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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역사발굴 세미나 자료집

  • No : 67652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09-12-15 14:25:38
  • 조회수 : 2084
  • 추천수 : 0

 

금산 700 의총과 승병

목 차

1. 청련암의 우국승장

4. 금산성 전투

2. 청주성 탈환

5. 영규대사의 전설적형상

3. 영규대사와 팔백의승 순국

6. 영규대사와 갑사

7. 결론

1. 청련암의 우국승장 영규대사

계룡산 甲寺의 靑蓮庵에서 참선ㆍ수행하던 스님들이 나라에 큰 난리가 난 것을 알게 된 것은 서울 왕성이 왜적의 발길 아래 짓밟힌 뒤의 일이었다. 4월 14일 상륙한 왜군은 불과 20일도 채 못된 5월초에 수도 서울을 짓밟았던 것이다. 당시 승려들이 왜적의 침략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유생ㆍ양반들의 혹독한 천대와 혹사를 피해 산중 끝에 숨어 세상을 왜면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세상의 천대와 억압을 받으며 산 속에 숨어살던 승려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청련암의 영규대사는 이 소식에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삼일 동안 식음을 전패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靈圭이고 호는 騎虛堂이라 하였다. 俗性은 密陽朴氏이며, 공주 板峙에서 태어나 일찍 출가하여 甲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 뒤에 당대 고승이었던 西山大師에게 가서 배움을 받고 여러 곳의 명승지와 고찰을 두루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힌 후 갑사로 돌아와 山內 암자인 청련암에서 제자들을 일깨우고 가르쳤다. 뿐만아니라 그는 일찍부터 남몰래 무예를 익히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몰래 숲속에 들어가 禪장枚 무술(봉술 종류)을 닦았던 것이다.

그는 젊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맹수를 만날수 있고, 또한 양반자제나 불량배들의 흉악한 행패에

대비해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무예를 가르쳤는데, 사실은 서산대사 밑에서 수학한 사명대사 등과 함께 머지 않아 닥쳐올 전란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틈틈이 남몰래 장대, 낫자루 등을 엄청나게 만들기도 하였는데 주로 눈에 잘 띄지 않게 뒤 곁에다 샇아두었다고 한다. 그는 왜적이 서울까지 짓밟고, 선조대왕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비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일 동안 식음을 전패하고 방에 있으면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왜적을 쳐수불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 산 승도 이 땅에 사는 백성이다. 나라님까지 도성을 빼앗기고, 피난길에 오르셨다니 이 난리를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빨리 내려가서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대사는 승려들을 모아 놓고 피끓는 열변을 토해냈다. 늘 자상하고 인자하던 승려에서 어느새 무서운 神將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 연장 자루로 쓰려고 모아 둔 것으로 생각했던 막대를 나눠주니 젊은 승려들이 모두 놀라고 말았다. 이로부터 나뭇가지 치는 데 쓴 장대, 낫 쓰는 법 등의 본격적인 무술연마를 수행하는 가운데 의승군 모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평소 병법을 공부하고 무술을 연마하면서 모아둔 나뭇자루가 바로 장대, 낫이나 창, 무기의 자루로 쓸수 있도록 준비했던 것이다. 그토록 천대와 억압 속에서 이같이 나라를 위한 위법망구의 호국정신을 발휘했으니 영규대사에 관해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ㆍ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영규대사는 스스로 우국충정의 의승대장이 되었다. 공주목사 허욱(許頊)의 협조를 얻어 의승군을 모집ㆍ편성하여 일차적으로 며칠 사이에 3백명의 지원승려를 모아 그들이 익숙한 나무치기 등 다루기 쉬운 연장무기를 마련해 훈련했다.

2. 청주성 탈환

청주목은 충청도의 중심이며 서울과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임란 당시 청주성은 왜군이 북상하면서 제5번대 蜂須賀家政이 이끌던 7천 병력의 일부가 방어사 李沃을 달아나게 한 후에 이곳에 주둔하면서 인근 고을에 온갖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은 수차에 걸쳐 관군과 의병에 의해 공격을 받았으나 성의 함락은 불가능하였다.

영규의 의승군은 7월 하순 청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와 함께 청주성을 공략한 조헌은 뒤늦게 당도하였다.

(조헌 의병이) 이윽고 洪州를 거쳐 懷德으로 곧장 行軍해 가니 이대 왜적이 막 청주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청주방어사 李沃과 조방장 尹慶)의 군대가 잇달아 달아나고 僧將 靈圭의 군사가 홀로 그 적과 여러날 동안 대치하고 있었다. (조헌)선생은 이런 소식을 듣고는 급히 사졸을 이끌고 청주로 향하며 한편으로는 이옥을 재촉하여 진군토록 하였다.

라고 하여 청주성 탈환에 최초로 참여한 것은 영규의 의승군이었다.

조헌이 청주에 도착하여 청주성을 공격한 것은 8월 1일이다. 이때 청주성 공격에 참여한 부대는 관군인 이옥의 군사와 의병장 조헌의 義陣, 그리고 영규의 義僧陳이었다. 방어사 이옥은 연기현 동쪽에서 청주쪽으로 진출하고 영규의 의승진은 청주성에서 15리 되는 安心寺(청원군 남이면)에 陳을 치고 있다가 청주성 서문밖 氷庫峴(청주시 모충동)까지 진출하여 조헌의 지휘를 받기로 하였다. 관군과 의병, 의승의 치열한 공방끝에 청주성은 탈환되었다.

청주서 전투에서 조헌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누구보다도 크게 활약한 인물은 의승장 영규였다. 그의 청주서 전투에서의 공은 다음 두 史料를 통해서 알 수 있다.

① 충청도는 적의 咽候(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적이 청주에 들어온지 이미 넉 달이 넘었습니다. 날마다 右道를 엿보며 흉독을 부려 우리의 腹心의 근심이 되어온지 오래입니다. 僧 영규가 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명의 중들이 돌진, 諸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전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才氣도 심상치 않으니 원 상을 주시고 환속하게 하소서.

② 대부대의 적병이 청주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주고 약탈과 살육을 함부로 하여 승 영규가 승도들을 많이 모았는데 모두 낫을 가졌고, 군기가 매우 엄격하여 적을 보고 피하지를 않았습니다. 드디어 청주의 적을 격파하니 연일 서로 버티어 비록 큰 승리는 없었다 할지라도 물러서지도 않았으니 적이 마침내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모두 영규의 공입니다.

