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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 No : 67639
  • 작성자 : 펌
  • 작성일 : 2009-04-26 06:49:09
  • 조회수 : 1698
  • 추천수 : 1

5.18광주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I. 문제의 제기

지만원 박사의 저술은 기존의 민중이 인식하는 12.12와 5.18에 대한 인식들은 잘못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전면적인 재수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저자의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객관적인 수사기록과 판결문, 진압군과 무장시민군 쌍방의 수기 등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주의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근 20년동안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정석이 化石처럼 굳어져서 각종 교과서와 근현대사 역사책에서 金科玉條처럼 우상으로 숭배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책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외쳤다는 발상과 용기에서 가히 혁명적인 책이다.

사회에 퍼진 기존의 인식들 “12.12는 신군부와 하나회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불법쿠데타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에게 폭압적 강경진압을 실시하여 무참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다.”

5.18단체의 공식입장

“5.18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적 투쟁에 의해 진실이 규명되었고, 그 진실에 기초하여 법적, 제도적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국가권력을 강점했던 이른바 신군부세력들이 법정에 세워져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단죄됨으로써 사법적 판단까지 마무리되었다.”(5.18단체의 긴급성명서에서, 2006.12.21)

- 한국사회의 급속한 좌경화 과정, 5.18이후의 뒤처리 과정에서 시작된다.

12.12와 5.18이전에는 군대가 국민들로부터 혐오의 대상도 아니었고 매도당하지는 않았다.

좌파 운동권의 급성장과 대중성 확보에 성공⇒87체제의 등장;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접근을 통해 좌파를 비호, 옹호하는 숙주의 확보, 각계 각층의 요직에 침투·공작, 방송언론에 침투하여 여론을 유리하게 조작, 사법부에 침투하여 판결을 조정⇒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의 탄생.

- 김대중의 친북정책; 햇볕정책의 시동, 낮에는 친미, 밤에는 친북정책의 이중성, 2000년 정상회담의 대가로 5억달러 상납, 1998년 현대아산으로 하여금 금강산관광 시동, 현대그룹 등 대기업에 북한 투자를 강요함.

- 노무현의 친북정책; 밤낮으로 노골적 친북정책, 청와대에 안희정, 이광제 등 주사파들이 득실됨, 국가정보원과 공안기관의 축소 및 무력화, 통일부에 햇볕정책 추진요원의 상주, 교육부에 좌파-관료연대를 형성하여 좌파시민단체에 대해 보조금 지급, 빨치산 등 좌익사범 등에 대한 복권, 보상, 대한민국 정체성 뒤흔들기 시도, 국가보안법 무용지물화, 2007년부터 개성관광, 2012년 한미연합사 해체 시도.

과거를 뒤 볼아보니, 운동권은 민주화세력이 아니라 친북좌파로서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 등장이후 그들의 친북정책과 노골적이 좌파행각에서 여과없이 그 실체가 벗겨졌다. 5공(반공보수)세력이 퇴조하니 좌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어느 세력도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민주화로 위장한 좌익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 북한의 대남공작의 실상, 5.18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나?

- 12.12의 본질은 하나회와 신군부가 주축이 된 쿠데타인가 아니면 정승화총장 연행사건으로 비롯된 우발사건인가?-국군의 명예회복

- 광주사태에서 진정한 공격자와 가해자는 공수부대인가, 무장시위대인가?

- 대한민국의 정체성 회복은 79-80년의 현대사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달려있다, 과거의 역사를 누가 장악하는가라는 역사전쟁의 의미를 지닌다.

II. 역사란 무엇인가?

- 과거의 무수한 事實⇒歷史的 事實⇒역사가에 의해 해석, 평가된 歷史認識⇒교육체계, 활자매체, 책, 언론의 전파⇒대중들의 역사인식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지난 사실의 총합적 집합이 아니라 사료를 수집, 정리, 평가, 해석하는 작업을 거친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 해석된 다듬어진(料理된) 서술된 역사(written history)이다.”

- E. H. Carr, "What is History?"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부단한 대화, 과거란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고, 현재란 역사가를 말한다. 부단한 대화란 사실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역사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새로 서술된다는 의미.

- 과거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세세하게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서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해 진다.

- 相對主義; 역사연구에서 객관성의 확보가 어려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사실보다는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의 유리한 입장과 편견에 의해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 역사의 속성; 연속성, 역사는 시간과 함께 진행되며 흐르는 물과 같아서 청산과 단절이 어렵다.

- 역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만인이 共有하는 것’이지 특정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다. 공유-찬반 토론, 참여, ** 망월동 5.18국립묘지-국가가 관리하는 기관이므로 누구는 참배 불가라고 방문객 배제는 공민권 구속사항, 왜 북한방문객들은 환영하면서 특정 남한 인사는 배제되어야하나? 광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공화국보다 위에 있나, 헌법보다 상위?

1. 새로운 史料의 발견;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 부산에서 발견=화랑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됨, 90년대 중반 코민테른 문서와 베노나 파일(Venona file)의 암호해독= 미국공산당이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령에 의해 활동한 사실이 폭로됨. 엘저 히스의 간첩행위. 미 국무부내의 간첩 활동, 조셉 메카시 상원의원의 “미 국무부에 200여명의 간첩이 있다”는 발언 진위,

2. 새로운 證人이나 證據의 등장; 케네디의 암살에 대한 새로운 사실 및 애인, 아이젠하워의 애인 등장, 정인숙사건의 진상, 탈북자군인들의 5.18북한군 개입의혹

3. 같은 사료라도 시간, 장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평가나 해석.

