설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세기의 재판이라는 5· 18 재판 고발 사실은 전두환이시민들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 자위적 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교도소를 습격하며 발포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5 · 18재판 고발인들은 광주시민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그렇게 하도록 전두환이 상황을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주장에서는 폭동의 책임은 전두환에게로 전가된다.

그러나 이런 논리로 고발 사실이 성립될 수 있는가? 이런 주장에 의한 고발 사실이 성립될 수 있는지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방화범이 집 주인이 방화 심리를 부추기는 상황을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로 자신의 방화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가? 혹은 소방서가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방화범죄를 유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며 소방대원들을 고발할 수 있는가?

이런 황당한 논리에 의한 고발사건이 5· 18재판 때 실제로 벌어졌다. 검찰이 수사하면 고발사실의 근거가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을까? 그러나 1년 넘는 수사 후에 검찰은 1995718공소권 없음이란 결정을 내리고불기소 처분을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15년 공소시효를 넘겼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느닷없이 김영삼 정권이 개입하여 518특별법을 제정케 하고 여론몰이로 재판을 강행하였다.

김영삼 정권의 법정은“... 것이라 못 볼 바 아닌 다음에야 ... 아니 볼 수 없어라는 꽈배기 문구로 전두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꽈배기 논리대로라면 아무리 목욕을 깨끗하게 한 사람이라도때 없는 것이라 못 볼 바 아닌 다음에야 ... 때 있다고 아니 볼 수 없어유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꽈배기 궤변의 문제는 실은 고발 사실의 근거를 재판부가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과 전두환 중 누가 5월 시위를 사전에 계획하였는가?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민청협>이 총궐기대회 날짜를 520일과 22일로 정한 사실이 김대중과 이해찬 등의 증언으로 광주청문회 속기록에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다.

 

45· 18재판 법리의 모순

(뒤 표지 문장)

 

일반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5· 18 재판 판결과 5· 18 재판 법리는 크게 다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시절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검찰도 고소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고, 재판부도 터무니없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단지 억지 법리 해석으로 피고인들에게 국헌문란 행위라는 올가미를 씌울 수 있었을 뿐이다.

고소인들의 주장에는 피고인들의 유죄사실을 증명할 근거가 없었기에 그 근거를 마련할 목적으로 이상한 법리가 등장하였다. 시민군이 친정부 세력이었다고 판단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급조된 이 법리는 광주사태 당시 2개의 헌법기관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출발한다. 헌법기관의 주 구성원은 5월의 시위대가 유신잔당이라 낙인을 찍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이다. 또 하나의 헌법기관은 이른바 시민군이라 부르는 시위대였다.

시위군중이 공공건물에 방화하는 것은 폭동이요, 무장시민군이 시청과 도청을 접수하는 것은 반란행위인데, 그런 행위들이 국헌문란인가 아니면 헌정질서 수호인가? 5·18 법리에서는 그런 행위들이 헌정질서 수호로 간주된다. 시민군은 대통령과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기에 헌법기관이며, 군 무기고 탈취 등은 헌정질서 수호 행위라고 이 법리는 해석한다. 차량 징발 등 시민군의 모든 행위들이 이렇게 정당화되면, 최규하 정부의 시위 진압은 헌법기관으로서의 시민군의 활동을 방해한 것이기에 국헌문란에 해당된다.

시민군을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의 수호기관으로 간주하는 법리대로라면 시민군은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 수호기관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시민군의 활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운동권 편에서 보더라도 시민군이 최 대통령 정부의 수호세력이었다는 역사 인식은 모순이다.

1996년의 5· 18 재판 판결이 역사 인식의 완성일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누가 보아도 5· 18 재판 법리는 모순이다. 5· 18 담론이 늘 뜨거운 쟁점인 이유는 법리가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그것은 5· 18 재판 법리의 바탕에는 어떤 거짓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최규하 죽여라는 시위구호를 최 대통령 본인이 대통령 지지 구호로서 인식하였겠는가? 시위 구호도, 5· 18 성명서도 대통령을 타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구호들을 대통령 지지 구호로서 해석하는 것은 객관적인 진실에 위배된다.

사실, 5· 18의 표어는 <자유민주>가 아닌 <민족민주>였으며, 이는 <인민민주주의> 혹은 <북한식 사회민주주의>를 함축하는 용어였다. 비근한 예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이석기가 북한의 지령으로 조직된 <민족민주 혁명당> 출신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5· 18 법리는 <민족민주> 진영의 지하조직들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반국가단체로 판단한 다른 재판의 법리들과 상반된다. 이래서는 광주사태 선동 논리와 5· 18재판 판결 논리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체 목차

 

프롤로그

1장 유언비어 잔치판

1. 전두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

2.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 운동권 개입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박관현

. 여수 돌산에서 북한방송 듣고 있었던 박관현

. 고의적으로 유포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 사전 기획된 학생사망 유언비어 유포작전

3. 헬기 기총사격 유언비어

4. 미 항공모함 시민군 지원 유언비어

5. 차명숙과 전옥주의 화려한 유언비어 가두방송

. 전옥주의 혜성 같은 등장

. 전옥주가 퍼뜨린 유언비어

. 베일 속의 여성선동가 차명숙

6. 유언비어로 모병된 시민군

 

25·18은 사전에 준비된 무장폭동인가 사후의 저항운동인가?

1. 1980년 이전의 무장봉기 준비

. 통일혁명당의 무장투쟁 준비

. 5·18의 주역 남민전의 조직

. 남민전의 무장봉기 예행연습

2. 5·18 이전 사전 준비된 무장봉기

. 사전 무장봉기 계획을 입증하는 5·18기록물

. 무기고 위치 사전 파악에 대한 탈북자와 윤한봉의 일치된 증언

. 3월로 예정되어 있던 광주사태

. 5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3. 5·18 이전에 민중봉기를 선동한 5·18 성명서

. 5·18 이전 성명서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 광주사태 전주곡이었던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 왕년의 빨치산이 대필한 서울대총학생회 성명서

. 왕년의 빨치산이 53일 살포한투쟁선언전단

. 대학가 괴성명서 베낀 김대중의 국민선언문

. 왕년의 빨치산이 대필한 전남대 총학생회 성명서

4.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입장

 

3장 날짜별 주요 5·18 사건

1. 517일 광주사태 전야 -거사 강행과 도피의 교차로

. 거사 준비 완료한 운동권의 술집 회동

. 박관현의 퇴장과 더불어 샛별처럼 등장한 윤상원

2. 518일 사태의 발단 :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당한 전경들

. 박관현 총학생회장 사망 유언비어

3. 519일 화공에 의한 폭력시위

. 동학군을 연상시키는 무기등장

. 차량을 이용한 화공

. 시위대의 최초 총기 탈취

4. 520일 차량 돌진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 차량 돌격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 방송국과 관공서에 대한 방화

5. 521일 무장 시민군의 도청 함락

. 오전 8시 시민군 선전조에게 인계된 시신 2

. 오전 10시 시민군의 이중 사기협상

. 도시게릴라전

. 도청 점거의 정치적 상징: 임시정부

. 도청 점거 이후의 봉기

6. 522일 예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뜻밖의 반전

7. 525일 광주코뮌 권력을 장악한 무장봉기파

8. 526일 전원 자폭 결의

9. 527일 새벽의 마지막 전투 <이상 1>

4장 시위대와 시민군 사상자 발생원인

1. [화보스토리] 5·18 대표 사진에 얽힌 비애와 비화

2. 시민 위에 떨어진 돌과 화염병

3. 시민군 총기 오발사고 및 시민군 간의 총격전

4. 시민군의 운전미숙으로 인한 사고

5. 광주교도소 습격

6. 시민군의 수류탄 폭발

 

5장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

1. 자발적인 불순세력과 비자발적인 광주시민의 결집

2. 시민군에 대한 객관적 진실 - 외지에서 온 시민군

. 가짜스님 간첩 손성모와 왕년의 빨치산 스님

. 김대중이 북송한 광주사태 공작 간첩 손성모의 증심사 시민군

. 5·18측의 마술 셈법

. 300명 단위의 시민군

. 21일 오전 8시 낫 들고 20사단 지프차 탈취한 시민군

. 21일 오전 9시 무기탈취 및 무장봉기 시민군 600명 출현

. 시민군 중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낌새들

. 낫으로 5·18광주의 영웅 되고 도끼에 전사한 대남공작원 장중한

. 낫을 든 괴한들이 탈취한 지프차들의 행방

. 무기고 배치도를 이용한 무기탈취

. 시민군 차량 돌격부대의 공격

. 시민군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 군경과 시민군의 뒤바뀐 제복

. 학생 없는 학생시민군

3. 가두시위에 응용된 유격전 전술

4.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낌새와 단서들

5. 북한방송 청취로 시사정보를 입수한 시민군

6. 시민군에 의한 언론탄압

 

6장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먼저 총을 쏘았나?

<이상 2>

7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1. 광주청문회 증인들의 숨바꼭질 관전

2. 김대중과 정동년의 광주청문회 위증

3. 5·18에 맴도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사적 전망

4. 국민이 인식하는 바와 전혀 다른 5·18재판 판결

5.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6. 두 개의 내란설 vs. 3세력의 개입설

7. 차명 대필 활동가 박현채의 민란 선동논리

8. 사라진 5·18비밀문서와 보존된 기록들

9.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한 판결 사례

. 1심의 황당한 판단

. 2심의 황당한 법리 해석

 

8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5·18 이전의 성명서를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2. 시민군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세력이었는가?

3.‘신현확 물러가라구호의 꼴불견

 

9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약탈과 도덕성 결여에 의한 국민 결집?

2. 무장봉기파와 수습위 간의 다툼

3. 시민 연행에 의한 결집?

4.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했던 시민들

5. 코뮌주의자들과 수습위 간의 다툼

6. 북한 지령문처럼 보이는 5·18성명서

7. 차량을 약탈하는 헌법기관?

8. 경상도 차량에 불 지르는 헌법기관?

9. 지역감정 자극 유언비어

 

10장 중학생 시민군이 헌법기관이라고?

1. 중고생 봉기위원회가 헌법기관이었는가?

2. 중고생·청소년 시민군

3. 해남시민군이 되어 송정리에서 죽은 영암 고등학생

4. 김영찬군과 상필이는 헌법기관이었는가?

5. 윤기권의 월북은 헌법기관의 월북이었는가?

6. 고등학생 시민군 김효석군의 무용담

 

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1.‘광주해방구주역으로서의 코뮌주의 혁명가들

2. 코뮌주의자들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법리 잣대

3. <광주해방구>를 설치한 코뮌주의자들의 <민족민주 혁명론>

<이상 3>

 

125·18의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1. 자유민주의 대항마였던 5·18민족민주

2. 5·18의 이념성향에 대한 객관적 진실

. 민족해방 운동

.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광주 운동권의 밀착

.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광주 운동권의 이념

A. 노동자, 농민과의 연대투쟁

B. 남민전 구호?‘농민수탈 금지

.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북한의 관계

.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명의의 투사회보

. 5·18의 반미 이념

.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본 5·18이념

.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운동

3. 5·18성명서 상투어에 반영된 이념

. 왕년의 빨치산 전용어: 신식민지와 매판세력

. 북한말 파쇼

. 대남 공작용어혁명역량

4. 북한공작금 수령한 민족민주 진영 인사들

. 김대중의 후원자 김일성

. 김일성이 문익환 목사에게 보낸 밀사

. 가톨릭농민회 회장 서경원 간첩사건

. 광주사태 배후 장기표의 여간첩단 사건

. 김낙중 간첩사건

 

13장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

1. 박현채가 원격 조종한 민청학련 사건과 5·18

2. 인민혁명당과 광주운동권의 연결고리 광랑

3. 광주일고 동문들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

4. 황석영의 북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으로 등장하는 황석영의 극단

. 황석영과 종북 좌파와의 관계

. 시민군 선전조였던 황석영의 극단 <광대>

. 황석영의 밀입북 배경

5. 빨치산과 선후배 관계였던 광주 운동권

 

에필로그 247

부록 1 - 컬러 화보로 읽는 광주사태 스토리

부록 2 - 19805 18을 전후한 시기의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문

부록 3 - 5 18 이전의 성명서들

부록 4 -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에서 청취된 북한방송

부록 5 - 5 18 성명서 기록물

참고문헌

<이상 4>

 

프롤로그

 

 

 

본서의 집필 동기는 영화 <화려한 휴가>관람 소감을 표현할 필요와 5 18기록물의 세계 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반응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유언비어를 팔아 흥행에 성공했으면서도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거짓 선전하였다. 만약 관객이 영화장면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대한민국 국군은 시민을 학살하는 살인기계로 인식되고 국군의 명예는 완전히 훼손된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를 가리고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본서 집필의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5 18 기록물의 세계 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반응이다. 누가 5 18 기록물의 세계 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하였는가? 누구나 그것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유언비어와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5 18성명서들이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 그럼에도 이왕 5 18성명서들이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이제 5 18을 연구하는 1차 사료로서 펼쳐 읽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5 18에 대한 논쟁의 문제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를 밝히는 문제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바른 지식이냐의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이다.

2008년의 광우병 반미 촛불시위 때이명박 물러가라구호를 외치며 청와대를 향하여 돌진하던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흔들고 전경에게 돌을 던지며 인질로 납치하는 과격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는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등 여러 가지 긴 명칭으로 불리는데,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 사건을광우(狂牛)사태라는 짧은 명칭으로 불러보자.‘광주(光州)사태광우(狂牛)사태도 두 다른 주장이 강하게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때의 과격 시위에 관하여 여전히 두 가지 다른 시각이 상충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런 거리정치를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격시위 자제를 호소한다.

광우사태광주사태처럼 그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이 뒤따른 사건이었다. 2008년 여름 촛불시위 배후에 대한 재판을사노련 재판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큰 혐의가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자는 선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광주사태도 광우사태도 자칭 혁명가들이 그 주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코뮌주의 혁명가들이었으며 그들의 혁명 방법은 무장봉기이다. 광주사태와 광우사태의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2008년 여름의 광우사태 때는 유언비어 혹은 과장된 주장에 의한 시위선동 논리에 반대하는 국민의 소리도 컸다는 것이다. 인터넷 영상매체 시대에는 과격시위를 반대하는 시민들도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번사노련 재판5 18재판과 같은 여론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리와 판결의 중요성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노동자 민병대의 무장봉기에 의해 국가를 전복시키고 새 권력을 수립하려 하였던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피고인들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판결이 나오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다.

시민 누구나 비디오 촬영을 하는 인터넷 영상매체 시대에 불가능한 주장이 있다. 만약 누가반정부 촛불시위대는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수호하는 시위요, 따라서 헌정질서 수호세력이며, 헌정질서 수호세력인 촛불시위대를 진압한 이명박 대통령은 국헌문란 행위를 범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만약 그런 주장과 판결이 있다면 그것은 인터넷 영상매체 시대의 국민들에게는 극히 황당한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분명히 그때의 구호는이명박 물러나라였다.“이명박 물러가라는 구호를 그 누가 이명박 대통령을 수호하는 구호라고 이해하겠는가? 그 시위 구호를 듣고 기억하는 국민은 그런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5 18재판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 광주사태 시위 구호는 분명히최규하 물러나라”,최 돼지 물러나라였다. 그럼에도 5 18재판은 그런 반정부 구호를 외친 시위대와 시민군을 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당시 시위 구호를 기억하는 국민은, 그리고 5 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그런 구호들을 기록물로 본 국민은 그 판결을 황당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광주사태의 실상과 5 18 담론의 허상, 즉 거짓의 한 예를 본다.“최규하 물러나라”,최 돼지 물러나라구호가 실상이었다. 그런 구호를 외친 시민군을 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으로 본 5· 18재판의 판결은 황당한, 즉 실재하지 않는허상(虛像)이었다.

그런 뒤집힌 판결과 더불어 5 18재판은 1997417일 끝났다. 판결이 뒤집혀졌을 때, 즉 사건의 실상에 정면으로 위배될 때, 그것은허상거짓이다. 그러나 그런 허상이 생겼다고 해서 실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거짓에 의해 사실이 뒤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과 김대중의 거리정치가 강하게 충돌하고 있었던 때에 최 대통령과 김대중 사이에서 광주시민군은 김대중 지지세력이었지 결코 대통령 수호 세력이 아니었다.