라고 한 내용을 보면, 청주성을 공략할 때 의승군이 선봉이 되어 영규의 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또 ②의 사료는 청주성 전투가 끝난 후 충청도관찰사 尹先覺이 올린 狀啓로, 그는 관군의 지휘관으로서 의병의 군사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그가 영규의 전공을 위와같이 평가한 것을 보면 영규의 활동이 컸음을 말하여 준다.

관군과 의병, 의승의 합동작전은 壬亂史에서 유일한 것이며, 또한 청주성 공략에서 ‘청주싸움은 영규가 실제로 指揮했다’라고 한 것은 뒷날 朴趾源이 임진왜란 7년 사이에 柭城者는 오직 僧 靈圭 뿐이다. 라고 극찬할 만큼, 성을 빼앗는 것이 영규가 주도한 것임을 명백하게 말하여 주고 있다.

영규의 의승군은 청주성 탈환작전을 마친 후 공주에 머무르다가 제2차 금산성전투가 있기 전 8월초에도 전라도 경내에 들어와 활약하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승병’이란 이름으로 용맹을 떨친 바 있었다.

영규대사와 300여 명의 의승군들은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아 각처에 격문을 돌려 구국제민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 우리들은 일어섰다. 우리는 조정이나 관부의 명령을 받고 일어난 게 아니다. 오직 나라와 겨레를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났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는 올 수 없다. 우리는 죽기를 겁내지 않는 이만이 뭉쳐 있다.”

영규대사의 지위 아래 모여든 일천여 승군이 청주 탈환을 위해 청주성 15리 밖 안심사에 집결하였다. 이때 충청병사(兵使) 방어사(防禦使) 이옥과 조방장(助防將), 윤경기(尹慶祺)가 이끄는 관군이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훈련되지 않은 관군병사들은 왜적의 조총에 미리 겁을 먹어 접전은커녕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러나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승군은 죽음을 불사하고 성난 사자처럼 적진을 향해 돌진하니 처음에는 “낫 들고 뛰어든 조선의 중놈들 봐라.” 하다가 뛰어난 장대낫 전술과 용맹, 그리고 신묘함에 왜장들은 눈이 휘둥그래 뒷걸음쳤다. 그리고는 끝내 겁에 질려 등을 돌려 달아났다. 무쇠선장을 휘두루며 용전하는 영규대사의 장한 모습을 사방으로 흩어졌던 관군들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임진년 8월 1일 총공격을 할 때 호서지방 의병장 조헌(1544-1592) 의병군이 합류하여 의승군 결사대는 기어이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최초로 청주성 탈환이 알려지자 우리 관군과 의병들은 왜적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승군의 승리는 항전의 사기를 드높여 전세를 만회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구국의 승군조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의승군이 크게 활약하자 선조대왕은 서산대사와 의논하게 되었다. 이때 선조는 서산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에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서산대사에게 “팔도 도총섭”의 첩지를 내렸다.이로부터 본격적 의승군 조직 활동이 확산되어 구국의 횃불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독하게 불교를 배척하던 조정대신들도 영규대사의 공과를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尹先覺의 장계(狀啓)에서는

“적군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게 된 것은 모두 dudr의 공이었습니다.(賊遂棄城而去 靈圭之功也)”

라고 하였다. 또 의주 행재소(義州 行在所)에서 선조대왕을 모셨던 윤승훈(尹承勳 1549~1611)도

“영규의 호령이 엄하고 명확해서 그 군사들이 앞으로만 진격할 뿐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싸웠기에 이들 의승의 군사들이 아니었으면 청주의 왜적을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靈圭號命嚴明直前無退一心爲之 淸州之賊 非比兵則 不得勝矣)”

라 하였다. 또 그때의 비변사(備邊司)에서 왕에게 올린 글(上啓)에도

"승려 영규가 분연히 의를 일으켜 많은 승려들을 모아 청주서 밑까지 진격하여 가장 선두에서 돌격해 들어가 청주의 적을 무찔렀는데, 그때 영규의 호령은 바람을 일으키는 서릿발같아서 아무도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호통칠 때마다 천명의 승군이 용맹스럽게 쳐들어 갔으므로 모든 군사(관군과 의병)들은 거기에 힘입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하니, 오직 그의 큰 공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어찌 가상타 않으오리까.(僧人靈圭( )義白募多聚徒 進逼城下 最先突入遂攻淸州 觀基號命風生基下無敢違 叱咤之間千僧躍進 者軍恃而無恐云 不唯大功可嘉…)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만 보아도 청주성 탈환의 싸움에서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가 세운 공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대왕은 그에게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단의(段衣) 한 벌을 상으로 내렸던 것이다.

그때 조정 대신 중에서는 ‘중을 당상(堂上)으로 삼는 일을 개혁 이래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먼저 상을 내리고 환속(還俗)을 시킨 뒤에 벼슬을 내려 중히 쓰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쨌든 그러한 당상의 벼슬을 처음으로 승려인 기허당에게 내린 것을 보아도, 기허당이 세운 그때의 전공이 얼마나 컸으며, 또 그의 승리가 당시의 전세(戰勢)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능히 짐작 할 수 있다.

3. 영규대사와 팔백의승 순국

청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며칠 뒤 의병장 조헌으로부터 금산의 적을 치자는 제의를 받은 영규대사는 조헌에게 금산공격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금산에 집결해 있는 막강한 왜적을 치자면 우선 호남지방의 관군은 물론, 각처의 의병들과도 서로 연락을 하여 대병력이 합세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금산의 적은 막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헌은 기어이 금산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독으로라도 쳐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조헌의 휘하에는 칠백 명의 의병이 있을 뿐이었다. 영규대사의 의승군도 청주성 탈환 싸움에서 많이 희생되어 팔백 명을 헤아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조헌이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전라 감사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이 거느린 2만 여명의 병력이었다. 권율장군은 난이 일어났을 때 광주목사와, 전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여기에서 군사적 활동을 인정받아 그는 일약 전라감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정리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쉽게 금산 공격에 가담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왜적들은 앞서 을묘왜변(乙卯倭變) 때에 호남지방에서 크게 패하였던 앙갚음을 한다는 구실로 많은 군사를 이 금산에 집결해 놓았던 것이다. 을묘왜변은 명종(明宗) 10년 을묘(1555) 5월에 왜적이 배 70척을 몰고 와서 전남 남해군의 달량포(達梁浦)를 점령하고 전라도 해안 일대를 그때 우리 전라병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薀)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이 사로잡히는 등 왜적의 횡포는 매우 심하였고 그만큼 우리의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보내어 영암에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란의 악독한 왜적들은 그러한 을묘왜란 때의 분풀이를 한답시고 호남 진격의 요충지인 금산에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금산의 적에게 그해 7월에 우리의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이 수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공격을 했다가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그 싸움에서 의병장 고경명은 장렬한 전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기허당이었으므로 조헌의 금산 진격을 극구 만류하였다.

