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윤한봉 녹취록-2 펌

  • No : 69847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13-06-03 19:50:10
  • 조회수 : 2969
  • 추천수 : 0



윤한봉 구술녹취문(2차)

윤한봉 구술녹취문(2차)

■ 개요
구술자: 윤한봉
면담자: 박현정
면담주제: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2006년 1월 24일 오후 2시-5시(3시간)
면담장소: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2차

■ 상세목록
1.
1-1. 신년맞이 등반대회
1-2. 민주구국선언과 구속
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1-4. 박정희 암살계획
1-5. 에피소드-간첩단 사건
2.
2-1. 생계유지를 위한 노력
2-2. 함평고구마사건과 쌀생산자대회
2-3. 황석영과 여성운동가 조직-송백회
2-4. 1978년 민주교육지표사건
3.
3-1. 민주세력결집
3-2. 동지애
3-3. 현대문화연구소
3-4. 문화운동-극단 광대
3-5. 방화사건 주모자로 연행과 물고문
3-6. 박기순의 죽음












1-1. 신년맞이 무등산등반대회
면담자: 오늘이 2006년 1월 24일이죠. 선생님 두 번째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어제 75년도까지 해주셨죠.
구술자: 제가 75년도까지 했는데, 어제 이야기할 때 구속자 협의회를, 전남 구속자 협의회를 75년 봄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4월 경이에요. 전남 구속자협의회를 만든 것이 4월인데, 잘 알듯이 4월 말일날 베트남전이 끝나고 그 다음에 통일이 되었죠. 그 이후로 이제 얼마 안 있어서 긴급조치 9호가 나오죠. 박정희 죽음 이후에야 해제가 되는데. 긴급조치 9호화해서 전국이 숨을 못 쉬게 된 거예요. 운동부터 모든 게. 그렇지만 구속자회 하나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어려운 시기에 아까, 어제도 말했지만, 독으로 버틴거지. 이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하튼 그런식으로 버티면서 그 외도 그 정보기관의 그 못된 탄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지속적으로 학교를 들락거렸어요. 헤헤헤. 제일 많이 간 곳이 이제 도서관 앞이지. 그때는 거가 분수 같은 것이 없었는데, 연못이 없었어. 그때, 잔디밭이었어. 그래서 가끔 토끼도 뛰어다니고 쫓고 그랬는데.
면담자: 그럼 그때 용지는 있었나요
구술자: 용이는 있었지. 그렇게 갓을(겉을)꾸미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흉측하니 못이었어요. 거기 가서 앉아있으면 인제 후배들이 지나가다 보고 하나둘씩 모여들어가지고 꼭 그옆에 둘러앉게 되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노천학습 같은 것이지. 정규조직을 갖추기 보담도 요즘 말로 말하면 동아이라든가 그런거을 따로 안 정해놓고.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계속 못하게 방해를 했죠. 내가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해. 내가 뭐 어쨌냐, 내가 다니던 학교에 왔는데, 아니 그러면 교문에서 못 들어오게 막는다든지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잡상인도 드나드는데 왜 내가 다니던 학교에 못 들어와야 이런식이지. 계속 후배들하고 서클들을 여러 갈래들로 만들어가지고 접촉해서 학습하고. 그런 활동을 계속 했어요. 학교에서 보면 눈엣가시지. 이거 죽이도 살리도 못하고. 예를 들면 어제 이야기했던 아이스케익 판다고 악을 쓰고 다니는 거나 초지에 풀을 벤다든가 다 학생들을 자극하는 거고 교수들 자극하는데 하여튼 계속 그걸 했어요. 그렇게 해나가다가 76년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게, 내가 인자 미국에 있으면서 깜짝 놀란 건데 이, 신년, 1월1일이 되면 광주 시민들이 오일팔 이후에 무등산을 많이 올라간다고, 엄청난 숫자가 올라간다고 신문에도 나고 그러더라고. 씨익 웃었는데. 그 시작이 76년이에요. 76년 1월1일날 두암동이었는데, 그때는 여가 완전히 시내에서 동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는데 윤강옥이라는 회원이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모여서 두암동에서 송년회를 하고 새벽에 걸어서 무등산을 갔어요. 입석대까지 올라가가지고. 해맞이 하고 악을 쓰는거지, 이제. 그리고 거기는 그때만 해도 어느 교회 청년부 같은데 교회 청년들이 한팀이 올라와 가지고 우리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우리가 그때 구시렁거렸던 것이 기억이 확실하게 나는데, 하여튼 모퉁이 돌고 나면 이 친구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올라가고. 젠장 우리는 기도 안 해도 잘만 올라오는데 뭐 기도냐 구시렁 구시렁 하고 올라오는데 그 사람들은 해돋이 보면서 기도하고 우리는 저쪽에 떨어져가지고 박정희 꺼져라 유신철폐, 아 듣는 사람 없으니까. 새해 첫날 새벽에 악을 악을 썼어요. 그렇게라도 울분을 토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그랬었는데 이 76년 새해 첫 아침에 무등산에 올라간 것이 그 뒤로 계속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80년 초 같은 경우는 아니다, 79년 초 같은 경우는 숫자가 단위가 200으로 올라갔죠. 우리는 민주가족이라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막 올라오고. 그렇게 규모가 계속 커져갔는데. 그것이 이제 이를테면 광주시민들의 무등산 새해 첫 아침 등반의 시작이었어요. 그런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어요.

1-2. 민주구국선언과 구속
구술자: 그래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거 운동하다 보면 어떤 계기나 전기가 있는데 이 긴급조치 9호로 숨을 못 쉬고 있을 때 그걸 거기에 이제 숨구멍을 터준 게 3월1일 구국선언이었어요. 민주구국선언. 그때 당시 함석헌, 김대중씨 등등. 내노라하는 유명 인사들은 거길 다 들어갔죠. 이제 윤보선씨라든가 해서. 그래서 이제 이 구국선언이 발표가 됐는데 문제는 언론에서 그것을 다루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79년 10월 17일 유신체제가 선포딘 이후에도 언론들이 그렇게까지 숨이 막히지는 않았는데 베트남전 끝난 이후 긴급조치 9호가 내려진 이후부터는 모든 언론이 숨을 못쉬어, 숨을. 기사를 못쓰고. 인자 각지가 술렁술렁 해져요. 소문으로 들려오고 다 구속되고 그랬으니까. 그래 구국 선언 내용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북쪽 방송을 듣고 그래봤는데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 좀 확실하니 전문을 입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 같아서 어떻게 서울에 가가지고 나상기한테서, 거기는 이제 기독학생운동하는 친구라 민청학련 출신이고 인제 상기한테서 교회 쪽이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간되는 우리 동포, 캐나다 동포 전충민씨라는 사람이 발행하는 뉴코리아타임즈라는 신문이 있었어요. 주간지인데. 그 주간지에 인제, 해외에서는 발표가 됐으니까. 해외 언론에서는. 거기에 실린 민주 시국 선언 전문이 실려 있드라구요. 그 신문을 입수했어요. 그걸 가지고 내려와 가지고 그런 것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때는 긴급조치9호가, 9호가 되니까. 여러 가지로 교회 저쪽 성결교회. 성결교회에서 마침 기독학생회 그쪽에서 이제 학습을 하는데 나보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해서 가가지고 내가 그걸 좀 읽어줬어요. 알고는 있어라 나라 원로들이 참다 못해서 이러고 있다. 백발 휘날리는 노인을이 이라고 있는데 우리 젊은 놈들은 멀쩡해가지고 있으니까 영 그렇다. 뻔하잖아요. 자극적인 이야기좀 해주고. 그게 4월 중순일건데. 그후에 4월 19일날, 4월 19일이 돼서 또 학교를 나갔죠. 4월 19일 날 되고 그랬으니까 더 가고 싶죠. 거기 가가지고, 문리대학교에 묘가 있었는데 그 묘 부근에 앉아있으니까 또 후배들이 모여들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학교 출입하는 서부 경찰서 형사 하나가 얼굴들을 알지, 자꾸 보니까. 날더라 나가주라는 거야, 학교를. 그래서 왜 또 그러냐고 그러니까 오늘이 4월 19일인데 염려된다. 서로를 위해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나가주는 것이 좋겠다. 이라고 인자 잘못했으면 잡아가라, 그러고 있는데 문리대 앞에 벽돌, 빨간 벽돌로 된 문리대 벽돌 건물있죠? 헐려고 하다가 못한 거. 그 앞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누가 선언문을 읽고 어쩌고 하고 있어. 그리고 딱 보니깐 기독학생회 나왔던 김영종이라고 나중에 사계절 출판했던 친군데. 이 친구가 여기서 성명서를 읽고 앉았는 거야. 그러니 형사고 뭐고 그리고 튀고 난리가 났지. 순간에 아차, 이거 내가 잘못 걸렸구나 얼른 나와 버렸어. 학교에서 웬걸, 이놈잡아다가 족치는데 이 친구가 경험이 없어노니까 인제 또 인제 민주구국선언 이야기를 이 친구가 취조 받는 과정에서 한 거야. 원로들이 이렇게 해서 내가 참다못해서 이렇게 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어쩌고 하다 보니까 내 이름이 나온거지. 그러다보니까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이 보자고 한 대. 그래 좋다고 가자고. 좋다고 갔는데 딱 들어가니까, 이래저래 했다매? 그래서 그냥 깔깔거리고 있었제.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떻게 할거야 안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후배들이 이야기 해버렸는데. 아이고, 바깥생활 안 그래도 고달프고 그런게 한 오년 푹 썩다가 나와야겠소, 갑시다. 한 오년 쉴라요. 그렇게 해가지고 들어가게 됐는데, 그게 인제 두 번 째 들어간 거예요.
면담자: 아, 그래요? 이게 부활절 사건이라는 건가요?
구술자: 그게 그때 기록들이 엉망이에요. 무슨 부활절 사건이야. 그러니까 교회쪽에서 운동사를 70년대 운동사 같은 것을 만든 것이 있더라구요. 거기 보면 나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에 다닌지 어쩌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징그럽게 싫어하는 것이 이를테면 열명이 모여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교인이 한명 끼면 종교계가 주도한 것으로 꼭 이걸 왜곡해서 써먹어요. 꼭 그래. 아주 못된 풍토가 있는데 그게 뭐가 부활절이야, 4월 19일 날이 부활절인가,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끌려간게에요.