 

인터넷 영상매체 시대에는 폭력시위에 한계가 있다. 시위대의 폭력도 영상으로 찍혀 증거물로 공개되고 보존되기 때문에 주동자들은 시민의 지지를 잃게 된다. 그러나 촛불시위 배후 세력이 바라던 대로 폭력시위가 무장봉기로 격상되었다고 가상해 보자. 그때 경찰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반정부 촛불시위의 목적은 국민건강이 아니라 정권교체였다. 그들의 청와대 진격은 국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전략이었다. 만약 종북좌파들 중에서도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운동권 권력이 수립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2008년의 촛불시위를 정당화하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재판에서 촛불 주동자들이 패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그 판결을 뒤집는 시도를 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법판단도 바뀌는 것이라면, 그것은 삼권분립이 아니라 사법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고 있는 나라이다. 만약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전복되고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면 법철학도 달라지고 판결도 달라지게 된다. 중도좌파를 자처하던 노무현 정부 시절에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과거사 청산이요, 인혁당 사건 등 여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에 대한판결 뒤집기였으며, 여러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 및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 판결을 해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5 18재판은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정당화해 준 재판이었으며, 헌정질서 수호라는 말로 정당화해 주었다. 거짓이 진실을 지배하였다. 대통령을 위해 총을 든 시민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허상이다. 심지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조차 대통령을 위해 총을 든 시민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에 근거해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가? 거짓에 근거해서 역사교과서를 쓰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 관하여 국민을 혼동시키는 것이다. 5 18재판 이후의 교과서로 혹은 전교조 교육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점점 더 그 시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의 5 18담론에는 실상보다 허상이 많았다. 광주사태의 발단 자체가 거짓 프로파간다였다. 1980518일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여수 돌산으로 가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박관현이 죽었다고 외쳤다. 이것이 광주사태라고 명명된 5 18사건을 야기한 거짓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거짓 소문이 광주시내로 쫙 퍼져나가고 있었을 때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없었다.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악성 유언비어에 휩쓸린 군중이 파출소로 달려가서 화염병을 던지며 방화하고 경찰을 인질로 납치하였다. 이것이 5 18재판에서 헌정질서 수호 행위로서 판단한 사건이다. 그러나 지성이 있는 국민은 그런 판단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는 거짓이었다. 그가 잠시 여수 돌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은, 더구나 그런 거짓말로 군중을 흥분시켜 시위선동에 이용한 것은 도덕성의 문제이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시위선동헌정질서 수호 행위로 간주되었는가?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유언비어 퍼뜨리기작전의 위력을 본 선전조는 그 다음 날 19일에는 전옥주를 데려다가 그 죽은 학생은 자기 동생이라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가두방송을 하도록 시켰다. 어떻게 전씨 성을 가진 여성의 남동생이 박씨 성을 가진 학생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오누이의 막내인 그녀에게 남동생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전옥주에게 남동생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런데 그런 거짓이 가두 선무방송으로 광주사태 쓰나미를 일으켰으며, 그녀는 하루아침에 광주의 영웅이 되었다. 국민들이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할 때 그것은 광주사태의 실상이 아니라 허상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전옥주는 착한 간호원 신애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여기에 시위선동 방법에 도덕성의 문제가 있었다.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도, 그 죽은 학생은 자기 남동생이었다는 전옥주의 가두 선무방송도 얼마나 도덕적이었는가? 윤리적으로 미개한 사회에서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 죽었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리거나, 있지도 않은 남동생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옳은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의 거짓말의 위력이 대단하였기에 그녀를 광주의 잔다크라고 칭송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착한 간호원으로, 정의로운 여성으로 미화된다.

20115 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사건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의 기준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한 다음 날에는박관현이 죽은 것을 알고 전남대총장이 할복자살을 하였다는 유언비어가 등장하였다. 총학생회장과 총장 사망 유언비어는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짓에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다. 그래서 이어서 그 가해자가 전두환이라는 유언비어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최규하 대통령이 사살되었다는 유언비어가, 전두환의 광주 살육 작전이라는 유언비어 유인물들이 등장하였다. 이렇듯 유언비어라는 거짓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5 18기록물이다. 그래서 그 기록물은 당시 유언비어 연구를 위한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들이 시위 선동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도덕적으로 값어치 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5 18재판은 광주에서최규하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던 시민군이 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이었다는 황당한 판결을 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허상을 내세우려고 숨겼던 실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판결에서는 5180시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건에는 전후 관계가 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도 그것이 불가피하였던 상황, 대통령이 그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 있었다. 김대중 세력은 신현확 총리내각에게 19일까지 총사퇴 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광주에서는 19일에 무장봉기가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며, 범운동권 세력이 20일 총궐기 대회로 최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킬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대통령이 국가 전복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막을 해법이 무엇이었겠는가? 아직 전경 병력도 몇 명 되지 않았을 때, 과도정부로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외에 달리 해법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2008년 여름의 광우병 촛불시위대가 청와대를 공격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전례가 있는 사건이었다. 1980515일 서울에서 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들을 압사시키고 중상을 입혀도 내무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절호의 기회로 포착한 시위대가 그 여세를 몰아 청와대로 진격하려고 했을 때 경찰은 무방비 상태였다. 2008년에는 1만 명 이상의 전경 병력을 동원하여 간신히 청와대를 사수할 수 있었으나, 1980년 봄에는 그런 전경 병력도 없었다. 그래서 광화문 일대가 시위대에 점령당했다. 그날 저녁 시위대 본부 차량이 서울역에 당도했을 때, 당시 시위 배후였던 <민청협>의 사주를 받은 유시민은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자고 했고, 심재철은 시위대를 해산시키자고 했다.

1974<민청학련>이 국가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왕년의 빨치산 출신 박현채가 민청학련을 원격 조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6년 만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민청협>)이 다시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며, 이때도 박현채가 <민청협>을 원격조종하고 있었다. 각 대학 재학생들은 복학생들(민청협)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민청협이 배후였고 민청협의 목표는 국가전복이었다.

19804월 초에 김대중은 <민청협>을 자기편으로 끌어안았으며, 조성우와 장기표 등 민청협 간부들이 김대중의 유급 홍위병들이 되었다. 그때 그들은 왜 엄청난 규모의 가두시위를 조직하였던가? 심심하거나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국가전복이었으며, 그 전략은 청와대를 점령하고 김대중 정부를 구성하여 내각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민청협과 그런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김대중이 예비내각 명단도 미리 짜놓고 있었다. 민청협은 20일의 총궐기대회 때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15일에 그 기회가 왔었던 것은 김대중 세력과 민청협으로서도 천만뜻밖이었다.

그 기회는 그날 오후 1시경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남대문경찰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여 경찰들을 죽이고 중상을 입혔을 때 찾아왔다. 남대문경찰 저지선을 뚫지 못하면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원 몇 명이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향해 돌진하여 죽이고 다치게 하였다. 이런 불의의 차량 돌격에 경찰은 혼비백산이 되었고 시위대는 손쉽게 서울역까지 장악하였다. 누가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인 범인이었을까? 경찰을 죽이는 것은 폭도나 할 수 있는 짓이다. 시위대원들 중에 폭도들이 있었을까? 본서의 담론(談論)에서는 그 괴한들은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간첩들이 있었다고 탈북자들이 증언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때 체포된 간첩이 있었다.

운동권 용어에서서울역 회군이란국가전복의 절호의 기회를 놓친 회군이란 뜻이다.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경찰을 죽인 시위 주동자들을 연행할 수도 없었다. 시위대 버스 돌격에 의한 경찰 사망이 내무부 치안유지의 한계였다. 내무부 단독으로는 청와대를 방어할 힘이 없었다. 그는 그날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전화로 심재철에게 시위대 해산을 호소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심재철은 해산을 결정하였다.

절대절명의 위기를 이렇게 간신히 넘긴 김종환 내무장관은 그 길로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서 내무부는 더 이상 치안을 유지할 힘이 없으니 군부가 개입하게 해달라는 호소를 하였다. 신 총리는 그 사실을 즉각 최규하 대통령에게 알리고, 대통령은 중동순방 일정을 중단하고 갑자기 귀국하였으며, 최 대통령 도착시간에 맞추어 517일에 심야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때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가결되고 선포되었다.

운동권이 쓰는 역사에서서울역 회군에 대해 비통해 하면서 심재철을 원망하는 이유가 있다. <민청협>은 적어도 520일까지는 시간이 자기들 편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520일의 총궐기 대회로 거사에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51724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내란음모 주동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있을 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515일 청와대를 점령할 기회를 놓친 이래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운동권의 5 18담론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민족민주 운동권 편에서는 아주 중대한 사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시킬 기회를 놓치게 하는 사건이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쿠데타였는가, 아니면 최규하 대통령과 그의 정부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는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최대통령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언은 정부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 18재판 판결 논리에서는 이런 배경이, 이런 전후 관계가 숨겨져 있다. 시민군의 무기탈취 및 무장봉기를 정당화시켜 주는 유일한 길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군사 쿠데타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런 억지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최규하 물러가라고 외친 시민군들이 바로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이었다는 판단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도대체 5 18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김영삼 정부의 5 18법정은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음을 입증하였는가? 아니다.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 5 18법정은 5180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므로 광주의 시위대는최규하 대통령 지지세력, ‘4공화국 유신헌정질서 수호세력이었다고 판단하였을 뿐이다. 5 18재판 판결에서는 5 18시민군은 유신헌법 수호세력이다. 이것이 사법적으로는 5 18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계엄군과 시민군 중 어느 편이 민주주의를 수호하였느냐의 판단의 잣대는 어느 편이유신헌법,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합헌적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을 수호하였느냐이다.

5 18재판 판결 논리에서 민주주의의 표준은 유신헌법이요, 최규하 대통령이다. 이 논리에서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최규하 대통령의 집권에 의해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 의거하여 시민군과 계엄군을 판단하는 법리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최 대통령 정부는 과도정부였으며, 과도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였다. 최 대통령의 목적은 유신헌법 수호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개헌이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합헌적 개헌이었다. 당시 정국은 개헌정국이었고, 최 대통령은 개헌 논의의 주체였다. 대통령 자신이 유신헌법 수호주의자가 아니었다. 김대중을 지지하던 시민군 역시 유신헌법 수호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입장은 합헌적으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5공화국 대통령을 직선제 선거로 선출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은 과도정부가 수행해야 할 일이었고, 선거를 통해서 합헌적으로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이 최 대통령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세력의 국가전복 논리는 최 대통령 정부는 유신잔당이므로 개헌을 할 자격이 없고 민중봉기로 최 대통령 정부를 타도하고 김대중이 군주가 되어 새로 헌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5 18재판 판결에서는 광주시민군은 헌정질서 수호세력으로 간주되지만, 그런 판단은 허상이자 거짓이다. 실상과 진실은 김대중 세력은 4공화국 헌정질서를 전면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도 유신잔당이므로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으며 총사퇴해야 한다는 것이, 4공화국은 유신잔당이므로 선거를 통해서 정권교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봉기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것이, 김대중 측의 입장이자 광주사태의 선동 논리였다. 김대중이 제시하는 정권교체 모델이란 몇 달 전인 1979년 가을 이란에서 폭동으로 팔레비 왕정 정부를 전복시키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과격파가 집권하게 된 그런 방법이었다.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은 그 방법으로 집권할 수 있다고 선동하고 있었고, 당시 중동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이란처럼 폭동에 의해 국가가 전복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패망이므로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최 대통령과 김대중 세력이 일대 충돌을 한 것이 바로 19805180시에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였다.

결국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므로 5 18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법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설사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므로 5 18은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대통령이 계엄 확대를 선포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라고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비상계엄이 확대되었기에 시위와 봉기가 정당했다는 논리라면, 19일 광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었을 때,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계엄을 확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180시에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지 않았으면 19일에는 광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무장봉기 음모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5 18재판 판결에서는 광주 운동권과 코뮌주의 혁명가들과 가톨릭농민회의 철저한 무장봉기 음모가 사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5 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은 자기가 무장봉기 준비를 총지휘하였다고 밝힌다. 그 말은 그가 행동 대장이었다는 데서 맞다. 그러나 행동대장은 그 배후세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의 배후에 왕년의 빨치산 세력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념전쟁은 한국전쟁의 휴전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특정 이념을 가진 집단이었으며, 그들의사회민주주의 혹은인민민주주의이념을민족민주라고 불렀다.

 

광주사태가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이념운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동자들의 이념운동이었지 결코 시민군 전체의 이념운동이 아니었다. 시민군은 전혀 이념조직이 아니었다. 무장한 시민군들 다수는 외지인이었으며, 더러 광주 사람들이 있었다지만 그들은 대부분 중학생 시민군이었거나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청소년들이었다. 중학생들 손에 총을 쥐어 주면 이념이 생기는가? 시민군은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런 개념도 목표도 전혀 없었다. , 80만 쪽이 넘는 방대한 5 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그런데 이 기록물은 시민군 주동자들에게는 전혀 자유민주주의 사상이나 이념이 없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불순세력을 제외한 시민군은 전혀 이념으로 뭉쳐진 집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체를 감추고 원격조종하던 배후세력과 그 행동대장으로서의 주동자들에게는 이념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5 18의 이념 코드는자유민주가 아니라민족민주(, 인민민주)였다.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주창하던 사회민주주의를민족민주라고 불렀다. 무엇이 사회민주주의인가? 191710월혁명 이래 70여년간 러시아는 사회주의 종주국이었으며, 스탈린 시대의 괴뢰국 북한의인민민주의사회민주주의이다. 58일에 이미 전남대총학생회장 박관현이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선포하였는데, 이때의민족민주화는 곧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시민군에 대한 5 18담론에도 실상과 허상이 있다. 시민군이 누구였느냐에 관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등장하는 시민군은 모두 허상이다. 영화대로라면 시민군은 도청과 금남로 주변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자 허상이다. 21일 오전에 광주에서 별일이 벌어졌다. 도청 광장에서 사람들이 인사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이 도청 주변동네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다. 도청 인근주민들 대부분은 대문을 꼭꼭 잠그고 숨어 있었으며, 시민군이 다이너마이트로 도청을 폭파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대부분 피난을 갔다. 그날 도청 광장과 금남로 일대를 꽉 채운 인파는 광주 외곽에서 수송되어온 사람들이었다. 시민군 차량 징발이 시작되자 버스운행이 중단되었는데, 광주 외곽 사람들이 어떻게 금남로로 왔는가? 그들은 모두 시민군 차량에 실려 수송되어 왔다.

그러면 도청 주변 동네사람들이 그날 아침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광주 외곽 사람들을 수송하여 왔는가? 아니다. 차량 탈취범 대부분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외지인이었다. 불순세력이 섞인 외지인들이 광주에 와서 수백 대의 차량을 징발하고 탈취하였다. 21일 오전 8, 낫으로 무장한 불순세력이 20사단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여 그 지프차를 이용하여 9시에 아세아자동차에서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일부는 전라도 38개 무기고로 무기를 탈취하러 떠났고, 일부는 광주 외곽 주민들을 광주로 실어왔다. 도청 주변동네 사람들이 무기를 탈취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무장 시민군이 등장하자 피난을 가거나 대문을 꼭꼭 잠그고 숨었다. 외지인들이 광주에 와서 차량을 탈취해 왔다.

시민군의 무기들은 광주의 경찰서로부터 탈취된 것들이었는가? 아니다. 광주경찰서 무기고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시민군 무기는 모두 타 지역에서 탈취해온 것들이었다. 도청 인근동네 사람들이 전라도 38개 무기고 위치를 샅샅이 알고 있어서 무기를 탈취하러 갔던 것인가? 아니다. 도청 인근동네 사람들은 무기를 탈취하러 가지 않았다. 외지인들이 무기를 탈취해 와서 광주시민들에게 분배하였다. 시민군 본부는 광주 어디엔가 있었다. 그러나 20사단을 습격하여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에서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한 후, 전광석화처럼 일사분란하게 전라도 여러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해왔고, 광주 외곽 주민들을 금남로로 수송해 온 자들은 외지인들이었다. 그날 오후 도청 주변동네 사람들이 총을 들고 도청에 입성했던 것이 아니라, 5~600명의 외지인 시민군이 도청 함락을 지원하여 주었다. 그들은 21일경 갑자기 광주에 출현하였다가 26일경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단숨에 이길 수 있었던 시민군은 오합지졸도 광주시민도 아니었다. 수백 명의 이 강한 시민군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 정체를 모른다. 그들 외에 우리가 그 정체를 아는 시민군들은 주로 청소년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불순세력이 무기분배를 할 때 대다수의 어른들은 꺼림칙하게 여기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누가 총을 주면 덥석 받거나 호기심에 이끌려 공짜 시민군 차량에 승차하여 시민군이 된 자들은 대부분 중고생들 혹은 청소년들이었다.

누군가가 중학생 시민군 특공대를 조직하였고, 중학생 시민군이 아무데나 총을 쏘았으니 이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중학생 및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국사를 결정할 연령층이기는커녕 무기를 책임 있게 다룰 수 있는 연령층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중학생 특공대를 조직하였기에 그들의 총기 오발사고로 많은 시민들이 죽었는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누가 중학생 시민군을 동원하였는가? 광주에서 학생운동권을 거느리고 일을 꾸미고 있었던 박현채 본인이 중학생 빨치산 출신이었다. 그에게 중학생은혁명 역량이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중고생 시민군이 동원되었다. 5 18재판 원심판결 논리에서는 시민군은 주권 행사를 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러나 시민군의 실상은 대부분 외지인들이었으며 광주 사람들로 구성된 시민군 대부분은 중고생 혹은 청소년들이었다. 도대체 중학생들이, 투표권조차 없는 미성년자들이 언제부터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였기에 그들이 헌법기관으로 간주된다는 말인가?

청소년 이외의 시민군들은 대개 노동자들이었다. 이것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과 엇갈리는 사실이다. 무장시민군 중에 지식인은커녕 대학생조차 없었다. 지금껏 시민군들의 증언은 모두 채증되었고, 시민군은 이념운동을 하였던 것이 아니었음도 확인되었다. 이 시점에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실상은 그 시절에는 아직 국민들이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용어도 그런 개념도 없었다.