전라감사 권율이 거느린 대군이 도착하거든 합세하여 적을 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헌은 기허당의 만류를 부리치고 기어이 금산으로 진격해갔다. 조헌의 고집이 세기도 하지만 자신이 우선 진격하면 권율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속속 지원해 올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누구든 먼저 적에게 접근하여 싸움을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그였으므로 자신이 그 불씨가 되기로로 작정을 하였던 것이다. 조헌의 군사들이 금산을 향해 떠나자 끝내 그 고집을 꺽지 못한 기허당도 팔백의 의승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해 진군해 갔다. 칠백의병과 팔백의승만으로 막강한 금산의 적을 친다는 것은 무모하기가 달걀로 바위 치는 격임을 간파하고 조헌의 진격을 그토록 만류하였던 그가 조헌의 뒤를 따라 금산으로 향해 떠나려 할 때, 그의 휘하 승려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허당은 그들을 향해

“조헌(趙公)은 충의의 선비일 뿐만아니라, 우리와는 싸움터에서 생사를 같이 하였던 저우요, 동지이다. 생사를 같이한 동지가 죽음의 곳으로 떠나는데 어찌 내 홀로 살겠다고 보고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기허당은 이번 싸움이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 분의 하나라도 이길 수 있다는 요행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그였다. 그러한 그가 번연히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스스로 택하였던 것이다.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의리를 생명같이 여기는 무인용사(武人勇士)와 의인열사(義人烈士), 쾌장부(快丈夫)의 풍모를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그의 그와 같은 행동에는 생사를 초월한 불승(佛僧)의 금도(襟度)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생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는 동사섭(同事攝)의 보살행을 스스로 지어 보인 것이다.

조헌과 기허당이 거느린 군사들이 금산의 적진지 십리 밖에 이르렀을 때 비를 만났다. 기허당은 여기서 의승군들을 독촉하여 진영을 구축하였다. 비는 계속 쏟아졌고 날이 저물었으나 의승군은 쉬지 않고 진영을 쌓았다. 그러는 한편 기허당은 조헌에게도

“군사에게는 방비가 있어야 우환이 없는 법(有備無患)이므로 오늘 진영을 다 마련하지 않으면 내일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진영 쌓기를 권하였으나 조헌은

“금산의 왜적들은 본래 우리의 적수가 아니므로 속전으로 군사들에게 충성의 마음을 격동시켜 그 사기를 돋구어야 할 뿐이니 진영을 마련할 필요가 없소이다.”

라고 하면서 진영을 구축하지 않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사실 비도 내리고 날도 저물었으니 진영을 쌓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적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 오직 죽음으로써 일전을 결할 따름이니 하루 밤사이 얼마나 진영을 구축하겠는가. 차라리 푹 쉬는 편이 현명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조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허당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어떤 전재이든지 다 그러하겠지만 이번처럼 워낙 적이 강하고 우리 쪽이 월등이 불리한 경우일수록 미리 대비하여 이족의 희생을 줄이고 상대방을 크게 손상시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기허당은 믿었다. 이처럼 기허당이 기초적인 병법을 지켰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그가 겸허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훌륭한 전략가였음을 알 수 잇다.

기허당은 전세를 판단하는 데도 탁원하였다. ‘적들은 우리 쪽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내일 우리가 쳐들어가지 전에 저들이 먼저 쳐들어 올 것이다. 또 불리한 병력인 우리 쪽에서 먼저 쳐들어 간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진영을 구축하는 일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기허당은 빗속을 무릅쓰고 밤을 새워 진영구축 작업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처럼 기허당은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이 철저한 명장(名將)이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충의심(忠義心)으로 의승군을 거느리는 승장이 아니라, 군사적 안목이 대단한 군략가(軍略家)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였기 때문에 청주 싸움에서도 희생자를 많이 내지 않고 크게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임진년 8월 18일, 혹은 8월 27일 이라고도 함) 새벽에 과연 기허당이 예측한 대로 적군은 쳐들어 왔다. 적들은 세 갈래로 나누어 무서운 기세로 밀어닥쳤다. 기허당의 말은 듣지 않고 진영을 마련하지 않았던 조헌의 군사들은 들판 가운데서 적에게 포위 당하고 말았다. 미리 방비를 하지 않았던 그들 의병은 적군의 총탄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앞장을 선 조총수들이 달려들며 쏘는 총탄에 우리 의병들은 어이없이 쓰러졌다. 마냥 적군의 총알받이로 서 있을 수만 없었던 그들은 우리 의승군의 진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앞일을 미리 내다보고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철저하였던 기허당의 의승군들은 진영에 의지하여 싸웠기 때문에 적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희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에워싸고 쳐들오는 적의 대군을 막아내기란 참으로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군이 가까이 육박해오자 조헌장군은 의병들을 지휘하여 적과 맞부딪쳤다. 수 만명의 대군 속으로 겨우 칠백 명의 우리 의병들이 뛰어들어 좌충우돌 싸웠으나 워낙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창이 부러지고 칼이 토막 나서 맨주먹으로 싸우다가 칠백 명의 의병들은 모두 쓰러졌다. 조헌장군도 난투전 속에 휘말려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러는 동안에 기허당이 이끄는 우리 의승군도 적군에 갇혀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청주의 대적을 무찔렀던 장대낫 전술로 맞싸웠다. 더욱 숙달된 신묘한 장대낫의 작전은 많은 적을 쓰러뜨렸다. 기허당도 벽력같은 호령으로 독전하면서 무쇠선장을 휘둘러 적을 쓰러뜨렸다. 그때 한 사람의 휘하 승병이 기허당에게 달려와서

“조장군과 의병들이 모두 전사하였답니다.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더 싸울 수가 없었으니 여기서 일단 후퇴하였다가 이 원수를 갚도록 하시지요.”