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구술자: 그래가지고 졸지에 인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해가지고 1년6월 선고받았죠. 그래가지고 통산해서 손해 본 것 합치면 20달 살고 나왔는데. 두달 더 살아서. 20개월 살았는데 광주교도소에서 2심 끝날 때까지 징벌방에 독방에 있었고. 그 다음에 대구교도소에 가가지고 나머지 기간 채우고 79년 12월 7일인가 8인가 석방 됐을 거야. 근데 인제 그렇게 해서 내가 들어와 있는데 영종이 그놈도 들어오고 영종이 그 친구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가고 그럴 때 인제 이를테면 아까도 말했지만 계기가 된 거죠. 구국선언이. 그래서 그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전국 도치에서 인자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는데, 광주에서도 8월달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구국기도회니 뭐니 해가지고 그때 윤기성 목사, 강진에 계신 윤기성 목사. 무안에 조홍회 목사 강신석 목사 이런 분들이 교도소로 9호 위반으로 들어오고 왜냐하면 3․1 구국선언에 문익환 목사랑 교회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기장 청년회, 구국 기도회 하고 뭐 하고 그래가지고 이 사람 구속, 저 사람 구속 그래가지고 교회운동이 확산이 됐죠. 하여튼 민주 구국 선언사건은 원로들이 제 값을 한 거예요. 어떤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 어떻든 그렇게 되고 나는 이제 독방생활 하면서 충전을 하자 해서 죽어라고 책만 봤죠. 내가 면회 온 후배한테, 내가 하루가 24시간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렇게 아쉬워할 수가 없다. 48시간 내지 72시간으로 늘었으며 좋겠다, 매일. 책보는데 미치것다, 시간이 짧아서. 그러니까 아주 오래오래 잘 사쇼 공부만 많이 하쇼. 나보다 성질 내더라고. 내가 어느정도 책을 봤냐면 여가 부어버렸다고, 눈이 부을 정도로 공부를 했어요. 눈두덩이. 인자 백열등 희미한 걸 높이 달려노니깐 눈이 시럽고 난리야. 화장실 뒤에가, 창도 닫아불고. 자살 못하게 하려고. 밑에가 환기통 요만한 것이 있는데 고 밑에서 인제 그 자연 햇살 좀 받아볼라고 한디 직접 들어오진 않지. 반사광이긴 하지만 거기다 놓고 보고. 운동시간 빼놓고 죽어라고 책을 보니까 돌아다니던 간수가 무슨 고시준비할라고 들어온 것 같다고 맨날 그랬는데. 그때 인제 역사 공부를 한번 체계적으로 하는데 내가 언제 체계있게 공부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문사회쪽이 구멍이 많았는데 또 내 스타일로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그래가지고 좋았어! 하루종일 내 역사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해냐 하가지고, 우주 역사부터 시작하자. 우주의 역사에서부터 좁혀오자. 세계사, 동양사, 국사, 국사에서 고대사부터 해가지고 현대사까지. 그래가지고 책을 넣어주면 별들의 역사부터 책을 넣었지 역사를 하다보니까 또 고대사를 하다보니까 고고학분야의 용어가 너무 모른 것이 많아요. 고고학 책을 넣어라 해가지고 고고학을 하고, 종교부분도 내가 스님들하고 목사님들하고 신부님들하고 이야기하고, 내가 뭐를 모른 채로 몇 마디 들은 것으로 해가지고 기독교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불교에 대해서 떠들어봤자 그 사람들이 척 하면 알죠, 내공을. 경전 하나를 안 읽고 무슨 소리를 하나. 비웃어버리면 내가 말이 먹혀들 수가 있나. 또 그 전문가들한테 들은 이야기하고 내가 한 이야기하고 비교했을 때 아무래도 신도들이 내말에 끌려올 리도 없고, 의식화의 절대적으로 무장이 필요하다. 전부 경계를 해가지고 교회, 기독교 경전, 그래가지고 내가 신구약을 8번까지 읽었는데 거 신학서적도 보다보니까 어려운 말이 많아요. 무슨 신학사가 불교부터 시작해서 야튼 우리 천도교까지 고루고루 인제 죽어라고 봐가지고 머 나는 누구 지도받은 적도 없고 혼자 내 나름대로 읽으니까.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게 된 거지. 근데 그게 나중에 나와서 이야기를 해보고 그러면 고게 좀 신묘하더만, 효력이. 왜 그냐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맨날 빵빵하니깐, 그랬는데 하여튼 지도받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그런 내 나름대로의 견해나 관점이 상당히 효력이 있더라고. 근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다시 운동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보자 그렇게 해가지고. 공부를 체계 있게 많이 했죠 두 번째로. 내가 그 출소한 이후를 생각, 대비해서 두 번째 공부를 했던 이야기여. 그러다보니까 어제 이야기 중에 바진 것 중에 첫 징역살면서 출소한 이후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준비할 과정에 뭐가 있었냐면 우리 큰형님이 듣고는 에끼, 징한 놈이라고 그랬는데 이제 75년 초가 되니까 교도관들이 와서 귀뜸도 해주고 면회갔다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곧 석방이 될 거 같애. 나가서 바로 활동을 시작해야 할것 같다. 근데 그럴라고 보면 뭐가 제일 필요하냐. 나는 이제 민청학련 사건 준비과정에서도 뼈저리게 느꼈지만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맨날 운동가들을 자동차에 비유하는데 휘발유, 가스 없이 자동차는 굴러갈 수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나가서 학교 다니니까 부모님이 뼈빠지게 학교보내노니까 딴짓거리 하고 징역이나 살고 나오니 자식들한테 부모님들이 용돈 줄 일도 없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도 없고, 당장 운동을 할려면 비상 자금이라도 필요하지 않는가 해가지고 영치금 엠네스티에서 넣어준 놈, 윤보선씨가 넣어준 놈 이런 것들이 넣어준 놈 별 먹고 싶은 찐빵 뭐 통닭 짜장면 죽어라고 안 먹고 그 돈을 모았어요. 출소하고 나가서 활동할려고. 돈을 상당히 모아 갖고 나오니까 이 먼 돈이냐 그런게 모았다고 하니까, 예끼, 징한놈. 두 번째는 돈보담도 운동하는데 필요한 이론 무장이죠. 그런 준비를 했죠. 나는 사상무장이라는 차원에서는 별로 노력을 해본적이 없어요. 이론무장을 했지. 그러다가 내가 대구로 이감을 갔는데, 대구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게 거가 좌익수들 비전향장기수들 전용사동인데 거기가 인제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을 같이 섞어 놓은 거죠. 그때당시 환경운동 개척했던 최열이라든가 있었는데 이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이제 나한테 가르쳐준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어느날 이제 독방에 앉아있는데 또을 푸는 친구들이 이제 출력하는 친구들 중에 그걸 하는 친구들이 옆방, 옆방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묻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할아버지, 여그 독방생활 얼마나 하셨어요? 그니까 고독하니까 꼭 똥 풀때 내다본다고, 나가서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러니까. 거기도 뒤가 막혀있고 밑에 구멍 있고. 그니까 그 안에서 한소리는 안들리지. 그 물었던 일반수가 충격 받아가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28년이요? 그러더라고. 28년간 독방생활 했다니까. 인제 그말을 듣고 내가 막 상당한 충격을 나도 받았어요. 그니까 내가 민청학련사건 때도 15년 받을 때도 씨발 다 살야 정치적인 것이니까 언제라도 나갈 것, 또 쉽게 나왔고. 받아봤자 이번에 1년6월, 77년 말이면 나가고. 28년이라! 그게 전향한 사람은 독방에 안 있거든요? 일반수 방에 함께 있으면서 출력하는데. 자기 신념,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28년간 적지에서 북에서 넘어온 사람인데, 이렇게 지킬 수 있는가. 이미 인제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가지고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폭력적인 살인적인 전향공작이 진행된 직후였어요. 우리가 민청학련 들어갔을 때, 그걸 들었거든. 그 소리를. 대전에서도 듣고. 얼마나 혹독한 고문들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거나 자살을 했는지. 적지에서 그 모든 전향공작에 고문부터 회유가 엄청 났을 거고. 특히 인제 그 당시 70년만해도 조금 먹기가 나았는데 전행 전후 이런 시기, 특히 50년 때 그런 때는 밥도 형편없이 적었다는 것을 다 아는 이야기고 일반 사람들도 다 아는데. 인간 이하의 어떻게 보면 대접을 받으면서 극도의 그 영양결핍 속에서 철저하니 고립된 적지에서 모진 고통고문을 이겨내면서 적지에서 28년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봤어요. 그리고 28년으로 끝난 것도 아니여. 앞으로도 계속 될 거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 저렇게 28년 30년 40년 저렇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읆나한 확고한 내 나름대로의 신념의 체계가 서지 않는 한, 사상 이념적으로 서지 않는 한 함부로 내가 무슨 주의자니, 마니 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자신이 확실히 섰을 때만이 내 사상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겠다. 그러한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함부로 그 사삿ㅇ 이념에 대해 뭐라 뭐라 이야기 하는 것을 철저히 조심하고 있어요. 그 다음부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더란 거여. 그때 혼자 독방에서 종일 그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 거기서도 죽어라고 이제 공부만 했는데 교도소가 좋은 학교라고. 최열이는 죽어라고 그때 공해문제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다른 거 안하고 그것만. 그래가지고 나와서 공해문제연구소 차려가지고 한국 운동사에서 환경운동에 개척자가 된 거에요. 그쪽으로. 나는 인자, 어느 한 부문 운동하는 것이 체질에 맞는 성격이 아니라 온갖 것을 다 손을 댔는데 일종의 조직운동가 스타일이죠, 내가. 그래서 나는 뭘 하다가 요분야가 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는 이런식으로 공부나, 그래서 나는 주로 상정을 했어요.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을때, 내가 그 사람을 과연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전도사들 연습하는 식이지. 그런 입장이었어요. 하여튼 거기서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어요. 그때 이제, 우리 어머님이 건강이 어쩌냐고 면회를 오고, 와서도 이해를 하고 부모님에 대한 그 효도, 효도 문제를 가지고도 이것도 정리를 확실히 하자. 대전 교도소 있을 때 교도관들이 효도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그래서 어머니의 얼굴 부끄럽게 하는게 불효고 떳떳하게 하는 것이 효도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넘어갔는데 이 효도 문제도 내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래가지고 이제 고부분에 의해서도 이제 낑낑거리면서도 정리를 한 것이 이제 아주 내가 어머니라는 시를 쓴 것이 있는데. 「나의 어미니」를.
면담자: 봤습니다.
구술자: 봤어요? 그런 식으로, 어머니도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제일 뒷부분은 518이후의 것을 덧붙였죠. 거기에. 모든 어머니들, 이땅의 역사 속 어머니들은 모든 이따으이 고난받고 수탈당했던 어머니들은 나의 어머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런, 그 당시에 진짜 그렇게 알차게 했는데, 이 요놈들이 나보고 전향을 하라는 거에요. 내가 무슨 전향이냐고 그랬더니 국가보안법이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있으니까 그때 당시에 전향 안ㅎ고 나왔다 그거에요. 그러니까 전향을 하라 이거죠. 미쳤다고 쏘아 부렀는데, 보안과에 가서 악쓰고 그랬는데. 나와 부렀는데. 근데 그게 어떻게 되었냐면 당시 상황이 에,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 가지고 받은 형 집행을 정지해가지고 나왔거든요? 구속집행정지로? 형이, 그니까 형 집행정지지. 그러지 형이 종료된 것이 아니거든. 근데 지금 장영달 열린 우리당 의원이 긴급조치, 민청학련 사건으로 우리랑 같이 들어갔었는데 석방됐다가 2․15조치로 석방됐다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가 가지고 수사과정에서 대들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형 집행정지가 취소되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장영달이가 졸지에 7년인가 더 살아버렸어. 남은 외상 값을 갚은 거지. 그런 선례가 있었어. 내가 알고 들어갔거든 이제. 장영달이가 목포에가 있었는데. 이놈들이 위협을 하는 거에요, 이게 당신 전향 안하면 형 집행정지가 취소된다 그거여. 그러면 남은 14년 외상까지 살아야 하니까 당신은 앞으로 16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한다. 와 이새끼들 아조 신경질나게 하데. 근데 말은 맘대로 하라고. 50년이 아니라 100년 뭐시 어쩌고 뻥을 쳐놓고 이제 들어오긴 했는데, 찜찜하제. 하도 단호하니 전향이라고 해서 대체 내가 어디서 어디로 전향을 해야, 내가 자유민주주의잔데. 그러면 저쪽은 사회주의로 전향을 해야. 전체주의로 전향을 해야. 뭐 어쩌것냐 그런 식으로 하고 인제 오고 끝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제 엉뚱한 일들이 터져서 난리가 났는데.

1-4. 박정희 암살계획
구술자: 이게 어제부터 지금까지 광주 운동사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사석에서는 몇 군데서 이제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하고 넘어갔는데, 공식적으로는 이제 언급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어요. 이 사건을 말을 할까 말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내 건강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또 이제 공소시효가 지났어요, 이게. 인제 말해도 돼. 에. 76년 7년 사건이나까 음...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거든. 그래봤자 2002년 정도 되면 다 끝난거야. 근게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래도 할까 말까 하다가 518기념 재단이 임의단체도 아니고 두고두고 이런 활동을 할텐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관련자들의 동의는 내가 안구하고 에. 심정적으로 충분히 동의를 할 몇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먼 일이 있었냐면은 어제 내가 이야기할 때, 4월 9일 75년 4월 9일. 인자 전남대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 사형당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악을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어떻게 마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던지 아, 요 정권에게 유인물이나 뿌리고 시위 집회나 하는 식으로 하고 도저히 엄두가 안나. 참아낼 수도 이겨낼 수도 없고 오래걸릴 것 같고. 그래서 봐불라면 적장을 보라고 박정희를 암살을 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죠. 추진을 했죠. 한명 두명 이제 끄집어들였죠. 우리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무지막지한 학살 정권, 독재정권을 꺼꾸러들일 수 있겠느냐. 적장ㅇ르 봐블자. 그래가지고 인제 한 일곱 명, 일곱 명 정도 끌여 들였죠. 나까지 해서. 근데 그 중에 나를 포함해 네명은 이름을 인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인제 5월 항쟁 당시 지도부에 외무부장을 맡았던 그 사람인데, 정상용 국회의원도 했었죠. 71년 교련반대 시위 때 강제 입영되었던 친구죠. 학교도 그냥 자퇴를 해버렸어요, 이친구가. 교수들한테 교수님의 기름기 낀 얼굴과 튀어나온 배를 보고 강의를 계속 듣는다는 것이 곤혹스러워서 그만둡니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퇴를 해분 친구들이 둘이나 있어요. 강제 입영당했던 친구 중에. 그 친구주 하나가 정상용, 하나가 이양현 그런데. 인제 어쨌든 간에 정상윤하고 내 매제인 박형선이하고 그 다음에 이제 농민운동하다가 나중에 남민전으로 들어가서 혼나고 나온 조개석이라고 있어. 거리해서 나까지 네명, 나머지 세사람이 있는데 인제 추진했는데. 세 사람은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공직에 있기도 해서. 그때 내가 이야기를 하기를 우리가 무슨 특수 훈련을 받아가지고 저격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찾기도 어렵고 그런 성능 좋은 총도 구입하기 어렵고, 영화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그런 정밀한 방법으로의 암설은 포기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해서 폭탄으로 봐버리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수류탄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폭 형식으로 안고 뛰어드는 그 방법밖에 없다. 확실하니 봐불라면 그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에 동의해갖고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을, 인제 물었어요. 어디서 이걸 구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저렇게 구할 방법이 군대 밖에 없어요. 수류탄. 그래서군에 입대해 있는 좀 말이 통하는 선후배 친구들을 찾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이제 찾아서 수류탄을 세 개 확보하고 인자 다이너마이트를 두 박스 뇌관까지 해서 확보하고. 준비를 해놨는데 근데 그때 양이 덜 차. 더 많이 준비해서 하나가 실패하면 또 봐불고. 이런 식으로 할라고. 이제 그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가, 그러면서 내색 전혀 안했지. 그 쪽에서 갑자기 내가 활동을 안하고 딴짓거리 하는 것 처럼 보이면은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해가지고 집중적으로 또 사찰을 다닌다 그래가지고 계속적으로 평상시에 하던대로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조용히 추진하다가 인자 (교도소에)들어가버린 거예요.