자유민주국가에서 모든 역사는 모든 시민들이 공유하는 것으로 일개 특정 단체의 독점물이나 전유물이 아니다. 전제왕조에서는 왕이 역사편찬에 관여하고, 공산국가에서는 역사는 공산당이 독점한다.

4. 현대사에서 평가와 해석의 어려움; 사료가 많고, 계속 발굴되는 진행형이고, 가까운 과거이기에 냉정함 보다는 자신의 당파성(지역적, 학벌, 문벌, 종파, 국적, 징치적 이념적 성향)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냉정하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ex) 김대중과 노무현의 인물됨됨이와 친북좌파 성향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한 참 지나서야 제대로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 이승만, 박정희의 경우.

III. 역사에서 용어문제

- 민주화운동의 개념-운동이란 장기지속적으로 진행되며 결사체가 조직되면서 특정한 목적을 가진 방향성을 가진다. 목적이 민주화라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에 대한 승복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헌법의 테두리내에서 합법적으로 벌리는 운동을 말한다. 국회에 대한 청원, 서명운동, 등 평화적 운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차아티스트운동,

- 혁명과 쿠데타, 1917년 10월 레닌이 주동한 볼세비키의 무장봉기는 혁명인가? 5.16의 경우, 군사혁명의 의미는? 4.19학생의거는 혁명인가?

-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인가?; 교도소습격, 무기고 탈취, 경찰서와 방송국 방화, 총기난사 민주화운동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계급혁명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사태, 민중항쟁, 무장폭동, 무장봉기, 무장폭동, 民亂, 叛亂,

- 5.18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법원의 판결이 아니라 역사가의 영역이다. 법이 학문의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 5.18은 학문적 영역에서 史料를 통해 토론과 연구의 결론이 아니라 정치권의 야합에 의해서 판검사에게 압박을 가해 강제로 규정지어진 성격이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법과 정치가 역사의 영역 침해가 아닌가?

- 2000년이후 5.18에 대한 여론이 변화가 감지된다. 여론조사, 2003.9.5-7, www.chosun.com에서 여론조사, 12,024명중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11,288명(93.88%), 민주화운동이다. 548명(4.5%), 기타 188명(1.56%), (지만원, II, p.11).

- 북한에서 민주화란 “공산정권에 의한 공산통일.”

- 남한의 각종 소요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북한 비밀문서의 공개가 필수적 요소이다.

IV. 5.18특별법의 위헌성: 법과 정치의 관계

- 一事不再理의 원칙 위배, 한 사건을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 정치권과 법관들이 결론을 미리 예단하고 의도를 가지고 재심. 한 사건을 두고 80년의 검사와 판사들과 90년대의 판검사들은 전혀 다른 판결을 내렸다.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와대와 야당, 광주시민들의 눈치보기가 성행했기에 자유로운 판결을 하지 못했다. 자연법 정신이 실종되었다. 고무줄 판결이 이어졌다. 마녀사냥식 재판, 인민재판, 여론몰이식 재판?

- 뒤집혀진 판결과 뒤집혀진 역사

1. 12.12에 대한 신군부와 하나회 음모설은 허위이고 조작이다.

2. 초기 공수부대의 진압의 미숙은 퇴로를 차단하면서 강경진압을 결정한 정웅과 윤흥정에게 책임이 있고, 정호용은 책임이 없다. 특히 18일, 초기대응의 미숙성, “발포에 대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소요사태를 필요이상으로 키웠다.” 아니면 18일 완전히 철수를 했어야했다.

3. 발포는 상관의 명령이기보다는 자위권의 일환, 전두환이나 정호용이 명령하지 않았다. 진압군 일선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발포가 동시발포거나 시위대에서 먼저 발생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어느 바보가 당하고 있나?

4. 5.18은 4.3사건은 역사뒤집기를 집행한 일란성 쌍둥인가?; .

악성유언비어⇒거짓선동⇒폭력(파괴, 방화, 살인)⇒모략(뒤집어씌우기)⇒집단적 억지주장⇒역사왜곡에 이르는 일련의 전술

5. 촛불시위와 5.18의 유사성은 없는가? 유언비어 유포, 시위의 폭력성, 반미성향, 차이점은 공권력의 발포력 억제로 인해 엄청난 댓가를 치렀다. 80여명의 전경, 경찰의 부상자라는 희생이 감수되었다.

V. 북한 정권과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의혹

- 북한특수부대 개입은 광주시민과 관계가 없고 책임질 성격이 아니다. 광주시민들이 초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별개의 문제다. 계엄군과 공안당국, 정부가 방지 못한 책임을 져야한다. 민주화운동이란 용어와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5.18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북한개입 의혹에 대한 발언자에 대해 명예훼손과 고소고발은 부당하다. 역사적 진실 규명 차원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한다.

- 북한군 특수부대 의혹을 밝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북한의 명예를 지키려는 이적행위가 아닌가?