하고 그의 말고비를 잡았다. 그러나 기허당은 뿌리치면서

“그들이 죽었다면 우리도 죽을 뿐이다. 어찌 구구히 혼자 살아 남기를 바라겠는가.”

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기허당과 함께 팔백 명의 의승군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새벽부터 시작한 싸움은 하루종일 게속되었다. 흡사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로 사나운 파도를 헤치듯이 그들은 겹겹으로 덤벼드는 적들을 무찌르고 또 쓰러뜨렸다. 그러나 악착같은 왜적들은 조금도 무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덤벼들었다. 아무리 신묘한 전법이라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큰 적 앞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날고 뛰는 재주와 무서운 용맹도 역부족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서운 장대낫도 이제 부러지고 동강이 났다.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했던지 기허당의 무쇠선장도 짧아졌다. 끝내 그들은 맨몸으로 들이받아 싸우다가 죽어갔다. 한 사람, 두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 백명, 이백명 쓰러지는 의승군들의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는 쌓아져만 갔다. 팔백 명의 의승군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고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 속에는 눈을 부릅뜬 승장 기허당의 주검도 있었다. 팔월의 내리쬐던 태양도 이미 산너머로 사라지고 어느새 천지는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맹렬하게 향하던 의승군이 쓰러지고, 승장 기허당이 최후로 꺽이자 살아남은 적들은 검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 왜적들은 그 밤을 타서 모두 금산에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토록 악착같이 항전하며 물고 늘어지는 의승군의 장렬한 최후를 목격한 잔적들은 몸서리를 치면서 그 곳을 떠났던 것이다. 끝내 기허당과 팔백 의승군들은 금산의 적군을 내쫓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억었지만, 결국 왜적을 금산에서 몰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싸움은 이긴 것이다. 을묘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남 땅을 짓밟겠다고 금산에 모였던 적들이 하루 동안의 싸움에서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버리자, 무주(茂朱)에 둔쳐있던 적들도 덩달아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리하여 호서와 호남지방에는 왜적의 그림자가 사라졌고 그로부터 다시는 왜적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기허당의 장렬한 전사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대왕은 크게 애통해 하고 그에게 중추부의 종이품(從二品)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附事)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비록 승려였으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였으므로 불가(佛家)에서의 화장(火葬)법을 쓰지 않고 관가에서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는데 그의 무덤은 지금도 공주 버들뫼(柳山)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기허당은 그날 밤 죽음에서 깨어난 후, 한 손으로는 상처로 흘러내리는 창자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선장을 짚으면서 육십리를 달려가 공주에서 다시 의승병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주에서 가까운 초포천(草浦川)을 건너다가 냇물이 창자 속으로 들어가 끝내는 불당리(佛堂里)에 이르러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무덤이 그 근처의 버들뫼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인조(仁祖) 12년(1634)에 금산에다 종용사(從容社)를 세워 조헌을 모실 때 기허당도 함께 모셨다. 그로부터 이백년이 지난 헌종(憲宗) 원년(1835)에 낙봉 대인(樂峯大人)이란 승려가 화주가 되어 금산의 남쪽 진악산(進樂山)의 기슭에 의선각(毅禪閣ㆍ지금의 寶石寺 안에 있음)을 세우고 기허당 영규대사의 진영을 모시면서 아울러 순의비(殉義碑ㆍ壬辰兵僧將騎虛堂 靈圭大師殉義碑銘)도 세웠다.

그때 금산의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의병장 조헌의 문인들이 칠백의병의 시체를 거두어 한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白義士塚)이라 하여 그 곁에 순의비를 세웠다. 그러나 팔백의승들은 무덤도 없고 비석도 없어서 오늘날까지 금산의 그 격전지에는 칠백의사총만이 남아 있을 뿐, 팔백의승군의 순국 사실은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

4. 금산성 전투

북상하던 왜군은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왜군의 전라도 침공은 그들의 ‘朝鮮8道經略’ 전략의 일환이었으나, 임란 초전상에서도 중요한 작전이었다. 전라도는 아직 왜군이 침략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전술적으로 왜군은 후방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전라도군을 제압하는 한편 곡창인 호남에서 군량미를 징발하고자 하였다. 제6번대인 小早川隆景의 군대는 전라도의 북부지방으로 침공하였으며, 安國寺惠( )의 군대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남부지방으로 침공하려 하였으나 郭再祐, 金( ) 등의 의병에 패하자 북상하여 무주로 침입하여 6월초에 금산성을 점령하였다. 본진을 금산에 설치한 小早川隆景의 군대는 무주ㆍ진안 일대를 점령하고 호남의 首府인 전주 침공을 기도하였다.

7월 초순 금산의 왜군은 態峙를 통해 전주를 공격하였다. 態峙에 진출한 왜군은 완주(完州)의 安德院까지 진출하였다가 패퇘하였다(7월8일). 이보다 앞서 호남에서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던 高敬命의 義陣은 7월 2일 珍山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10일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순절하였다(제1차 금산성전투). 이어 금산의 왜군이 다시 전주 점령을 시도하자, 權慄은 梨峙에서 大捷을 거두었다(梨峙大捷). 두 번에 걸쳐 전주 침공에 실패한 왜군은 금산성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전주 침공을 재시도하고 있었다.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은 勤王하기 위하여 북상하던 중 때마침 금산을 점거한 적세가 매우 치성한 것을 우려한 兩湖의 순찰사로부터 먼저 금산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되었다.

한편 영규는 8월 초열흘게 전라도순찰사가 금산의 적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자 윤선각은 영규를 선봉으로 금산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이에 영규의 의승군은 儒城에 진을 치고, 조헌의 의병진이 이에 합류하였다. 이때 영규가 조헌에게 말하기를

전라도순찰사가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시기는 정하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여 8월 18일을 기하여 금산을 향해 일제히 협공할 것을 약속했으나, 권율이 기일을 변경하자는 글을 보냈으나 미쳐 받아보지 못한 채 급히 금산성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조헌이 금산성 공격을 서두르자 영규도 합세하였다. 이때 영규의 휘하 사람들이 ‘반드시 패할것이 분명하니 가지 마소서,’라고 하자, 영규는 ‘可否를 서로 의논할 때에는 오히려 그의 말을 좆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 사람이 이미 먼저 갔으니 내가 만일 그를 따른지 않는다면 누가 구언학PT는가’ 라고 하면서 조헌과 함께 하기를 굳게 약속하였다.