1-5. 에피소드-간첩단 사건
구술자: 인제 나는 나가서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 준비해놓은 것도 있고.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인제 우리 형하고 하튼 누가 면회를 왔어요. 근디 이제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를 안 시켜줬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형선이가 내 메가 왔는데 이 친구가 못 들어오고 창문 밖에서 이라고 손만 흔들고 갔어요. 면회를 했는데 인제 그때 그래요. 형선이가 책 가져와서 책 넣었다. 알렉세이『뿌리』 들어왔는데 아 인제 당연히 그날로 책이 들어와야 하는데 책을 안 넣어줘요. 독촉을 했지. 왜 안 넣어주나. 안 넣어주고 그날 넘어가. 그 다음날 또 안와. 막 문을 차고 왜 책을 안 넣어주냐고. 그런게 이제 책이 들어왔어. 그래서 이제 재미난 소설부터 먼저 읽는다고 해가지고 알렉시이 『뿌리』를 보는데 한참ㅂ 읽다보니까는 볼펜으로 활자 사이에다가조. 딱 하나 쓰였어. 예감이 이상해서 살펴가면서 보니까는 조. 그 뒤에 글짜 써진거 보니까 적, 의, 명, 령, 이, 오, 빨리 나오시오. 그래놓고 뒤에다가 인자 자기들 별명을 늘어놓은 거에요. 이 원수들이. 하마, 참새, 이러니 뭐 이러고. 그러니까 그 때 교도소에서는 이 책을 돌려보거든. 보고나서 다른 사람 주고 그랬는데. 근데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런디 나는 또 생각없이 볼펜으로 째깐한 글씨니까 지위부써 이제. 그래갖고 이제. 그랬는데 그 다음날 운동을 갔다 왔는데 그 시간에 이놈들이 들어와가꼬 책을 글씨를 어떻게 했는가 본 거에요. 내가 안지웠으면 넘어가는 건데 지위노니까 문제가 된 거에요. 나중에 사건이 끝나고 보안과에서 가서 기록을 보니까 처음에 책에 대해서 대장에게 ‘불허’, 그래갖고 ‘낙서’. 근데 그 다음에 이걸 끗고, ‘허가’ 그래놓고는 가로 해놓고 ‘공작상’ 그라고 써 있드라고. 공작상 어떻게 된가 하고 넣어본 거에요. 거기에 내가 걸린 거죠. 아, 이거 뭐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우연히 그놈들한테 걸린 거지. 아니면 형선이가 바깥에서, 거기서 썼대. 나중에 들어보니까. 면회서 앞에서 소파에, 벤치에 앉아가지고 이러고 쓴 거야. 딱 그날 오후에 사복 입은 놈들이 들이가 와 가지고 나오라 해. 뭐 먹은 약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없다고. 따라나가서 대구 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지. 가가꼬 뭐 뻔하지 뭐. 거기야 뭐 의자 딱 콘크리트에 박혀있는 고정된 팔걸이 의자에 딱 앉으면 양쪽을 채워버리면 옴짝달짝 못하지. 그 앞에 책에 녹음기, 백열등, 강한. 저쪽에서 쏘아버리면 저쪽에서야 내가 훤히 보이겠지만 나는 모습은 안보이는. 목소리만 들리는 식으로 갖춰져있는 것이지. 침상하나 있고, 갔더니 박형선이가 뭐라했냐고. 내가 무러 알것이여. 갔더니, 하나 둘 셋 한 열명이 들어와 가꼬 앞에 서고 책상 옆에 서고 뒤에 서고 그라고 나만 보고 있는 거야 이렇게. 꼴아보고 있어. 째려보고 이러고 앉아 있는거지. 뒤에서 몇 명이 보고는 옆에서 앞에서 보고 그라고 이제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나서는 본적 이름부터 묻기 시작해서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라고. 나는 뭐 끌려올 때부터 아이쿠야, 이젠 전부다, 눈앞이 캄캄하지. 그래, 초등학교 동창회 그 다음에 동창들끼리 맺은, 묻는다고 하지, 계모임. 그 다음에 전남 구속자 협의회. 그거밖에 없으니까 나야, 나야. 그래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 하나 동창 계는 누구누구 들었고 뭐 하고 언제 만들었고 어쩌고 구속자회는 뭐가 어쩌고 여기(책) 왜 지웠냐, 이게. 나한테 이런 모임이, 조직이, 동창이 이런데서 명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잇는 조직이 있냐. 구속자회는 니가 회장이었지 않냐. 그게 무슨 협의회들, 친목모임 같은 건지 우리가 다 아는데 먼 명령이냐.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하마, 참새 뭐 이런 것들을 이제 일종의 간첩들 접선할 때 이름 그렇게 생각한 거에요. 딱 그놈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게 생겼지. 모르것다고 이제 나 나믈대로 인자, 내가 월부책 장사를 잘해서 에, 돈 좀 벌어보자고 제안을 여러 친구들이 했었는데 그래서 참새는 정상용이라고 하는데 꼭 참새같이 이쁘장하니 생겨갖고 여자들 잘 후리게 생겨갖고 그래서 제비라고 부르고 하마는 하마같이 생겨서 하마라고 그러고 박형선이는 어쩌고 저쩌고 해가 지고 인제 같이 나와서 장사하자는 이야긴지 운동을 계속 같이 하자는 이야긴지 내가 여기 안에서 알 수가 없다. 인제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데 요놈들, 흔적 안 남게 하느라고 여기 저기 치는 거지. 숨 막히게 치고 여기가 급소거든. 길길이, 물어본 것 또 물어보고 그래갖고 인자 내가 3일간을 출소 일주일 앞두고 에요, 일주일을 앞두고. 인제 이미 그때는 출소한다고 그래갖고 머리 깎았던 것도 두달 반 전부터 길어갖고 두발이 상당히 길었을 때에요. 그러니까 인제 묻는거지. 그렇게 계속. 그런데 그 시간에 인제 나중에 인자 확인해 본께 먼일이 있었냐면 딱 내가 이걸 지운 것이 드러나자 정보기관에서도 그러더만. 수평적으로 광주 정보부하고 협조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 본부에다가 이야기를 해가지고 헬리콥터가 떠버린 거에요. 급히 광주로. 조직을 잡을라고. 와가지고 광주 정보부 한쪽 칸 비우라고 그래가지고, 정보도 안줘블고 여기다가는, 그러드마 그놈의 시키들. 그니까 자기들이 일종의 비상 수사관을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여기서 이제 형선이를 찾은 거여. 내가 형선이가 이 책을 썼다. 책이 왔다, 면회가 왔었다. 그래, 내 여동생은 결혼한 여동생은 끌고 형선이를 찾으러 다닌 거죠. 아니, 결혼이 아니라 사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내 여동생은 어떻게 먼 일인지는 모르고 도망가버려야 하니까 시간을 끌라고 자꼬 헛간데를 데꼬 다니는 거에요. 끌고 그것이 나한테는 고통인데. 원수들이. 헛간데를 끌고 다니는데, 형선이 뿐만 아니라 그 구속자협의회 회원들을 요놈들이 찾으니까 한놈이 없는거야. 광주에 인자. 어디를 가도. 근게 이놈들은 더 이상하게 생각한거야. 하마도 없고 참새도 없고 누구도 없고 누구도 없고 끝까지. 그 사이에 이 구협 맴버들은 광주 왼가 담양인가 모여서 자기들 나름대로, 요즘 말로는 수련회같이 이박 삼일인가 일박 이일인가 먼 모임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인자 들어날 수가 있어야지. 안보이지. 인제 내 동생은 인제 알면서도 숨겼고. 그러니까 빨리 찾았더라면 내가 쉽게 나올 수 있었는데 그 바람에 내가 3일 생똥을 싸분거지. 그래갖고 요놈들이 진짜로 간첩단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래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인제 그 소식이 전해졌었어. 그니까 이제 그 친구들이 하마부터 참새 다 정보부로 간거여. 그래갖고 문 뚜드리고 요리 들어와갖고 나를 왜 찾소? 너 누구여 그런게 아 내가 당신들이 찾는 하마요. 왜 날 찾았소? 왜 날 찾어. 넌 누구여. 같이 간 것도 아니고 따로따로 들어가갖고. 내가 참새라는 사람이오. 어째 참새같이 안 생겼소? 누구같이 생겼소? 이 사람들이 기절해버리지. 아이쿠야, 이거, 간첩단은 커녕 이거 황당한 녀석들이구나. 나가 한 이야기하고 말이 맞어분거야. 근디 인자 재미난 것이 결정적으로 유리했던 것이 뭐냐면 구속자회에서 그 전 모임을 한번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구속자협의회에서 어 인자 한봉이 형이 고집피우고 각서 같은 것을 안 쓰면 잘못했다고 하는, 민청학련 때 그 외상까지 살아야한다. 그러면 인자 운동도 못하고, 광주 운동도 못하고 인자 타격이 크니까 어떻게 하든지 적당히 써주고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근게 일부는, 에이 한봉이 형도 눈치가 있는데 알아서 쓰고 나오시겠죠 무러 그런 걸 걱정하냐고. 아이, 그래도 고집이 보통이 아닌게 충분히 우리 뜻을 전달을 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그 전달책임을 박형선이가 맡은 거여. 내가 면회 갈 때 따라갈란다. 그러면 영선이가 면회할 때 적당하니 각서라도 쓰고 빨리 나와라 해라. 그러니까 형선이는 고걸 빙자해가꼬 그렇게 애매하게,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 써버린거여. 그래놓고 그렇게 됐던 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이 친구들이 있어 노니까, 조직이라고 하면 아니, 한봉이 형이 이거 각서 안 쓰면 외상까지 살고 나와야하니까 적당히 살고 나오라고 그 말을 전달하라고 해서 내가 가가꼬 면회를 나는 못 들어간다고 해서 그냥 책에다 썼다. 그 밑에 가까운 후배들 이름도 쓴거다. 그렇게 해부니까 이 친구들이 황당하지. 다 맞아 떨어지거든. 다른 사람들 다 불러다 조회해도 하실이라고해. 회의 때 그 이야기가 나와서 형님 면회가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면회 와가지고 전했으니까 안 되니까 책에다 했다 이거지. 그래서 이 사람들이 허허, 이 새끼들아 느그들 때문에 윤한봉이만 죽어분다, 윤한봉이가 죽어. 나는 인자 그때 죽고 있었으니까. 교도소에 저녁이면 데려다 주는데 일단 법무부에 묶여 있으니까. 인자 이침에 데려가고 이런식이제. 그래가지고 3일째 되는 날 이제 오후에 정보과장이 나와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보고 쓰래.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것을 그들이 기대한 대로 야무지게 써준 게 도 이놈들이 놀랜 거야. 나는 내 나름대로 관점을 쓰는 것이니까. 아,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 같다고. 아 머, 하도 빨갱이로 몰아싸코 하니까 내가 솔직하니 내 심경대로 쓴거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먼 밥을 시켜주고 그러믄서 대우가 달라져.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 그래서 뭔가 감이 좀 잡혀서 아, 내가 더 늙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어쩌고 저쩌고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빨리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끝이 쭈뻣쭈뻣 스니까 빨리 나가야지, 나가서 이 일을 수습해야지, 큰일나게 생겼다. 그렇게 해서 살겠다고. 법도 잘 지키고, 그래가지고 몇일후에 석방되어서 나갔어요. 그런데 첫날, 첫날 가서 수사를 받고 들어와 가지곤 밤에 잠이 안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이구야 큰일났다. 지금 틀림없이 밖에서 난리가 났을건데. 이거 보통사건이 아니다. 자칫하면 천지가 쑥밭이 되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 에라. 너무 절박해분거죠. 너무 심각해분거에요. 사건 자체가. 그래서 자살기도를 했는데. 그대 뻔히 혼자 독방에서 방법이 있나. 화장실을, 기둥 모서리가 이렇게 각이 진 기둥인데. 정확하니 여기(이마정수리)를 중앙으로 해서 들어 받아블면 머리가 쪼개져서 죽을 것 같다고 판단이 돼서 고놈을 잡고는 그냥 그대로 받었는데 그래갖고 정신을 잃어븟지. 난중에서 일어나보니까 교도관이 지나가면서 정면으로 안 맞고 옆에가 맞았는데 머리카락 위쪽으로 여가 이렇게 붓고, 안 죽은 거에요. 인자 보니까 와 사람 머리가 그렇게 단단한지 몰랐는디. 쭈욱 들어가부렀더라고. 아이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래가지고 아침에 나갈 때 머리에 혹난 것 같고 이상하게, 너 왜 그래 물어보면 곤란할 것 같아서 철문열고 나가다가 나가는 중간에 철문이 있고 또 나가는 중간에 또 철문이 있는데 그 철문 조그마한 쪽문으로 열고 교도관들이 거기를 뛰어가면서 찍어부렀어, 여기를(이마를). 그니까 당장 소리가 나지. 철문 자체가 흔들거리고. 밀폐된 철문이 아니라서 그러니 교도관들이 이 자식이 미쳤나, 박을라면 임마. 축구한지 아냐고 어디서 뭘 박는거냐고. 그래서 한번 봐주쇼 그래가지고 고걸로 한 것처럼 해놓고 머리 이래가지고 갔는데. 와 그다음에 아조 곤욕을 치르고 나왔는데 나와서 알아보니까 이제 그런 사연이야. 구속자회서 이렇게 이러헤 해가지고 이렇게 됐다고. 그래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큰일 터져블뻔 한거야. 그래갖고는 아이, 이것저것 그 일을 더 추진하기가 불가능하더라고. 알아보니까 인자 나 들어가부니까 내 후배는 인자 고기 잡아블고, 다이너마이트 가지고 물고기 잡아먹어블고.(일동웃음) 수류탄을 어떻게 그렇게 처리를 해버리고 그래갖고 그게 백지화 되버린 거에요. 그래놓고는 조심을 당분간 해야한다 그래가지고 증거는 없어졌지만, 증거물, 아이고 정말 조심하면서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저놈들이 내가 나가면 법을 지키고 어찌고 한께는 혹시나 해가지고 전향은 아니지만 내 각서같은 것을 아 이자식이 진짜로 그러나 하고 보는디 뻔하죠 뭐. 나오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고 사건이 이제 5․18이후에 어떻게 되냐면은 항쟁지도부에가 그 사건에 관련된 살마이 세사람 있었어요. 항쟁지도부에가. 근게 또 이놈들이 예비검속된 사람중에 형선이도 들어있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오, 요 새끼들 봐라. 또 이렇게 된 거에요. 이제. 응 이상하게 생각한거지. 그러니까 또 형선이가 또 꾀를 내가지고 요가를 많이 했는데 이불을 둘러쓰고 요가를 해가지고 심호흡을 해가지고 온 몸에 땀이 줄줄줄 새부러요. 그렇게 되니까, 짠거지, 그래가지고 헌병을 물고 해싼게 땀이 막 비오듯이 쏟아지고 이러니까 이불 들러쓰고 그 무더운 여름에 그러니까 병원으로 와서 우리 전남대 병원으로 와가꼬는, 전남대 병원오면 맨 광주일고 선후배들이 의사들이나 이놈들이 어마어마한 위기의 상황인 것처럼. 이 보안사놈들이 와서 보면 아조 큰 병인 줄 알아고,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어쩌고 해가지고 그 위기를 넘겨버리고 그런 적도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때 당시에 수배죠. 만약 잡히면 그 사건까지 한꺼번에 나올 거 같아서 더 마음 졸이고 그러고 있었는데. 야튼 광주에서 그런 비사가 있어요. 하기야 그게 그런 사건으로 끝나서 다행이죠. 진짜로 그 일을 추진했다가 던졌는데 박정희는 안죽고 그래블면 난리 나부러. 생사람 수없이 죽을 판인데. 에 어쨌든간에 그렇게 해서.
면담자: 박정희는 어쨌든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네요, 선생님.

2-1. 생계 유지를 위한 노력
구술자: 하하하. (일동웃음) 20개월만에 석방이 돼서 나왔어요. 그게 두 번째 징역이었죠. 그 두 번째 징역은 참말로 공부를 많이 하고 알차게 보낸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s와서 이제 또 인제 뭐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게, 78년으로 넘어가가지고 나와서 이제 맨 먼저 관련됐던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냐, 78년 4월이에요. 함평고구마 사건. 내가 나와 보니까 20개월 만에 나와 보니까 이제 광주의 민청세대의 중심은 구협 회원들 신상에 여러 변화가 있드라구요. 그래서 에 사회운동 차원에서 분화가 일어난 거에요. 이강씨하고 박형선이가 이제 농민운동 쪽으로. 이제 강이씨는 직접 농사를 안 지으면서 카농(카톨릭 농민회)교육담당으로 하고 형선이는 고향 보성으로 내려가서 직접 지게지고 쟁기질 하면서 농사지으면서 카농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이양현이 그 친구는 청계천쪽으로 올라가가지고 노동지역에서 일종의 현장체험을 하고 내려와 가지고 노동운동 교육을 하고 김상윤이는 책방 차리고 있었고 녹두서점이라고 안에 방 하나 딸린 거기서 독서모임 하면서 후배들 키우고 있었고, 이학영이도 서울로 가서 현장으로 피복공장에 들어가 가지고, 위장취업해서. 인자 그 살길 찾아서 가는 거지. 학원 강사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서너명, 문덕희, 이홍기, 정안춘, 뭐 이런 친구들이 학원에 들어갔죠. 이 친구들이 세월이 좀 가고 그러니까 그 전에는 과외도 못하게 했었는데 조금씩 이제 봐준거죠. 다들 먹고 살려고 뭐 사업한다고 꼬마시장이라고 구멍가게를 열어서 체인으로 해가지고 꼬마시장 여기저기서 열었는데 강이씨도 꼬마시장을 했는데 손해보고 정상용이도 꼬마시장하다가 망했고 좌우간 다들 빡빡빡 긴 거에요. 지금 보성건설 대표이사로 되어갖고 지금 어, 대한민국 운동권 출신으로는 제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이기신인데, 보성건설 대표이사로 이기신이하고 윤광옥이라는 친구는 이제 주월동에다가 복덕방을 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복덕방이란 것은 영감님들이, 영감님들이 용던벌이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복덕방. 다들 먹고 살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어요.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안 보여블고 가정에서 압력은 계속오고 그러니까 다들 이제 먹고 살 길을 찾기 시작한 거에요. 그런게 나는 인제, 나와서 광주 올라와야 하는데 옛날부터 나는 동가숙서가식 하고 가방하나 들고 다녔기 때문에 복덕방 그 방에 안에가 사무실 있으면 안에가 방 딸리잖아요. 그 방에서 인제 상당기간 머물렀어요.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다들 이제 먹고 살려고 뛰는데 나만, 나이 좀 더 먹은 나만 또 EHd가방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부담스럽고. 옛날하고 달리 잠자리가 불편해요. 왜그냐면 거기 들어가기 전에는 결혼들을 안했기 때문에 빈대붙어서 자고 그랬는데 인자 모두들 결혼해가지고 상하방 같은 데를 얻어서 살고 그래서 이제 복덕방 건너편에가 이름이 뭐라드라, 석공이란 비석, 글씨 새기고 그런 거 하는데 아침부터 떠들어서 저것이 정신집중도 되고 먹고 살기도 좋겠다 나도 저런 일이나 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면서 운동을 해볼까. 그러고 나서 일하는데 책임자한테 나 여기서 일하는 것 좀 시켜달라고 그랬더니 씨익 웃으면서 나이가 몇이요 하니까 저게 쉽게 보이요, 힘으로 한줄 아요. 손이 굳어버린 나이 먹은 사람은 못하는 일이요. 손이 부드러울 때 시작을 해야지. 지금 이렇게 하다가 저 큰 비석 글자 하나 잘못 파불면 어쩌요. 지금은 컴퓨터로 해버리지만. 그래가지고 내가 또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보신탕, 구탕집이라고 하드라고요 친구들이. 그때만 해도 보신탕집이 상당히 깨끗하니 차리곤 했지만 그때만 해도 보신탕집이 으슥한 뒷골목같은데 단골들만 들락거리고 개고기 먹는 게 일반화가 안됐을 때에요. 그래도 돈은 번다고 대인시장에 가가지고 개고기집에 가서 아저씨한테, 아저씨 내가 나도 보신탕집을 좀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 봉급 안 받을테니 여기서 기술지도 좀 몇 달 해달라고 요리법들을 배우고 싶다고 그런게, 결혼했어? 결혼 안했는데요. 그럼 가쇼. 왜요. 총각이 보신탕집 해갖고는 나중에 결혼도 못하고 그리고 작은 자본으로 이런 식당 같은 것을 하려면 부부가 몸으로 때워야지 사람쓰는 거 아니요. 아예 상식이 없소. 어디서 그것도 모르고 왔소? 당신은 묻는 것 부터가 틀렸소. 안되겠다. 그래서 거기서도 퇴짜 맞고 쫓겨났어.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뭔가 생업을 가지면서 운동을 해 볼려고 그랬는데 그게 안 되는 거야. 안되는데, 김남주가 카프카 서점을 망해묵고 시골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또 먹고 살려고 후배들 일어지도를 했어요. 일어지도를 하는데 이 친구가 이제 교재를 ‘파리 꾜뮨’으로 택한 거에요. 일어판 파리 꼬뮨. 근디 그 사실을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놈이 밀고를 해버렸어요. 중정(중앙정보부)에다. 그래 가꼬 갑자기 인제, 남주가 수배가 되요. 그리고 남주하고 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 끌려가고 이강씨도 잽혀가고. 근게 또 내가 눈이 뒤집어졌제. 그래가지고 이제 정보부 가가지고 왜 잡아갔냐, 내 놔라부터 어쩌고 쭉쭉 하다가 다시 또 운동에 뛰어들게 된 셈이 됐죠.