- 북한의 고정 간첩망을 통해 광주교도소 습격을 사주; 5/21, 무장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사건, 총 수감인원 2700명에 간첩 및 좌익사범 170명 수감.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6차례에 공격으로 총격전, 사상자 발생, 시민군 26명 사망. 이 대목에서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보기 어렵다. 국가전복의 목표???

- 간첩 이창룡의 검거; 23일, 오전 6시경 남대문 경찰서에 잡혔다.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종을 압수했다.

- 26일 전남 일대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 카빈, M-1, 기관총 등 5,403정,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발, TNT 10여상자,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의 탈취되고 이 중 군용차 34대, 경찰차 50대, 아시아자동차 328대, 일반차는 367대로 구성되었다. 정규군 2개 연대에 해당하는 규모. **의혹-일반인들이 무기고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배후세력이 있다는 증거다.

- 26일 발생한 민간이 사상자 35명 중에서 13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는데, 총상 13명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한 사망이다. 총상의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다. 계엄군에는 카빈총이 일체 없었다. 시민군내에 불순분자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지만원, II, 213-215).

- 이재춘(당시 21세, 1959.·11.7일생, 방위병신분으로 시민군 기동타격대에서 활동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음), “방위병으로 기동타격대로” 1987,7월에 글,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만원, III, 65),

- 사망자 13명의 신원미상자, (p.107), 보상금 15,000달러.

- 무등갱생원의 M-16무장 36인조; 끝까지 무장해제에 저항, “당신들은 무기를 반납하면 돌아길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면 돌아갈 집은 커녕, 밥 한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이제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지만원, III, pp.113-14), 1개조 5-6명으로 낯선 인물들로 구성, 36인조는 함께 움직이고 함께 행동함, 북한 특수부대의 의혹, 그들은 슈류탄, 대검, M-16으로 무장됨. 5/27일에 광주 재진입 작전시 사살된 시민군에서는 이들의 흔적이 없었다.

- 5.18민주화투사 윤기원의 월북사건; 1991, 3, 보상금 2억원 받고 월북.

-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 꾼다> “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했다.”(p. 240). "북한의 가장 큰 대남 공작부 3호청사는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삐라를 만들어 광주로 보냈다.“(p.241).

**광주사태 기간 중 북한의 동향,

김일성은 5월 17일 심야와 광주사태 발생 당일인 18일에 연이어 군·정·기관 고위관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국내정세를 검토하고 통일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인민군은 18일 전군 연대장급 이상 전원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의 정세를 평가한 후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19일에는 북한전역에 걸쳐 군수물자 동원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점검했다. 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군사대표단장 백학림 중장이 북한은 통일을 위해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공언했고, 21일에는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군인의 외출을 일체 금지시키는 한편 출장중인 군인과 당원을 27일까지 귀대하도록 지시했다(지만원, II, 362-63).

- 이영명 교수, “광주사태는 남한에 배치된 북한의 지하당 소행”<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p.164).

- 謀略戰의 실태; 시민군의 일부가 공수부대 유니폼과 비슷한 예비군 군복을 입고 아파트 등에 다니면서 나쁜 행위들을 저질러 놓고 이를 공수부대 행위로 모략했다. 카빈, M-16, 기타 총기를 가지고 시민들을 뒤에서 쏜 행위도 모략전의 일종. 시체를 난자하고 불에 그을려 놓은 것. ** 나체 여인의 등에다 뒤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 경우, 나체 여인이 둔부를 드러낸 채 목이 잘린 사진도 있고, 전기톱에 의해 얼굴이 가로로 잘려진 시신도 있는 등 잔인하게 죽임은 당한 것은 공수부대가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2006/12/20 탈북자군인연합 임천용의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사진들).

- 북한군 개입의 구체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개입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흔적과 의혹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황장엽과 탈북자 군출신들의 북한군 개입의 증언과 확신은 무엇을 말하나?

VI. 5.18 성격의 재조명

- 시민전투원들의 사회계급; 1심에 357명이 재판, 80%가 17살에서 22살까지의 청년들,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공장노동자, 점원, 무직자(실직자), 구두딱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불량배, 넝마주이, 전과자 등으로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하층민과 노동자계급이 주축, 잘사는 사람에 대한 분노, 평소 억압을 가했던 공권력, 경찰에 대한 사회적 분노의 표출, 축척된 소외감, 박탈감이 일시적으로 폭발된 것으로 민주화를 위한 의식적 운동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 5.18 무장시위군의 궁극적 목표는?; 무장시민군 대장 김종배(조선대 무역학과 3년, 후일 열우당의원), “(무장폭동과 폭력혁명으로) 최규하 정부의 전복.” 1980년 8.14일 피의자 신문에서(지만원 III, 52-53).

- 실패한 무장봉기; 파리코뮨(1871), 1917년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

- 무장시위군의 만행, “무장시위대들은 거리에서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는 등 공포분위기를 연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장례비를 치른다는 명분으로 돈을 뜯어내고, 여염집에 들어가서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다.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집에 들어가서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서 거리로 나갔던 시민들도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지만원 II, 287).

- 5.18단체의 정체성? 건국60주년 배척사건, 2008. “국립묘지란 누구나 참배할 수 있어야.”