 

그러면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 본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민주화투쟁이란 용어를 사용했었다. 그런데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차명 대필한 성명서에서 한두 번민주화운동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광주사태 후에 그가 쓴 글들에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박현채가 그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광주사태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514일부터 16일까지민족민주화 대성회가 있었다. 대다수의 광주시민들도 시민군도민족민주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금년 2012년의 총선에서 이석기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는데, 그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출신이며, <민혁당>은 북한의 지령으로 조직된 간첩단이었다. 왜 북한이 민족민주운동권을 지원하여 왔는가? 그것은민족민주는 곧인민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민족민주는 광주사태를 선동할 수 있는 위장 용어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민족민주 운동권이 자유민주주의 타파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동자들 편에서는 그 이념이 몹시 중요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체제 전복이었기에 그들의 이념 및 그들의 용어의 개념이 중요하였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헌법 및 체제를 수호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대한민국 법관들에게도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이념 및 그들이 사용하였던 용어들의 개념이 중요했어야 하지 않는가? 5 18의 이념은민족민주이다. 윤상원과 정상용 등 그 성명이 공개된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코뮌주의자들이었다.‘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사건과민족민주혁명당사건들에 대한 모든 재판 판례들에서 이 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었다. 그렇다면 5 18재판에서 그 세력이 헌정질서 수호세력이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어디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은 언제 누가 관찰하느냐에 따라 항상 둘 이상의 사관이 존재한다. 역사 논리를 사법기관에서 결정하는가? 모든 역사 논리를 전부 사법기관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974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대법원 재판이 있었을 때 한국경제는 IMF 환난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가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업적을 성취한 바로 그해 가을 IMF 환난이 닥치고 말았다. 왜였는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주관하였던 정권의 경제논리가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정권의 경제논리가 완벽할 수 없듯이 역사 논리 또한 완벽할 수 없다.‘역사바로세우기재판이란 한 정권의 역사 논리를 재판에 의해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역사 논리가 사법기관의 재판의 대상이 될 때 특정 정치세력을 위한 편견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 경우 역사 논리는 주관적 흑백논리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정 정치세력을 위한 정치논리가 지배하는 재판이 공명정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특정 정치세력이 정치적 보복을 위하여 재판을 이용할 때 심판 대상에 까만색을 칠하는 흑백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가 전 국민에게 획일적 흑백논리를 강요할 수 있는가? 만약 획일적 흑백논리만 강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 논리가 아니다.

광주사태 당사자들 전체가 국헌문란 세력과 헌법수호 세력으로 양분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5 18재판 법리는 진압군은 국헌문란 집단이요 시민군은 헌법수호 기관이라는 주장에서 맴돌았다. 국군의 임무는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다. 단 한 명의 군인도 국헌을 문란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군 편에서도, 단 한 명의 무장 시민군도 헌법을 수호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왕년의 빨치산들이 무장봉기 배후에 있었으며, 간첩들이 시민군 주변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시민군이 순수하게 헌법기관이었다는 판결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재판의 목적이 진압군 처벌이었을 때에는 먼저 진압의 정당성을 부정해야 하며, 진압의 정당성을 부정하려면 진압을 국헌문란 행위로 해석해야 한다. 시민군의 무장봉기 진압을 국헌문란 행위로 해석할 근거를 위해 시민군은 헌법 수호기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사실에 있어서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 헌법기관일 수도 없었으며, 외지인을 제외하면 주로 중학생들과 청소년들로 구성된 시민군이 헌법기관일 수도 없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사실과 동떨어진 논리가 재판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애초부터 역사논리는 몇몇 법관들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김대중의 거리정치가 광주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국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광주운동권을 원격 조종하여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1980년의 광주사태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윤한봉 등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이 그대로 광주사태 주동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청학련 사건은 전혀 전국적 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싱겁게 끝났었는데 반해 광주사태는 엄청난 규모의 봉기로 폭발하고, 심지어 전라도 여러 지역의 무장봉기로 확산되었던 데는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곧 1974년 봄에는 김대중의 거리정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2008년 여름 광우병 반미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대중이 거리정치판을 만들어 준 것이 있었다. 김대중이 과격한 폭력시위를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르며 거리정치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런 정당화가 대중을 시위 군중으로 결집시켜 주었다. 바로 그런 거리정치 정당화로 김대중이 광주사태의 판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김대중이 520일과 22일에 일명총궐기대회란 명칭으로 전국 규모의 거리정치를 한다니까 왕년의 빨치산 세력이 바로 그 기간에 무장봉기를 일으킬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5 18재판의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 야당총재요, 최대 피해자는 김 대통령 본인이었다. 5 18재판은 한마디로 1980년 봄의 김대중의 거리정치를 정당화시켜 주는 논리로 짜여 있었다. 그 재판으로 김대중은 세계적 거리정치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거리정치로 IMF를 초래하였다. 김영삼이 5 1 8재판으로 김대중을 거리정치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자마자 김대중은 거리정치로 답례하였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개정을 해야만 했다. 그것을 김대중이 거리정치로 막았다. 12월 국회에서 개정법을 통과시켰으나 김대중의 거리정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 끓고 철회해야만 했다.

또 하나의 IMF의 요인은 김대중이 기아자동차 장기파업을 선동한 것이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못해서 외국인의 투자환경이 악화된 데다 기아자동차 장기파업이 겹치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갑자기 자금을 회수하여 IMF 환난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IMF 환난은 김대중의 거리정치의 산물이었으나 그 누명은 꼼짝없이 김영삼이 쓰게 되어 있었다.

만약 후대에 제2의 김영삼이 등장하여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IMF환난 오적(五賊)을 심판한다며 IMF 재판을 연다면 그 재판이 공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김영삼 정부의 잘못도 있었다. 그 정부의 5· 18재판 논리가 상당히 주관적이었듯이 경제논리도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판단에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것인데, 경제에 문외한인 법관이 경제정책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법률 전문가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다. 법률 전문가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듯이 안보전문가도 아니다. 그럼에도 5 18재판 판결문에서 안보전문가가 판단할 몫을 법관이 하였음이 눈에 띈다.

19753월 월남 중부지방에서 일어난 시민군의 무장봉기와 19805월 전라도 중부도시에서 일어난 시민군의 무장봉기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월남에서 시민군의 무장봉기가 일어나자마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월맹군이 남침하였다. 만약 광주와 전라도 여러 지역에서의 무장봉기가 계속 확산되었다면 북한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침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래서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은 519일자의 하와이 호놀룰루 기자회견에서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북한의 어떠한 공중 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 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74)

분명 무장봉기가 장기화되거나 타 지역으로 확산되어서는 아니 될 안보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법원판결 제3장 이른바 5 18 내란 등 사건 부분 중“1. . 위법성 조각사유 등 (2)”둘째 단락은 그런 안보적 판단에 이런 문구로 내란죄 판결을 내렸다: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 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 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 볼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재판 판결은 역사 논리의 완성도 역사 연구의 끝도 아니다. 재판이 역사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5 18사건에 대한 온 국민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이다. 그러기에 해마다 새로운 증언들과 새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자료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사용될 때 그 값어치가 있다. 광주사태 32주년은 그 자료들이 풍족하게 축적된 해이다. 이제 유언비어 혹은 거짓의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자 5 18의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제 지난 30여 년간의 흑백논리 너머에 있는 진실 찾기를 더 이상 뒤로 미루어서는 아니 될 해이다. 광주사태의 주역들과 5 18사건 당사자들과 시대의 증인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에 모두가 힘과 노력을 합하여 우리의 지난 한 시대의 경험으로서의 5 18의 참 이야기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광주사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사건이며, 극과 극의 서로 다른 주장이 팽팽하게 충돌하는 사건이다. 5 18사건에 대한 담론은 이제 양편이 한 치도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으며, 이럴 때에는 주관적인 주장이 앞서기가 쉽다. 그리 먼 과거 사건이 아님에도 이제 이 사건은 국민들이 몹시 혼란을 느끼는 사건이 되었다. 이제라도 5 18사건을 객관화하여 보다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진실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누구나 흑백논리에 굴복하고 거짓이나 허상에 순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18을 보는 관점에 대한 국론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자유로운 토론은 허용되어야 한다. 본서는 한 쪽 주장만이 아니라 양쪽 견해를 들어보며 새로 밝혀진 사실들에 비추어 5 18을 재조명해 보기를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길잡이 도서이다.

에필로그

 

 

 

1980518일 광주사태 발발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영화 <화려한휴가>에서 강진우라는 고등학생으로 등장하는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 사망 유언비어였다. 광주사태 발생 요인들 중에는 이처럼 분명 우발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는 사전에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사건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단 몇 시간 사이에 전라도 38개 무기고를 동시에 접수하여 무기를 탈취한다는 것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518일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에 선동된 시위군중이 파출소들을 파괴한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치더라도 도청 접수 계획 및 도청 점거를 위한 무기탈취 계획 등은 사전에 세워져 있었다.

 

1980년 봄 전국 대학가에서 시위가 있었다는 말은 상당히 과장된 말이다. 5월 중순 들어 시작된 가두시위는 주로 서울 일부 대학과 광주에서만 있었을 뿐이다. 그때 왜 학생들이 시위하였는가? 재학생들에게는 시위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선배임을 내세우는 복적생들이 시키는 대로 마지 못해 따랐을 뿐이다. 복적생들은 재학생들에게 전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시위를 선동하였으며, 재학생들은 시위를 해야 하는 이유도 전혀 모른 채 거리로, 가두시위 장소로 내몰렸다. 가두시위는 <민청협> 소속 복적생들이 있는 학교에서만 있었다.

여기서 복적생들이란 6 3사태 관련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남민전과 교육지표사건 연루자 등으로서 3월 초에 복적된 학생들을 말한다. 198031일 시국사범들의 복적이 발표되자마자 김대중은 장남 김홍일을 시켜서 <민주연합 청년동지회>(약칭, 연청)를 급조하고 복적생들을 자신의 사조직으로 흡수하였다. 이때 복적생들은 <민청협><국민연합><연청> 등 김대중의 전위조직들에 겹치기 가입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었던 이들 운동권은 복적되자마자 각 학교에 복적생협의회를 조직하고 총학생회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복적생협의회의 지시에 고분고분한 인물을 선정하여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도록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해주는 방법으로 학생회 장악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각 대학교 복적생협의회는 복적생 장기표, 조성우, 심재권, 이현배가 그 간부로 있었던 <국민연합> 사무국의 지휘를 받았으며, 사무국 조직국장 장기표는 각 대학교 복적생들이 총학생회를 장악하여 시위를 조직하는 계획과 현황을 계속 김대중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1980년 봄의 시위 배후는 김대중이었다. 그가 대학가 시위를 총지휘하였으며, 동국대와 한신대 등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1980년 광주사태 직전 대학가에서 있었던 사건들은 1960년대 중반의 중국의 문화혁명을 방불케 한다.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지식인 숙청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홍위병이라는 운동권에 의한 지식인 숙청이었다. 그런데 그런 운동권에 의한 비운동권 교수 숙청 작업이 전국 대학교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복적생들로서 김대중의 사조직이 조직되어 있는 대학에서만 비운동권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들이 있었다. 교수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야 했다. 순순하게 따라주지 않으면 어용교수로 몰려 숙청 대상이 되었다.

전남대에서는 정동년이 퇴진 대상을 결정하였다. 어느 교수든 사표 쓸 각오가 아니라면 정동년의 눈 밖에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감히 문교부장관도 할 수 없는 결정을 정동년이 하였다. 학원에서는 교수 퇴진 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진 자였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지식인 숙청 권한을 가진 십대의 홍위병들이 하나의 권력집단이었던 것과 같았다. 대학교에서는 교수 살생부와도 같은 퇴진교수 명단 작성자가 권력자였다. 교수들은 언제 자기에게도 어용 딱지가 붙을지 몰라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어떤 교수에게 어용 딱지가 붙어 퇴진 요구 대상이 되었을 때 총장도 문교부도 경찰도 그 교수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학생이 스승의 사임을 강요할 권한을 가졌을 때 그런 학생과 스승의 관계는 이미 정상적인 사제지간이 아니다. 도대체 정동년의 그런 권한은 어디서 왔는가? 전남대 학생들은 민주적인 절차로, 즉 투표로 그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었다. 정동년이 스스로 그런 권한을 가졌으며 단독으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결코 당시의 정치상황과 무관한 행동이 아니었다.

 

1980년 봄 전국 대학가에서 비운동권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등 똑같은 사건들이 풀빵 찍듯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김대중의 사조직화 되었던 <민청협> 간부들이 전국대학교 복적생협의회를 지휘하고 있었다. 복적생들을 김대중의 사조직화하는 데는 장남 김홍일의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김홍일의 역할에는 한계점이 있었다. 노련한 운동권의 눈에는 김홍일은 후배 운동권일 뿐이었다. 전국 대학가 운동권을 통째로 장악할 수 있는 인물은 김대중의 명함 없는 비서 박현채였다. 빨치산 경력을 갖고 김대중의 비밀 비서가 된 박현채는 운동권에 신화적 존재요, 카리스마가 있는 대선배였다. 1974년 봄의 민청학련 사건도 그가 원격 조종하였듯이, 1980년 봄의 시위도 그가 원격조종하였다. 그는 이번에는 민청협과 각 대학교에 흩어진 그 산하조직 복적생협의회를 최대로 활용하며 원격조종하였다.

실로 1980년 봄 여러 대학교에서 학생회 명의로 수많은 성명서들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명서들은 학생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시위를 원격조종하던 왕년의 빨치산이 작성한 것이었으며, 설사 학생이 작성한 것이 간혹 있더라도 그것은 그의 이론과 문구들을 그대로 베낀 것들이었다. 북한신문들에서는 하나의 논조만 허용될 뿐이다. 이처럼 1980년 봄의 대학가 성명서들에서도 획일적인 논조만 있었으며 그 논조는 왕년의 빨치산 논조였다.

19805월의 학생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생각하는 존재였는가? 아니다. 정치 시위에 관한 한 그들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픽 디자인 시대에 컴퓨터로 백만 대군 영상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다. 그리고 백만 대군이 이리 저리 돌격하게 하는 것도 간단하다. 그러나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백만 대군이 어떤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가? 아니다. 차명대필 성명서 작성자가 어떤 마네킹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작성하였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마네킹이 생각하는 존재인가? 아니다. 19805월의 시위대가 이와 같았다.

일명서울역 회군으로 알려진 515일의 집회 때 10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 10만 명이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의 조직들이 대학가 벽보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오로지 일방적인 선동만 있었다. 찬반 토론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었기에 일시에 학생들을 시위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였다. 1980년 봄에 흑백논리가 대학 캠퍼스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배후조종하던 세력의 목표는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었으나 시위에 동원된 군중에게는 그 목표를 위해 시위를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2008년 여름의 광우병 반미 촛불시위에 무수한 군중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군중이 많이 동원되었다고 해서 그 군중에게 반미 반정부 촛불시위를 해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코뮌주의 혁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사노련(社勞連)은 공산주의 혁명의 수순으로서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고, 선거 없이 정권 교체를 하는 방법으로 반정부 촛불시위를 조직하고이명박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시위에 동원된 군중은 전혀 그런 음모가 있는 줄 모른 채 동원되고 구호를 따라 외쳤다. 정보의 쌍방 교류가 가능하였던 2008년에도 그러하였으니, 19805월에는 유언비어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유역을 개발하려 했으나 어려웠던 이유는 찬반 토론과 국론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좌초되었던 것도 그 한 예이다. 그런데 1980년 봄의 대학가 운동권 문화는 획일주의였다. 상부에서 대자보가 내려오면 그 지령대로 학생들을 시위 현장으로 동원하였다.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유언비어를 받아들이고 휴강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로서 시위구호들을 목청껏 외쳤었던 것이지 결코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외쳤던 것이 아니다.

 

19805월의 시위 구호는최규하 퇴진신현확 퇴진개헌 반대였다. 그리고 그런 시위 구호를 외치는 가두시위를 조직하는 명분은민주화 일정 촉진이었다. 10만 명의 학생들이 모두 정치학 박사들이었으며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보다 한 수 위였기에 대통령 위에 군림하여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불호령하였던 것인가? 아니다. 당시 시위대는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대통령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뭔가를 몰랐기 때문에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구호들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외칠 수 있는 구호가 아니었다.

최규하 퇴진신현확 퇴진구호 다음에개헌 반대가 따라붙었던 이유는 이러했다. 당시 최규하 정부는 4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여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탄생한 과도정부였는데 김대중의 사조직화 되어 있었던 운동권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잔당이므로 개헌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하였었다. 직선제로 개헌할 자격이 없는 유신잔당은 물러나라는 구호가최규하 퇴진신현확 퇴진개헌 반대였다. 신현확 총리에게는 19일까지 내각 총사퇴하라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데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퇴진한 후에 어떻게 민주화 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후임자 선출 없이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퇴진하면 국가는 전복된다. 과도정부가 타도되어 국가가 전복되면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할 주체가 없어지므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불가능해지는 바로 그 순간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붕괴된다. 그러기에 최 대통령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와 민주화 일정 단축 요구는 양립할 수 없었다.“최규하 퇴진신현확 퇴진개헌 반대19805월 초 중순의 시위 구호들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외칠 수 있는 구호가 아니었다.

 

19805월의 광주사태는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크게 충돌한 사건이다. 북한에서는 북한이 비민주적 국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북한의 정치 논리에서 북한은 처음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한의 국호가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며 영어 공식 국가명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 그러면 무엇이 대한민국과 미국과 서구 국가들의자유민주주의와 북한식인민민주주의사이의 차이점인가? 그 두드러진 차이점은 정권 세습이 있고 없고의 차이점이다. 북한에서는 옛날 왕조 시대처럼 정권이 세습된다. 김정일이 사망한 후 20대의 젊은 청년 김정은이 김정일 정권의 후계자요, 북한 정권의 계승자이다.