2-2. 함평고구마 사건과 쌀 생산자대회
구술자: 그러다보니까 이제 4월이 되니까 함평 고구마 사건으로 북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 전혀 내부에서 준비도 없이 치약 칫솔 하나, 소금 한 줌 준비 안한 채로 친구 하나도 없이 갑자기 준비를 해버린 거에요. 단식농성에 들어가 버리거든요. 인제 성당측에서 동의를 안 할 것 같으니까 성당 교육실, 교리실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런데 강이씨가 카농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고 형선이도 있고 조계선이도 그러고 있고. 이게 함평 고구마 사건이지만 함평 농민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막 간부들이 오고 그랬는데. 그래 단식농성이 딱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들이 또 일하니까 밥은 이만큼씩(많이)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예비단식 과정도 없이 아무런 준비없이 시작하니까, 침구도 없지. 세면도구도 없지. 소금도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 다음에 이제 거기에다 누웠다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거 아니거든? 이제 증폭을 시켜야 하는데 단식효과를 정치적으로 높이려면. 그러면 밖에서의 흔히 말하는 재야나 청년 학생들 쪽에서 호응을 해줘야 하는데 인제 그 일을 갑자기 내가 맡게 된 거에요. 근게 침구 구해 날리고 세면도구부터 몰래 솔래솔래 타먹으라고 미숫가루부터, 해가지고 완전히 경찰이 봉쇄를 해버렸기 때문에 복동성당 뒷골목으로 해가꼬 경찰들이 모르는 골목으로 담 넘어서 인제, 들여보내고 이제 그런 일을 하고나서 인제 바깥에서 모임을 주선해가지고 지지격려차 북동성당 방문을 해야한다. 시위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양림동 성당에서 모여가지고 그런 음모 꾸미고. 동원하고. 그래서 진짜로 청년 학생들이 밤에 북동성당 위로차 간다 그래가지고 걸어오고 경찰이 막고 뛰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번지게 되니까 저쪽에서 항복! 그래가지고 피해배상한다 그러고 농협에서 횡령했던 놈들 대폭 해임하고 구속하고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겪었어요. 끝나버리고, 이겼는데. 이긴 다음에도 그 침구부터 시작해서 다 실어다 주인들 갖다 주고 나르니라고 고생했는데 고 일로 해서 인제 갑자기 농민운동쪽하고 굉장히 가까워졌죠. 신뢰도 얻고. 서울에 연락하고 그런 일을 다 했기 땜에. 고거를 인제 계기로 해가지고 느닷없이 11월에는 인제 계림동 성당에서 전국농민쌀생산자대회를 했는데 추곡수매가인상 등 다양한 요구들을 쌀생산자대회를 했는데 이제 농민회 간부들이 함평고구마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신뢰가 생겨서 쌀생산자대회를 하는데 여덟끼를 먹는다. 1박2일에. 아니다, 2박3일이구나. 그래가지고 2박 3일동안 800명이 잘 수 있는 숙소 마련. 그니까 그때는 방법이없어요. 계림극장 뒤에 지금 개발이 안되어서 완전히 옛날 그대로 안되았고 쉽지가 않는데 거가 엄청나게 준 옛날 창녀촌 비슷했거든 거가. 그래가지고 여인숙이 많았어요. 여인숙. 싸구려 여관. 가장 낮은 급의 그런데 농민들이 돈이 없으니까, 그런 여인숙에다가 어느 여인숙에는 몇 명 어느 하숙에는 몇 몇 고런 일만 하고 그 다음에 그것만 부탁을 해. 그래서 EH 다른 것은 필요없냐 했더니. 없대. 알았다고. 그러면서 날더러 800명 8끼 식사를 맽길만한 믿음직한 도시락 만드는 식당 같은데 아느냐 그래. 순간에, 야 이거 우리가 맡아야 겠다. 그거 왜 식당에 맡길라고 하냐. 식당 아니면 맡길 길이 없다여. 800명의 밥을 어떻게 할 수 있냐. 그 밥, 우리가 맡으마. 인자 우리라 글지, 내가 맡아서 청년들하고 여자들하고 동원해서 할란다. 그러니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같잖다는 투로 전부 나를 봐. 밥 할 줄 아요? 자취를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해봤지 않냐고, 그 자취가 팔백명 밥하고 같은 건지 아냐고. 800명 밥할라면 솥이 몇 개가 필요한지 아요? 깍두기 먹을라도 깍두기를 지금 얼마를 담아야 하는지 아요? 국은? 시작해서 그릇? 젓가락, 숟가락 80개부터 거 어떻게 할라고. 잔소리 하지 말고 들어보라고. 요걸 식당에다 맡기면 반이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간다. 그것이 상식이거든. 50%를 먹으니까. 근데 그러고 따뜻한 밥 따뜻한 국을 못 먹는다, 도시락으로 하면. 직접 내가 광주 운동권 사람들 동원해갖고 성당 마당에서 솥단지 걸어놓고 밥을 해서 항시 밥과 국 따듯하니 먹고 훨씬 도시락으로 먹는 것보다 맛있느 반찬에서 먹을 수 있게 해 줄테니까 나를 믿고 나한테 맡겨라. 자기들끼리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게 식사라는 거에요. 왜 그냐면 고게 잘못 되 버리면 다른 프로그램이 전부 엉망이 되분다는 거에요. 제 시간에 시작 못하고 뭐 어쩌고. 그래도 책임질 수 있냐고. 일초 안틀리고 여유있게 시간 맞추어서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제 되냐 안되냐 한디 윤한봉씨가 할라고 하면 할 수 있다. 근게 맽겨봐야 한다는 사람도 보이고. 내 이야기를 어서 들었는가 어쨌는가 그래가지고 내가 그걸 맡게 된 거에요. 그래가지고 엉뚱한 일을 벌려가지고 나 혼 났는데. 그래가지고 쌀생산자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2-3. 황석영과 여성운동가 조직-송백회
구술자: 그 이야기 하기 전에 여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인제 설명하는데. 그때 두 번째 징역을 살고 나왔더니 고생했다고 그래가지고 구협 동지들이나 시골로 강진으로 가 있으니까 찾아와서 이말저말 부탁을 하는 거에요. 두 가지 부탁을 하더만. 긍게 여러사람이 이야기를 한디 일치된 것이 두가지여. 하나는 지금 해남에 장길산을 쓴 황석영씨가 왔다. 장길산을 감옥 안에서 재밌게 읽었거든요. 연재가 다 끝나진 않았지마는. 그런데 자지들이 본 바로는 이거는 원광석이다. 이걸 갈고 닦을 사람이 없다. 야생마 같은데 갈고만 닦으면 멋진 보석이 될 것 같은데. 그 일을 맡아주라 그러야. 근디 그것이 첫째고. 두 번째가 인자 나 안에 있는 동안에 여자들, 여성들, 여성운동단체를 만들어보려고 남편들이 이제 여러차례 시도를 했던 모양이야. 결혼들을 하게 되고 그러니까 왜냐면 자꾸 갈등이 생기는 거야. 근데 이건 의식의 차이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들도 모여서 나름대로 학습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래가지고 의식의 공유가 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이제 모이게 해야 한다. 그래서 몇 차례 시도를 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런데 모이면 남자들 성토장이 되고 남자들에 대한 정보교환장이 되어가지고 왜 집에 돌아오면 남들은 발을 한번 닦는데 당신은 일주일에 한번밖에 안닦냐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쓸데없는, 생일 선물 누구는 줬다는데 당신은 뭐했어? 그런 엉뚱한 쪽으로 튄다는 거에요. 그래서 실패했단 거에요. 그래서 나가지 말라고 해가지고 이렇게 다시 또. 그러니 날더러 여성들 조직 좀 해달라는 그것이 대표적인 두가지. 알았다 그래가지고 황석영씨는 해남으로 찾아가가지고 하룻밤 이야기해가지고 확 휘어 잡았죠. 나 나름대로 황석영씨하고 저녁 내 이야기를 해보고 이 사람이 서울 무대에서 활동하다 내려왔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재야 쪽, 문화, 문학 예술 분야 이런데 발이 넓어요. 우왕꾼이라. 그래서 이제 구라도 좋고. 그래서 아, 전남 운동과 서울 운동의 교류협력하는데 있어서는 이 양반이 상당히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판단이 되고. 이 지역의 운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이 되고. 앞으로 이양반을 잘 접촉을 해야겠다. 죽어라고 계속 그걸 그렇게 해나갔죠. 황석영씨하고 서울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황석영씨가 성깔이 괴팍한데다가 변덕이 심해요. 넘의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면담자 웃음) 성격이 쎄요, 상대적으로. 인제 그 꼬라지, 그 죽끓듯한 변덕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데 나는 그걸 딱 각오를 했기 때문에 장점도 강점도 많은분이고 재주도 좋은 분이고 정치감각도 뛰어난 사람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황석영씨 문제는 풀어갔고. 그 다음에 여성들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그래가지고 인제 그때 당시에 여성운동 관계 서적이라는 게 신비의 여성, 여성 시리즈가 몇권 있었어요. 지금 이름도 잊어버렸는데, 자유로운 여성 뭔 여성 어쩌고 하여튼 그런 책들이 어서 구해다가 보고 하이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너무 많고, 에이씨 내식으로 하자 그래갖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일종의 결집. 이런 이렇게 내세우고 는 이 털양말짜기를 시작했어요. 털양말짜기 이게 뭐냐면 민청학련 때도 경험했고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경험했지만 한 시월 정도 되면 벌써 재소자들이 동상에 걸려요. 콘크리트 건물이라 여름에 달아오를 때는 못 견딜 정도로 덥고, 춥기 시작하면 냉해가지고 온기가 없으니까 햇빛 안 받고 약해져 놔서 발 손 인제 여지없이 인제 동상에 걸리는데, 그런데 이거 나일론 양말 이런 것은 두 개 세 개 신어도 이차가운 기를 못 없애요. 그런데 내가 그거 좋다고 털양말이 한겨울 동상 걱정 없이 넘어 가니까 발이 따뜻하니까 몸도 좋고. 그래서 내가 나와서 인제 알아봤더니 인제 그걸 사는 거냐 그랬더니 털양말을 판 데가 없다는 거에요. 짜야한다고. 그래서 내가 이 털양말을 가지고 가방에 담고 다니면서 신고 다니던 놈 갖고 교도소에서 겨울나기가 얼마나 힘든가부터 동상약이야기 하다가 털양말 이야기 끄집어내서 이놈을 하나 신어노면은 한겨울 동상도 안 걸리고 넘어간다. 기가 막힌 거다. 그게 빵은 한겨울 동상도 안 걸리고 감기 안 걸리고 넘어간다. 기가 막힌 거다. 그게 빵 넣고 사과 넣고 그런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양말하나 넣어준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그래가지고 양말좀 짤 수 없냐, 양말 좀 짜서 넣자. 그럼 여자들이 대부분 단 한사람도 나 안할란다 하지를 않아. 그런데 하긴 하겠는데 양말짜본 적이 없다 이거여. 어떻게 짜는지를. 그러믄 짤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냐 이거 보면 모르냐,부터 해가지고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누가 짤지를 안대. 어떻게 짤지 서로 연결을 해갖고 짜는 기술을 배운 거예요. 그럼 처음에 내가 털, 털 순모를 사다 줬어 이제. 사다줬더니 다음부터는 이제 털실 필요없다, 우리가 다 샀다고. 그래가지고 나는 처음에 광주교도소에 있는 장기수부터 정치범들 한 40명 있었을 땐데. 여기만 생각을 했어요. 너 줄라고. 그래서 자기 샂ㄱ했는데, 이를 테면광주 운동권에 관계된 사람 부인들 또 애인들, 그다음에 YWCA에 이해신 돌아가신 이해신총무부터 김경천 간사부터 안희옥 총장 뭐 이런데 간사부터 아예 일하시는 여자분들, 안성례씨를 비롯해서 저쪽 기독병원 일하시는 분들 하다못해 목포에 한산촌 결핵 요양원이 있는데 여기까지도 부착을 하고 황석영씨 부인부터 시작해서 뭐 목사님들 부인부터 천지사방에다 인자 내 여동생부터 또 교회운동 하는 기독청년회 여사들부터 이렇게, 그래서 어떻게 인자 짜고 있으면 같은 직장 동료가 뭐하냐, 그럼 또 자랑을 하는거죠. 의미 있는 일을 하니까 이래저래해서 짜면 가만히 들어보면, 양심수들이 어쩌고 저쩌고 감기도 안 걸리고 나도 한 번 해볼까 이런식으로 해갖고, 나중에 147갠가가 나왔어요. 147컬레, 실값만 해도 꽤 많은 건데 나는 인제 딸랑 하나 인제 황석영씨 부인 지금은 이혼해갖고 계시는데, 빨리 좀 짜주라 그래갖고 완성된 놈 들고다니면서 봐라고 말이야 인자 또 이렇게 해가지고 딴딴하게 짜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많이 짰어요. 그래서 그 짠 놈을 나를 준다고 가져가라고 그래서. 다음단계로 짠 것을 나한테 줄 것이 아니라, 몇 월 몇 일날 광주교도소 앞에서 만나자. 다 자기가 짠 놈 가져오고 주민등록증 가져오라고. 직접 넣어라, 그러면은 내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죠. 감옥 안에 있으면서 남자들이 와서 빵사고 옷 넣는거하고 여자들이 온 놈하고 또 다르다. 받을 때 기분이 다르다, 그랬어. 그래갖고 그 여자들이 넣으면 냄새도 다르고 향수도 있고, 뭐 어쩌고 저쩌고 기분도 좋아하고 그러니까 그리 오라고 그래가지고 교도소에서 인제 내가 미리 장기수들 하고 정치범들 명단을 입수한 놈을 놓고 한 명당 다섯 명씩 고르라고. 그래갖고 골라서 나는 정씨니까 정 뭐 어쩌고 다양하니 그렇게들 해갖고 그 이름들 넣게 하는 거죠. 자기 이름으로. 그것이 이제 송백회 결성 1단계작업이었어요. 그래갖고 남은 놈하고 전북 교도소 전주에서까지 전주교도소 전주교도소까지인자 소문이 나니까 보내주라고 그래가지고 보내고 그랬는데, 고걸 끝내고 나서 인제 그때가 인제 추워지기 전이거든요. 추워지기 전에 넣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넣은 거것이 그때가 한 10월 달엔가 넣었을 거에요. 그러고 인자 쌀 생산자 대회 밥일을 하는 과정에서 또 인자 묶에 세울 수 있겠다 판단해서 남자후배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 힘도 동원할 수 있게 되니까 자신이 서서 내가 밥을 하겠다. 그래갖고 인자 모든 책임을 준다 그러더라고. 근게 인자 여자들만 그때만 해도 송백회라는 조직을 만들기 전잉요. 만나갖고 이야기를 한거에요. 이래저래해서 이 지식인 운동과 민중운동, 농민운동과 여성운동, 청년 학생회운동의 연대차원에서 연대연합을 위해서 이번에 우리가 이사람들에게 여덟끼 따뜻한 밥과 국을 맛있게 끓여줘야한다. 그런데서 신뢰가 싹트는 거지, 시위한다고 같이 악스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는 말이야. 깊은 신뢰는 이런데서 오는 거니가 일하자, 여자들이 나보고 하이고 일 또 저질러 논다고 말도 팔백명 밥이라는 게 또 똑같은 소리하는게 남자들이 했던 이야긴데 거기다 덧붙ㅇ이더라고 여자들이. 깍두기 담을라믄은 얼마나 필요한지 아냐고 남자들은 묻는디 여자들은 뭐라고 하냐면 무가 리아카로 몇 개가 되냐부터 다라이가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좋다 그럼 어려우니 만큼 의미가 큰거 아니냐, 우리가 하면은. 그러니까 같이 하자. 그라믄 인자 마당에 파같고 솥단지를 인자 솥을 아 솥은 내가 구한다. 국통은 아 구한다. 왜그냐믄 집에가믄 다라이다 있지 않느냐. 목욕한다고. 집에 집집마다 있는 솥단지부터 빌려오면 될거 아니냐. 그러믄 거기서 땔 나무는. 아 학생운동 출신중에서 여그 전남전남에서 대학다닌 애는 아닌데 영석이라고 그 친구 지그 아버지가 제재소를 해요, 광주에서. 제재소에 가면 인제 나무 목재 빼내고 남은 껍데기 피죽인가 그런것들이 많이 있어요. 고거 리아카로 실어나르면 되지 않느냐. 고놈 때믄 된다. 그릇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봤더니 대인시장 같은데 가면 하루에 얼마씩 해서 수저 젓가락 국그릇밥그릇전부 빌려준. 그러다 분실하면은 배상하는 거죠. 하여튼 다 책임질테니까 하자. 