- 김용규(15년간 암약한 거물간첩),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치고, 지하당 개입이 없는 사태는 하나도 없다.” “민주화는 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서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으며,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5.18을 북한에서는 5.18민중항쟁이라 부른다.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소리없는 전쟁> (지만원, III, pp.193-94),

-김일성의 비밀교시(탈북한 북한간부들의 증언과 비밀자료로 엮은 것, 산경신문의 2004년 5회에 걸쳐 연제)를 보면 5.18광주의 북한개입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결정적 시기>

(1976년 8월 대남공작원들과의 대담)

결정적 시기를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성속되게 됩니다....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 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위 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1974년 1월 대남담당요원들과의 담화)

결정적 시기가 조성되었다고 해도 그 시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4.19때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모스크바에서 지도할 수 없듯이 평양에 앉아서 남조선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혁명의 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 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하에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쿠데타입니다...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주목할 사실은 신군부라는 용어가 김일성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탈북자 김용화(북한사회안전부 대위출신)의 증언; ‘너구리 작전’-“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소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 차례 목격했는데 밤 1,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 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북한군이 광주로 가기 위한 것으로 확신했다.”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지만원, III, 278-79).

VII.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

5.18광주는 미완성의 역사, 진행형의 역사, 북한군 개입 증거불충분과 북한측 비밀문서의 미공개, 첩보작전은 상당히 세월이 흘러야 증거가 드러난다. 특정사건에 대한 역사해석은 판사가 법적 판결로 인해 규정되거나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과 증언에 의해 새로 기술되며, 더욱 완전하고 공정한 역사로 진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는 특정 권력이나 시민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1. 북한군 개입의혹의 증언이나 증거물은 보관하고 있나, 아니면 인멸했나? 북한군의 사망한 북한군에 대한 대규모 암매장의 의혹, 흔적없이 사체를 없앴나?

2. 신원미상의 13명은 누구인가? 우주에서 온 外界人인가? 5.18이후 시신과 증거물은 어떻게 보관 및 방치되었나? 얼굴과 지문 등은 계엄사에 아직 보관중인가? 아니면 인멸했나?

3. 5.18광주의 주동자는 누구이며 배후는 누구인가? 윤상원은 책방서점에서 일하는 일개 점원이었다. 피고인들을 심문하여 작성한 <계엄사>에는 윤상원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 무대에서 배우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기록은 계업사의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의 일지에 소상히 나오고 있다. **90년대 법원판결에서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어떻게 처리했나? 무죄냐 노코멘트냐?

4. 악성유언비어는 누가 퍼트렸나? 주체는? 북한의 대남공작부?

5. 12.12와 5.18에서 전두환 등 군부세력이 정당했다면 왜 역사는 뒤집어지고 좌경화를 막지 못했나?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87년이후 벌어진 집권당의 권력암투와 공안사건의 교훈을 되새겨야한다.

VII. 결론: 과제와 대응책

- 5공세력의 성격의 재규정 문제-반공구국세력인가 아니면 민중을 탄압한 권력찬탈세력인가? 지만원 박사의 책을 통독해 보면, 단순히 권력을 탐한 반란세력이 아니라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후 5.18에 이르는 극도의 혼란정국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들이 아닌가? 그런데 마녀사냥처럼 밀려닥친 좌파 여론재판의 쓰나미로 인해 국가유공훈장을 모두 빼앗기고 살아있어도 죽은 자보다 못한 산송장이 되었다. 심지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시의 유공훈장도 박탈당했다. 이런 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런데 항의한번 못하고 있다. 증언도 남기지 못한 채, 한 풀이로 해외관광이나 하면서 화풀이로 골프만 치고 있다. 그들의 역할은 사라졌나?

- 역사가의 과제와 역할; 이 책을 들은 소감은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의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앞선다. 왜냐하면 역사학자가 할 일을 육군대령출신 지만원 박사에게 그 힘든 작업을 맡긴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만 미안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읽어주였다는 점에서 지만원 박사의 노고에 치사를 대신하려고 한다. 무려 18만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문서를 5년에 걸처 읽었다고 하니, 그 인내심과 애국심에 경탄과 존경의 마음을 표할 뿐이다. 지만원 박사의 노고에 보답하는 길은 부지런히 그 책의 핵심을 대중들에게 잘 전달하고 한국현대사를 새로 기술하는 일이며, 의혹투성이지만 미처 밝혀지지 못한 미진한 부문에 대해서 더 깊은 연구성과를 내는 것이 후학들이 할 일이라고 믿는다. 학문적 논의에서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또 다시 인민재판식으로 때를 쓰고, 고소고발이나 심지어 폭력행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

- 증언자들이 생존해 있기에, 쌍방간의 증언과 기록이 보다 선명하게 공개되어야한다. 또 학계에서 일방적으로 한쪽편만 들지 말고 소통과 토론을 통해서 다른 입장을 들어보면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해 가야 5.18성격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게 될 것이다. 좌편향에 치우친 5.18광주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기 운동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 진압군의 명예회복과 보상; 광주민들의 명예와 보상은 좌파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상당히 이루어졌다. 이제는 진압군에게 정당한 평가와 보상이 이루어져야한다.

 

 

종교계 좌파들을 어떻게 척결할 것인가?
 