광복 이래 한반도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다른 체제의 대결이 지속되어 왔다. 누가 빨치산이 되었는가? 박현채처럼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투사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이 있었다. 어째서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었으며 통혁당 간첩단 사건이 있었는가? 남한에서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운동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운동권이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통일운동가라고 부른다.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으로의 전향을 거부했던 빨치산 류락진을 통일운동가라고 부르는 운동권이 있다.

무엇이 1974년 봄의 민청학련 사건이었던가? 그것은 남한에서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가 실현되게 하려고 투쟁하던 박현채와 인혁당이 배후조종한 사건이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 상당수가 1976년 이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에 흡수되었다. 남민전은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투쟁민주화투쟁이라고 불렀다.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하며 북한 지령에 따라 움직이던 남민전이 왜 민주화투쟁을 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남한에서도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1978<민청협>으로 개명한 <민청학련>과 동맹을 맺었다. 어째서 김영삼 씨 편에는 단 한 명의 민청협 회원도 없었고, 민청협 전체가 김대중의 사조직화되었는가? 만약 민청협이 민주화를 위한 조직이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민청협이 양 김 씨 진영에 반반씩 고루 분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영삼 씨 편에는 단 한 명의 민청협 회원도 없었다. 김대중에게 김홍일이란 아들이 있었듯이, 김영삼에게는 김현철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남철은 나무에 붙지 못하고 쇠에만 붙듯이, 민청협은 김대중과 김홍일에게만 찰싹 붙어 있었다. 김영삼 씨는 신민당이란 정당도 가지고 있었으며, 튼튼히 다져진 지역구 조직들도 있어서 정치 지망생들을 끌어들이기에 훨씬 유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봄에 단 하나의 복적생 조직도 김영삼에게 붙지 않았다. 양 김씨 사이에 무엇이 그 차이점이었던가? 김대중에게는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라는 비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47일에 김대중이 신민당과 결별하고 국민연합으로 복귀하였을 때 그것을 납득할 수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국민연합은 문익환 목사 등 몇 사람을 빼고 나면 이름만 존재하는 유령단체에 불과했고 속빈 강정이었다. 그러나 복귀 즉시 김대중은 민청협 회원들을 모두 국민연합에 가입시켰으며, 이로써 국민연합의 주도권을 김대중이 장악하게 되고,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밀려나고 국민연합마저 김대중의 사조직화되었다. <민청협> 회원들을 국민연합에 가입시킴과 더불어 김대중은 그들로 하여금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개입하게 하여 전국 80여 개 대학교들 중 과반이 넘는 대학교 총학생회를 장악하였다.

1980년 봄의 시위에서 김영삼 씨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은 학생 시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그에게는 학생 시위를 주도할 수 있는 아무런 조직도 없었다. 1980년 봄의 시위는 양 김씨 합작품이 아니라 김대중의 단독 작품이었다. 김대중은 신민당 가입 대신에 민청협과 손잡는 거리정치를 선택했던 것이다. 학생 시위는 김영삼 씨의 작품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작품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김대중의 사조직의 작품이었다.

<민청협>에 대해서는 막강하면서도 유명무실하였다는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었다. 민청협은 간부들끼리만 모였을 때는 결코 거대 조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국 대학가를 시위의 도가니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시위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성냥불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면 그 말도 사실이다. 모래사장이나 호수 위의 성냥불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솜과 기름이 있는 곳에서는 성냥불은 집 한 채를 순식간에 태울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한다. 시위에 관한 한 민청협의 성냥불에 대학교는 커다란 솜뭉치였다. 기름은 김대중이 얼마든지 지원해 주었다. 이처럼 솜뭉치도 기름도 있었기에 1980년 봄의 민청협의 시위 조직력 및 선동력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 26 사태로 인한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김대중과 <민청협>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197911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날의 시위 선동은 전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때 그들에게는 대학가라는 솜뭉치가 없었다. 민청협 회원들이 그때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기에 대학가의 시위를 조직할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이듬해 1980229일 최규하 대통령이 김대중 등 시국사범 687명을 사면복권시켰을 때 저들에게 기회가 왔다. 400여 명의 민청협 회원들이 전국 여러 대학교에 복적되어, 대학가란 솜뭉치가 무진장 있고 김대중도 훨씬 더 많은 연료를 시위 조직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던 때에, 다시금 1980520일을 겨냥하여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했던 것이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또 한 번 불발탄이 되었으나, 광주 지역에서는 그대로 솜뭉치에 점화된 사건이 바로 광주사태였다.

 

김대중의 사조직들의 집권 전략은 제24 19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면 그 책임을 지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김대중이 얼른 과도내각을 임명하여 집권하게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거리정치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는 민중봉기 선동을 정치로서 이해하였다. 김대중이 김영삼과 결별한 이유는 김영삼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청협> 조직망을 이용한 민중봉기가 그의 집권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와 박현채와 <민청협> 간부들은 인위적으로 4 19와 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들기 위한 모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4 19와 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는가? 민청협 회원들 중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연루자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아주 과격한 시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 김대중 홀로 <민청협>을 동지로 삼았었던 것은 아니다. 민청협이 전국 주요 대학가를 장악하고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었을 때 왕년의 빨치산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여러 명의 왕년의 빨치산들에게 있어 그들의 빨치산 전투는 20여 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빨치산의 투쟁 목표는 대한민국 정부 전복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의 국가 혼란기가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빨리 움직였으며, 그래서 민청협 조직에 밀착하였고 필요한 지원을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민주화가 아니라 반국가 활동이었다.

박현채는 김대중의 성명서 담당 비서였으되 김대중의 졸개도, 직업적 비서도 아니었다. 빨치산 소년병 시절 그의 큰 주인은 김일성이었으며, 여전히 그의 위대한 지도자는 김일성 수령이었다. 경제학 지식에 관한 한 김대중은 자기에게 배우는 학생이었다. 김대중의 경제 스승은 김대중의 졸개가 아니었다. 1992년 김대중이 더 이상 자신의민족경제론을 신봉하지 않자 단호히 그와의 관계를 끊었던 것도 그가 김대중의 졸개도, 그의 비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2년 김대중만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운동권 후배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1980년 주장했던 이론이 전부 엉터리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무엇이 박현채가 1971년 김대중의 대선홍보용으로 써 준 책대중경제론의 내용이었던가? 그것은 박정희 후보의조국 근대화에 대한 정면 반대였다. 박현채를 추종하는 운동권이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결사적인 반대를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는 한국이 서구의 실패한 경제 모델을 따라 근대화하고 산업화하고 수출하면 1980년대에 한국 경제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 후 10년이 경과하였을 때 붕괴한 쪽은 서구 경제가 아니라 동구 공산권 경제였으며, 한국경제는 박현채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급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사이에서 박현채의 인기와 카리스마는 절대적이었다. 1980년 봄 <민청협>이 주도한 대학가 시위는 1974년 봄 <민청학련> 사건의 부활이었다. 박현채는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반대하였으며, 박현채를 따르던 운동권은 박현채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었기에 기필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던 박정희 대통령과 그것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려던 민청학련간의 한판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단 한 번도유신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지만 언론이유신헌법이라 불러 그 명칭이 굳어진 유신헌법의 취지는 1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 기간 동안에 박정희 대통령이 한 번 더 출마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대통령 출마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선례가 있었다. 미국이 대공황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뉴딜 정책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일관성 있는 장기적 전략이 필요한 정책이었으므로 1930년대에 대통령이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의 경제 건국기였던 그 시절에 미국 국민은 대통령 출마 횟수를 논의하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의 민주주의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200년의 세월을 두고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므로 경제 건국기에 바로 그 선례를 따른 것이 유신헌법이었다.

 

<민청협>에는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없었다. 만약 그들에게 어떤 이념이 있었다면 그것은 박현채의 이념이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경제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았다. 단지 박현채의 책을 읽으며 그의 글들을 널리 퍼뜨렸을 뿐이다. 박현채의 경제이론을 신봉하던 김대중과 운동권이 중화학공업 육성이 완성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며, 완성 찰나에 그것을 거세게 막으려던 시도가 광주사태로 폭발하였다. 지금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중화학공업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방해가 있었으며, 김대중은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이래 줄곧 박정희의 산업화와 조국근대화를 반대하고 방해하였다. 그 무렵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뒤집고 뒤엎어버리기 위해 자기를 대통령으로 밀어야 한다고 유세했었다.

이처럼 잘못된 경제정책을 관철시킬 목적으로 대권에 집착하였던 김대중은 자신의 집권을 민주화와 동일시하였다. 그런데 그의 대권 도전은 거짓말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의 거짓말은 민주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였다.

만약 클린턴이나 오바마가 어느 학자에게, 더구나 적국을 위해 활동하던 학자에게, 책 집필을 부탁하여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여 대선홍보용으로 사용하였더라면 미국 여론이 그런 부정선거운동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 대선 후보가 남에게 석사학위 논문 써 달라고 하여 학위받고, 남에게 책 써 달라고 하여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여도 되는 나라인가? 그런 부정선거 운동하면서도 민주화의 기수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1971년 김대중은 박현채가 쓴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100을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여 경제전문가라는 인정을 받았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에 정면 반대하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 박정희 후보에 근접하는 표를 얻었다. 득표수로 그는 박정희에 맞서는 인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남의 책, 남의 이론을 자기 책, 자기 이론이라고 사기치는 방법으로 그는 인기를 얻고 정계 거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왕년의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 김대중의 그런 부정선거 운동이 계속 허용되었더라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서구에서 200년 걸리던 중화학공업을 단 10년 만에 육성시킬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1972년에 막 시작되었던 중화학공업 육성 시설들을 김대중은 전부 파괴하였을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박현채의 이론이었으며, 김대중은 광주사태 직전이었던 19804월의 가톨릭농민회 연설에서도 자기가 집권하면 중화학공업 시설들을 당장 파괴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가톨릭농민회 시민군의 승리로 그가 광주사태 때 집권했더라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고, 한국의 산업화는 영영 중단되고 영세 농업국으로 복귀하였을 것이다.

1980년의 김대중과 1990년 이후의 김대중의 경제관은 다르다. 전두환 정권의 지원으로 1980년대에 5년간 미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온 김대중뿐만 아니라 운동권의 경제관이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박현채는 박정희의 경제 모델로 인하여 한국경제는 1980년대에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운동권은 모두 그 이론을 신봉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한국경제가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박현채는 서구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하였는데, 몰락한 쪽은 서방세계가 아니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박정희의 경제이론이 옳았으며, 조정래의 소설태백산맥의 주인공 조원제였던 왕년의 소년병 빨치산 박현채의 이론이 틀렸던 것이다.

2012년 봄에도 한미 FTA는 국론을 양분시키는 쟁점이었다. 이처럼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도 그 당시에는 국론을 양분시키는 쟁점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5 강국이기에 외화를 벌어들인다. 그러나 박현채의 경제이론이 운동권 이념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김대중이 자기가 집권하면 중화학공업 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연설하여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72년 시작된 중화학공업 육성은 10년 넘게 걸리는 국가사업이었으므로 1980년의 시점에서는 아직 국민들이 그 열매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건국 후 130여년이 지났던 193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은 경제 건국기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경제정책이 필요했던 그 시절에는 대통령 임기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1970년대의 한국은 경제 건국기를 거쳐가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김대중이 남의 책 명의도용 등의 부정선거 운동으로 계속 인기를 모아 차기 대통령이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반만년 역사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회를 붙잡아 그 사업을 완성할 것인가? 만약 대통령 임기가 5년뿐이라면 10년 넘게 걸리는 사업을 도저히 완성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박정희가 지은 고부가가치 산업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이 김대중의 목표였으며,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러면 김대중과 운동권이 왜 그때는 수출산업 육성을 그토록 반대하였는가? 운동권은 그때 서구와 교역을 안 하는 북한식 경제모델이 최고라고 믿고 있었다. 후진국은 수출을 할수록 선진국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예속된다는 것이 그 당시 운동권의 경제논리였다. 지금은 한국경제가 수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두 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국론을 양분하는 이슈였다. 지금 한미 FTA가 양약이 될지 독이 될지 그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에 한미 FTA 체결 문제를 놓고 양 진영이 수년째 싸우고 있다. 바로 그런 것이 1970년대의 운동권의 입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청사진을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운동권은 그 청사진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민청학련이 생긴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은 주로 광주운동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어느 국가에서나 농업국이 산업국으로 변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렵다. 많은 후진국들이 한국처럼 산업국으로 되면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중남미와 동남아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후진국들은 그렇게 못하는가? 첫째로, 어느 나라에나 산업화에 대한 강한 저항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농업국은 사회가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지주 집단은 산업화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은 산업화에 대한 강한 저항운동이었으며, 그 저항운동이 무력봉기로 폭발한 것이 1980년의 광주사태였다. 전라도에 있는 농민단체들을 가톨릭농민회라고 불렀는데, 김대중과 천주교 신부들이 산업화 때문에 전라도 농민들이 소외된다는 논리로 봉기를 선동하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선한 신부로 등장하는 김성룡 신부는 그런 논리로 광주사태를 부추겼다. 청소년 시민군을 제외한 시민군 대부분은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전라도 각 지역에서 들어온 농민운동 세력이었다.

대학생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가? 시민군 중에 대학생의 수는 극히 적었으며 그래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단 한 명의 대학생 시민군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중고등학생들과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가? 그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동원되었을 뿐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어서 전남 민청협과 손잡고 무기탈취를 사전에 준비한 세력은 농민운동 세력이었다. , 한국에서도 산업화에 강하게 저항하는 농민운동 세력의 논리가 그 시절에 있었으며 그들이 무장봉기 장소로 광주를 선택하였다. 광주사태는 광주시민들이 벌인 잔치가 아니라 외지인들이 광주에 침투해 들어와 벌이고 시민군 차량으로 광주시민들을 금남로로 수송해 벌인 잔치였다. 광주에 윤상원 등 코뮌주의 혁명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 말 동학란과 파리코뮌에서 혁명 모델을 찾으려고 했으며, 그래서 파리코뮌을 모형으로 한 제2의 동학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광주 코뮌주의 혁명가들의 무장봉기 음모 동반자는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운동 세력이었다.

이렇듯 박정희를 투쟁 대상으로 하는 운동권의 싸움은 경제관에 대한 싸움이었다. 운동권은 그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고 그랬을 것이다. 1970년대에 경제가 계속 좋아지고 있었으나 운동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박현채의 경제이론에 세뇌되어 있었던 그들의 눈에는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박정희와 싸운 것이었는데, 민주화운동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그때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도, 그런 개념도 없었다.‘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이하, 남민전)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민주화투쟁이었다.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그들이 인민이라고 부르는 남한 국민들을 세뇌시켜야 했는데, 그 방법이 경제논리였다. 그래서 운동권 양성 학습교재는 늘 북한경제체제가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의민족경제론은 운동권의 필수 학습교재였다. 이 책은 박정희의 수출산업 육성에 정면 반대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책을 읽은 운동권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심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북한이 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는가? 박현채가민족경제론에서 제시하는 경제정책과 비슷한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민족경제론은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었으며, 만약 한국이 그 이론을 따랐더라면 산업화의 꽃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북한처럼 국제경쟁력 없는 나라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의 민청학련은 박현채의민족경제론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겼으며, 박현채식 사회주의 경제의 실현을 위해서 그들은 혁명을 생각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박현채의 경제이론에 세뇌당한 민청학련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도 일차적으로 경제정책에 대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말하는 민주는민족민주였다. 광주사태의 코드도민족민주였다. 5 18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이제 5 18 성명서들을 읽어보라. 5 18 성명서 작성자들이 말하는 민주는자유민주가 아니라민족민주였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가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왕년의 빨치산들의 상투어 민족민주는 대남 공작용어였다. 도대체 무엇이 민족민주인가? 대남공작용어에서 민족민주는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던 58일 이후의 시위 명칭은 바로민족민주화 대성회였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에 일부는 남민전에 가입하였으며, 남민전 하부조직 민학련이 광주사태 주동세력이었다. 어째서 광주사태 주동세력이었던 민학련 중에서 주사파가 나왔는가?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민주는 민족민주요, 인민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사상가에게는 김일성 정권이 김정일과 김정은에게 세습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사파에게는 수령 세습은 당연하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의 차이점이며,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광주사태에는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이 모르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무장시민군이 광주에서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4 19 20주년을 맞이하여 뭔가 일을 꾸미자고 하였으며, 5월 중하순에 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를 타도하고 박정희가 성취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5 16 화형식도 거행하였으며 20일을 겨냥한 총궐기대회 준비가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은 무장봉기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24 19, 2의 부마사태를 무장반란으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광주에서 갑자기 무장시민군이 등장하였을까? 이것이 당시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이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광주에서 무장시민군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에게도 수수께끼였다. 복적생들이 시키는 대로 가두시위를 조직하기는 했지만 민간인 무장세력이 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511일에 519일로 예정되어 있던 가톨릭농민회의 무장반란 계획을 비밀 회의록에 기록하면서도 그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다. 한상석 등은 전혀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에 그런 무장봉기 계획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받아적었다. 무장시민군이 등장하자 학생들은 기겁을 하여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시민군에 끌려가 시민군 부역을 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멀리 도망갔다. 이처럼 당시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에게조차 무장시민군의 등장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더불어 민중봉기를 준비하면서도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과 <전남 민청협> 사이에 약간의 동상이몽이 있었다. 520일로 총궐기대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은 무모한 무장봉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한봉의 <전남 민청협>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국적 민중봉기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데는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 책임이 있었다. 그들이 시위의 배후였다. 그러나 그들이 무장봉기의 배후는 아니었다. 김대중의 총지휘 하에 전국 규모의 가두시위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 그 틈을 타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지, <민청협>의 목표가 무장봉기였던 것은 아니다. 남민전의 오랜 숙원이 무장봉기였으며, 남민전과 밀착되어 있었던 <전남 민청협>은 윤한봉의 통솔 하에 비밀리에 무장봉기 준비를 착착 해나가고 있었다.