8월 17일 의병과 의승군은 금산성 밖 10리쯤인 延昆坪에 진을 치고 권율의 전라도 관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나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가 결전한데다가 왜군은 의병의 후속부대도 없고 군영이 미비한 점을 간파하여 그들의 작전에 역이용하였던 것이다. 제2차 금산성전투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다음 史料에서 잘 말하여 주고 있다.

처음에(다음날) 아침에 모두 함께 공격할 것을 약속하여 명령이 이미 떨어졌는데 그날 비가 와서 진영이 갖추어지지 못하니 영규가 말하기를 “군사는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는 것인데 진영을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니 내일은 싸울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헌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하기를 “이 적은 본래 우리가 대적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내가 속히 싸우려고 하는 까닭은 오직 忠義의 격동으로 사기가 한창인 이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요.” 라고 하였다. 이튿날 새벽 적이 밀어닥쳐왔을 때 영규는 지영짜는 일을 대강 끝냈고, 조헌의 군사는 들판 한가운데서 적과 백병전으로 싸웠는데 살상한 수효가 상호 비슷하였다. 적의 대군이 계속 몰려오는데 조헌의 군사가 잠시 물러나 영규의 진으로 옮겨 들어가는 순간에 적병이 뒤에서 밀어닥치니 우리 군사들이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런 중에도 맨손으로 치며 싸웠으나 적세는 좀처럼 꺽이지 않았다. 얼마후 조헌이 난병 속에서 죽음을 당하니 어떤 사람이 영규에게 말하기를 “趙義將은 죽고 적은 더욱 많은 병력이 몰려오니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규가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죽으면 죽었지 어찌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종일 적군을 무찌르며 싸우다가 그 또한 죽었다. 그리하여 의병의 군사들이 모두 다 싸우다 죽었을 뿐 감히 물러나 산 사람이 없었다. 적도 또한 이날 밤에 경상도로 향하여 달아났으니, 이후 감히 호남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여 조헌의 攻城戰은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적의 기습공격을 받은 세이다. 위의 사료는 여규의 신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헌의 성급한 공격의지가 패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조헌 자신이 말한 것처럼 忠義의 격동함을 전투력에 그대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 의병장의 생각이었고, 또 그것이 바로 의병전의 한계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2차 금산성전투의 의병측의 일방적인 패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왜적도 많은 희생자를 냄으로써 군세가 크게 꺽여 殘兵을 거두어 還陣하였다. 이때 적병들의 器聲이 들판에 진동한 가운데 쌓인 시체를 태우는데 그 불길이 3일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금산성에 웅거하고 있던 적은 물로니거니와 茂朱 일원의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해 있던 왜군 전부가 영남지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결국 제2차 금산성전투를 계기로 하여 小早川隆景 이 이끄는 왜군은 전라도 공략에 완전히 실패 한 뒤 다시는 곡창 호남을 엿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큰 국난의 하나였다. 왜군이 침공하자 관군은 도처에서 패주하여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가운데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호서지방에서 起義한 의병은 세 부류였다. 조헌을 중시으로 한 의병진은 學綠을 기반으로 호서의 전역에서 召集되어 그 규모가 가장 컸고, 의병항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다음에는 오랜 전통의 향촌공동체와 애향의식의 토착적인 성격이 적의 침공에 대항한 鄕兵의 활동이다. 이들은 대체로 在地士族에 의하여 世居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신분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義僧軍을 조직하여 활동한 예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公州에서 起義한 靈圭이다.

호서의병의 특성은 儒生을 중시으로 이루어진 義軍과 승려에 의하여 조직된 義僧軍이 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여 왜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趙憲의 의병진과 영규의 의승군은 부산과 서울을 잇는 요충지(咽候)인 청주성을 탈환하여 남북으로 잇는 적의 연결망을 차단하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헌ㆍ영규의 양군은 금산성의 왜군을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실정은 호남지방을 제외한 국토 전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버린 상황에서, 전라도는 국난극복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금산성의 탈환은 절대절명의 일이었다. 兩湖의관군과 의병은 금산성 탈환에 혼신을 다하였다.

금산성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전투는 態峙戰鬪, 第1次 錦山城戰鬪, 梨峙戰鬪 등 모두 치열한 격전이었다. 조헌과 영규의 군대는 제2차 금산성전투에서 비록 800義士가 모두 순절하였지만 왜군을 금산성에서 물러나게 한 큰 승리였다. 왜군은 이 전투 이후 남쪽으로 퇴각하여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임란기 호서의병을 영도한 인물은 당시 사림의 중망을 받고 있던 趙憲이었다. 그러나 의승군을 이끌고 조헌과 함께 청주성 탈환과 제2차 금산성전투에 참여했던 영규는 실질적인 작전을 펼친 僧將이었다.

영규는 청주성 탈환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관군의 주요 인물들도 그의 호령에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였다. 의병은 대체로 훈련되지도 않았고, 잘 조직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규의 의승군은 짜임새 있게 조직적으로 행동하였고, 또 전세의 불리함에도 義로써 영도하는 조헌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여 죽음을 같이 하였다.

영규는 조헌과 합동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면서도, 당대 그리고 후대에까지 사림의 총망을 받던 조헌에 가리어 그 공적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제 영규의 眞面이 밝혀져 義僧將 靈圭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의승군은 의병과 달리 많은 제약과 위험 속에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도 그 전과의 대부분은 의병이나 관군의 전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의승군들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오직 구국일념에만 전력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승군은 천시ㆍ억압받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국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며 공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로 피신해 있던 선조대왕도 평소 친분이 있는 휴정 서산대사를 불러 이 난세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의논하게 된다.