李 法 徹(대불총 지도법사)
 
 
공산주의와 종교와의 사이는 수화상극지간(水火相剋之間)으로서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대다수 종교인이 신불(神佛)의 가름침을 본받아 실천궁행하지만, 내심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작태를 보이는 일부 종교인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소위 혁명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펴는 종교인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요, 허망한 말로 인민을 기망하여 인민의 고혈같은 돈을 착취한다고 보고 종교인들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정의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땅에서는 으레 종교인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문죄한다. 첫째, 공개처형 하거나, 둘째, 종교생활을 포기하게 하거나, 셋째, 수용소에 수감하여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상례이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종교시설, 성당, 교회, 사찰 등을 강제 접수하여 국유화하고, 돈벌이 시설로 이용한다. 북한정권이 사찰을 관광지화 하여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한국에는 종북 좌파 목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선양하는 ‘민중신학’이 있다. 종북 좌파 신부들이 외치고 선양하는 ‘해방신학’이 있다. 종북 좌파 승려들이 외치고 선양하는 것은 ‘민중불교’이다. 그들의 논리는 얼핏보면 귀족특수층이 아닌 민초적 고해대중을 위해 신명을 바쳐 운동 하는 것같지만, 속내를 간파해보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낙처(落處)처럼 김일성 숭배로 귀착된다.
 
이 글을 집필하는 뜻은, 종교인의 탈을 쓰고서 종교를 말살하는 자들과 손을 잡은 거짓 종교인들을 질타하고, 본분을 깨닫도록 해주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 못하는 선량한 대중에게 종북 좌파 종교인들의 정체를 깨닫기 해주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그러나 타종교의 언급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에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필자가 몸 담고 있는 조계종 불교는 종단정치를 하는 소위 정치승려들이 2008년부터 내부문제를 외부로 발설치 못하도록 내규(內規)로 묶어 놓았다. 만약 법규위반시는 중징계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들이 바라는 통쾌한 진술이 희박할 수 밖에 없다. 깊이 머리숙여 양해를 구하며, 야반삼경(夜半三更), 별전(別傳)을 기약하는 바이다.
 
“종교계에 포진한 김정일의 충성동이들”
 
한반도의 공산주의자 수괴는 김일성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제 식민지에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미,소(美,蘇)의 강대국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분단된 남북문제는 ‘우리 민족 끼리’ 천천히 시간을 두고 평화적 대화로 평화통일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반도에 김일성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야욕으로 소련과 중공의 외세를 끌어들여 기습남침, 한국전을 일으키었다. 그로인해 유엔군이 참전하였고, 한반도는 유사이래 없는 처참한 국제 전정터가 되었고, 남북한 국민은 전화속에 시산혈해(尸山血海), 참극의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김일성은 대한민국을 적화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패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패주하든 김일성은 중공군의 대거 참전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미군에 혼줄이 나고 난뒤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무력 적화통일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대한민국을 향한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줄기차게 대한민국을 향해 무력 도발을 했고, 무장공비를 보내 테러를 자행했으며, 간첩들을 보냈고, 남한내 고정간첩들을 양성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돈이 정치인, 언론인, 대학교수, 종교인, 등 많은 추종자들에게 지원되었다.
 
김일성은 한국을 적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로당 부활을 통해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직과 국회를 장악하려 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한반도 국가의 정통성은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에 있다는 것을 선전선동하게 하였다. 종북 좌익들을 통해 DJ를 빼고는 이승만을 위시하여 역대 대통령을 폄하 역도로 몰았다. 또 미군철수를 부단히 외치게 하고, 투쟁하게 하였다. 미군이 저, 월남이나, 필리핀처럼 남한에서 떠나게 되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또다시 대한민국을 적화시킨다는 계산인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을 적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남로당원들에게 ‘민주화’를 외치게 하게 한 것이다. 민주화를 좋아하고, 민주화라면 수화(水火)라도 뛰어드는 한국인의 심리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남로당적 정치인들이 국회에 승승장구 입성하였고, 마침내 민주화를 외치던 종북 정치인들이 대통령직에까지 진출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철의 장막이요, 비민주, 무인권의 독재자 김일성이 한국을 적화하기 위해서 ‘민주화’처방을 했다는 것은 아리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교활한 방편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반론하리라. 한국이 민주화 되어 김일성에게 어떻게 정치적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김일성은 상전국(上典國)인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으로부터 집단살인에서 얻을 수 있는 권좌의 비법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똑같이 권력을 잡기위해 수천만명을 도륙(屠戮)히듯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김일성은 마침내 대한민국이 적화가 이뤄지면, 스탈린과 모택동처럼 대량살륙을 통해 오매불망하던 권좌에 오르겠다는 극본이다. 김일성이 뜻을 못이루고 죽자 그 아들 세습독재자 김정일은 대한민국을 접수하면 자본주의에 찌든 쓰레기 같은 자들을 2천만명 정도 청소해버리면 반기드는 자는 전무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또, 종북 좌파들이 북한정권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민주화 운동에는 또다른 뜻이 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하는것 처럼 위장을 하지만, 결국은 ‘조선인민민주화’로 귀착하는 것이다. 이제 민주화를 외치는 자에게는 대한민국 민주화인가, 조선민주화인가,를 따져 물어봐야 할 것이다. 민주화, 개혁, 진보 등의 용어로 위장한 김정일의 전사들의 위계술에 우리는 과감히 해탈할 때가 되었다.
 