그래갖고 인자 설득했더니, 그라믄 이미 그렇게 약속해브렀다. 해보자고. 한사람 두사람 이렇게 끄집어 내고 남자들 콱, 여자들 앞장서서 남자들 잔심부름 다해. 실어나르고 리어카에다 피죽 실어나르고 대인시장에 가갖고 이것저것 사는데 재밌어요 인제. 영수증이 필요한거 아닌가 돈을 받았으니까 증거가. 그 영수증이 어딨어, 꼬추장에다가 도장 이거 해갖고 아줌마들거 받고 거 거름종이 찢어가지고 꼬추장 그래갖고 얼마 그래갖고 일벌렸다고 난리여. 다라이들 밑에다가 문병란, 쓰고 그래갖고 괭이로 북동성당 앞에 마당에다 파고 솥단지하고 국단지하고 걸고, 국솥걸고, 하여간에 난리를 꾸몃어. 그래가지고 밥을 하는데 밥국을 하는데 그릇 씻을 때 내가 앉아서 인자 여기서는 대충 붓고, 여기서 대충해갖고 여기서 비누칠하믄 넘기믄 행구고 이런 식으로 그때 인자 총 동원이 됐어. 43명이 동권해서 인제 빵잽이들부터 대학후배들까지 전부다 동원해갖고 나 근데 인자 국통 들고 난리다가 잘못해서 손이 빠져갖고 엄지발가락 빠져브렀는데 하여간에 그래가지고 첫날 무사히 딱 마치고 그 다음날 여관에서 자고들 여인숙에서 자고 왔는데 밤에 눈이 와브렀어요. 첫눈이 나무가 다 젖어블고 그랬지. 근데 그만큼 일찍도 나갔어. 젖은 나무막 불어가면서 밥을 해가지고 농민들이라 일찍 일어나요. 일찍들 와. 밥이 예를 들어 7시부터 8시사이에 먹는다 그러면 6시 경부터 와브러. 오는대로 이미 준비 되는대로 해갖고 따뜻한 국에다가 인자 간부들이 자기들끼리 회의하고 워 인자 오늘 큰일나븟다 인자 밥 제때 안될 것 같은데 눈까지 와브러가지고 그라믄 우리 회의 일정에 뭔 차질이 있나 자기들이 온거예요. 와서 보니까는 여기저기서 있고아이고미 아직 밥 안됐고만. 그래와서 딱 보니까 이미 밥다 먹었다는 거에요. 자기들이 늦게 온셈이 되는거지 인자. 그래갖고 인자 놀라고. 여덟 번 밥을 받았는데, 안에서 밖에서 싸늘했었지 추워가지고 고생한 놈들 악쓴다고 여덟끼 따뜻한 밥주고, 국주고, 남은 쌀가지고 떡을 만들었어요. 인절미를. 그래작고 또 인자 마지막 끼니 인절미를 딱 나눠주고. 한푼 안남기고 한거니까. 그전에 인자 도시락 깍두기 담고 여자들 난리 꾸미고 남자들은 인제 씻어 날리고 실어 날리고 잔심부름 다하고 설움까지 당했는데 여자들한테. 인자 그걸 끝내고 나서 자연스럽게 우리 모여서 뭔가를 앞으로 해야 되지 않냐 그래가지고 송백회라고 뜬 거에요. 그것이 인제 내가 맨날웃으면서 조선 엠네스티라고 그랬는데, 옥바라지, 근게 양심수뒷바리지하는 조직원들 이렇게 뜬거에요. 그것이 인제 11월 말인가 12월인가 하여튼 78년. 그래가지고 인제 거그 현대문학연구소 78년 6월에 아 79년이구나 현대문학연구소. 나중에 인제 송백회 사무실 겸해서 현대문학연구소에서 쓰게 됐는데 거 현대문학, 송백회. 인제 송백회 결성하고, 그 다음에 거기 인자 교사들이 여자교사들이 중고교 교사들이 여러명 들어왔어요. 와이에 있는 정명화부터 이윤정이 거기도 인제 나중에 송백회 된 다음에 와이로 들어갔는데. 그 다음에 인제 뭐 강목사 사모님 초대회장 맡어쌌고 하여튼 운동관련 부인들은 뭐 아내들 다들 고생을 하죠. 교사들이 또 들어왔는데, 인자 송백회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2-4. 1978년 민주교육지표사건
구술자: 그러고 인결집78년에 인제 중요한 게 그 6․27 민족교육지표사건이에요. 그때가 한 5월이나 됐나. 인자 슬그머니 정보가 들어오더라고요. 긍께 서울에서 성내원 교수랑 백낙청 전교수가 중심이 돼가지고 광주에 이제 전남대는 송기숙 교수가 맡고 조대는 문병란 선생이 맡고 문병란선생은 인자 그때 학원강사였지 교수가 아니었는데, 조대는 맡고 그런 식으로 해갖고 전국적으로 이제 유신헌법을 개탄하고 민족교육지표 아니 국민교육헌장 이걸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한고 있다. 얼마나 인자 흥분되는 사건이었어요. 드디어 인제 교수님들이 움직인, 교수님들 움직이믄 학생들이 가만있나. 그래가지고 인제 나는 주변에다가 이 일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학생들하고 접촉의 창구가 조끔이라고 있는 친구들한테 인자 이러이러한 것이 준비된다 그러면은 교수들이 발표를 하게 되면 뻔하니 연행되고, 해직 투옥될 건데 그래갖고 교수들만 피해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이거 운동으로 운동에너지로 이걸 증폭시켜야하니까 학생들이 바로 뒤따라서 쳐줘야한다. 눈치것들 움직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교수님들 만나면 슬금슬금 인자 자극 주는 그런 정보는 일제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도 송교수님은 가끔 그 말씀 하시는데, 그 발표한 몇 일 앞두고 우연히 인자 저녁에 만났는데, 내가 학교 교수님 어째 하시는 일 잘 돼가세요?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금방 또 표정을 바꾸면서 뭔일? 나 하는 일 없어. 그러고 가시더라고. 하여튼 잘하셔야 합니다 어째 좀 이상한가 자네 우리집 가서 차나 한잔 하세 좋습니다 하고 따라갔지 안자. 집이 중흥동인가 됐을 건데 따라가서 자네 뭘 알아? 그래서 아니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요? 그래서 교수님 한 열명 조끔 넘겼죠? 그러니까는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면서 어떻게 알아 이사람아. 아이고 눈치로 아는 거죠. 뭐 어찌고 하면은 내가 맞춰볼까요? 이 양반이 얼굴색이 딱 굳어지면서 서명한 교수들도 누군지를 모르고 한다는 거여. 자네가 어떻게 알어? 내가 맞춰볼가요 그래갖고는 세었어. 하나둘 누구 누구누구 여덟명째 세 가니까 송기숙 교수 얼굴이 완전히 굳어블드라고. 그래 갖고 인자 세사람이 틀렸어요. 아 어떻게 아냐고 아니 나는 간단하다고 평상시에 내가 대학 들어다니면서 교수님들 이렇게 만나뵐 때 뭔가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교수님들하고 내가 월부책장사한다고 75년에 뛰어다닐 때 사라고도 안했는데 사람 시켜서 학생 시켜서들 찾어 오라 해갖고 사준 교수들이 있다. 그런 교수들이 있었어요. 잘 모르는데 블러갖고 가면 뭐 책 판다며? 내가 사줄게 그래갖고 사주고. 그런 교수님들을 내가 쭉 해갖고 세사람이 틀렸어요 인제 한 사람은 싸인은 한다는데 그 사람이 해외로 지금 연순가 문가나가게 돼서 뱄다, 고 한분 틀리고 나머지 그랑게 세 분이 틀렸어 하여튼. 그 내가 그때 틀린분이 홍승기교순가 하고 김두진. 하셨는데 내가 모르는 분들. 그분들, 깜짝 놀래. 내가 인자 직접 배왔던 사람들이 김현곤 교수는 불어, 해서 내가 알고 이석원 교수는 문화사, 뭐인자 직접 나를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인제 뭐 이제 이홍길 교수라던가 이방기교수라든가 이런 분들은 내가 인자 개인적으로 알고. 어쩌고 어쩌고 해갖고 와 하여튼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교수님이나 알아서 잘 하십시오. 나는 밖에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라고 인자 27일 날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일 날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일부로 연행이 됐어요. 정보부로. 교수님들이 이 송기숙 교수님 댁에다가 대책본부를 꾸몄어 인자 그래갖고 서울에다 다 전화하고, 서울서들 내려오고 그때 백낙청 교수도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러고 인제 30일부터 학내에서 인자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아니 저 30일이다 28일부터 시작해서 29일 날 이제 대규모 교내 시위가 벌어지고, 30일, 7월 1일 시가지를 벌이고 까지 발전한 거죠. 근게 인자 거기 있으면 송기숙 교수님 댁에 전화가 있어갖고 미리 이야기하는데 학내에서 29일날 막 시위하고 그럴 때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고 지금 어디서 경찰하고 붙고 있고 실황되다시피 전화가 오고인자 그랬는데, 긍게 안기부 이놈들이 골목길에다가 아예 딱 정보과 계장하고 직원하나하고 둘이 차에 타고 있더, 내가 들락거리고 있다가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 이게 이래도 되는거여! 왜그냐믄 다른 지역에서 안 난 사건이 여기서 터져브니까 전남대에서 자기들도 책임이 있지. 그러다가 31일, 31일인가? 이제 사모님이 송기숙 선생 사모님이 막 싫은 눈치를 하는 거여 우리들한테. 저놈들이 인자 뻔하지 당신 남편 조용히 있으면 나올 건데 저놈들이 이용해먹는다 상식이지. 그러믄 당신 남편 진자 못 나와븐다 이런 애기. 그래서 사모님이 사정없이 미운표정을 지어블고 막 눈치를 주고 하더니 쫓겨나브렀지. 그러고 정보부에서 부장이 정보부장이 지부장이 만나고 싶다고 그래갖고 인자 황석영씨하고 내가 정보부에 갔어요, 갔더니 아니 이렇게 뒤에서 장난을 할 수 가 있어요? 어쩌고 저쩌고 시치미 딱 치고 무슨 장난이요? 아 우리는 송기숙 선생님 인자 석방을 위해서는 노력했을 뿐이라고. 올바른 발언을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어쩌고 인자 이러지 맙시다 좀 막 그라고 인자 갖짠다는듯이 한방 놔블 듯이 인상을 써갖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성질 내쌌드라고. 어쨌든 그렇게 되고 마지막날 그 박석삼이라고 박석률이라고 민청학련세댄데 석률이 동생인데, 그 박석삼가 나중에 즈그 형하고 같이 남민전에 연류돼 갖고 고생했는데, 그 박석삼이하고 죽은 박기순 둘이를 불러갖고, 인자 석삼이는 인제 학생들 시위준비 과정에서부터 자기 가게에 모여서 음모도 꾸미고 그런 친구 중에 하난데, 둘이 모여서 인자 그동안의 일지를 작성했어 인제. 이렇게 해서 27일부터 죽 해갖고 학생들이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하고 학내에서 시위할 때 경찰들이 진입해갖고 거기서 막 치고박고 할 정도였으니까. 시내에서 뛰다닌 것부터 그대당시에 거 광주시내 좀 높은 빌딩 옥상에 군장교들이 올라가서 고막 뭐야 충장로 등등 골목골목 누비고 뛰어다닌 것을 전부 그 사람들이 에 내려다보고 있고 그랬는데, 고런 이야기 다 쓰는데 마지막에 와서 형님 장갑차가 나왔다네요, 그래 그래서 확인도 안해보고 장갑차 출현 써가지고 차비 줘서 서울로 와서 문익환목사님 만나갖고 그게 인자 언론에서 보도를 안하니까. 외신에서 나왔어요, 그 성명서도. 성명서도 외신으로 내 보내가지고 광주가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빨리 알려드리라고 그래갖고 인자 보냈어요. 그랬더니 석삼이가 거기 가서 전했더니 이 양반이 장갑차 출현에 충격받아갖고 기자들한테 이야기 해가지고 신문사 기자들이 내려온 거예요. 근디 인자 장갑차 출현했는디 지나가블믄 볼 수가 없지. 그래갖고 영 난처해갖고 있는데 벌교 쪽 농임회에서 무슨 땅문제 갖고 그동안에 무슨 집회시위했었는데, 이 팀들이 도지사실을 점거해갖고 난리를 꾸민거여 그시간에. 그거 그 현장을 대신 인자 인도해브렀어. 근게 인자 기자들 말이 글더마 도대체 이놈의 광주는 민주 교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지만 농민들까지 이게 도대체 완전히 다른나라라고 놀란거여. 서울에는 그런것이 없는데, 근게 인자 도청앞에 가니까 난리가 인자 전경들 서있고, 도청 안에서 악을 썼쌌고, 이층에서 그 벌교 농민들 투쟁현장을 그분들이 와서 보고 그랬는데. 이 석삼이는 그것땜에 수배되고 그래갖고 못 내려오고 서울가 있다가 즈그 형님 꼬임, 꼬드기는 바람에 남민전에 들어가지지고 날벼락맞아가지고 지금까지 서울서 살고 있는데, 기숙이는 인제 그걸 계기로 해서 7월 초에 기장인가 어디 교회 청년들 모임에 거기 나가가지고 그 629시위 627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폭로하고 징계 먹을 것에 대해서 미리 자퇴를 해버렸죠. 자퇴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었으니까. 7월11일 전후해서 있었던 전준가 전북 어디서 있었던 거 교회 청년회 모임에 가서 언론에서 안 다루니까 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한거지. 그래가지고 인자 들어간 친구들도 일제히 옥바라지 시작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자 민족교육지표사건이죠. 인제 그때 그래요 그사람들을 송기숙 교수가 얼굴이 굳어질 정도로 놀랬던 게 뭐냐면 어떻게 아냐 이거지, 왜그냐믄 당시에 학생들이 시위하고 성명서 발표하고 참여하는 것하고 교수님들 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왜이냐믄 이 학생들은 기득권이 아니거든, 기독권자가. 교수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는 기득권인데, 특권계급인데 사회적인 지위, 명맘, 모든 것을 봐서나 소득으로 봐서나 정말로 좋은 자리 아니에요. 그걸 포기하고 그것도 투옥될 각오를 하고, 교수님들이 거기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거든. 정말 보통 결단이 아니여 그거. 그전에 내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전남대 구 본관에다가 518기념문화 기념관? 518 기념관 만들고 그 안에 인자 들어가서 보믄 학생운동사 나온데 그 최영태 소장한테 내가 아조 강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민주교육지표사건이 너무 적게 다뤄졌다. 거 가서 보면은 이거야 말로 큰거다. 큰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큰 사건이다. 전남대만 유일하게 했으니까. 그런데 너무 비중이 적드라, 두 번째 민주 교육지표사건이 있는 전남대학 저 그 사건을 현장인 전남대학교에서 민주교육지표사건에 대한 기념사업이 전혀없다는 것은 사진 몇장 걸어놓고 인제사 그 부끄러운 이야기다. 우리는 들불 열사 추모비도 세우고 그러지 않냐. 근데 느그는 뭐하냔 말이야. 그역사적인 사건이다. 근게 나름대로 좀 신경을 써야 할거 아니냐 나중에 야길 들어보니까 전남대에서 저 조형물도 만들고 그러자고. 그런데 인자 교수들부터 서운한게 뭐나면 나이든 자신들이 자기가 나서갖고 자기를 기념할 순 없는 거 아니요. 누가 해줘야써. 근디 기념사업이라는 게 힘들어. 왜그냐믄 돈이 들어가니까. 근디 가만히 말을 못하고 체면에 가만히 있는데, 다른 하다못해 학생들 중에서 투신한 애들 뭐 시위하다가 죽은애들부터 시작해서 강경대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뭐 박승희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다 있는데, 이 민주교육지표사건 기념, 사업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거여. 20년이 흘렀는데도. 20년이 뭐야 30년이 흘렀는데. 속상하지 근디 자기를 자기가 기념한다고 할 순 없고, 그러니 인자 내가 나서주고 싶은데, 나도 이제 뭐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있고 인자 들불 여기까지 하고 있는데, 또 거기가 신경쓸 여유도 없고 그래서 자꾸 인자 해란 말이야 나도 참여하겠다, 그래서 627민족교육지표사건이후에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감방에 가거나 학사징계받은 친구들 등등 관심있는 친구들 중심으로 인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그저께 연락이 왔더라고. 그것도 사실은 관련자들이 나선다는 거 자체가 모양새가 그렇긴한데 뭐 어떻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 힘들어요. 아조 힘들어. 그 조형물 만드는데 실비로 전부 무료로 해주고, 공사하고 다 해갖고도 6천만원 들었다고요. 그 518자유 공원 가봤어요?
면담자: 예,가봤어요.
구술자: 그게 대한민국 명물이에요. 고거 본딴게 여그저그 나오기 시작한다고 지금. 그 양식을 본 따서. 테라코타를 못 붙이고, 그런데다가 인제 지금 들불 상 제정 인제 사단법인 들불기념사업회 만들어갖고 1억 5천정도 모금을 했는데, 5천만원정도 더 모금을 해가지고 매년 천만 원짜리 상을 줄 거여. 그것이 대한민국 운동권 관련 상으로는 제일 큰 거예요.