군대 해산을 권유하며, 군인들도 가두시위에 합세할 것을 권유하는 성명서를 서울의 <민청협><전남 민청협>516일자에 동시에 작성하였으며, 북한 평양방송도 그 즈음 같은 내용의 방송을 하였다. 김대중도 <민청협>이 작성한 성명서 초안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로 서울의 <민청협>도 과격한 시위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조차 그들의 동지 윤한봉이 전남 지역에서 무장봉기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였던 듯하다. 윤한봉이 구술녹취문으로 증언을 남겼으므로 당시 무기고 및 도청 접수가 어떻게 사전 계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재구성이 가능하나 그가 누구와 그런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런 수수께끼는 광주운동권의 역사적 뿌리를 살펴보지 않으면 풀 수 없다. 광주운동권도 <민청협> 회원들이었지만 여타의 민청협 회원들과 크게 구별되는 특질이 있었다. 광주운동권에는 1971년의 민청학련 사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광주운동권의 뿌리는 1960년대 후반의광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바, 광랑은 통혁당이란 간첩단 조직이 침투하여 장악한 써클이었다. 북한의 지령을 직접 받았던 통혁당의 목표는 무장봉기에 의한 국가전복이요, 무장봉기에 의한 공산혁명이었다.

통혁당이 검거되었을 때 그들이 광랑에 뿌려둔 사상의 씨마저 검거되었던 것은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광랑 회원들의 세계관을 형성하였던 것은 통혁당의 이념이었다. 청소년 시절 그들의 심성에 무장봉기의 목표가 주어졌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무장봉기의 주동자가 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었다. 그들이 운동권 선배들로부터 들은 역사는 대한민국은 미제국주의자들이 세운 괴뢰정부요, 그래서 무장봉기로 전복시켜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했다.

그들은 청소년 시절 광랑에서 미래의 운동권으로 양성되었다. 그들이 여러 해 후 전남대학교에 진학하였을 때 이번에는 인혁당 재건위가 장악한 조직의 포섭 대상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 바로 1974년 봄의민청학련사건이었다. 통혁당 시절부터 운동권은때가 온다는 역사 논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7910 26 대통령 시해사건 때 그들의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민중봉기와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그들이 바로 5 18사건의 주역, 즉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되었다. 이렇듯 광주운동권의 요람은 광랑이었다.

 

여기까지는 광주운동권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광주사태에는 광주운동권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5월의 민중봉기는 윤한봉이 민청협과 더불어 총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광주사태가 시작되자 윤한봉도 모르는 일이 전개되었다. 광주사태가 시작되자 운동권이 선봉에 섰는가? 아니다. 시민군 지휘자들은 광주운동권조차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이것이 광주사태의 수수께끼이다.

광주운동권은 중학생 시절부터 호남의 모든 운동권을 보아 왔으며. 만나서 동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521일 광주에서 운동권 동지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그들이 누군지조차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누가 수백 명의 시민군을 통솔할 수 있었는가? 윤한봉이었는가? 아니다. 오랫동안 무장봉기 준비를 해온 윤한봉으로서도 그런 담력은 없었다. 무장시민군이 등장하는 것을 본 순간 그는때가 왔다!며 환호하였던 것이 아니라큰일 났다!며 여동생의 보호를 받으며 여동생 애인인 척 변장하고 황급히 광주를 빠져나와 멀리멀리 도망갔다. 호남의 모든 운동권을 아는 그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들이 무슨 이유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인지는 피신하는 윤한봉에게 큰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수수께끼이다.

광주운동권도 5 18 재판 법관들도 모르는 무장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정체 미상의 무장세력을 헌법수호기관으로 가정하는 법리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모르는 사실은 모르는 사실이며, 모르는 사실은 사법적 판결의 영역일 수 없다. 진실 규명을 위해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영역이 있다. 윤한봉도 이 수수께끼 연구의 몫을 역사 연구가들에게 남겼다. 누구보다도 5 18기념재단을 아끼는 그에게 5 18의 역사 기록은 중요하므로 구술녹취문에 많은 비밀들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그가 사망 1년 전 남긴 이 증언들은 5 18재판 법리를 송두리째 뒤집는 내용들이다. 무장봉기는 자신이 사전 준비한 것이었다는 그의 증언 한 마디가 5 18재판 판결논리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폭로한다.

시민군 중에 운동권이 없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사상 무장이 잘 되어 있던 운동권의 대부분은 총을 들고 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총을 받지도 않고 도망갔다. 도망간 운동권과는 대조적으로 정말로 국군을 향해 총을 쏘았던 용감한 시민군에게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 5 18시민군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시민군들 한 명 한 명을 우리는 그들의 증언록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유언비어에 의해 결집이 유지되던 무장조직이었다. 여기저기 총을 쏘고 다니던 시민군은 대부분은 아무런 목표 없이 시민군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들은 것은 유언비어와 시민군 구호뿐이었다.

유언비어가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장봉기는 결코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유언비어가 쓰나미를 몰고 왔으되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어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윤상원과 김종배는 정말로 닷새만 버티면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승리할 줄로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전국은커녕 서울에서조차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시민군과 반군은 동의어처럼 되어 있다. 2011년 한국 언론들은 리비아 반군을 시민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런 호칭 논리대로라면 5 18시민군은 반군이었다. 정말 반군이었는가? 그 무장단체를 시민군이라 호칭하든 반군이라 호칭하든 간에, 어떻게 갑자기 시민군이 등장하였으며 시민군이란 호칭은 어디서 왔는가? 광주시민이 시민군을 창군하자고 의논한 일이 있었는가? 없었다. 21일 오전부터 전라도 38개 무기고의 무기탈취를 주도한 자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주로 외지인들이었다. 20일에 광주사태를 생중계하던 북한방송에서 봉기군이란 용어를 쓰자 정말로 21일 시민군이 등장하였다. 시민군은 오합지졸이었는가? 아니다. 시민군 중에는 결코 오합지졸이 아닌 병력이 있었다.

521일 오전 8시에 등장한 첫 시민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휘차량 등 지프 14대와 무기들을 탈취하며 20사단 병력들에 부상을 입혔다. 기습당한 20사 인솔대는 전부 도망갔다. 60여 대의 차량으로 이어진 1개 전투사단 차량들을 불과 50명의 인원으로 공격한 최초의 시민군은 결코 오합지졸들이 아니었다.

왜 광주사태에 즈음하여 간첩 손성모가 스님으로 위장하고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왕년의 빨치산들이 광주로 모여들어 활동하고 있었는가? 김대중이 훗날 2001년 북한으로 송환하여 준 바로 그 간첩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가 기거하던 증심사 스님들이 총동원되어 광주사태를 선동하고 있었다. 손성모는 그 이름이 공개된 광주사태 공작 간첩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북한이 광주에 침투시킨 간첩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광주운동권이 한편으로는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성명서 문서들을 작성하여 학생회 등의 명의로 발표되게 하였다. 그러면 그런 5 18기록물들이 밝히는 이념은 어떤 이념이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이념이었는가? 아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명의의 58일자 성명서는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배격한다는 뜻을민족민주화 성회라는 명칭으로 천명하였다. 이 성명서 전문에해방구라는 의미의 문구해방을 맞는 민족의 광장이 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해방구였는가? 아니다. 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위한 해방구였다.

어째서 광주사태에서민족민주해방구가 짝을 이루는가? 그것은 북한과 운동권이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결속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민족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의도로, 즉 한미동맹을 해체시키려는 의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남성명서들에서는 이런 문장들에서민족민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오늘의 첨예한 정세로 보나 민족자주통일 운동을 더욱 힘 있게 벌여야 할 시대적 요구로 보나 반미 반전 운동은 한국 민족민주세력이 들고나가야 할 당면과제이다

민족민주세력들은 반미 반전 투쟁을 중단 없이 힘차게 벌여 자주통일시대에 사는 자기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민족민주세력을 자처하는 북한과 운동권이 이런 논리로 한미동맹을 해체하려고 했을 때, 그 목적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있는가? 아니다. 그 정반대가 사실이다.

1975430일 자유월남이 패망하고 월남이 공산화되자 남한도 같은 전술로 적화통일 시키려고 했던 민족민주 운동의 지도부가 남민전이었으며, 남민전은 자체 강령에 제시되어 있는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이 이루어지기까지 비공개 조직으로 유지하고, 민투는 일정 시기에 반합법, 반공개 조직으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윤상원이 525일 밤에 무장봉기파를 이끌고 임시정부 성격의 <민투>를 구성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민전은 남조선을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 북한에 종속하는 정부를 수립할 목표를 세우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라는 그런 종북정부를민족적 민주정부라고 불렀다. 그들의 논리에서는 북한정권에 종속하는 것이 민주였다.

남민전은 빨치산 세대 운동권이 조직하였으나 광주에 거점을 둔 산하단체 민학련은 신세대 운동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코뮌주의 혁명가들의 통솔을 받고 있었다. 광주 코뮌주의 혁명론이 민족민주 혁명론이었으며, 무장봉기로서의 광주사태는 민족민주 혁명론의 실현을 위해 준비된 사건이었다. 민족민주 혁명론의 출발점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종북 이념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혹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 이념이었다.

 

지난 19대 총선 때 벌어진 이석기 사건은 민족민주 운동권이 정계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으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광주사태 이후 모두 간첩단 사건 및 반국가 이적단체들에 대한 재판은 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이나 민족민주 운동권 진영에 대한 재판들이었다. 그런데 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이나 민족민주 운동권 진영에 대한 재판에서 상반된 잣대가 적용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5 18 재판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재판들에서는 민족민주 운동권은 북한의 조종을 받는 단체, 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은 반국가 단체라는 판결을 내렸었다. 그런데 유독 5 18재판에서만 그 법리가 180도 뒤집혀 민족민주 운동권과 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이 헌정질서 수호세력으로 간주된다.

실로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코뮌주의 혁명가들과 민족민주 운동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는 줄곧 있어왔다. 단지 그런 시도들이 무장봉기로 격상된 것이 광주사태였을 뿐이다. 코뮌주의 혁명가들과 민족민주 운동권에 유죄 판결을 내리는 모든 재판들에서 그 형을 가볍게 내리는 이유는 그들의 활동이 무장봉기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을 참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활동이 무장봉기로 격상되었던 5 18 사건에 대한 재판들에서는 그들의 무장봉기는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지극히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어떻게 그런 법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만약 코뮌주의 혁명가들과 민족민주 운동권에 대한 다른 모든 재판들에서 반국가단체들로서 판단한 그 판단이 옳다면 그런 반국가, 반체제 이념을 위한 무장봉기가 헌정질서 수호행위였다는 가정은 잘못된 가정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런 잘못된 가정에 의거한 5 18재판 법리는 결코 타당한 법리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식의 오류가 분명한 법리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이제라도 공론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광주사태에 대한 김대중의 주장은 무조건 옳았는가?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가? 박현채의 책을 자기 이름으로 내어 대선후보 자리를 굳히고 표를 긁어모은 것은 이만저만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주장은 얼마만큼 옳고 얼마만큼 거짓말인가? 그런 선동적인 연설로 김대중은 인기를 끌고 많은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윤한봉이 누누이 증언하고 기록하였듯이, 김대중은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래서 5 18의 바른 역사기록이 5 18측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어느 광주인이 말했듯이, 진정한 광주인의 명예는 유언비어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진실 편에 서는 것이다. 진정으로 광주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광주의 명예를 위하는 광주인은 영화 <화려한 휴가>나 영화 <26>의 거짓과 허구와 허위 날조 및 그 영화가 조장하는 테러행위 편에 서지 않는다. 그런 엉터리 내용과 우리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유언비어와 허황된 줄거리로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할 때 도덕과 윤리는 실종된다. 도덕과 윤리의 실종 그것이 거짓말의 열매이다. 그렇다면 진실과 거짓 중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본서의 집필은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이었으며, 많은 진실을 밝혀내었으며, 다른 5 18연구가들의 보다 깊은 연구를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될 것이다. 본서가 광주사태의 모든 수수께끼들을 완벽하게 푼 것은 아니며, 역사 연구는 지속되어야 하고 역사 이론은 계속 발전하여야 한다. 비록 본서가 역사로서의 5 18의 최종 완성품은 아니라 할지라도 진실 탐구를 위한 하나의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의의는 있을 것이다. 사실 시간이 아주 많이 드는 이런 집필에 착수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다. 만일 광주사태 진실 규명을 위한 선각자들의 외침이 없었더라면 이 책의 집필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광주사태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의 한 개 선상에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5 18 사건은 1980518일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맥락에서 진전된 사건이다.

집필 동기는 사단법인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사무총장 김효선님과의 대화였다. 처음 김효선님이 집필을 권하셨을 때는 짧은 글에 잠깐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가설을 수정해야 하는 새 자료들이 계속 발굴되었다. 남민전 조직들이 광주사태 배후였다는 조희연의 기록을 찾았을 때 연구는 1970년대로 확대되어야 했고, 광주운동권의 뿌리는 1960년대의 광랑(光郞)이었다는 윤한봉 등 여러 광주운동권의 증언들을 접하였을 때 다시 그 연구는 1960년대로 확대되었다. 광주사태 당시 활동하였던 간첩 손성모의 행적을 살필 때에는 북한 자료들로 연구범위가 확대되었으며, 코뮌주의 혁명가들에 대한 판례에 대해서는 수십 년간의 판례와 법리로까지 연구가 확대되었다. 만약 그때 전 육사 교수이시며 현 한미애국단체연합 회장이신 정창인 박사님의 애국심에 대한 감화가 없었더라면 집필 마무리와 탈고는 어려웠을 것이다.

1천 매가 넘는 본서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으로 읽어주시고 도움말을 주신 분은 정창인 박사님이셨다. 필자의 졸고가 출판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비봉출판사를 찾으신 분도 정 박사님이었다. 집필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출판 결정 과정에 큰 역할을 하여 주신 정창인 박사님과 김효선 사무총장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도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님의 용단이 있었기에 본서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 필자의 졸고로 좋은 책을 만들어 주신 박기봉 사장님과 비봉출판사 편집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본서 집필을 성원해 주셨던 분들과 본서 출판을 기다린 독자들에게도 뜨거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사실 본서의 집필에는 여러 독자들의 자문 도움이 있었으며, 그 중 실명을 공개할 수 있는 분이 광주사태 당시 전남매일 기자로서 군복을 입고 시민군에 대항하여 싸우셨던 김동문 기자님이시다. 신문사 기자가 군복을 입고 시민군에 대항한 것은 실로 한 편의 영화 같은 사건이었다. 만약 그때 해남과 진도와 목포 등 전라도 서남부 13개 지역 시민군이 광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한국은 19754월의 월남 꼴이 될 뻔했으며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실로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그때 그는 순간적인 기지와 지혜로 나주 예비군 대대를 사수함으로써 나라를 구하였다.

시민군의 무장 차량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고 나주는 광주로 향하는 전초 기지가 되었지만 광주 향토사단은 무대책이었다. 이때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김동문 기자가 시민군이 나주마저 함락하는 것을 막아내기로 한 것이 광주사태의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나주성을 지키려면 먼저 나주 예비군 대대를 지켜야 했는데, 예비군 대대장과 무전병과 김 기자 등 몇 명 외에는 군인도 경찰도 없는 나주대대에서 가장 큰 악조건은 식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민군이 나주를 함락하려고 몰려오고 있을 때 김 기자는 자신도 군복을 입고 한편으로 나주대대에 진압군 300여 명이 공수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읍민들께 알린다. 폭도들의 유언비어에 속아서는 안 된다. 지금 계엄군은 체포한 17명의 무장폭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무장 시위대에 알린다. 오후 3시까지 무기를 반납하고 자진 귀향하라! 3시 이후부터 저항하는 자는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등의 방송을 하였다.

김 기자의 역정보 흘리기 및 방송 전략에 말려든 시민군 지도자들은 정말로 나주대대에 진압군 300여 명이 있다고 여기고 갑자기 작전을 변경하여 송정리를 경유하여 광주로 진격하려고 하였던 것이 시민군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나주읍을 포기하고 송정리로 우회하여 광주로 진격하려던 전남 서남부 시민군은 송정리 큰다리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내 또다시 몇 시간 허비하는 동안 송정리 도로는 철저히 봉쇄되었다. 그 결과 이미 광주로 들어가 있던 무장봉기 세력이 521일 도청을 접수하여 해방구를 설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 시민군 증원이 극도로 제한된 해방구는 고립상태가 되어 무장봉기 확산의 다음 단계로 연결되지 못했다.