민주화를 이용하여 미군철수를 하게 하고, 민주화를 이용하여 ‘조국통일지상주의’로 국민들을 선동하여 대한민국을 접수한 후, 쓰레기 청소하듯 2천만명 정도 살육해버린다는 구상을 갖은 김정일에게,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고 장, 차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고위공무원을 하는 자 등이 부회뇌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우치, 우매함에 경악을 넘어 격분을 금할 수 없다. 여기에 일부 종북 좌파 종교인들이 자신의 신불(神佛)을 저버리고 김정일이 치는 북장단에 대한민국 배신의 춤을 정신없이 추어대고 있는 것이다.
 
일부 불교인들도 미국을 통해, 제삼국을 통해, 한국에서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북한정권의 손을 잡고 품에 안겨 김일성, 김정일의 조국통일안에 박수를 보내고 추종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불교계에 종북 左派는 존재 하는가
 
한국불교의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소나기를 피하는 정자(避雨亭)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운명과 같이 고통속에 신음하는 남녀들이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있는 사찰에 들어와 귀의를 하면 스스로 떠날 때까지 무료로 숙식과 기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대자대비다. 수많은 고해중생들이 한국 불교계에 신세를 지고, 혹은 승려가 되고 혹은 세속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을 파악하기 위한 지침서로 읽었든 책이 ‘아리랑’이다. 이 책의 저자는 ‘님 웨일즈’라고 불리는 금발의 미인 미국인 여기자이다. 그녀는 최초로 모택동을 인터뷰하여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자를 내어 세계적 명성을 떨친 ‘에드가 스노우’의 아내이다. 그녀는 남편에 못지 않게 중국 공산당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모택동의 대장정으로 유명한 연안까지 찾아가 취재를 하던 중, 장정에 참가한 한국인 김산(본명; 장지락)을 만나 생애를 인터뷰 해서 .아리랑‘이라는 책자를 집필한 것이다.
 
김산은 연안에서의 인터뷰에서 님웨일즈에게 자신은 1919년, 14살 되던 해, 조국에 해방 투쟁의 함성이 들리기 전까지 절대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압록강을 건너 무정부주의자를 거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산은 금강산 장안사의 승려였다고 전한다. 그는 승려로서 상구보리(上求菩堤),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뜻이 없고, 중국 공산당에서 조선의 독립을 운위(云謂)하며 입신출세를 희구하였다.
 
김산은 장지락이라는 이름 외에 10여개의 가명으로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김산이 님웨일즈와 인터뷰를 하고 난뒤 1938년 중국공산당 정보책임자인 강생(康生)은 돌연 김산을 일본 특무 스파이로 지목하여 체포하였다. 김산은 중국 공산당의 모진 고문 끝에 처형 되었다. 당시 김산의 나이 33세였다. 김산 뿐만이 아니다. 중국 땅에서 조국 독립을 외치던 수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 혁명가들이 그렇게 처형당했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중국 당국은 김산을 중국조선족 혁명열사로 회복시켜주었다.
 
대한민국에는 김산을 본받는 승려들이 적지않다. 일부 승려들이 부처님의 교훈을 버리고, 공산주의에 심취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 저주를 퍼붓고, 중국 공산당과 북한 공산당에 호의를 가지고, 몸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조국은 평양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자들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과거 파주 보광사 경내지에 빨찌산들의 묘역을 만들어 연화공원이라고 명명하고, 준공식에서 “보광사는 미제국주의자의 점령지인데 동지들을 이곳에 모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반드시 진정한 우리 조국땅에 모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것도 김산 추종자들이다, 님웨일즈가 문장력을 발휘한 것이 중요한데, 김산을 영웅시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조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이다.
 
진짜 승려는 이 세상 어떠한 이데올로기 보다 불일증휘 법륜상전(佛日增輝 法輪常轉)을 다짐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에는 삭발한 승려는 단 한 명이 없고, 모든 사찰은 국유화 되었다. 유서깊은 사찰에 승려는 단 한명이 없이 관광안내원만이 있는 것을 보고 교훈이 되지 않을까? 북한의 승려는 오래전에 인민재판에 의해 공개처형되었고, 강제환속당하였으며, 생존자는 요덕수용소에 갇혀 반야심경 등 불경 암송은 없고 김일성 유시를 매일 반복해서 암송하고 자아비판을 받으며 연명하고 있는데, 교훈되지 않는 것인가?
 
필자는 오래전에 전 선운사 주지 호명(浩溟)노스님에 대하여 들었다. 한국전이 일어나고 얼마후에 선운사는 공산치하가 되었다. 사하촌(寺下村)에서 붉은 완장을 차고 죽창을 든 자들이 봉기하여 살육을 시작하였다. 호명노스님의 상좌인 향엄스님은 은사에게 피신할 것을 간절히 말씀드렸다. 그러나 호명노스님은 “조석예불은 누가 하며, 천년고찰인 선운사를 지켜야 한다.”며 피신을 권하는 상좌를 오히려 꾸짖었다. 호명노스님은 다시 “일생을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고, 자비를 베풀어 왔다. 자비무적(慈悲無敵)인데 누가 나를 해치겠는가.”라고 하였다. 향엄은 울며 어쩔 수 없이 홀로 선운사를 빠져나갔다.
 