3-1. 민주세력 결집

구술자 : 그 다음에 이제 78년 6월 달이 이제 민족교육지표사건으로 그렇게 가고 7월이 들불야학이 개설되는 시기죠. 인자 이 들불야학부분에서는 직접 개입은 안했어요. 다만 나중에 인제 돈 좀 필요하다고 모금하고 그럴 때 돈 좀 모아주고 그 정도만 했고. 근디 광주 운동사회에서는 이 지역 운동사회에서는 민족교육지표중에는 들불야학이 더미가 클 수도 있어요. 왜 그냐믄 요번 민주교육지표사건과 달리 이건 518에도 연결이 되니까. 7.80년대의 아우르는 사건이에요. 들불야학이 개설됐고 이 지역에서. 인자 어떻게 보믄 78년부터 이 지역의 노동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한거죠. 그게 인제 그렇게 됐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78년 말에 송백회가 결성이 됐고, 그
다음에 인제 그 78년 겨울이 오자 제가 이 민족교육지표 관련으로 교단에서 쫓겨나신 분들을 저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최대한 운동에너지로 또 이걸 바꿔내야 한다. 그래가지고 YMCA하고 이야기들을 해서 동계대학이라는 것을 실시했어요. 그래가지고 황석영씨를 통해서 서울에서 온 강사들, 좀 불러오고 이홍길교수부터 시작해서 명노근교수 등등 해서 송기숙교수도 오고 그 양반들 중에서 동의하신 분들이 이제 강의를 좀 하고. 그렇게 유료로 이게 80년 때 많이 행해졌던 것인데 우리가 광주에서 선구적으로 했던거죠. 티켓 팔아가지고 동계대학, 시민강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해서 돈 쪼금 남기고 그래서 인자 그 양반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는데 동계대학을 하고 그러고 인제 이 송백회를 여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어떤 구심체로서의 어떤 기금, 기금이 마련되면은 오래가거든요. 이것이 좀 힘이 생기니까 그래서 계모임 같은 것도 그래요. 요 기금이 좀 모여 있으면 계가 잘 활성화 되요. 기금이 안모이면 안되고. 다만 이제 우려가 되는 것은 돈 문제 가지고 도중에 깨지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좀 우려스러운것이지만 하여튼 송백회 기금을 좀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래가지고 이 참 치사한 방법을 썼는데 미술품 전시회를 인자 상당히 크게 했어요. 음 요건 79년이구나. 맞아 79년, 78년이 아니라 이 송백회기금 마련을 위한 미술전시회가 요거 YMCA에서 했는데 하여튼 이건 놔두고요.

3-2. 동지애

하여튼 내 개인적으로는 78년에 개인적으로 있었던 일인데 그게 인제 내가 민청학련 사건때 징역을 살면서 내 인생최초로 동지가 뭔가에 대해서 인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동지 사전 찾아보면 뭐 동고동락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 그런 식이죠 뭐. 그게 인자 그것이 그 추상적이고 애매해가지고 딱 감히 안 잽혀요 근데, 내가 석방된 다음에 고향에가 그 정신병이 좀 있는 분이 선배 한 분이 있는데, 어쩔 때는 맑았다가, 어쩔 때는 또 흐렸다가 거 정신분열증 비슷한 거였어요. 하여튼 그 양반이 손에 돈을 쥐면 인자 정신이 헤까닥하는거예요. 근디 그런 분들이 가끔 그런 분들이 어릴 때 동네에서 보면은 이 보통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도 뻔히 보고도 못 느끼는 것을 딱딱집을대가 있다고요. 신들렸다는 뭐 그런 소리도 듣고 그러는데, 근디 내가 인자 215조치로 석방되고 집에가 있는데, 작은방에가 있는데, 마당에서부터 큰 소리로 한봉아 나왔다. 미안해서 너 바로 못 찾아오고, 고민 고민 하다가 할 수 없이 오늘사 왔다. 어찌고 해갖고 들어오시더라고 근디 그때가 인자 정신이 약간 인자 돌아올 때였어요 그 양반이. 영식이형이라고 영식인데 권영식. 그 내가 그 양반한테 내 인사를 한 다음에 참 형님 내가 좀 물어볼 것이 좀 있는데, 근께 뭐이냐 그래서 동지가 뭐예요? 동지. 그러니까 야 조용히 하고 펜 줘봐, 막써가지고 나를 주더라고요. 거가 인자 한자로 유무상통하고 쓰는거예요. 유무상통. 근게 순간적으로 짜릿한 맞다, 이거다 라고 인제 감이 오더라고요. 그래도 확인할라고 이거 설명좀 해주십시오, 근께 아무리 뜻을 같이한다고 해도 그 니들이 학생이니까 부자나 가난한 놈이나 있는놈 없는놈 가릴것없이 다 학생이니까 뜻하나라도 같이 막 모여서 일을한다. 동지라고. 그런데 나중에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고 그렇게 되면은 모여서 뭐회의하고 어쩌고 할 때는 나라가 어떻게 민족이 어떻고같은 주제를 갖고 막 이야기를 나눠도돌아스면은 가난한 놈은 집세걱정, 부인 병원비 걱정 학비, 자녀들 학비걱정 그런 세계로 빠져들어블고, 돈있는 놈은 돈벌궁리 투자할 곳 사업할 곳 어쩌고 저쩌고 생각들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사는거다. 절대 그 건 동지가 안되는 거다. 그렇게 돼서는 그러니까 진정한 동지는 뜻도 같애야 되는 거지만 서로 어려울 때 있는 놈이 없는 놈에게 주고, 그래서 함께 나눠 사는 나눠먹는 근게 유무상통하는 필요할 때 서로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돌려쓰는 이런 관계가 돼야만 올바른 동지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런 뜻으로 내가 유무상통이라고 쓴 거다. 유무상통하지 않고는 동고동락이니 공생공사니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딱 감이 잡히더라고. 예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께 그러믄 인자 기왕 오셨으니까 저한테 해줄 말 있으면 한마디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종이 달라고 하더만 딱 쓰시더라고. 살생유택 그 세속오계 화랑 우리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그걸 써요. 살생유택. 그 이건 또 뭡니까 너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그래서 이거 우리학교 다닐 때 배운대로 한다면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 생명들을 죽일 때 함부로 죽이지 말고, 잘 택해서 죽이라 그런 뜻이라고 그랬더니, 거 잘못안거야, 그러믄요 그랬더니 죽일 놈과 살릴 놈을 정확히 구분해서 하라는 뜻이다. 죽이고 살림을 잘 택해서 하라. 엄정하니 구분해서하라. 나중에 죽일 놈들 있다가 무자별하게 무차별적으로 죽이지 말고 정확하게 골라서 죽이고 살릴 사람들은 끝까지 키워야 한다. 키운 뜻으로 받아 들여야지 생을 생 육성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런게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큰 절 올렸는데, 그 살생유택 요부분 유무상통 요부분에대해서 많은 생각을 두 번째 징역 살면서 하다가, 내가 78년에 이제 재산목록을 작성했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무엇인가부터 정확하니 파악을 해 놓자.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필요한 사람들한테 줘버리자 그래서 유무상통할 수 있는 내 자신의 준비부터 갖추자. 목록을 갖춘 재산목록을 했는데, 일번이 만년필, 이번이 내가 가방에 담고 다니는 누가 준놈 뭣헌건데 자동 면도기, 그래가지고 쭉 삼번 손목시계 그래갖고 고무신 빤스 란닝까지 전부해놓고 인제 두 개 이상 있는 옷은 인제 잠바도 그렇고 상의 옷도 그렇고 후배놈들 줘브렀어요. 인제,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내가 산다.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살아생전에 그 옆집을 하나 시골집을 요고는 인자 한봉이꺼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해 놓으셨어. 나중에 인자 큰형님이 다 받아다 쓰셨는데, 내가 장사한다고 거짓말 치고 인제 거 형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고 집값이라고 그래갖고 얼마를 주시더라고요. 고놈 갖고 와서 인제 정상용이가 인제 이 꼬마시장한다고 구멍가게한다고 빚이 많이 져 있어요. 빚값는데 쓰라고 돈 줘블고, 나는 인자 다털어븐거지. 유무상통 그런 차원에서. 그라고 인제 정상용이가 결혼식을 못하고 인제 동거하고 있어. 그러니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쑥덕쑥덕하게 결혼도 안하고 동거나하고 이러면 안되나 결혼식을 시켜야겠다. 나도 그때 돈이 없고, 주변에도 돈이 없고 그래서 박형선이가 시골에서 농사지면서 보성에서 독사, 하사, 능사, 이런 뱀들을 잡아갖고 뱀술을 수십통을 땅에다가 묻어논 거에요. 그게 아주 잘 만들어가지고, 그거 마시면 사람들 되게 좋아해. 또 주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그때 비싸게 팔렸어요. 서울같은데로 이러고 팔고, 뱀술 열병을 주라고 그래가지고 인자 고놈 팔아서 결혼식에 쓰라고 인제 뱀술을. 그런식으로 인제 그 뭐랄까 당시 운동이 그런 식으로 이뤄졌어요, 광주지역운동이. 뱀술 팔기작전에 들어가고 그랬는데, 어쨌든 간에 78년 이 광주운동이 굉장히 거 뭐랄까 활성화된 해였어요 그때 아주 78년이 그렇게 됐고. 그 다음에 79년으로 넘어가죠. 좀 쉬었다 하죠. 차한잔. 79년에 들어서 그거 저 인자 아까 말했던 그 1월 1일 무등산에 올라가고 그런건 78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79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규모가 커지고 어쨌든 간에 79년에 들어와서 거 한가지 이제 새로 시작했던게 5월 5일날 어린이날을 기해서 막 운동한다 뭐한다 해서 이리뛰고 저리뛰고하고 감방에 들락거리고 그래가지고 가족들하고 차분히 바람쏘이러 야외에 나가보거나 그러지를 못해 가정에서. 삭막하지. 물적조건이 안되니까.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친밀도 좀 높이고 그런 문제도 함께 풀겸해서 5월 5일날 민족가족야유회라는 것을 가게됐어요. 그래가지고 그게 79년 80년 5월 5일 마찬가지 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게 어떻게 된지 모르겠는데, 그럼 인제 가정 가족들을 다 끌고나오니까 꽤 많은 숫자가 모였다고요. 79년 5월 5일에는 화순쪽으로 갔는데 지금 화순 어딘지는 기억이 안나요. 하여튼 그쪽에 가서 하루 쉬었고, 80년에는 여그 광주에 있는 식영정 그쪽으로 갔었고.

