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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수첩속의 6.25南侵 前夜이야기 -1-2-3-

  • No : 69061
  • 작성자 : 華山
  • 작성일 : 2009-06-22 22:12:51

 

1.-----인터넷 특성상 한꺼번에 소화하기에는 무리하다고 보아 3회에 나눠

올립니다.

 

 



한반도에는 6.25남침의 60년 戰雲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일촉즉발, 언제든지 터질것같은 전쟁위기가 벌써 59년간 이어

지고 있는 것이다.



4천 5백년 한민족사상 수 십번의 외침을 당하면서 한번도 외국을

침략해본적 없는 이 민족이 어째서 동족간 싸움은 좋아하는지

민족성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여하간에 그런 배경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외세를 업은 북한

共産集團이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여 동족상잔의 피를

뿌린지 며칠 후면 59주년을 맞는다.



쉬 아물길 없는 동족간 살륙전의 역사적 진상을 아는 것만큼

또다른 비극을 막는 힘이 따로 없다고 보기에, 그리고 아는

것만큼 전쟁억지력이 될 수있다고 보기에 남녀노소 누구나가

그 진상을 國民手帖에 담아 6.25남침 前夜의 진상을 간명하게

이해하도록 <千字6.25남침전야 이야기>을 작성해 본다.



1949년,



남한에서는 미주둔군철수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일고 있는 동안

북한의 김일성은 박헌영 등 각료 6명을 이끌고 3월 3일에서 20일

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었다.



이때 김일성은 모스크바 교외 별장에서 스탈린과 비밀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은 생전처음 사회주의국가 소련의 수상이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거두 스탈린과의 회담에 잔득 긴장하고 있었다.



초상화나 뉴스에서 보는 당당한 체구의 인물을 상상하지만 실제

스탈린은 160센티 안팎의 그루지아출신의 키작은 사내였뿐이다.



막닥드려 긴장을 푼 김일성은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스탈린동지, 우리는 언제든지 남조선을 해방할 준비가 되어있

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을 허가해 달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조선은 하나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을 비무장 중립화한다는

약속을 깨고있다.우리가 38도선 이북에만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트루먼도 그 정도의 것은 이해하리라 본다"



"그렇다면 좋다는 말씀이군요"



스탈린은 기세 오른 김일성을 제지하며 말했다.



"우리는 언제든지 조선 동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이라는 뜻은 아니다.  미국의 핵독점이

붕괴되고나서다.  그것이 먼 장래 일이 아니다."



이 시점에 소련의 핵개발은 완성단계에 있었다.



비밀회담이 끝난 후 연회가 베풀어졌다.

김일성은 소련 공산당 간부들과 기분좋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는 스탈린 사후 서기장이 되어 스탈린 비판을 시작,

스탈린格下운동을 촉발시키고 중-소 분렬을 몰고온 흐루시초프의 모습도 있었다.







 

2.--미국의 核獨占붕괴와 애치슨宣言 그리고 박정희의

    敵情判斷書--

 

 

 

1949년 9월 7일, 소련은 마침내 원폭 개발에 성공하고 미국의 핵독점체제는 문어졌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드릴까 하는 것을 남한에서 가장 먼저 파악한 사람이 朴正熙소령이였다.

 

1949년 말경부터 38선에서의 긴장의 도가 높아졌다.

특히 개성 북쪽 송악산과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괴뢰군의 도발이 잦아졌다.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는 괴뢰군의 남침조짐에 경종을 울렸으나 국방장과이나 참모총장은 들은척하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는 사상문제로 곤욕을 치르며 군복을 벗고 잠시 민간인 신분으로 정보국 상황실장이라는 임시직책을 맡고 있었다.

 

아침을 서울에서, 점심을 평양에서, 저녁을 신의주에서하며 허장성세만 늘어놓는 한심한 군수뇌부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박정희는 전면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경고를 발하자고 결심했다.

 

박정희는 정보국 상황실 北韓班의 총력을 기울여 49년말, 綜合敵情判斷書 작성에 착수했다. 상황실에는 북한반과 남한반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철야작업을 거듭하며 한 달만에 완성한 판단서는 두께가 15센티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판단서는 38선 북측 주민의 후방 소개, 괴뢰군의 2개 전차사단과 포병부대의 전방배치, 전투지휘소의 전방설치 등 등을 지적하고 <새해 50년 봄을북한은 38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감행할 企圖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박정희는 적정판단서를 가지고 참모본부를 방문했다.

 

"북괴, 그따위에 겁낼 것없어. 대통령으로부터 명령만 떨어지면 서울에서 아침 먹고 평양에서 점심. .........." 당시 참모총장 채병덕의 예의 허장성세를 뒤로하고 박정희는 참모장실을 나왔다.

 

그후 사태는 여기서 재론할 것도 없이 박정희의 상황판단대로 돌아갔다.