붉은 완장을 찬 죽창을 든 자들이 선운사에 들이 닥쳤다. 붉은 완장들은 호명노스님을 포박하여 복날의 개 끌듯이 선운사에서 도솔암 쪽의 가는 길 옆 깊은 골짜기 ‘희애재’로 끌고갔다. 그곳에서 붉은 완장들은 낫으로 호명노스님의 목과 사지 등 열두 토막을 내어 숲속에 흩뿌렸다. 공산주의자 들은 이구동성으로 인민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쓰레기 청소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비무적의 호명스님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청소(처형)해야 할 쓰레기였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선운사를 방문하면 선운사 입구 숲속의 비전(碑殿)을 찾아보시라. 왼 쪽에 초라한 작은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禪師의 法名은 佳誠이요, 俗姓은 陳氏茂長人이다.(중략)…. 庚寅年에 六二五動亂을 逢着하여 火坑중에 全燒당할 禪雲寺를 換身救出하시고 壬辰九月 二十七日 世緣己盡 하시여 入寂하시니 法臘七十三이요 世歲 八十六이러라>한국전 때 좌익에 의해 전소된 사찰과 비참하게 죽어간 승려의 사례가 어찌 선운사뿐일까? 부지기수이다.
 
한국불교계에 김산을 추종하는 좌파의 승려들은 존재한다. 조국을 평양으로 믿고 설치는 자들은 있다. 그러나 김산을 비롯하여 부지기수의 공산주의자들이 결국 공산주의자 손에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것은 역사의 생생한 교훈이다. 따라서 참승려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 수호에 앞장 서고, 법륜상전(法輪常轉)에 전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광주 사태와 승려들
 
광주사태 때의 추상(追想)은 언제나 공포와 안타까움을 수반한다. 평소 온순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순식간에 손에손에 총기를 들고 서로 죽이고 죽는 광경은 지옥도(地獄圖)와 무엇이 다를까? 필자가 찾은 광주사태의 거리에는 고속버스가 백주대낮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었고, 복면을 한 청년들은 군용 짚에 가득타고, 손에는 칼빙 총을 들고, 어깨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띠를 두르고 여기저기 달렸다. 짚차에 확성기를 달고 여자가 선전선동을 하고 달리기도 했다. 필자는 방송하는 여자를 보면서 나약한 여자가 선전선동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전남 도청 앞에는 경찰들의 ‘상무관’이 있었다. 그곳에는 하얀 천으로 싸고 덮은 관들이 60개가 넘어보였다. 관들 웨에는 태극기가 덮여 있기도 했다. 관마다 앞에는 죽은이의 사진이 세워져 있었고, 어머니들은 손으로 관을 어루만지며 죽은이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울었다. 관들이 놓인 곳에는 대형 향로가 있어 향연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시신이 상하기 쉬운 철이기 때문에 냄새를 가리는 것은 분향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분향소 옆에는 박스로 만든 모금함이 있었다. 총을 멘 젊은 시민군이 지켜보는 모금함에 사람들은 돈을 넣었다.
 
억울한 주검은 상무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무대의 비에 젖은 잔디 밭에는 판초 우의에 덮힌 국군의 시체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국방의무를 하러 입대했다가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광주 국군통합병원에는 총상을 맞은 환자들이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위관 한 명은 총알이 양 겨드랑을 관통하여 졸지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양 팔을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는 불구가 되어 필자를 보자 무어라 웅얼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분명 불교신자였을 것이다.
 
도청에는 높은 곳에 비행기를 쏘아 격추시킬 때 쓴다는 캐라반(?)50이라는 기관포가 설치되었고, 시민군들은 기관총, 개인화기로 무장하여 진압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청 지하에는 도청과 그 일대를 날려 버릴 대량의 다이나마이트를 몽땅 설치했다는 것이다. 도청을 사수하려는 시민군의 면면들을 보면 대학생들이 아닌것 같았다. 슬픔과 고뇌가 많아 보이는 민초의 아들들이 대부분이었다.
 
거리의 벽보에는 대형종이에 검은 매직 붓으로 독전(督戰)의 선동 글이 있었으며,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듯 빨간 매직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의 학생과 시민들이 광주를 구하러 오고 있다”, “미 7함대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오고 있다”고 하며 독려하였다. 도청을 사수하는 민초의 아들들은 미 7함대가 오고 있고, 서울을 위시해서 부산, 대구 등의 시민이 합세하러 온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드디어 진압군이 진압의 서곡을 울렸다. TV에서 특별자막과 방송을 하였다. 시민들의 식수를 보급키 위해 식수차를 이동하려는데, 잠시 전원을 모두 차단하겠으니 양해 있으시기 바란다, 는 광고였다. 눈치빠른 시민들은 식수 핑계 대고 전원을 차단하고 난 뒤 진압군이 진입해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교전시 유탄에 죽지 않으려고 이불로 몸을 싸기도 하였다. 광주사태 때 억울하게 죽은 이들 가운데는 구경하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무차별 양측이 발사하는데 고개를 빌딩에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다가 당한 불운한 사람도 있었든 것이다.
 