3-3. 현대문화 연구소

그렇게 해서 자꾸 내부의 단합 좀 높인것 같고 결정적으로 이제 79년에 신경을 썼던게 이제 수가 이제 불어났는데 참 모여 앉어서 이제 이를테면, 쉽게 얘기하면은 어디가면은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곳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약속없이도 수시로 모일 수 있고, 정보교환 할 수 있고 그런데 이게 이를테면은 75년에는 카프카서점이 이제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인제 모이고 그랬는데 이게 수가 좀 불어나니까 그런 자리가 마땅치 않는 거야. 다방에나 앉아서 그래봤자 만나야 다방에 가는 거고 돈만 들어가고 아깝고 돈도. 눅두서점이라고 있어봤지만 책방에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숫자가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또 옥바라지를 할려면은 인자 책을 계속 넣어야하는데 한두권넣고 끝나면 좋은데 그 다 볼때쯤이면은 교체를 해줘야하거든. 그런데 그걸 그때그때 책을 사서 넣을라면은 그러 안해도 가난한 우리 전라도 가정들 부담이 커요. 그래서 옥바라지용 책들을 왕창 모아놓고 파는 곳에다가 그책 이제 가족들이 와서 이제 그 책들을 갖다 넣어 갖고 다시 찾아오니까 이렇게 돌려서 다시 갖고 오고 새로 갖고 가고 이렇게 하면 서로 부담도 덜어주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서 책들을 고루고루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을 한군데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학습할 필요도 있고. 그래서 내가 인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이름은 그럴듯하니 지어야 하니까 제일
원만한 이름으로 현대문화연구소, 긍게 인제 애매해블지 현대문화연구소 그래블믄. 애매할수록 좋으니까. 현대문화연구소를 이 장동로타리에 있는 거 이층건물인가 되는데 거 이층 끝에 방인데 한 이십평짜리 됐어요. 고걸 이제 돈 여기저기서 빌리고 뭐 어쩌고저쩌고해갖고, 전세금 얼마 월 얼마 이런 식으로 하고 이제 소장을 아예 그냥 문덕희라고 내 삼년 사년후배한테 해놓고 얼마 있다가 이제 김희택이 정용하이런 식으로 소장이 바뀌게 됐는데, 나는 인자 전면에 안 나설라고. 그게 현대문화연구소에다가 이 가구들 짜서 돈 안들이고 할라다보니까 인제 해갖고 길게 탁자들 놓고 의자 놓고 앉어서 하게 의자는 그때 그 관광호텔 사장을 황석영씨가 잘 알아가지고 어떻게 어찌어찌해서 인제 호텔이라 조금 낡은 의자 같은 것을 교체하는데 삘건 의자 등받이 의지 갖다놓고 많이들 놓고 돼지저금통 큰놈 탁자위에가 올려놓고는 앞에다가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나중에 또 사건 터지면 어서 돈 나서 움직이겠냐고 골치 아플 것 같애서 차 한 잔으로 연구소 운영에 동참합시다 그래 갖고 커피한잔, 오백원 그때 가격으로 하면은 시중가격에 한 열배 가까운 가격을 붙여 브렀어요 거디가가 인자. 차 한잔에 오백원. 그래가지고 예를 들면 교수님이 한분 오셨다 그러면은 그 둘러 앉어 있는 사람들이 딱 보믄 일곱명이여 그러믄 여덟잔 여덟곱하기 오백원 그러면 사천원이믄 내 놓으믄 되는데 대부분 만 원짜리 놓고 가고. 인자 저금통에다 놓고 완전히 칼만 안 들었지 강도라고 그라믄 웃고. 차도 안마시고 거기다 돈 넣고 가시는 분들도 있고. 그래서 인제 책장을 짜놓고 인자 구호를 청했어요. 그 시절에. 일기장과 가계부를 제외한 책은 다 내와라. 족보, 일기장 가계부 족보를 빼논 책은 전부 다 내놔라. 그래가지고 인제 서울 출판사들까지 연락해갖고 서울서 돌았어요. 출판사들을 돌고, 왜 그냐믄 그때 학생운동출신들이 제적당한 사람들이 올데 갈데 없으니까 배운 재주는 있고 그러니까 번역을 많이 했는데 번역을 하다가 어떻게 출판사하고 연결이 돼가지고, 보니깐 이거 할만하거든 출판사들을 많이 찾은 거예요. 거기서 베스트셀러도 나오고 돈 좀 번 사람들도 있고. 인제 그런 것들이 토대가 돼 가지고 80년에 출판운동이 활발하니 해 갖고 좋은 책들이 마 많이 냈던 거지. 근데 속없는 이 후배들은 팔팔뛰는 애들은 감방 갔다나온 애들은 선배들한테 이 외국책이나 번역하고 자빠졌다고 선배들 욕을 욕을 바락바락하고 그랬는데, 긍게 인자 날카로와지면 어차피 좁게 보니까 속내용도 모르고 80년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어쨌든 간에 서울 이제 돌아다니면서 책좀 보고 책도 좀 모으고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쓸만한 책들 뿌리채 뽑아갖고 와서 넣고 한 이천권을 책장에다 빡빠가니 채워넣고 그리고 옥바라지할 때 쓰라고 가족들한테. 서울서 와서도 광주들러서 거기 들러서 책 갖고 가고. 광주에서 자기 가족이 있거나 그러면은 그라고 한참 악질적인 짓을 했지. 족보와 가계부와 일기장만 빼고 다 내놔라. 인제 그렇게 하고, 그 사무실에 이제 송백회 자기들 회합장소로 쓰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나중에는 거기서 80년 초에 80년 1월에 극단 광대가 출범을 하는데 극단 광대 후원이 모임처럼 된거예요. 거기다가 인제 모든 살림도구들 놔두고 그렇게 했는게 그 놔두고 그 다음에 민주청년 협의회 회의실 겸 사무실 구속자협의회를 이름을 바꿨어요. 이 민주청년협의회로. 그러니까 인제 그 민주청년협의회 얘기좀 해야겠네요. 어떻게 됐냐믄 아까 그 인제 조직원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 그 사건으로 해서 이제 대구쪽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광주에가 전남 민주 구속자협의회가 있다는 것을안거예요. 인자 그걸 중앙에 보고를 하니까 전국에 유일한 거예요. 거기가. 그러니까 인제 불벼락을 내린거예요. 여기 정보부에다가. 왜 인자 나뒀냐 깨라. 그러니까 이놈들이 불러다가 구속자협의회회원 한사람한사람 놓고 탈퇴각서를 쓰라고 한거예요. 거기서 안쓰면은 인자 두들겨패블고.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있는 갑자기 사람이 가끔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날때가 있다. 굉장히 나하고 가까운 친군데 갑자기 이름이. 아니 그 조길례교수 남편. 최, 이런 또 갑자기. 기다리고 고 졸도해브렀다고 맞고. 그래가지고 이놈들이 다 각서를 받고, 해체했다고 이제 발표를 했는데, 보고를 하고 그랬는데 다시 최권혁이 여기 영문과 조길례 교수 남편이지. 이 졸도까지 하고 그랬다고 그랑께 이 친구들이 다시 YMCA에서 모임을 해 갖고, 이거 강제로 쓴 각서다. 이렇게 두들겨팼다 졸도까지 했다 이건 무효다 그라고 규탄하고 해가지고 다시 이제 이걸 재결성 해븐 거예요. 그렇게 인자 깡으로 버텼지 이지역에서. 그래갖고 이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울에 있는 빵잽이들이 민청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광주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뭐냐. 그래가지고 이제 자기들도 그동안 인자 거기서는 주로 출판사에서 모인거예요. 인자 번역실 비슷하게 만들어가지고 공동번역실, 번역을 할라는데 집도 그러고 애기들이 뛰다니면서 떠들고 그런께 번역실이 따로 없거든. 공동번역실이라는게 사무실하나 빌려가지고 자기들 번역할 책거리들들고 모으는거제. 거기가 인제 연락처겸 회의실겸해서 쓰였는데, 이 사람들이 자기반성을 하고 광주를 이렇게 고통 속에서 탄압받으면서도 지켜가고 있는데 우리가 뭐하냐 그래가지고 자기들이 만든 것이 민주청년인권협의횐가 인권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민주청년협의회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제. 시대에 맞게. 구속자들뿐만 아니라 구속자 아닌 사람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이 생겼으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감방에 간적이 없는 박효선, 정삼용, 이향연, 이런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이제. 그 다음에 긴급조치 9호 세대들도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조직을 확대 강화한건데 그 내가 졸지에 또 회장을 맡게 됐었는데. 이 민주청년협의회실 사무실로도 쓰고, 그래갖고 앞에다가 그러고는 인제 문 앞에다가 뭐라고 써붙였냐면은 거갖고 정보부 애들하고 싸웠는데, 학생과 정보사찰시관은 출입엄금하고 써 붙여놨어요. 학생과 정보사찰기관은 왜 그냐믄 학생들 들락거려노믄은 엄한놈들 맨날 잡혀가고 끌려가고 날벼락 맞으니까 사회운동에 매진을 해야하기에 그리고 정보사찰기관은 기분 나쁘고 긍게 못 들어오게 해블라고. 그러고 써 붙여놨는데, 정보부애들이 요쪽 우리가 끝방이었는데 요쪽 끝에가 다방이 있었다고요. 연합다방인가 그랬을거예요 연합빌딩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그 일층 아래 밑에가 녹두서점이고 인자 그리 옮겨왔는데, 정보부에 계장이 와갖고 사정을 하는거여. 뭐라고 하면은 잘 알거아니냐 각 지역 사정을. 대한민국천지에 정보사찰기고나은 출입엄금이라는 이 무지막지한 놈의 글자를 붙여논데가 여기 말고 또 있냐. 이건 우리 자존심문제다 광주. 인제 체면 좀 살려주라 안 들어갈게. 아예 떼어도 우리 안들어갈테니까 좀 우리 체면 살려, 타 지역에서 알면 웃음거리다 우리는. 정보부 알기를 우습게 진짜로 이건 해도 너무한거 아니냐, 긍게 내가 그랬어. 당신들이 분명히 안들어올 것 같다는 내 판단이 슬때까지는 좀 붙여놓을테니까 아예 기다리라고 대신 저 만약이 뜯어내고 나면 글씨 더 크게 써 또 붙이고 할거니까 나중에 빼인뜨 칠하고 그래블거니까 손대지 마라고. 그래갖고 인자 그걸 버텼다고. 그래갖고 아조 거기서 그 간사로 일하던 임영희 같은 경우도 뭔 일이 있어가지고 그 사람들이 와서 똑똑 문 두드려갖고 이렇게 여니까 들어올라오면 막 쥐어뜯어블고 아조 유명하게 아조 악질적으로 굴어갖고 못들어오게 막고 그랬는데. 아예 못 들어왔다고 이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인제 공간 마련한데 서울서 운동권친구들이 내려오면은 딱 문열고 입을 떠 벌려. 너무 넓고 멋지거든 깨끗하고 걸레질을 내가 아주 잘하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큰. 자기들 공동번역식이라고 지저분하고 좁고 아조 근디 춥던디 여기는 아주 멋지게 해 놨다고 부러워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그러는데. 그 현대문화연구소 고게 인제 딱 일년도 못채우고 518 만나가지고 작살나버렸는데, 어쨌든 거 현대문화연구소를 인제 개설을 했고. 그 다음에 인자 아까 말씀드렸던 말했던 송백회 기금마련을 위한 미술품 전시회라고 해가지고 인자 황석영씨를 통해서 서울에 있는 화가들을 접촉을 해가지고 주로 항아리, 그 도자기 이 전시했다가 안 팔린것들 요것들을 이제 이를테면 공출을 한거지. 그래서 인제 뜻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내놔가지고 작품을 내놀때마다 특징이 있더만. 그 예술가들은 얼마 밑으로는 절대 팔지마라. 어떻게 보면은 자존심중의 하나지. 자기 작품이 너무 싸게 팔린다는거 싫은 모양이여. 40만원 이하로는 팔지마라 이런것들. 그래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뭐 작품들을 모아서 이고걸 용달차에다가 포장해가지고 포장해가지고 광주로 싣고 와서 YMCA거 현관 공간에다가 진열해놓고 밤에 거기서 자고 인자 손님들은 미리 맨마다 전남대 총장 그때 사십만원짜리 하나 팔고 그랬는데, 꽤 많이 팔았어요, 그때 기금을 삼백만원 마련했죠. 그래가지고 그때 인제 우스개,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저녁에 자면서 오줌이 마려운데 에이 사십만원짜리 요강에 오줌 한 번 싸봐야지 거기다 싸고 아침에 가서 붓고 씻고 거기 깔깔거리고 웃고 그랬는데, 이 그렇게 해서 송백회 기금을 마련을 하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조직을 거 추스러가는 그런 과정이 있었고.