서산대사는 선조대왕에게 즉각 원병을 청할 것과 전국민에게 항쟁할 것을 건의하고, 불교의 젊은 승려는 모두 전쟁에 임하게 하고 노약자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이에 선조는 옳다(義)고 기뻐하시며 즉시 서산대사를 '팔도 16종, 도총섭'의 직을 수하였다. 이때부터 서산은 폐불정책 속에 나라의 위급함을 당하여 당상의 예우를 받는 불교 최고의 영도자가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의승군 활동이 눈부시게 전개된다. 서산대사는 전국의 모든 사찰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승군에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로 인해 오랜 핍박 속에서의 침묵을 깨고 전국의 승려가 앞다투어 의승군에 지원해 전후방에서 앞장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임진왜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의 승장 서산, 사명 대사 그리고 영규, 자운, 옥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승장들이 이로 인해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 것이다.

서산대사의 문도 제자, 송운 사명대사는 기허당 영규대사ㆍ서산대사와 함께 임진란을 예측하고 승군훈련에 주력했으며 전쟁발발 동시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800여 명의 의승군과 고성 등 관동지역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 기허당 영규대사는 전라지역에서 1,200여명의 승군으로 권율장군과 함께 싸우다가 뒷날 800의승이 금산 황산벌에서 모두 순직했다.

서산대사는 친히 1,500의 승군을 모집 순안 법흥사를 중심으로 싸웠는데 날로 의승군 지원자가 많아 전국 방방곡곡 사찰의 모든 승려가 신도와 함께 주력부대에 합류, 전투의 선봉장이 되어 용전분투하였다. 이같이 전국사원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구국봉기에 앞장서 수많은 전과를 세우며 눈부신 활약을 했던 것이다.

서산ㆍ사명대사가 이끄는 의승군이 주력부대가 되어 거듭되는 승전고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부패한 관료에게 시달려온 피폐한 백성들이 승려들을 따랐고, 이들이 관군보다 지역지리에 밝고 첩보수집에도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민심을 얻은 의승군들은 군비를 자급자족하며 독자적으로 혹은 지원부대로 맹활약을 했으니 관군은 거의 의승군에 전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전과는 모두 관군이 차지하는 실정이었다. 이를테면 전과 올리는 사람 따로, 훈장 받는 사람 따로인 셈이었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明軍과 함께 일곱 달만에 평양성을 회복했는데 이는 서산대사의 공훈이었다고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같이 서산ㆍ사명을 중심으로 의승군의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되었지만, 이들은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거나 신분을 보장받은 것도 아니다. 서산대사가 팔도 도총섭 승군대장이란 공식인 직함을 수여받은 것이 전부인데, 사실은 이것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백의종군한 의승군에 대한 공식적인 신분보장이었을 따름이라 하겠다.

○ 선조대왕 환도 어가도 의승군이 했다.

그 당시 관군이 얼마나 허약하고 믿을 수가 없었으면 선조대왕의 어가를 승군이 호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는가? 서산대사는 선조대왕의 요청에 따라 정예 의승군 700여 명을 엄선해 선조대왕의 환도 어가를 호의하게 했다. 이후 사명대사에게 승군지휘권을 위임하고 묘향산으로 귀향하였다.

5. 영규대사의 전설적 형상

1) 민중영웅의 탄생

영규대사에게 僧將이란 호칭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한데 전설적 형상화를 거친 주인공으로서 영규대사를 지목할 경우 승장이란 말보다는 오히려 민중영웅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 아래의 설화를 보기로 한다.

늘티고개마루가 바로 영규대사가 출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속성은 박가이니, 박영규였지요, 옛날만 해도 그곳은 아주 험한 산으로, 그 험한 곳에서 영규대사가 자랄 때 밤에 대변보러 가는데 “너는 밤중에 변을 보다가 범한테 물려가면 안되니 그러지 말라” 이렇게 어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렸어요, 한데 “아버님 호랑이가 사람을 이기는가 지는가는 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방안에서 변을 보는 것은 다른 이를 괴롭혀 주는 일이니 안됩니다” 그러더래요. 이렇게 마을 안 듣고 부득불 밖으로 나간 아이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자 집안 어른들은 호랑이한테 물려간 줄 안고 걱정이 태산 같았더래요. 그런데 한참있다가 보니까아이가 호랑이를 잡아 가지구선 한 손으로 간단히 끌고 들어오더랩니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변을 보다가 호랑이가 달려들길래 한 손으로 호랑이를 밪아 끄고가는 동안 죽더라” 그래요. 이 일이 있고부터 집안 어른들은 아이 때문에 멸문지가가 될 것을 두려워 하다가 마침내 영규대사를 갑사로 출가를 시켰답니다. 하지만 처음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절에서는 부목에서 공양주, 공주에서 행자승으로 올라가는 법인데, 따라서 부목으로 있었더랩니다. 거 나무를 하는 일을 하지요. 이분이 나무를 해오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나무가 오는지 산이 들어오는 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70-80개의 서까래 같은 아궁이에 엄청나게 나무가 들었는데 어떤 머슴 부목이 해도 감당할 수 없었는데 영규스님이 혼자해도 나무가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나무하러 갔다면 항산 나 1개, 도끼 1자루를 매일 엃어버리고 오는 거여요. 주지승이 “참 이상한 일이다. 너는 매일 같이 그것을 잃어버리느냐” 꾸짖으면 “나무하느라 정신이 팔려 연장을 늘 잊곤 합니다.” 하더래요. 그 후 난리가 일어나자 그동안 잃어버렸다고 하던 도끼와 낫을 바위 밑에서 꺼내 가지고 이를 녹여 무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스님이나 부처가 반드시 법당에만 있는 것이냐, 절에와 있으면 국난을 예측했으니 승려를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대사라고 했고 영규라는 호와 선각자라 해서 영규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에 이곳 괴목아래서 조헌선생과 금산벌 싸움의 계략을 짰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규대사가 승장에 머물지 않고 애 민중영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이 물음에 위 설화는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본다. 미천한 신분에서 과인한 용기와 힘을 가지고 태어나 아이 적에 벌써 대호와 맞서 싸워 이겼다고 했으니 아기 장수설화의 서두와 다른 데가 없다. 대략을 말한다면 아기장수설화는 출중한 용력의 소유자는 장차 모반할 가능성이 높다하여 소문이 나기 전에 부모가 서둘러 아기를 살해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역시 영규의 집안에서도 6-7세에 불과한 영규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가 멸문의 싹을 없앨 방도로 갑사에 출가시켰다고 했으니 아기장수와 같은 비극적 운명을 답습하지는 않고 있다. 어쨌든 出家는 멸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탈출구로 여겨지고 있다. 출가 후 영규대사의 과인한 힘은 땔감이 부족한 甲寺에서 60-70개 아궁이를 지필 나무를 혼자서 도맡아 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상징화된다. 힘만 있다고 해서 영웅이라 할 수 없는 것이거니와 영규대사는 異人들이 그러하듯, 국운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음을 빠뜨리자 않는다. 닥쳐올 임진란을 위해 장차 무기가 필요할 거란 생각에서 나무하러 갈 때마다 낫과 도끼를 바위 밑에 秘藏하는 것에서 우리는 그의 뛰어난 투시력을 확인한다.