필자는 광주사태의 현장에서 목도한 사람의 하나로서 말한다면, 광주의 비극은 양비론(兩非論)이다. 광주시민은 간디의 무저항식 시위데모를 하지 않았다. 무저항식 시위를 하는데도 진압군이 발포를 해댔다면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진압군의 얼굴에 벽돌을 던지는 등 폭력행사를 선행하였기에 진압군은 제살기 위해 자위권을 발동할 수 밖에 없었든 것이다. 무벽돌이면 무탄(無彈)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결국 진압의 명령을 수행한 국군도 억울하게 죽었고, 시민군도 억울하게 죽었다. 억울하게 죽은이들만 불쌍하게 되었다.
 
광주사태 때의 광주거리 도처에는 “신현확 죽여라! 전두환 죽여라!” 구호가 내걸려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희안하게도 당시 대통령 최규하에 대해서는 격렬한 구호가 없었다. 진압군을 보낸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대해서도 없었다. 구호를 보면서 구호의 배경에는 전남출신 정치인이 최고 권력의 의지를 불태우며 지옥도(地獄圖)를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과연 광주의 비극을 발판삼아 전남북을 석권하는 정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종북 좌파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의 물결이 더욱 고조되는 좋은 세상이 오면, 광주사태는 재조명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사태 때 억울하게 죽은 시민군의 한도 크지만, 명령을 받고 진압군으로 출동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장병들의 한도 큰 것이다. 또 출동한 장병들이 민주화를 짓밟는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부의 명령을 받은 장병들이 역사의 죄인이 되고 그 주검은 개주검이 된다면 뉘라서 나라에 충성하겠는가! ‘5,18 특별법’은 국군을 짓밟는 모독의 법이다. 그날의 억울한 시민군과 억울한 국군이 해원상생(解寃相生)하기 위해 ‘5,18특별법’은 조속히 재심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시민군과 진압군이 최후의 결전을 앞 둔 전야에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은 대다수 민초의 아들들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이 생업에 종사하는 민초의 아들들이 결전의 용사로 선택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위로하는 척 하면서 구원병이 온다고 선동하는 신부, 목사, 승려, 등 배운자들이 설쳤다. 선동하든 어느 승려는 영화속의 장면처럼 권총을 배에 꽂고, 등 뒤 허리 띠에 꽂고 다니며 설쳤다.
 
그러나 민초의 아들들이 결전할 때는 선동하든 목사, 신부, 승려, 배운이들은 어둠속으로 핫바지 방귀 새듯이 사라져 버렸다. 훗날, 서울에서 권총을 두 자루나 챙겨 설쳤든 승려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필자에게 당당히 자신은 ‘사회과학도’라고 자처했다. 승복을 입은 시회과학도의 동류들은 막강한 세력이 되어 있다.
 
결론과 전망
 
천주교, 기독교, 불교의 종교인 대다수는 자신의 신앙인 신불(神佛)의 사상을 지고지상의 경전으로 믿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일부 거죽은 종교인이면서도 내심 영혼은 마르크스에 팔아 먹은 자들은 있다. 이들 가슴속에는 성경, 불경 보다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소의 경전으로 삼고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성당과 교회외 사찰에 있어야 할 종교적 하등 이유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왜 종교계에 있는 것인가? 꿩이 마음은 콩밭에 있듯이 그들은 김일성, 김정일에 충성하면서 대한민국을 망치고, 김일성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인의 탈을 쓰는 것이다. 그들 대다수는 태생적 붉은 전사들이다.
 
불교계에도 6,15선언, 10,4선언을 법등명처럼 여기고 실천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자들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의 비민주, 무인권과 수백만이 기아로 굶어 죽는것에 대해서 언급하면 버럭 화를 내고, ‘역도’라고 매도 한다. 금강산 여성 관광객이 억울하게 총맞아 죽는 것도 종북 좌파승려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첫째, 대한민국은 없어져야 할 나라이며, 둘째, 대한민국 국민들을 기름짜듯 착취해서라도 김정일에게 바쳐야 한다는 논리와 주장을 펼칠 뿐이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서 그들이 왜 종교계에 종교인으로서 활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그들은 서울 하늘에 인공기가 펄럭이는 그날까지 종교계에 몸담아 있으면서 사회의 동류들과 연대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거목에 도끼질을 하기 위해서이다.
 
종교계의 좌파를 어떻게 처결할 것인가? 상자 속 온전한 사과를 위해서 썩은 사과는 집어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좌파 정권들에 의해 숙성된 종교계의 좌파는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 그리고 사회조직과의 연대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종교계 내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척결할 수 없는 지경이다. 유일한 특단의 척결처방은 종교계 내의 우익 종교인들과 사회 애국단체와 연대하여 척결에 나서는 수 밖에 대안은 없다.
 
그러나 종북 좌파들이 무서운줄 모르고 설치는 것은 위정자가 국가보안법이 엄존함에도 국가보안법을 활용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종교계 내부의 우익 종교인들과 애국단체들이 연대하여 위정자에게 국가보안법 실천을 맹렬히 촉구하고, 위정자의 실천각오가 있을 때, 비로소 좌파 척결이 가시화 할 수 있을 것이다.◇(bubch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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