무장봉기파들은 결코 광주에서의 고립을 자초하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의 계획은 먼저 나주와 영암과 목포와 함평과 해남과 진도 등 전라도 1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킨 다음,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킴과 동시에 서울로 진격하여 무장봉기를 수도 서울로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 광주를 타 지역으로 연결하는 일차 거점이 나주였기에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함과 동시에 나주를 함락시키려 하였으며, 국민연합 나주지부 등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있는 나주 장악을 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나주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가 피탈되던 그날 밤 9시에 김동문 기자에게 걸려온 한 통의 협박 전화가 돌발상황을 일으켰다. “거기 유신 언론인 집이지? 방문할 테니 기다려!하는 험악한 목소리의 장년의 협박전화가 쩌렁쩌렁 울렸는데, 그것은 무장시민군 혹은 무장괴한이 건 전화였다. 빨리 피해야 하는데 경찰이 후퇴한 나주에서 피할 곳은 예비군대대밖에 없었다. 그는 금방 죽일 듯한 무장시민군의 협박이 무서워 예비군 대대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예비군 대대에서는 그는 역전의 파월장병 용사였다. 대대장 정 소령은 역전의 용사를 상관처럼 모셨으며, 실전 경험이 있는 김 기자가 자연스럽게 예비군 대대 사수를 위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월남전 경험이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으며, 그가 들려주는 월남전 참전 경험담이 대원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나주로 몰려드는 시민군과의 전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방법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기 싸움에서는 역전의 용사가 오합지졸을 누른다. 항복을 권유하는 역전의 용사의 우렁찬 방송에 시민군 선발대가 총을 버리고 항복하였다. 나주를 함락시키려던 시민군 선발대의 항복 소식에 시민군 장수는 그가 보고받은 첩보, 즉 나주 예비군대대에 계엄군이 공수되었다는 첩보가 사실인 줄로 여기게 되었다. 북한이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지원하면서 노린 것은 그 무장봉기가 진압 불가능한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민군 작전 결정권자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민군 작전이 갑자기 변경되었다. 구멍이 뻥 뚫려 있고, 사실상 성문 빗장이 활짝 열려있는 나주 함락을 포기하고 계엄군이 도로를 철저하게 차단한 송정리와 화순 쪽에서 광주 외곽 거점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 시민군측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계엄군은 상무대 인근 송정리 비행장을 호락호락 시민군에게 넘겨주지 않고 삼엄하게 경비하였다. 화순을 사수하는 예비군은 없었으나, 화순으로 가는 길목도 정예의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다. 무장시민군이 민간인 미니버스로 위장하고 무리하게 화순 함락을 시도한 것도 주남마을 총격전을 초래하였을 뿐 외곽통로를 뚫지 못하였다.

본래 광주 일원의 무장봉기는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야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속전속결이 필요하였는데, 모든 주요 도로들의 시민군 통행이 차단되자 그 기동력을 상실하였다. 만약 시민군이 나주를 함락하였더라면 실로 나라의 운명이 뒤바뀔 뻔하였다. 그러나 시민군은 나주의 모든 무기고들을 접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동문 기자의 정보 심리전에 걸려들어 패주하였다. 목포 사태를 일으켰을 뿐 전라도에서 제2, 3의 해방구는 없었다. 바깥으로는 서남부 시민군이 점차 흩어지고 안으로는 연일 계속되는 궐기대회에 시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민심이 빠르게 떠나 26일에 이미 광주시민들의 선택은 혁명이 아니라 수습이었다.

군경과 시민군 양측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무장봉기가 수습되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동문 기자의 이런 숨은 공로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광주사태의 현장을 잘 아는 산 증인이기에 5 18의 진실 규명에 큰 기여를 해 오고 있으며, 본서의 사진 설명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영화 <화려한 휴가><26>5 18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많은 허구와 픽션으로 가득차 있다. 만약 사실에 바탕을 둔 진정한 5 18영화의 소재가 있다면 그것은 김동문 기자의 빛바랜 원고 속에 담긴 광주사태 수기일 것이다. 기자로서의 그의 진실한 수기야말로 진정한 5 18 기록물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기자께서 32년 전의 빛바랜 원고를 세상에 내놓으려 하던 바로 그 해에 영화 <26>이 제작되었다. 이제 5 18 담론에서 거짓 대 진실의 일전(一戰)이 시작된 것이다.

 

예비군 대대 외에는 나주읍 전 지역을 시민군이 장악했던 상황을正史 5 18361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시위대는 이제 실탄을 장전한 총을 메고 시내를 휩쓸고, 나주 읍내는 시위대의 손에 완전히 장악된다. 군수실에도 여기저기서 그동안 군 행정에 불만을 가졌던 민원인들의 험악한 전화가 쏟아져 들어온다. 이때 위협을 느낀 군수는 금성산 정상에 있는 대공포 진지로 피신했다. 그는 후에 지휘 책임을 물어 장흥군수로 문책성 인사조치를 당하기도 한다.

 

正史 5 18이 기록하는 민원인들의 험악한 전화는 실은 민원인들의 전화가 아니라 시민군의 전화였고 협박전화였다. 민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김동문 기자도 숙청 혹은 제거 대상한테 걸려오는 협박전화를 받고 피신해야만 했다.

무장봉기 주동자들은 나주를 영암과 목포와 해남 등 전남 일원으로 무장봉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으며, 이미 국민연합 나주지부 등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조직되어 있던 나주를 단숨에 점령하여 완전 장악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하였다. 시민군이 광주와 나주와 목포와 해남 등 4개 거점만 확보하여도 무장봉기는 정부가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며, 북한군 남침의 절호의 기회가 될 판이었다. 만약 나주에 김동문이란 인물이 없었더라면 그런 최악의 상황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민군을 보거나 시민군이란 단어를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져 경찰과 예비군대대장들이 모두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가던 때에 한 언론인이 오히려 예비군대대장 군복을 입고 앞장서서 915예비군 관리대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당시 광주시 광산동에 위치한 지방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 차장직에 재직하던 김동문 기자는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보다 조국을 위한 대의를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나주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가 피탈되던 그날 밤 9시에 그의 나주지사 사무실 바로 옆 청수식당에서 시민군의 카빈총 소리가 계속 요란하여 두꺼운 벽 쪽으로 몸을 피하며 무서워하고 있을 때 한 통의 협박전화가 걸려왔다.“거기 유신 언론인 집이지? 방문할 테니 기다려!”하는 험악한 목소리의 한 장년 사내의 협박전화가 쩌렁쩌렁 울렸다. 생소한 명칭유신 언론인으로 자기를 부르는 자의 목소리에서 살기를 느낀 김 기자는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고 직감했다. 그러나 경찰이 모두 도망간 나주에서 피할 곳은 예비군대대뿐이었다.

 

2km 거리에 있는 예비군대대도 안전한 피난처는 아니었다. 전화국 앞 송전탑 부근에 무장시민군 버스가 이미 와 있었으며, 시민군이 부대 정문을 차단하고 마구 위협사격을 하고 있었다. 불안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고 아침 6시가 되자 도로변에는 머리에 붉은 띠에다시민군이라고 쓴 무장단체를 가득 태우고 밤새 질주하던 차량들이 더욱 기세를 부리며 다니고 있었고, 시민군들은 차창 밖으로 총기와 각목 등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부대 후문으로 가는 길목마저 영암시민군이 가로막고 경계하고 있었다. 시민군을 요리조리 피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부대에 당도하여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일순간, 예비군대대 대대장 정 소령이형님! 이게 무슨 날벼락이요? 사단과 연대의 무전은 잡히지 않고 무장폭도들이 300미터 마을 어귀까지 몰려와서 총질을 해대니 어쩌면 좋소?”하고 도리어 김 기자에게 물었다.

 

부대 지휘관이 자신에게 보호를 의탁하러 온 언론인에게 도리어 조언을 구한 것을 부하 장병들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를 버릴 것인가, 사수할 것인가의 결정을 놓고 상급부대의 지시를 애타게 기다리는 정 소령은 상급부대와의 무선교신이 불통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때에 역전의 파월장병을 보는 순간 입에서 그런 질문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걸려오는 전화라고는“400만 전남도민들을 모두 죽이라는 학살 명령이 떨어졌다고 부대 방위병들과 읍내 예비군들이 전해주는 소문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그런 학살 명령이 떨어졌는지 유언비어인지를 파악해야만 다음 행동을 정할 수 있다. 그래서 정 소령은 부하들이 자리를 비키도록 하고 김동문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월남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 기자는 그 소문이 유언비어라는 판단을 재빨리 해냈다.

학살명령 소문이 유언비어라면 군인의 임무는 부대를 사수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김동문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 소령, 자네는 대한민국 육군소령이자 향토예비군 부대 지휘관일세. 지역 경찰관서마저 피습되고 많은 양의 예비군 무기마저 나주에서 탈취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이 부대 하나뿐일세. 우리가 지키세. 만일에 군 병력이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동원되고 나면 3 8선은 어쩌겠나?”

정 소령, 버티는 데까지 부대를 사수하세. 이곳마저 철수하면 광주는 물론 나주의 치안은 공백상태이네.”

 

그러나 무엇으로 사수할 것인가? 정 소령은 자신의 부대로는 현실적으로 방어가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했다. 병력이라고 해봐야 자신을 포함, 현역은 고작 16명이고 부대로 피신한 방위병과 예비군 그리고 현역 휴가장병 7명을 합쳐도 60여 명밖에 안 되며, 무기는 M16소총 16정에 카빈소총 30여 정이 전부이고, 탄약은 비상 휴대용뿐이라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사계 신모 상사가 대대장에게 식량이 떨어졌음을 알려왔다.“소수병력 부대인지라 3일 분량의 식량 보급품이 피신 온 예비군과 방위병 등 60여 명의 취사로 인해 아침에 바닥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를 받고 얼굴이 굳어버린 정 소령이 김동문 기자에게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시민군이 부대 정문과 후문 쪽 길을 가로막고 경계하고 있기에 민가에 가서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굶어 죽는 것을 무릅쓰면서까지 부대 사수를 하는 것이 그 누구에게라도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으리라.

 

대대장도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결정을 김동문 기자가 단호하게 했으며, 대대장은 그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 나주는 서남부 11개 시군의 교통 요지로 남쪽으로는 신안, 목포, 함평, 무안 쪽으로부터 광주로 진입하는 관문이고, 서남쪽으로는 영암, 강진, 장흥, 완도, 진도, 해남 등지에서 광주를 향하는 중심지로서, 마지막의 이 부대마저 철수한다면 외지 시민군의 광주 진입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김동문 기자가정 소령, 나와 운명을 함께 하세. 월남전에서 살아온 목숨 내 나라에서 값있게 던지려네.라고 비장한 각오로 말하자 정 소령이 김 기자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 김 기자는 당번병이 가져온 대대장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김동문 기자가 월남전 참전 이후 14년 만에 처음 군복을 입자마자 후배 예비역 대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갑게 수화기를 들었으나 그가 전해준 소식은광주 - 목포 간 경유도로인 나주 읍내는 차량마다 영암, 목포, 무안, 함평, 장흥 그리고 4시간 거리인 멀리 진도 부대라는 시민군 표시를 한 버스와 트럭들이 몰려 있고, 아시아 방산업체에서 제작된 군용 트럭까지 동원, 차량마다 무장한 폭도들이 읍내를 점거, 거리 곳곳에서 피난 행렬까지 줄을 섰다는 것이었다. 예상 외로 빠른 사태 확산 소식에 놀란 김 기자는 손에 든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이런 판국에 부대 안에서는 두 끼니를 굶으며 정문 사이 철조망 경계근무를 서던 방위병과 예비군들이 웅성거리자 현역들까지 동요되고 있었다,

부대 앞 200여 미터 흥룡부락 앞에 진을 친 무장시민군 차량에선 고압 철탑을 은폐물로 삼고 공포를 쏘아대며 부대를 위협하고 있었다. 식량 보급을 위한 최후수단과 방법은 무전병이 지닌 소형 무전기뿐인데 그나마 벙어리가 된 지 3일 째였다. 이를 두고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하던가! 이토록 절박한 상황이 되자 패기 왕성하던 김 중위와 이 중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교들이 계속 부대 경계순찰을 해야만 했으므로 잠을 잘 수도 없는 밤에 이윽고 벽시계가 자정을 울리자 정 소령이 월남전 이야기를 주문하여 김동문 기자가 털어놓은 월남전 경험담이 대원들의 허기진 배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48시간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김동문 기자의 월남전 이야기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사이 새벽을 알리는 동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한 줌의 쌀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수차 무전교신을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광주 쪽 사정이 악화된 것으로 판단되지만 연대나 향토사단은 나주 지역이 화약고임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시민군의 무장 차량이 갈수록 불어나는 나주가 광주로 향하는 전초기지가 된 것을 몰라서일까? 아니면 서북부 장성, 담양, 화순 지역과 동부 여수, 순천, 고흥, 보성 쪽의 진압이 더 급박해서일까?

간신히 무전교신이 잡혀 식량지원 요청을 한 후 헬기가 부대 쪽으로 날아오자 부대 300여 미터 앞에서 시민군이 계속 헬기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헬기가 착륙을 못한 채 상공을 맴돌고 있는 것을 본 김동문 기자는 내무반으로 달려가서 침낭의 하얀색 홋이불 천을 가져와서 헬기를 향해 마구 흔들어 착륙 안전지대를 알렸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자 헬기는 서서히 연병장을 향해 내려왔다. 소령 계급장의 장교가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헬기에서 M60기관총과 실탄 상자만 달랑 내려놓고 다급히 출발을 서두르는 요란한 엔진 소리가 요동치자 주변이 흙먼지로 뒤덮인 채 시야를 가렸다. 애타게 기다리던 식량 보급품을 내려놓지 않고 이륙하는 데 분노가 치밀은 김 기자가 조종석을 향해 카빈소총을 겨누며 소리쳤다.“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니 식량을 내려 놓으라!”조종사는 떨리는 음성으로본인은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나주대대에 중화기 수송 명령만 받았을 따름입니다라고 하며 저자세로 나왔다. 아마 그는 계급장 없는 군복차림의 김 기자 모습을 보고 군 특수부대나 자신보다 상급자로 여겼던 것이리라. 잠시 화풀이를 했던 김 기자는 사과의 뜻으로 그의 안전 이륙을 위해 양팔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헬기를 떠나보내고 대대장실에 들어서니 벽시계가 오후 5시를 알렸다.

그 일로 인해 부대 사수냐, 철수냐의 판단이 혼란스러워졌다. 식량 보급을 요청했는데 왜 실탄 보급을 해 주었을까? 전남도민 학살 명령이 사실일까?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의 광주 투입이 사실일까? 식량이 떨어져 절박한 상태에서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식량 대신 중화기와 탄약 상자를 보내다니! 시민군이 기습하면 사살하라는 뜻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대장이 말문을 열었다. “형님! 명령에 죽고 산다는 군인이지만 저들이 기습을 하더라도 발포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군이 기습해도 발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민군이 총을 쏘는데 가만히 있으면 부하들이 죽는다. 그래서 철수 외에는 부하들의 희생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대대장 정 소령이 다시 무전기에 매달렸고 오후 늦게 ○○연대와 연결이 되었을 때 대대장은 부하들에게 호령하는 투의 언성으로 외쳤다.“폭도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부대 사수가 어렵다.발포 여부를 하달하라.”한참 후 소형 무전기의 수신음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부대 방어를 위한 위협사격과 공중 발포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교신을 받았다:“발포 절대 불가.방어 최후 수단인 공중 발포 허용.”상급부대로부터의발포 절대 불가명령 한 마디로 그 동안 무성했던 학살 명령 소문은 유언비어였음이 드러났다.

또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군청 내무과장이 전화로 하루 사이 새로 등장한 유언비어들을 예비군 대대로 알려주었다.

첫째,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가 광주에 이어 나주까지 진격했고, 둘째, 이미 광주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사살되었고, 셋째, 금남로 거리는 탱크 부대가 출동하여 마구잡이 학살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화를 엿듣던 김동문 기자는 월남전 경험을 살려 이런 유언비어의 의도를 순간적으로 간파하였다. 시민군이 장악한 나주 군청에서 이런 유언비어를 나주 예비군 대대로 흘려보내는 것은 무장봉기 주동자들이 베트콩식 민사심리전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월남전에서 사용했던 특수 게릴라 전술로서 약육강식의 본능을 이용, 베트콩들이 쓰는 게릴라전인데, 그들은 한국군 주둔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야간에 팬티 바람으로 3~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수류탄으로 기습공격하고, 대규모 부대일 경우에는 현지 주민을 월맹 정규군으로 위장시켜 한국군 부대의 정보를 얻어내는 데 사용하는 민사심리전이다.

광주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사살되었다는 등의 악성 유언비어들은 시민을 선동하여 시민군에 가담하게 하는 데 이용되었고,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가 광주에 이어 나주까지 진격했다는 유언비어는 예비군 대대의 사수 의지를 꺾고 시민군에 항복시키려는 심리전이었다. 정 소령과 내무과장 간의 통화가 길어지면 부대의 약점이 시민군 쪽에 노출되고 민사심리전 계략에 휘말려드는 것이기에 김 기자는 대대장의 손에서 수화기를 대뜸 가로채고 역()심리전 정보를 흘렸다:“과장님, 군 기밀 사항이지만 귀띔해 드리는데, 어젯밤 사이에 3백여 명의 계엄군이 공수되었습니다.”