위의 전설이 흥미소 위주의 화소들에 의한 비사실적 부위 위주로 엮어진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영규대사의 사실적 전기가 무미건조하고 신상명세적 활약담에 머물러 있을 뿐인데 반해 여기서는 민중들이 상상하고 해석한 나머지의 영웅적 면모가 여지없이 표출되고 있다 하겠다.

2) 임전무퇴의 승장

영웅의 진정한 뜻은 전투를 통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자로 테두리를 잡을 수 잇다. 또한 굳센 의지에다 뛰어난 지략을 겸비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영웅으로 대접받아 마땅하다면 영규대사는 그 반열에 능히 들어가고도 남을 위인이다. 영규대사의 武士的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再造藩邦志나 殉義碑, 그리고 大東奇聞 등의 기록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배경이나 사건의 자의적 서술이나 익명적 처리와 달리 한문으로 기록된 이 글들에서는 무엇보다 대사의 전장에서의 활약상 및 마지만 전투상황이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 급박했던 상황까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殉義碑의 일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대사의 속성은 朴氏이며 密陽人이다. 서산대사의 高弟로 항시 공주 靑蓮庵에 머물렀는데 신기한 힘을 지니고 禪杖을 갖고 무예를 연마하길 즐겼다. 왜군이 쳐들어와 선조가 피란을 가지 대사는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3일간 곡을 하다가 스스로 장군의 추천하였다. 이때 州牧이었던 許頊이 장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고 이에 승군을 규합하니 수백인이 휘하에 모였다. 防禦諸將軍들과 청주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관군이 허물어지자 대사는 홀로 적과 싸웠다. 의병장 조헌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여 병영을 연대하고 주서문의 왜군을 압박하고 크게 무찌르자 적들은 밤을 틈타 달아났다. 趙公이 장차 금산의 왜군을 진격하려 하는데 대사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대사는 “조공이 홀로 죽게 할 수는 없다”며 같이 전투에 참가했다. 군의 경계에서 10리쯤 가지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진영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에 대사는 “병사는 有備無患인데 천천히 병영부터 세우는 것이 어떻소”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조공은 “적은 우리가 대적 할 수가 없지만 다만 충의로서 사기를 고무하여 속히 싸워 보는 것이 낫잖겠소” 하고 했다. 다음날 새벽 적들이 들이닥쳤으나 아군을 지원해줄 부대가 없어 조공은 전사했다. 이때 누군가가 영규대사에게 “적군이 닥쳤는데 왜 퇴각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사는 큰 소리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발랄 것인가” 하고 말했다. 싸움이 한층 치열해지면서 대사 또한 숨지고 말았다.

훗날 영규대사가 각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까지에는 젊은 날 무예를 연마했던 이력이 퍽이나 도움이 되었을 터. 이는 미래 전장에서의 활약과 연결시키더라도 아주 자연스럽게 복선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한 자기 호신이나 의협심을 과시하기 위한 무술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국난에 대비한 것이라는 데서 그 행위는 선지적 통찰로까지 미화될 수가 있다. 거기다 자발적으로 나서 의승군을 규합하고 선봉에 선 모습은 선방에서 수도를 닦던 승려였다는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한편 전장에 나서서도 대사의 출중한 지략과 작전은 돋보였다. 조헌과 대비되어 형상회된 위의 글을 통해 우리는 거듭 대사가 얼마나 출중한 장수적 자질을 갖추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즉 전후 상황을 온전하게 숙지하지 못하고 의협심과 성급함을 앞세워 왜군을 뒤쫓다가 조헌의 부대는 들판 한가운데서 중과부적의 상태로 적에게 노출되는 위기를 맞고 만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조헌의 고집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온 것이었다. 바로 전에 영규대사가 일러준 대로 진격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진지를 먼저 구축하고 기회를 기다렸다면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유비무환이야말로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는 영규대사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바람에 조헌는 700duad의 군사와 더불어 전사하는 비극을 맞고 만다. 그러나 영규대사의 무사적 용맹과 희생정신이 찬연하게 빛나는 것을 그 다음 대목이다. 대사는 밀물처럼 닥친 왜병들과 무모하게 싸울 필요없이 퇴갈할 말 리가 없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접전하다 무망하게 죽을 필요가 없다고 일단 후퇴를 건의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는 전우애를 상기하며 기꺼이 조헌의 뒤를 이어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고 만다. 영규대스이 이 같은 행적은 傳燈錄에 씌어진 대로 勇과 烈과 忠을 모두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의 전형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규대사의 비가 발휘한 영험력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1950년 정오에 미군 폭격기 두 대가 날아와 공주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계룡면 사무소 앞에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렸다. 그때,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한 위치를 말하라면 계룡면 사무소 앞은 큰 길이고, 길 건너는 영규대장 비각이 서 잇었다. 폭탄이 바로 그 자리에 명중되는 순간 계룡산을 갈라놓을 듯한 음향과 아울러 큰 화재가 일어났다. 피난민들은 미리미리 내뺐는지 人影이 희소한 이때 이 화재를 끝까지 구경한 사람은 공주읍 국민회 간부 민병하부장을 비롯하여 오순호 및 송종섭 군이었다.

