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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그 懷顧 인물

  • No : 69083
  • 작성자 : 華山
  • 작성일 : 2010-06-14 23:53:14

 







별명 "Old Iron Tits - 철가슴의 사나이"로 불린 그는 항상 양쪽 가슴에 수류탄
두 발을 차고 있었다. 하나는 실제 수류탄이고 하나는 응급의료품이 들어있는 가짜였
으나 상시 전투태세라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6.25전쟁 초기 워커에 이어 美8軍司令官으로 취임한 릿지웨이 장군의 이야기다.

해마다 6.25를 생각하면 으례 첫째 떠오르는 인물이 맥아더 장군이다.

원체 영향력이 컸던 세기적 인물이며 전세를 역전시켜 대한민국을 구원해 준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으로 우리를 지켜 준 전선의 미8군사령관들은 망각한채 지내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사선에서 우리를 지켜준 은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금년은  전쟁 60주년이라는 각별한 의미도 있어 묻혀저 온 군인 하나를 회상해 보고자한다.

이 글은 미국 언론인이며 다큐저자 故 하머스텀-David Halberstam의 마지막 최신 저작 <The Coldest
Winter-American and Korean War>에서 전적으로 인용한다.

미군사상 특정시기에 완벽하게 적합한 군인이 있어다면 그는 機能不全에 빠져 혼란해진 미8군을
인수하도록 불러내어진 릿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였다.

그는 더할나위 없이 완고한 사나이였다.

유모가 없고 무섭도록 공격적이며 자기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 용서 없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군인 이외의 존재로는 생각할 수없는 그것도 평화시 군인은 아니었다.

맥아더 같이 위엄이라곤 전무하면서도 독특한 신비적 분위기가 있으며 역사에 있어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지극히 개성적인 그러면서도 高邁한 의식을 가진 군인이었다.

릿지웨이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착임한 것은 1.4후퇴 직전 1950년 12월 26일이다.

무모운전을 일삼던 전임 월턴 워커 사령관이 12월 23일 아침 운전병 부관 호위병 4인이 탄 지프로 서울
북방전선으로 향하던중 마주 오던 한국군 트럭에 정면 충돌해 동반 3인은 무사했으나 워커 자신만 현장
사 함으로써 전선사령관 공석이 생긴지 3일만이었다.


전선시찰에 일상을 보내던 워커 장군의 교통사고는 부산교두보를 지키고 38선을 돌파 평북 雲山까지
북진, 중공군 개입으로 그 춥던 겨울에 후퇴를 거듭하다 일어난 대참사였다. 해임될 것을 감지하고
있던 그는 아쉽게 죽어서 4성장군으로 서훈되었다.

후임은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패튼의 세대보다 다소 젊은 매트 릿지웨이였다.

2차세계대전 종반에 일본 공격임무를 띈 공정단을 지휘할 주요직책을 맡음과 거의 동시에 전쟁이
끝났다.

그는 당시 Time誌가 특집기사로 다룰만큼 전공 유능한 군인으로서 와싱턴이나 도쿄가 모두 그만이
워커의 후임에 유일한 적임자로 보았다.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의 訃報를 받자 즉석에서 릿지웨이를
요구했다.

릿지웨이는 12월 22일 제8군사령관 임명을 통보받고도 다음날까지 그 사실을 부인 페니에게는 입을 다물
었다.  그리고 짐을 간소하게 챙겨 도쿄로 향했다.

그도 맥아더만큼이나 맹렬한 반공주의자였으나 이데올로기전사는 아니였고 敵은 적일뿐, 그 실제적 强
弱에 근거한 분석을 기초로 싸와야 한다는 실전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데올로기가 중공군이나 인민군을 보다 훌륭한 보다 헌신적인 병사로 만든다며는 그 사실에
주의를 기우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즉석에서 "제3차세계대전....Armageddon,
동서간 최후의 대격전의 시작"이 아닌가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즉각 소련군의 이상 동향은 없는가 세계 속에 감시하도록 부괸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상관 브래들리와 콜린스에게 적어도 부분적 動員을 요구하도록 건의했다.

<이 행동을 취한 상태에서 전쟁이 안일어나며는 돈을 잃는다. 그러나 그것을 아니한 채 전쟁이 되면 大破局을 맞는다.>고....

당시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전을 가리켜 전선사령부 없는 전쟁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전장 한국 땅에서 하룻 밤도 잔적 없는 전선사령관이라는 것이다.

사령부가 멀리 딴 나라에 떨어져 있어서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제 모르고 전혀 별개의
기분내키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 와싱턴 본부 사람들의 걱정이었다.

이때 전투현장의 지형을 알고 거기에 수반하는 어려움도 직접 파악하는 사령부가 현지에 생기게 되는
계기가 릿지웨이의 부임과 함께한다.

릿지웨이 사령관의 부임 척 작전명은 <Killer>였다.

와싱턴의 콜린스 참모총장으로부터 메모가 전달되었다.

Killer작전이란 명칭은 피에 굼주린 잔인성이 있어보여 홍보에 부적합하다는 반대 뜻이었으나 릿지웨이
는 "전쟁이란 적을 죽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째서 맞지 않는 이야기냐고 이해 할 수없다고 했다.

전쟁은 그렇게 불쾌한 것도 아니고 유혈도 그저 약간 요구될 뿐이라는 식으로 전쟁의 실상을 감춰 국민
에 전쟁을 장사하는 식의 속임수에 나는 성격상 반대한다고 했다.

릿지웨이가 전선에 발딛고 맨 처음 한 것이 군이들을 모두 차에서 끌어내려 걸어서 산에 올라 敵前 정찰
을 철저히 시킨 것이다. 따뜻한 차 안에서 무슨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냐였다. 중공군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추위뿐이라면서 인내하고 도로망을 벗어나서 산간계곡에 숨은 적을 찾아서 공격하는 적극공세로
전술을 전환시켰다.

1.4후퇴 이후 밀리기만하던 전선은 차츰 반전되어 북상을 시작했다.

특히 1951년 1월 지리멸렬한 8군의 군기를 다잡은 릿지웨이는 原州 砥平里전선에서 승기를 잡고 살륙전
을 전개, 그 해 봄에는 적을 다시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하고 두번째 서울 수복을 가져오고 마침
내 휴전회담 개시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6.25전쟁과 회고 인물 릿지웨이 장군을 이야기 하면서 서양인으로서는 175센티의 비교적 단구이면서
다부진 체격의 그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천성이 군이으로서 미국 군사에서도 귀감이 되었듯이 우리
한국군에도 외국인지만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본분의 귀감이 되었으면하는 뜻에서 적어도 현역 지휘관급
은 선배 군인 릿지웨이를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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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