이런 허위정보를 흘려야 한다는 판단을 김동문 기자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비군 대대의 약점을 시민군 진영에서 잘 알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예비군 대대는 1개 소대병력도 채 안 되는 소규모 부대이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쪽에서 민사심리전을 걸어왔을 때 시민군 기습공격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고 300명 진압군 투입설을 유포하였던 것이었다.

 

김동문 기자가 예상한 대로“3백 명 진압군 공수설은 즉시 시민군 진영에 전해졌다. 문제는 시민군이 예비군대대 공격을 단념하기는커녕 훨씬 더 큰 병력을 나주로 포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비군 중대장 모 씨로부터 전해온 소식은, 읍내에 진압군 공수설이 전해진 이후 무장한 시민군 차량들이 10여 대씩 집단을 이루어 광주와 목포 간 도로변에 있는 산정동 천주교 앞에 진을 치고 일전을 불사하겠다며 속속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심리전 작전이 대실수였는가? 부대원 60여 명의 희생을 불러오는 최악의 사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실시간 전해오는 읍내 쪽의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이미 시민군이 대대 점거를 위해특공대와 기동타격대까지 조직했다는 전언이 날아왔다.

시민군이 대대 점거를 하려 한다는 정보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서광을 비추는 전화가 왔다. 군청 내무과장이 전화로수습대책위를 만들고 주민대표가 시민군 책임자와 협상을 하겠으니 진압군의 시내 진입을 유보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곧 나주읍에서 시민군과 진압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나주 주민들이 그런 재난을 막기 위해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였던가? 시민군 편에서도 공격을 보류하고 주민대표들과 물밑 접촉을 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모두가 강경파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다 무기 분배를 받고 시민군이 되었어도 나주 주민이라면 그 누가 자기 동네에서 전쟁이 벌어지기를 원하겠는가? 혹은 강경파 입장에서는 총공격을 위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민군이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협상 제의가 왔으며, 예비군 대대장과 김동문 기자에게 이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기별이었다.

 

예비군 대대장 편에서의 한 가지 큰 걱정거리는 주민대표들이 협상 차 부대를 방문할 때 탄로날 거짓말이었다. 정말로 진압군 300명이 공수된 줄로만 알고 있다가 부대가 텅 비어 있고 진압군 그림자도 안 보일 때 허위정보가 들통 날 것이 염려되었는지, 대대장은 사태 수습을 위해 부대를 찾아오겠다는 주민들과의 약속이 영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방위병과 예비군을 합친 60명이 진압군 300명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면 되는 것이기에 김동문 기자에게는 그 정도 문제의 해결은 아주 간단했다. 월남전 전술에서 흔히 쓰는 위장술과 심리전을 병행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어느덧 부대 서편 산머리에 붉은 석양이 걸쳐 있었으며 그 날 밤에도 김동문 기자는 월남전 이야기로 부대원들을 위로해야 했다.

 

김동문 기자가 부대를 찾아온 지 4일째가 되는 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 그날 찾아올 방문객을 대비 300명 진압군 공수설이 허위였음이 탄로나지 않게 하는 위장술 준비에 부대원 모두가 분주했다. 먼저 장교 둘이 중화기인 M60 기관총을 정문에 배치하고 현역병과 방위, 그리고 예비군들에게 블록담장 철조망 사이로 1미터 간격으로 거총 자세의 상체만 보이도록 담장 사이를 에워싸도록 했다. 방문 시간인 오후 2시 이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방위병과 예비군들이 처음 겪어본 실전의 작전 지시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여 주었다. 그날 점심은 4~5명씩 조를 짜고 교대로 취사장을 오가며 식사를 하도록 했다. 병력 수가 다섯 배 많아 보이도록 위장하는 와중에도 경계지역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속시간 10분 전인 낮 150분쯤 주민대표 5명이 부락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김동문 기자는 대대장의 두 손을 꼭 쥐면서 주민대표들에게 부대 주변 경계모습만 보인 후시민군들이 탈취한 무기들을 자진 반납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런 처벌도 없다는 말만 하고 끝내라는 당부를 한 후 옆 내무반 막사로 몸을 피했다. 방문객들은 나주 주재 김동문 기자를 잘 아는 지역민들인지라 군복 입은 그의 모습을 보면 300명 진압군 지원설의 허위가 드러날 것이기에 숨어 있어야 했다. 이제는 대대장과 주민 대표들 간의 협상이 성공하여 그들이 총기 회수에 앞장서 줄 것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바심 속에 10여 분이 흐르자 당번병이 주민대표들이 떠났다는 연락을 해주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대대장의 표정에서 주민들과의 수습 협상이 원만하게 타협되었음을 읽었다. 다행히 부대 정문 앞에서 잠시 동안 이뤄진 수습대책회의는시위대가 탈취한 총기류를 주민들에게 반환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그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퇴로를 나주 - 목포 간 도로로 제한하고 나주 - 영산포 간 도로는 진압군이 차단한다. 24시간 시한부로 24일 오전 10시 이후 시위대가 철수하지 않을 경우 진압군은 불가피하게 읍내로 투입한다, 진입 도중 저항하는 자는 구금, 체포되며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고 합의했다. 5분간의 대화로 협상이 이뤄졌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주민대표들은 위장된 병력규모를 믿고 무기회수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비치며 부대를 떠났다.

그러나 협상 성공에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짧았다. 주민대표들이 떠나자마자 영산포에 거주한다는 예비군으로부터 급보가 전달되었다. 영산포 삼거리에서 목포 방향인 구진포 쪽에서 영암 시민군 표지판을 부착한 수십 대의 무장 차량들이 인접 시민군과 합류하여 나주 진입을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민군은 총집결할 시간을 벌기 위해 주민대표들을 내세워 협상 시늉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민대표들이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해 주었으면 하던 실가락 같은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난 후에 부대 사수를 위한 최후의 수단은 읍내로 집결하는 차량의 저지였다. 김동문 기자는 대대장과 함께 읍내 도로망 지도를 점검했다. 신의주 1호선 국도가 부대 정문 쪽 1킬로 지점이고, 도로변에 나주 전신전화국 4층 건물과 읍내 방향 200미터 지점에 호남 비료공장이 있다. 이 도로를 방어선으로 결정했다. 수백 명의 시민군을 태운 무장차량들을 대대장을 포함한 16명이 막아내야 했다. 그날 밤 9, 내일의 출동을 기다리는 장병들의 모습은 죽음의 전투를 앞둔 병사들의 비장한 모습이었다.

24일 새벽녘 잠시 눈을 감았던 김동문 기자가 악몽에 시달리다 잠을 깨니 대대장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당번병은 조금 전 대대장이 현역 병사 16명과 함께 출동했다고 알려주었다, 대대장은 출동하면서 현역 당번병과 함께 부대에 남는 방위병과 예비군들의 안전을 당부하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철수하라는 지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 기자의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16명이 1천 명의 시민군을 막아내는 것은 170의 벅찬 작전이 아닌가! 김 기자는 당번병에게 부대 잔류 병력의 안전을 맡기고 부대 앞 정문을 향해 뛰고 다시 작전 지점을 향해 뛰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도 훈련병처럼 민첩하게 마구 뛰었다. 단숨에 부락 어귀 송전철탑에 도착하니 논두렁 사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김동문 기자가 논두렁 사이로 바짝 엎드린 채 철탑 주변으로 접근하자 선임하사와 세 사람의 현역병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주 - 목포 간 신의주 1호 국도인 영산포 나주 간 중간지점을 차단하려고 도로변 철탑을 은폐물로 매복한 듯했다. 이 철탑 주변은 시민군이 4일째 부대를 위협하며 진을 치고 있었던 지역이다. 대대장과 남은 병력의 행방을 물으니 선임하사는 군복을 입은 김 기자를 상관 대하듯 대하며대대장과 잔여 병력은 도로 차단을 위해 전화국 쪽으로 출동했음을 알려주었다.

김동문 기자는 200여 미터 논두렁을 타고 전화국 쪽을 향해 마구 뛰었다. 전화국 정문 쪽에 도착하니 현역병 8명이 철재 파이프로 된 차량 차단 시설을 설치하고 차량 통행과 주민 통제를 하고 있었다. 김 기자가 대대장이 있다는 4층 옥상으로 얼른 올라가니 그를 본 대대장은 놀란 표정으로부대에 잔류하라며 당부까지 했는데하면서도 반겼다. 민간인인 김 기자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배려한 대대장과 그런 배려를 마다하고 사지로 대대장을 찾아온 김 기자가 부둥켜안았을 때 두 사람은 뜨거운 전우애를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무언無言의 전우애를 다짐하는 동안 중년의 전화국 직원 두 사람이 허겁지겁 옥상으로 뛰어왔다. 진압군의 출현에 이제 살았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자신들이 할 일들을 맡겨 달라고 했다. 당장 시급한 게 비상전화와 방송시설이다. 역시 전화국 직원들의 능숙한 솜씨로 10여분 만에 전화와 확성기 3대가 가설되었다. 김동문 기자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1주일에 한 차례씩 광주 기독교 방송국에서 뉴스 중계를 생방송으로 했던 그는 마이크를 다루는 데 익숙한 편이었다. 그의 대시민군 심리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읍내에 있는 무장폭도들에게 전한다! 잠시 후 계엄군은 시내로 진입한다!”

무기를 버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 저항하는 자는 시민군이 아닌 폭도로 지목하고 발포한다! 여기는 나주지역 계엄본부다.”

김동문 기자는 쉴 새 없이 방송을 반복했다. 조금 더 멀리 확성기 소리가 퍼지도록 고함을 쳤다. 목이 터지도록 외치기를 몇 분이 흐르자 잠시 호흡이 멈춰지고 정신을 잃었다. 잠시 찬 기운에 눈을 뜨니 대대장과 김중위가 번갈아 가며 물수건으로 온몸을 적셔주고 있었다. 모두들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다시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문득 시민군 퇴로를 알려주지 않았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나주는 광주로 진입하는 서남부 11개 시군의 교통 요지이자 관문이다. 광주를 가려면 폭 6미터의 국도가 2개 노선뿐이다. 한 곳은 나주-영산포간 국도로 완도, 진도, 해남, 강진, 장흥에서 진입하고 또 하나 광주-목포 간 도로는 목포, 신안, 무안, 함평 등 4개 지역의 통로로 무장 시위대가 비교적 적은 편이므로 광주-목포 간 도로를 퇴로로 결정했다. 몸이 기진맥진 탈수상태였지만 방송으로 시민군 퇴로를 알려 주어야 하므로 김동문 기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장폭도들은 들어라! 나주-영산포 간 도로는 차단되었으니 광주-목포 간 도로로 퇴각하라!”

광주-목포 간 도로는 개방되어 있다! 무기를 버리고 귀향하라! 저항하는 자에게는 발포한다!”

광주-목포 간 도로를 개방한 이유는 첫째로 2개 지역 도로를 차단할 병력이 없으며, 둘째로 나주 읍내를 점거하고 있는 1,200여 명의 시민군이 나주성당 앞 광주-목포 간 도로에 총집결해 있었으며,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할 경우 나주 읍민들을 인질로 삼겠다는 협박을 대대본부(전화국 옥상에 설치한 임시 작전상황실)에 유선으로 전달해 왔기 때문이었다. 시민군의 숫자가 1,200여 명이라면 사실상 광주 외곽의 시민군 총병력의 숫자일 것이다. 광주와 목포를 완전 점령한 시민군이 나주마저 점령하면 무장봉기는 성공한다. 서해안 도시 목포는 시민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목포 시민군을 나주로 빼돌리는 것은 시민군을 총지휘하는 자 편에서는 큰 모험이었다. 그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날 병력을 나주로 집결시킨 것은 그만큼 나주마저 완전 장악하는 것이 시민군 전략에서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계엄군 300명이 공수된 줄로만 아는 그들은 계엄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여차하면 나주읍민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했다.

군복 차림의 김동문 기자가 반복되는 내용의 방송을 10여분 동안 계속하는 동안, 옥상에 설치된 비상전화의 벨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왔다. 대대장과 김중위가 번갈아 전화를 받았다. 대부분 읍내 예비군과 주민들이 전해 준 시민군의 동향에 대한 제보들이었다.

어느덧 두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전화국 직원이 건네준 냉수 한 컵씩으로 허기를 달래고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이때 갑자기 요란한 소음을 내며 영산포 방향에서 무장버스 1대가 저지선을 뚫고 돌진해 왔다. 도로변 고압선 철탑 아래 설치한 저지선을 넘어선 것이다. 전신전화국 옥상 지휘소와는 100여 미터의 거리였다. 아마 시민군 지휘자는 두 가지 이유로 무장버스 1대를 저지선으로 보냈을 것이다. 하나는 계엄군의 저지선 사수 의지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엄군 발포를 유도하여 시민군 희생자가 생기면 무장봉기를 선동하는데 유리하고 예비군대대 공격 명분도 생기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김동문 기자가 앰프 방송으로정지! 정지!를 외쳤으나 버스가 멈추지 않자 철탑 아래 설치한 M60 기관총성이 이어졌다. 잠시 후 돌진하던 버스가 도로 중심선을 가로 지른 채 멈추었다. 100여 미터 옥상에서 지켜본 버스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위협사격으로 인명피해라도 생긴 것일까 하는 조바심 속에 김 기자는 대대장과 함께 버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버스 앞 10여 미터에 접근한 대대장이 거총을 한 채 외쳤다.“차 안의 폭도들은 손을 들고 차 밖으로 나오라.”몇 차례 고함소리 끝에 시민군 머리띠를 두른 장발의 청년들이 손을 들고 줄줄이 버스 앞문 쪽에서 나왔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얹고 차에서 내린 청년들은 모두 17명이었다. 철탑 아래 기관총 사수였던 김 하사를 비롯 7~8명의 병력들이 도로를 가로지른 버스를 갓길 마을 어귀까지 옮겨야 했다. 버스 속을 뒤져보니 60여 정의 M1과 카빈 소총이 실려 있었고 라면과 음료수와 빵 등 풍부한 식량이 실려 있었다. 현역병 병력이 부족하여 김 하사 일행을 다시 저지선 매복지점으로 보낸 김동문 기자는 이들 17명의 영암시민군을 예비군 대대로 인솔했다.

 

부대 내무반으로 인솔하고 보니 그 중에는 고등학교 교복차림의 17세 가량의 애띤 학생도 있었다. 울면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년 시민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너 어느 학교 학생이지?”하고 부드럽게 묻자, 고향은 영암이고 나주 한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며 울먹였다. “왜 학생이 시민군 차를 탔지?”하고 묻자, 시민군 차량마다 학생 한두 명은 타고 있다며 자신도 저 아저씨들이 차에 타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 탔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김동문 기자는 시민군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또 다른 조직이 있음을 얼른 알아채고 전화국 옥상을 향해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옥상에 있던 대대장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읍내에서 계엄군이 수백 명의 시민군을 학살했다면서시민군 특공대를 조직,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협박전화가 수차례 걸려 왔다며 걱정했다.

김동문 기자는 그때 예비군대대 사수를 위해서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계엄군이 아니라 민간인이요, 행여나 시민군 손가락 하나라도 다칠까 봐 마음 조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시민군 수백 명의 학살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악성 유언비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또 어떤 소요가 있을지 몰라서 24일 하오 2시에 김 기자는 또 한 차례 방송을 해야 했다.

읍민들께 알립니다. 폭도들의 유언비어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계엄군은 체포한 17명의 무장폭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무장 시위대에 알린다. 오후 3시까지 무기를 반납하고 자진 귀향하라! 3시 이후 저항하는 자에게는 생명을 보장하지 않겠다.”

5분 동안 반복되는 방송이 이어지고 옆자리에서 전화기와 씨름하던 대대장이 손짓으로 O.K. 사인을 보내 왔다. 그동안 무기회수와 사태수습에 참여했던 주민대표들이 부대 방문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정문 초병으로부터 6명의 주민대표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김동문 기자는 군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또 잠시 자리를 피했다. 주민대표들은 시민군 수백 명 사살의 유언비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부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들은 17명의 시민군이 손가락 하나 다친 이 없이 부대에서 잘 보호받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갔다.

영암 시민군 17명이 나주 예비군 대대 가까이서 항복한 후 시민군 수백 명 학살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누가 유언비어들을 제조하였는지 궁금케 했다. 만약 광주사태 가해자가 있었다면 그들은 유언비어 유포자들이었다.

521일 오전 전라도 각지에서 동시에지금 광주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런 유언비어를 외치면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탈취한 무기를 분배받은 광주시민들의 총기 오발사고 희생자가 생긴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사건 전개 순서에서 유언비어가 먼저였고, 시민군 총기 오발사고가 나중이었다.

이처럼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전라도 각지에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광주로 보내기 위해서 필요했다. 만약 나주에서 시민군 수백 명 학살 유언비어가 계속 퍼져 나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민대표들이 직접 확인해 보니 부대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영암 시민군 17명 중 손가락 하나 다친 이가 없었다.

사실 나주 예비군대대 사수를 포기해야 할 핑계거리는 많이 있었다. 병력이 16명밖에 안 된다. 부하들을 굶어 죽게 할 수 없다. 시민군이 기습해도 발포할 수가 없다 등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대를 시민군에게 넘겨주었다면 그 후의 사태는 어찌 되었겠는가?