 

설상가상, 오랜 내전끝에 중국대륙이 모택동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고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국가가 들어섰다.

 

새해 1950년 1월 13일,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또하나의 간떨어지는 뉴스가 와싱턴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내셔날프레스센터 연설에서 극동의 방위선은 일본-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은 방위선 밖으로 내밀렸다.

 

對中政策의 실패로 미국에 고립주의가 대두하면서 한국은 트루먼의 무거운 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둘러 와싱턴의 張勉 주미대사에게 미국무성의 선언 철회를 요구하도록 엄명했으나 사태는 바뀌지 않았다.

 

 

 

 3.--放火犯,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연쇄모의하여 한반도에

 불을 지르다.

 

 

1950년,

 

"정말입니까?  부위원장 동지, 틀림없겠죠?"

 

한편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박헌영으로부터 애치슨선언 소식을 전해듣고 몇번이고 다짐하듯이 확인했다.

 

김일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조선 해방투쟁에 미군개입은 없다고 확신했다.

 

박헌영이 말했다.

"남조선인민의 애국투쟁은 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하조직이 인민대중을 조직한 유격대가 연일 출격해서 남조선 군경과 반동분자를 숙청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해방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들의 이른바 남조선해방은 박헌영의 悲願이기도 했다.

많은 구남노다원들이 남한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북에 쫓겨올라간 박헌영으로서는 하루빨리 남쪽에 정치기반을 재건하는 것이 북의 김일성으로부터의 또다른 해방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를 말하면, 소위 남조선해방전쟁은 박헌영의 뜻대로 되지않았고 박헌영은 결국 김일성에 의해 미제국주의 간첩으로 낙인찍혀 숙청된다.

 

김일성은 기고만장해서 외쳤다.

"인민군이 전방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가하고 빨치산부대가 호응해서 후방을 교란하면 남조선군은 전멸한다.  1주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2개월 이내에 부산을 공략한다. 미군이 개입해 오기 전에 남조선해방작전은 끝내야하는데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38선 일대는 강력한 인민군이 전개해 있었다.

총병력 16만. 포 2500여문, 전차 240대, 장갑차 200대, 작전항공기 230대,거기에 國共內戰에서 용맹을 떨친 武亭 휘하의 조선인지원병 5만이 조중 공산당비밀협정에 편입되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한국군은 총병력 겨우 10만이 될까말까, 포는 북괴의 3분의 1, 장갑차는 10분의 1, 전차는 전무, 공군 비행기라야 훙련기 22대가 고작이었다.

 

애치슨선언으로부터 4개월 후, 5월 12일, 스티코프 소련대사가 노동당 중앙당사를 방문,박헌영과 함께 있던 김일성과 남침작전에 있어 중공측을 어떻게 처우할 것이냐를 긴밀히 협의했다.

 

남침전쟁 개시라는 스탈린의 결재사안에 모택동의 동의를 얻고 만일의 경우 직접 지원을 어떤 형태로 할것이냐를 놓고 김일성이 모택동과의 담판을 위한 작전모의였다.

 

다음날 아침, 5월 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북경으로 나라갔다. 그날 밤 늦게 모택동 주은래와의 4자회담이 극비리에 열렸다.

 

김일성이 스탈린과의 남침합의사실을 전하자 모택동은 "스탈린 동지로부터 직접 듣고싶다. 거기에 대한 답은 그 후에 하자."고 자존심 강한 모택동은 회담을 중단하고 즉석에서 로신 주중소련대사를 불렀다.

 

다음날, 스탈린으로부터 중공 머리 위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긴급전문이 나라왔다.

 

두번째 회담에서 김일성은 작전을 설명했다.

신중히 듣고 있던 모택동이 한가지 주문을 곁들였다.

 

"중요한 것은 작전을 신속히 진행하는 것이다.  大都市 점령에 시간 보내지말고 우회해서 적의 군사력 파괴를 최우선 목표로 해야한다.  전쟁의 장기화는 미제국주의의 개입을 부른다."

 

과연 빨치산 전략 전술의 임자, 모택동다운 주문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미제국주의는 개입의사가 업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트루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 보이겠다."

 

박헌영도 주은래도 양 두목의 주고받는 말을 열심히 경청했다.

 

"그렇게만 되면 바랄게 없지.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 두라. 조선이 멸하면 중국이 멸한다는 속담이 있다.  미국이 개입하면 우리 중국은 지원부대 보내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抗美援朝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동의 싸움이다."

모택동의 마지막 당부였다.

 

김일성은 사의를 표했으나 내심 그럴 피료까지는 없을 것이라고 고집했다.

 

이렇게 해서 1950년 6월 25일 미명, 한반도 허리에 공산집단들에

의해 불이 지펴졌고 火傷 후유증은 60년간 아물지 않고 있다.

 

 

6.25남침 前夜 이야기--1.2.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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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