조선말엽까지 영규대장 비각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다니는 守令 方伯들이 그 비각 앞을 통과할 때 말에서 내려 걸어가지 않을 때는 그 말발굽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만한 자들은 下馬하기가 아니꼬워서 딴 길로 돌아가던 것이었다. 그러나 경술년 뒤로 그런 영감이 없어지고 지금은 남의 학대를 참아가면 쓸쓸하게 서 있으니 예일조차 미신의 말이 되고 지금 저 불 속에서 재만 남으리라고 생각하던 것이다. 세 사람은 멍하니 서서 보고 가희 “슬픈 일이구나 영규대장이 불타다니…”하면서 민부장은 개연히 탄식하는 소리를 내지만 오군은 또 민동지의 탄식 소리를 못 알아듣고 “좀 더 구경하고 갑시다” 라고 말하고 송씨는 또 오군이 갑사로 들어가는 줄만 알고 “안돼요 경천으로 가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불기둥이 가늘어지면서 뽀얀 연기가 포삭포삭 올라올 때 세 삼은 다시 불타는 자리로 가까이 가서 본 것이다. 놀랍게도 영규대장 비각의 전후 좌우가 바짝 타버렸지만 비각만은 불길하나 않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일찍부터 영규대사 비는 下馬碑로서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행인들이 그 앞에서 경박한 행위를 자제할 줄 알았고 하마가 싫으면 일부러 길을 에둘러 갈 정도의 전통적 예의를 지켜왔다. 지역민들는 전부터 수령 방백일지라도 말을 탄 채 앞을 통과한자는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언을 되새기면서 영규대사에 대한 숭배정신을 게승해 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사의 비는 염감을 잃어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놀림이나 소외의 대상으로 변해 쓸쓸히 방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세 사람이 미군의 폭격을 맞고도 비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 충격적 광경이 목도되기에 이른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어찌 비각만 온전할 수 있었는가. 이 의문은 그것이 단순한 비가 아니라는 점을 일러주거니와, 오랫동안 잊어왔던 영규대사의 영험력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 설화적 여건을 살려내기가 어렵다한다. 실제 설화 발생이 희귀해진 것이 시대에 위와 같으 설화가 내재한 의미는 한결 뜻이 깊거니와 시공을 초월해 영규대사의 자취를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고 잇다. 이로 보건대 기백년 전에 산화한 대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그 영령은 시대를 넘어 불멸의 생명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할만하다. 임란시기의 것은 물론 현재까지 전승되고 영규대사 전설에서 지정 지향하고 있는 담로적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새삼스럽게 위 설화는 잊고 있던 위인의 참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데서 퍽 소중한 各篇으로 여겨진다.

6. 영규대사와 갑사

영규대사가 출가한 뒤 갑사의 말사 靑蓮庵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전설적 공간으로서 갑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한결 높여준다. 출가이전에 벌써 대사의 타고난 비범성이 복선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갑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영웅적 자질을 꽃피운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그는 그곳에서 수행하는 틈틈이 선장을 들고 무예연습에 진력했다고 했으니 호국 도량으로서의 당시 갑사의 분위기를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그의 입장에서 갑사는견디기 힘든 통과제의적 공간일 수 도 있었다. 물론 강제한 일은 아니지만 그가 저르이 땔감을 거의 혼자 도맡아 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궂은 일일수록 일신을 돌보지 않고 솔범하던 행자 시절의 자취는 마지막 전투에서 일신을 초개같이 던지며 싸우다 장렬히 숨을 거두는 것과 그대로 접매되는 바 있다.

갑사의 유적 중 철당간 지주에는 영규대사와의 인연담이 결부되어 있다. 처음 영규대사는 갑사를 중심으로 하여 승군을 조직하고 전장 터로 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승군조직의 명분을 아무리 역설해도 도무시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대사는 그 뒤에 우뚝하게 솟은 당간지주를 올려보다가 갑자기 철당간 위로 몸을 날려 28칸의 까마득한 꼭대기에 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다시 한번 창의를 역설하는 사자후를 토했고 경악한 스님들이 더 이상의 불평은커녕 휘하에 서로 들어가겠노라 다투어 따라 나섰다고 한다.

實記에 의하면 대사가 조헌장군과 어울려 여러번 전투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데 전설에서는 갑사 아래 중장리 괴목정에서 이들이 처음 조우해 각자 부대를 조직하기로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후 조헌은 옥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았으며 대사는 갑사에서 궐기한 승병을 이끌고 그해 8월 청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어 대사는 조헌부대와 함께 錦山의 臥龍平으로 진격하는 데 조헌의 뒤를 5000여명의 왜병들과 싸우다 그 부하 700여명과 더불어 순사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어떤 전설은 이와 달리 영규대사가 와룡평 싸움에서 전상을 입고 산 너머 남일면 보석사까지 왔다가 잠시 여기서 치료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다가 계룡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산을 넘고 보문산 자락인 중암사를 거쳐 계룡산에 들어갔는데 결국 전상이 덧나는 바람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든 영규대사와 공주 권역은 각별한 인연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하겠다. 특히 갑사와 계룡산은 영규대사라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가능케 한 신령스런 공간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여러 역사 유적들 역시 영규대사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한층 각별한 으미체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하겠다.

7. 결 론

임진왜란을 당해 나라가 풍전등화같이 위태로울 때 청주성 탈환에 성공한 기허당 영규대사를 시발점으로 서산ㆍ사명을 비롯한 경헌ㆍ인오ㆍ법견ㆍ태능ㆍ신열 등 수많은 승장들과 전국사찰의 승려들이 거의 다 의승군에 참여했다.

한편 의승 水軍으로는 자운ㆍ옥향ㆍ삼혜ㆍ의능 등 수군승장을 비롯한 여수 흥국사 중심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거의 의승수군에 의존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나 세상에 너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문제도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거북선 제작도 보월ㆍ보운 스님의 반야용선에서 착안하여 설계 제작을 이순신께 수 차례 건의했다는 기록이 왜적장일기에 나와 있다고 한다.

아무튼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조선조 오백년의 국방사에 중추적 역할을 해 온 것이 의승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국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며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조달해가면서 전쟁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이같은 의승군 활동 사항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민족의 수치라 하겠다. 종교적 편견이나 개인의 이익을 떠나 민족적ㆍ역사적 차원에서 조속히 정리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매우 중요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창달해온 불교가 정치적ㆍ종교적 목적으로 탄압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승려는 민중과 함께 爲國忘私하는 순교정신으로 의승군 활동을 수행한 것이다. 승려들은 7천의 하나로 천시와 억압받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시에는 전투 주력부대로, 평시에는 도성을 쌓고 부역하며 왕실 및 관헌 신축작업과 경계임무 그리고 온갖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우받는 유생ㆍ관리ㆍ의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라도 의승군 봉기의 사회적 배경과 그 활약, 그리고 기능과 그 정신에 대해 올바로 연구한다만 오늘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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