부대원 60명이 시민군의 공격에 희생되지 않기 위하여 철수하느냐, 아니면 무장봉기 확산을 막기 위하여 부대를 사수하느냐의 결정이 절박하였던 때에 부대 사수를 결심한 이는 놀랍게도 민간인 김동문 기자였던 것이다. 그는 상급부대의 명령을 받는 군인이 아니었다. 애국심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는 결심을 하게 하였으며, 싸우지 않고 1천여 명의 시민군 진영을 와해시키는 지혜가 있었다.

그의 심리전은 적중하였다. 그는 나주에 침투한 영암 시민군을 대상으로무기를 반납하고 자진 귀향하라!고 방송했다. 그 방송을 한 김 기자 본인은 33년간 모르고 있었으나 정말로 그 즈음에 영암에서 대대적인 시민군의 무기회수로 영암 시민군이 완전 와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김희규 등 일부 시민군이 봉기에서 수습으로 생각을 전환한 후 꾀를 내어 영암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였다. 양편이 모두 총을 들고 있을 때 어떻게 무기를 회수하는가? 김희규 등은 시민군 식사준비가 되었으니 총은 차에 놔두고 내리라고 하는 방법으로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그들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무기를 반납하였다. 이처럼 광주 외곽 시군의 시민군을 대상으로 용기 있게 무기반납을 권한 김동문 기자의 방송에는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있었다.

광주사태는 광주라는 일개 도시에 국한되었던 사건이 아니라 목포사태가 있었던 사건이요, 나주와 영암과 해남 등 전라남도 여러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한 기자가 예비군대대장 군복을 입고 부대를 사수한 그날의 쾌거는 나주대첩이었다. 만약 나주대첩이 없었고 시민군이 예비군 대대를 점거했었더라면 그날의 사건은 나주사태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광주 시민군보다 2배 이상 시민군 수가 많은 시민군이 나주를 완전 장악하는 나주사태가 있었다면, 광주사태의 명칭도 달라졌을 것이다. 나주대첩의 수훈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19805월 중하순 광주 일원에 일어난 무장봉기를 전라도사태라고 부르지 않고 광주사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최소의 병력을 최대로 활용한 김동문 기자의 나주 예비군대대 사수 및 나주-영산포 간 도로차단 작전은 그 효과의 중요성에 있어서 가히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에 견줄 만하다. 5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 외곽 봉쇄를 시작했을 때 가장 중요한 곳이 나주였다. 그럼에도 나주에 단 한 명의 계엄군도 배치되지 않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한 언론사 기자의 주도 하에 한 작은 부대가 불과 16명의 병력으로 그 일을 해내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희생자는커녕 아무도 다친 이가 없었기에 나주대첩은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광주와 나주 사이의 길을 뚫지 못한 시민군이 화순을 통해 가는 길을 뚫으려다가 발생한 주남마을 사건 등 다른 외곽도로 봉쇄는 총격전과 교통사고 등의 인명사고를 초래하였으며 5 18을 기념할 때마다 대서특필되고 크게 보도되어 왔다. 그러나 광주사태 33주년에는 김동문 기자와 16명의 무명의 장병들이 이루어낸 찬란한 나주대첩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1950915일 인천 상륙작전의 효과는 수도권 이남, 특히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을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북한군 보급로가 차단되고 부산 가까이까지 깊숙이 진격하였던 북한군이 고립되니 아무런 힘을 못 쓰고 궤멸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의 효과는 한 마디로 전방과 후방간의 북한군 병참도로 차단 효과였다.

김동문 기자의 시민군 차도 차단효과 역시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주시민군의 역할은 광주 시민군을 각 지방의 시민군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역할을 못한 채 나주 시민군의 발이 묶여 있었다. 영암 시민군이 영암 예비군 무기고에서 많은 총과 실탄을 탈취하였으나 전혀 광주 시민군에게 보급해 줄 수가 없었다.

각 지방으로부터 고립된 광주시민군은 527일 새벽에는 광주시민들로부터도 고립되어 있었다. 만약 광주시민군의 숫자가 많아서 광주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었더라면 진압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광주시민군은 대부분 외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계속 줄어들기만 하고 전혀 외지로부터 보충이 안 되어 26일 광주시민군의 숫자는 2백 명 미만으로 줄어 있었고 모두 도청에 모여 있어 그들이 시민들과 격리된 상태였던 27일 새벽을 틈타 진압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무장단체가 시민들로부터 격리되는 틈을 노려 무기 강제회수 작전을 쓴 소준열 전교사령관의 전략도 훌륭했지만, 그것은 한 발 먼저 방송 심리전으로 나주와 영암 시민군 무기를 회수시킨 김동문 기자의 훌륭한 전략이 있었기에 성공 여건이 마련된 작전이었다.

김동문 기자가 915예비군 관리대라는 나주의 작은 부대를 사수하였을 때, 그는 대한민국을 사수하였다. 북한이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지원하면서 노린 것은 그 무장봉기가 진압 불가능한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521일 시민군의 주력부대는 73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광주로 진격하던 해남 시민군이었다. 해남 시민군이 나주읍을 거쳐 광주로 가려던 작전을 갑자기 바꾸어 나주 삼거리에서 노안을 거쳐 송정리로 간 것이 무장봉기 실패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박행삼이 인솔하는 해남 시민군이 송정리 큰다리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내고 몇 시간 지체하는 사이 송정리 도로는 계엄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 본래 광주 일원의 무장봉기는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야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속전속결이 필요하였는데, 모든 주요 도로들의 시민군 통행이 차단되자 그 기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각 지방 시민군의 광주 집결이 늦어지자 무장봉기 지도부는 연일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민심을 붙잡아 두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궐기대회에 염증을 느낀 민심이 빠르게 떠나 26일에는 이미 광주시민들의 선택은 혁명이 아니라 수습이었다. 당시 무장봉기에 의한 혁명은 얼마나 빨리 각 지방 시민군과 광주시민군이 연결될 수 있느냐의 시간 싸움이었던 것이다.

지방 시민군의 최후의 선택은 나주를 거쳐 광주로 진입하는 도로 확보였다. 광주 상행선 저지선 2키로 전방 영산포 삼거리는 서남부 11개 시군의 광주방향 교통 요충지로서 목포에서 광주로 진행하는 교차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구진포 삼거리라고 불렸던 영산포 삼거리에는 영암, 목포, 강진, 해남 등 11개 시군에서 온 시민군이 나주읍을 돌파하여 광주로 진격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김동문 기자의 심리전과 위장술에 걸려 또 하루를 허비하고, 정면 돌파를 시도해 보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광주행 상행선을 차단하기 위해 16명이 배치되었고 김동문 기자가 도로변 전신전화국(KS통신) 옥상에 지휘본부 설치를 끝낸 뒤였다. 역전의 파월장병 출신의 씩씩한 기상과 방송기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의 지휘본부 방송을 들은 시민군은 정말로 수백 명의 진압군이 있는 줄로 알고 겁에 질려 패주했다.

523일 윤상원 등 광주의 무장봉기 주동자들이닷새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무장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하는 말, 타 지역 시민군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말이었다. 만약 모든 것이 계획과 예상대로 진행되었더라면 그들에게 충분히 그럴 승산이 있었다. 그들이 단지 며칠간 전남도청을 숙소로 사용하고 싶어서 시민군을 조직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나주대첩이 무장봉기 확산을 막았다.

나주대첩은 시민군 무기회수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주시 영강동에서 40여 년간 식당을 운영해 온 60대의 한 시민은 이런 증언을 한다:

19805월 광주사태가 터질 초기에는 제가 3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당시의 시위를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생각하고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해남, 목포, 진도 등지에서 나주로 몰려온 시위대들에게 음식과 음료수를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일 오후 1시경에 전라북도 전주 차량에 복면을 한 괴한 20여 명이 저의 식당 바로 앞 영강동 파출소 무기창고를 파손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곧바로 참전용사(월남전)인 남편과 이웃에 거주하는 예비군 중대장 등 3명이 무기고에 보관된 소총 176정을 저의 집 3층에 숨겨두었습니다, 무기를 숨겨놓은 사실을 어떤 사람이 알려주자 전주 시민군 10여 명이 대검으로죽인다, 무기를 내놓아라!라고 협박, 저의 남편은 부상까지 당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타 지역 복면 괴한들이 파출소 무기창고를 파손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때 애국시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때 총을 숨겨놓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부상을 입은 시민 역시 5 18 부상자였으나, 그런 부상자들은 보상은커녕 지난 33년 동안 시민군에 가담했던 자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살아야 했었다.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의 무기 회수를 위해 용기를 냈던 분들이 이제 또다시 용기를 내서 필요하다면 실명으로 증언하겠다고 나선다. 5 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5 18 옹호론자들이 종북 이념 동조자들인 것이 이제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도 보이므로 30여 년 전 무장봉기 세력에 맞서던 용기를 다시 내서 5 18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증언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5 18이 민주화운동이었는지를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 묻기 시작했다. 종북 이념과 한 배를 타는 민주화운동도 있는가? 5 18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이 한국인의 이념 형성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기에 많은 국민들은 이제 이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원점으로 돌아가 객관적으로 조명하기를 바라고 있다.

험산준령을 등반하는 것과도 같은 오랜 연구 및 작업 끝에 마침내 탈고된 본서는 바로 이런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5.18 광주사태 연구자를 위한 자료 사이트 안내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물은

http://archives.518.org/

에 있고, 도서 문헌이 아니라 이 사이트 기록물로만 볼 수 있는 기록물인 경우 본서 4권 참고문헌에 일일이 링크가 만들어져 있으므로

신문에서 이 사이트 주소를 홍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http://archives.518.org/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김영진이 주관하는 사이트이니까요.

우리가 알려야 할 것은 기록물 그 자체이지, 기록물에 대한 광주 단체들의 주장이 아닙니다.

신문에 본서에 기록물 출처들이 전부 밝혀져 있음을 명시하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고,

김영진이 유네스코 임원으로서 추진하는 5.18 온라인 기록관 사이트 주소를 신문에 광고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제 의견입니다.

그러나 신문에 실어 진실을 알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 사이트는 윤한봉의 구술 녹취문 사이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1).” 면담자 박현정. 두암동 자택. 123.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연구.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20121030일 접속).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2).” 면담자 박현정. 두암동 자택. 124.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http://trollwall.egloos.com/4237820

(20121030일 접속)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3).” 면담자 박현정. 두암동 자택.

222.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http://trollwall.egloos.com/4237830

(20121030일 접속).

 

윤한봉이5.18 기념재단 설립자이므로 그의 구술녹취문이 세상에 알려지면 김영진 등 5.18 단체 사람들의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릴 것입니다.

 

,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의 2006년도 구술 녹취문으로 광주 사태 비화 판도라의 상자 열리다 등의 문구와 더불어 아래 사이트 주소를 실으신다면 아주 효과적일 것입니다.

윤한봉의 구술 녹취문 1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윤한봉의 구술 녹취문 2

http://trollwall.egloos.com/4237820

 

윤한봉의 구술 녹취문 3

http://trollwall.egloos.com/4237830

 

사이트 주소에 관하여는 우선 이렇게 긴급 답변을 드립니다.

 

 

박기봉 사장님께,

 

제가 두 시간 전에 급히 보내 드린 회신에 이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추가해 드립니다.

유네스코에는 5.18 광주의 기록물이 등재되었음을 한 문장으로 언급한 사이트와 광주 단체들이 올려놓은 몇 장의 사진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는 광주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5.18 광주의 기록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이 성명서들입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동기 및 목적 등이 성명서들에 표현되거나 천명되어 있으니까요.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을 말씀드리면 5.18 기록물들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과 동시에 5.18 단체들이 성명서들을 감추기 시작하였습니다.

5.18 연구소가 각종 5.18 성명서들을 수집하여 온라인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 1997년경부터였으며 5.18 연구소의 여러 사이트들이 2~3년 전 하나로 통폐합된 것이 이 사이트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

 

유네스코에 5.18 기록물들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도 그 무렵 시작되었는데 그때를 즈음하여 성명서들을 사이트에서 전부 없애 버렸습니다.

여기 방문해 보시면 지금 월간지 관련기사와 시민군 증언록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5.18 연구소가 사이트에서 성명서들을 전부 감추기 전에 저는 모든 성명서 수집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5.18 연구소 사이트에서는 성명서들을 없애 버리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는 등재하였기에 그 성명서들을 본서에서 물증으로 제시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http://archives.518.org/

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기록물들을 광주단체들이 온라인으로 전시하는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 대문이 광주단체들의 주장을 홍보하는데 이용되고 있을 뿐 일반인들은 도저히 성명서들을 검색하지 못합니다. 성명서들이 5.18측에 불리한 것을 이제는 아는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명서 전문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 저는 성명서 제목을 알고 있기에 제목을 검색하여 찾아냅니다.

성명서 전문을 전부 소장하고 있는 제가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877720

등 유네스코에 등재된 성명서 사이트 링크를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이유는

광주 단체들이 딴 소리 못하도록 물증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위의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877720

의 예를 들면 당시 동아일보 이재의 기자가 박현채를 도우며 516'전남대학교 자유언론투쟁위원회'라는 위장명의를 사용하며 광주사태를 선동하였습니다. 이 성명서 작성자가 전남대생이 아니라, 이재의 기자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국내에는 숨기는 비밀입니다.

 

518일 이전에 이렇게 조직적으로 광주사태 선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광주단체들이 숨기고 싶겠지만 그 기록물들을 그들이 없애는 것이 이제는 영영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기에 그들이 없애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보존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책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성명서 기록물들을 증거물로 제시하며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나 유네스코에 5.18 성명서를 열람할 수 있는 사이트는 없으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시민군 성명서들이

http://archives.518.org/

에 있으나 일반인들은 성명서 제목을 모르므로 검색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5.18 연구가들이 <역사로서의 5.18>, 특히 참고문헌이 수록된 4권만이라도 꼭 구입하여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사이트 주소를 언급하신 광고 문안을 어떻게 작성하셨는지 모르나

혹 저의 설명에 대하여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신속히 답변 올리겠습니다.

 

 

박기봉 사장님께,

 

여덟 시간 전에 보내 드린 메일의 보충 설명에 이어 또 다시 보충 설명을 드립니다. 5.18 기록물들을 광주 단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하던 지난 2010년에 즈음하여 5.18 연구소 사이트들에서 텍스트로 된 성명서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일단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상 광주 단체들이 그 원본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며, 본서 참고문헌 링크를 통해 유네스코 직영이 아니라 광주 단체들이 유네스코 지원으로 운영하는 유네스코 5.18 기록물 온라인 전시관

http://archives.518.org/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서에서 소개된 상당히 많은 성명서들 출처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로 되어 있습니다. 성명서가 최초로 수록된 문헌은 1987년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출판한1980年代 民主化運動이며, 이 책에 상당히 많은 성명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 되었지만 저는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어 김영택 기자의 1988년판 도서에 5.18 성명서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수는 적습니다.

 

광주 단체들이 5.18성명서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때는 1997년부터이며 감추기 시작한 때는 2010년부터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1997년부터 2006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여 총 50권으로 2007년에 출판된 문헌입니다.

거의 모든 5.18 성명서들이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1권과 2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쇄된 5.18 성명서 출처로서 이 책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비매품으로서 <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50권 한정 인쇄하여 그 중 35권을 해외 대학 도서관들에 기증하였습니다. 참고로, 제가 <518자료총서 소장 도서관>을 워드 문서로 첨부하였습니다.

이렇듯 이런 중요 연구 자료가 있으나 출판도 판매도 배포도 안 하므로 국내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이 자료는 그림의 떡입니다.

 

제가 조갑제 기자의 예를 들어 성명서 자료의 중요성의 예를 들어 봅니다.

조갑제 기자는 당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 5.18 성명서들을 전혀 본 적이 없었으며 그래서 그의 가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지만원 박사님의 소중한 연구도 5.18 성명서들을 보실 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5.18성명서들을 읽기 시작할 때 지 박사님의 가설과 명제들이 입증되므로 지 박사님 저서들도 한층 더 그 진가를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전혀 5.18성명서들에 대한 참고 없이, 1996년에 5.18재판이 진행되었었던 것도 5.18재조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논객들에게 5.18성명서는 몹시 필요합니다.

5.18성명서들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물 제시 없이는 광주사태 토론은 끝없는 갑론을박 토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서 4권 부록에 성명서 전체가 수록된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그 살인적 용어들이 잔혹한 성명서들은 문자로 인쇄되기에 적합치 않았으며, 내용이 중복되는 성명서들도 추려내고 부록 餘面이 허용하는 분량을 실었습니다. 4권 부록에 실린 성명서들이 독자들은 물론 논객님들과 연구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활동하시는 논객들에게는 전자 텍스트로 된 성명서들도 필요할 텐데 그 점은 언젠가 본서를 4권만이라도 전자책으로 제작하실 때 상당히 해소되리라 믿어집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5.18성명서들을 열람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는 없으며, 독자들이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5.18성명서 서적도 없습니다.

1980年代 民主化運動은 절판되었고,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는 한정 인쇄된 비매품이었습니다.

 

여기에 <역사로서의 5.18>의 역사 해설뿐만 아니라 팩트 자료 연구서로서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서는 독자들은 5.18성명서 연구로 초청하지만 2013년 현재로서는 유네스코에서 그 성명서들은 유네스코 사이트에서 전자 텍스트로 열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명서들이 있었으며,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http://archives.518.org/

등에서 그 원본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 때 또 답변 올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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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