3-4. 문화운동 - 극단광대

그 79년도 말부터는 이제 그 박효선을 중심으로 해서 문화운동하는 친구들 묶어서 이제 광대, 극단 광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YWCA산하에 두는 것으로 그렇게 YWCA 극단 광대.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는 YWCA를 띠어브렀는데, 이 친구들이 이제 인연을 어떻게 맺게 되었냐면은 78년 10월 11일에 있었던 북동 쌀생산자대회때 이 친구들이 이 함평고구마사건을 주제로 한 마당극을 만들어가지고 쌀생산자 대회 때 공연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아조 우뢰같은 박수를 받았지. 굉장히 효과가 컸는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연극반하고 전남대 탈반 애들이 묶어져서 극단 광대를 80년 1월에 출범을 해고 그러고 인자 그 3월에 유명한 돼지풀이 마당굿을 하게 되죠 광주에서. YMCA에서 했는데, 근디 인자 문제는 극단 인자 출범할 때 돈이 없으니까 북 장구 같은 악기 하나가 없는거예요, 하나가. 근게 내가 인자 그걸 돈을 구해가지고 전부사고 주고 그래가지고 이제 창단 공연을 하자 그래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가지고 그때 돼지값 폭락으로 난리가 났어요. 농민들이 돼지새끼를 시장으로 팔러 갔다가 너무 싸니까 화가 나갖고 다시 차에 싣고 오다가 집에 가면 또 사료값이 비싸니까 애물단지거든. 버스에다 놔두고 내려버리고 새끼돼지들을 그런 일들이 막 벌어질 때였어요. 피폐한 농촌의 참혹한 상황을 돼지를 중심으로 해서 해갖고 풍자적으로 작품을 해보자 그래가지고 돼지풀이 마당굿을 만들었는데, 공동창작으로. 그래가지고 서울 올라가서 이제 이 또 황석영씨의 연줄을 최대한 활용한거죠. 양희은 김민기 최희완 다 내려왔어요 이제. 그래가지고 공연하고. 아이 뭐 양희은이 올때 버스로 같이 내려오고 아 돈없는데 뭐 어떻게 기차 어찌고 버스가 더 나. 거기에서 가면서 극단 광대에 세상에 풍물도 하나도 없이 뭔놈의 문화운동을 기금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래가지고 내가 그때 백오십만원을 남겨서 주겠다 그래가지고 내가 기획을 맡았어요. 이게 80년 3월 이야기에요. 그때 기획할 때 웃긴게 구호가 결사강매, 현찰박차기 그랬죠 내가. 그래서 티켓을 이제 할당을 한거지 그래갖고 결사적으로 팔아 현찰박치기 외상 절대 없어. 그래가지고 못팔믄 돈 내놔 그대신. 돈 딱 가져가블고. 영수증같이 해갖고 딱딱해갖고 받고. 악착같이 해갖고 그 이야기를 듣고 김민기랑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세상에 요런 공연해갖고 손해 안보믄 성공하는거다. 여기서 남긴다는게 말이 경험이 없어서 그런소리한다고 나한테 글드라고. 긍게 효선이가 그래도 합심이 하면 다른데, 합심이 하면 남겨.
면담자 : 선생님 별명이 합심?
구술자 : 응 합심. 이 막 그런적이 없다. 적자 안나믄 성공하는거라고. 근데 백오십만원 남겼어요 그때. 그라고 작품이 좋았기 때문에 호응도 대단히 좋았고. 내가 앞에서 기도스다시피했는데, 극 보고 나가면서 막 나보고 좋은 작품 보여줘서 고맙다고 그라고 악수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 그래 그 이후로 이제 돼질풀이 마당극가지고 여기저기 이제 초청공연을 다녔죠. 농민단체들, 어쨌든 인자 그렇게 됐는데. 이 광주문화운동도 돈이 없어가지고 이 탈춤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은 얼마나 한가 서울에서 문화패들이 탈춤전문 강사를 모시고 자음 자봉가 스머푼가 어디 해수욕장 안가봐서 모르는디 어디로 온거예요. 와갖고 여름에 텐트치고, 자기들끼리 수영도 하고 놀다가 시간나면 탈춤 모래사장에서 배우고. 이 근디 이소식을 듣고 광주에 이 문화운동 팀들이 자기들은 이런 강사를 초청해서 배울 기회가 없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그걸 쫓아내려간 거예요. 내려가가지고 꽁자로 배울 수 없으니까 거기서 떨어진데다가 텐트쳐놓고 이제 동네 수영복도 안 입고 동네청년들이 뭣한가 구경한 것처럼 얼쩡얼쩡 가갖고, 인자 거기서 가르치고 배우는걸 보는 거예요. 그래갖고 눈썰미로 익혀가지고 돌아와서 안보인데 돌아와서 거기서 아까 이렇게 하던데 아까 이렇게 했어 자기들끼리 본 것을 기억해가면서 연습해가면서 그렇게 배우고 그랬다고. 비참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간에 광장이 뭐야 극장광대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출범을 했죠.

3-5. 방화사건 주모자로 연행과 물고문

근데 인자 나는 그런거 떠나서 이게 거 10월 달에 이제 또 감방을 가게 되었는데, 10월 3일경에 전남대 인자 본관 방화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지도감사실. 안기부 직원들하고 정보부 직원들하고 서부경찰서 형사들 일종의 쉼터지 거가 사무실이지. 저 학교 본관에가 그런 방들을 줬으니까 아예. 근디 인자 고걸 그 연통을 통해서 불질러 갖고 거 조끔 태워갖고 피해액이 만 오천 원 나왔는데, (웃음) 그 원수들이 거 백장민가 하는 영화보고 나치하에서 학생들이 운동 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인가 하여튼 그런 책을 책 내용을 영화한 거 있었다고요. 고것보고 와 가지고 이제 고희숙이 머 신영일이 이런 애들이 하여튼 지앙을 친거에요. 그래서 또 이 자식들 태울라면 야무지게 태우지 그거 조금 태우고 어쩌고 인자 그러고 인자 쉽게 넘어갔는데, 얼마 이후에 내가 돈이 또 운동자금 마련 때문에 이게 뉴스에서 멸치를 가루로 만들어서 가루멸치로 만들어서 팔면 잘 팔린다고 그래가지고 이제 후배가 자기 형하고 뭐한다고 그래가지고 가루멸치가 잘 팔릴거라는 얘기를 어서 들어놔서 가루멸치를 내가 한 번 팔어볼까 하고 여수를 내려가고 있는데 부마항쟁이 터진 거예요. 인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이거 말이 안된다 이건. 왜냐면은 인자 그 동안에 쭉 운동을 해오면서 봤지만 그렇게 대규모로 어떻게 보면은 민중봉기형식으로 그렇게 크게 터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해버렸으니까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게 전망은 둘째하고 아예 상상은 못했으니까 그저 대학에서 유인물 뿌려가지고 학생들 몇십명이라도 모이면은 뭐 될 정도고 농민들이 아까 말했지만 팔백명 모여서 집회하는 정도 그거이 큰거였다고요. 아 근데 부산 마산에서 그런 엄청난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이거 뭐 긍게 의외에 사건에 충격을 받았지요. 어떻게 이거 가능한가, 왜 우리는 예상을 못했을까. 전망을 상상도 못했을까, 이거 문제가 있다. 빨리 가봐야겠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사회를 잘못보고 있고 대중을 잘못보고 있다. 그래가지고 인제 거기를 가기로 맘먹고 광주 들러서 일처리 해갖고 갈려고 왔어요 이제. 일을 좀 지방에서 보고 와가지고 연구소에 딱 들어갔더니 그때 23일이에요. 그랬더니 형사들이 들이닥쳐가지고 그 몇 일 전에 남민전사건이 터졌죠. 남민전사건이, 남민전사건은 묘하게 피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어쨌든 그래가지고 이제 무작정 나는 끌려간거지. 그랬더니 이 무지한 놈들이 서부경찰서 수위실 여가 유치장이면 여가 수사과이고 일층 여가 유치장인데 유치장옆에 숙직실이 있는데 숙직실로 덱고 들어가요. 들어가서 보니까 이미 의자 두 개 세워놓고 몽둥이 걸어놓고, 빠께스에 물, 걸레 주전자부터 딱 물고문 준비 해놨더라고. 그래갖고 들어가서 가자마자 이런(등치 큰)놈들이 있어가지고 옷 벗기고 그리고 이렇게 수갑채우고 이렇게 해서 여기다(허벅지에다) 장대 채우고 물 먹이는 물고문을 시작을 했는데, 인제 그것이 어떻게 됐냐면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지고 가라앉을 만하니까 대구 계명대에서 그러니까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긴장을 한 거예요 이놈들이. 정권차원에서. 그라고 광주를 중시한 거예요.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한 거이죠. 그래서 그때 인제 내가 들은 정보로는 인제 그때 육군항공대에서 이 가스탄을 가득 실은 경비행기를 인자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내려보내고 해서 광주에 대해서 이제 사전 준비를 해가고 있던 시기예요. 근데 이미 광주에서 본남 전남대 본관 방화사건이 터지고 남민전사건 부마항쟁 그러니까 이 광주에서 예방을 철저히 해라. 긍게 하여간에 이 불소시게 역할을 할 놈들을 철저히 잡아라 이런 지시가 떨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 고문한 놈들이 세련된 정보부에서 파견된 놈들도 아니고, 경찰출신들도 아니고 전경들 중에서 등치 좋은 놈들, 사람 때리믄 기분 좋아할 때리는 것을 즐길 놈들을 동원한거야. 그래가지고 그냥 방에서 직접 패버리니까 거 수위실 숙직실에서 수사과에서 다 들려블고, 유치장에서도 다 들리는거예요. 지하실이 아니니까. 지하실도 안기부같은데 정보부같은데 보믄 지하시리에 있는 수사하는 방도 전부 방음장치가 돼 있는데요. 그런 것도 안 되어있는 유리창 여닫이문인데 새끼들이 거기서 무자비하게 이게 고문으로. 그러니까 인자 광주 학 전남대에서 쪼끔 의식화서클 어떻게 해갖고 뛰어다니는 놈들 거슬렸던 놈들 다 잡아다가 고문을 무조건 해 버린거여. 그때 화장실 같은데다 낙서했던 친구 신민정부터 시작해서 편지, 괴편지 보냈던 발신인 이름 안하고 보냈던 박병기나 이런 애들부터 시작해서 뭐 시위 준비했던 애들부터 다 잡아브렀어. 물고문 해버리니까 두들겨패고. 그러는 과정에서 인자 나를 방화사건으로 연결 시켜서 잡아 넣어블라고 계획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박병이 이 원수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내가 들어갔는데. 박병기가 하루는 와 갖고 연구소에 날더러 형님 나 돈 얼마만 주소 그래, 왜? 얻다쓸라고? 근디 물어보지 마시구요 그 돈으로 술먹겠습니까 꼭 필요해서 그런다고. 근디 인자 내가 암말도 않고 주고 말아브렀으면 쓰거인데 그게 또 얼마전에 김영종이가 징집거부운동에 참여해 갖고 수배당하고 도망다니는데 영종이가 돈이 좀 필요하다고 도피자금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와가지고. 이번에 내가 김성종이한테 성종이한테 내가 돈을 좀 해서 올려보냈거든요. 인제 박병이가 그래서 영종이 도피자금 때문에 돈을 써블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주란대로 다 못주고 요만만 줄테니까 써라 그러고 돈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 돈 준놈을 불어븐거여 인자. 윤한봉이가 시켰지 계속 나를 들이대갖고 고문을 하니까 그래가지고 돈 준 것이 드러나브렀죠. 그래가지고 너 잘걸렸다 나를 잡어다놓고는 이 남민전으로 붙어보고, 뭐여 이게 방화사건 배후조정으로도 붙여보고 나는 전혀 모르는 애들이니까 그 애들을. 인자 그래가지고 그래가지고 내가 3일간을 엄청나게 엄청 심하게 고문을 당해브렀습니다 물고문을. 인자 얼마나 물고문하게되면은 이 허리라던가 이런데를 다 상하게 되는데, 몸부림을 치니까. 묶어놓고 해브니까 허리가 부어버려 가지고 내가 인제 벽에 기대지 않고는 앉지도 못하고, 일어설 때도 이렇게 못 일어나고 벽잡고 일어스고 앉을때도 벽잡고 미끄러지듯이 간신히 앉고 그렇게 됐는데. 그런데 인자 삼일째 되는 날 저녁에 그렇게 하고 고문하다가 피곤하면은 이놈들이 두놈이 지발하나에다 내발 요놈발에다가 내발 이팔에다가 내손 저팔에다가 내손 수값 네 개를 딱 채워갖고 지그들 코골고 자는거예요. 인자 긍게 내가 꼼지락만 거리면은 발로 차블고 때려븐거여. 지그들은 인자 밑에다가 깔고자고 시월달인데 숙직실이 찬데 이 바닥에서 나는 암것도 안깔고 하니까 등 몸은 차지 물붙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맹물로 한 것이 아니라 화학약품이라고 그래요 남자구실 못하게 하는거라고 그래갖고 뭘 타갖고하는데 그런것들이 범벅이 돼 있으니까 가렵지. 사람 환장하지 가렵긴 한디 이거 긁을수가 있나. 여기서부터 뭐가 긴것 같으면은 한 오분에 걸쳐서 여기서부터 가렵기 시작해갖고, 그렇게 대각선으로 요리 지나가는 것 같애 벌레가. 진짜 진짜 암안보이니까 뭐. 그래가지고 그 가려움을 인자 막 얼굴 시렵게 하면서 아주 미치지. 저려오지 꼼 움직이면 때려블지 그렇게해갖고 얻어터지다가 고문당하다가 물고문당하다가 이렇게 한놈은 올라타고 내 머리하고 귀딱잡고 한놈은 볼펜들고 나를 깔고 앉아갖고 막 주먹을 온몸을 문질러요 그럼 민감해져 벌겋게 된다고. 그럼 인자 눈 딱 가려놓고는 꽉 잡아놓고는 볼펜으로 옆구리를 팍 쑤신다고 그러면 이 몸이 의지와 관계없이 이렇게 욱 이렇게 간다고. 내 눈가린지라 어디로 숙인지 모르지 또 여글 팍 또 욱하고. 요걸 계속 하는거야 인자. 사람 완전히 인자 땀으로 목욕하면서 인자 이렇게 문질러 놓은 것이라 민감하니까 이 불펜 이렇게 쑤셔도 되게 고통스러워요 인제. 인제 이놈들은 즐기는거야 인제. 근데 26일날 아침이 되니까 이놈들이 갑자기 나갔다오더니만 내 수갑을 풀어주면서 다 같은 국민이고 나라걱정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이제 똑같은 거리느니 어째 좀 몸이 어때 어디가 어때 해쌌고 담배를 주고 이상한 짓거리해싸 근데 이런 고문을 받아보면은 갑자기 인자 이상한 짓거리 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괴롭히는 것의 시작을 의미하거든. 이 새끼 또 뭔짓거리 할라고 이러노 이러고 있는데 한놈이 모르는 놈이 하나 들어오더만은 벽에 탁 기대앉더만은 어허 나라가 걱정 돼 나라가 걱정돼, 그런데 실내방송이 들리는데 뭐락뭐락한디 유고 계엄령, 들려오는거야. 이놈들이 갑자기 이상한 짓거리하고 유고, 계엄령 나라가 걱정, 아! 이거 박정희 죽었구나 이것이 순간에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해갖고, 그 쾌감은 아직 그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온 몸이 간질간질하면서 희열이 아 나 살았다 나 더 이상 고문없다, 박정희 죽었다 세상바뀐다. 아 그때 참 희한한 경험했어. 우리 어머니는 이제 그때 광주에 있는 작은 형님 집에 계시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데, 한봉이 살았다 한봉이 살았다, 박정희 죽었다고. 그래도 인자 그 뒤로 유치장으로 넘어갔다고 교도소로 갔는데, 그때 내가 팔이 완전히 이쪽 왼쪽 팔이 완전히 마비가 돼브렀어 인자. 그래갖고 인자 뿔 이렇게 집어도 힘이 안들어. 그래갖고 맨날 교도소에서 10월 내가 23일날 구속 돼 끌려가갖고 12월 9일 날인가에 나와요 그러니까 최규하가 인자 대행을 하면서 대행이었던가 체육관에서 다시 뽑혔던가 그래가지고 긴급조치를 해제를 해요. 그래서 인제 뭐 인자 법이 없어져 브렀으니까 이 석방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때 모두들 들어갔던 후배들도 다 그때 한꺼번에 나오게 되는데, 나와가지고 고향에 가서 선산에 가서 인사드리고 어머님이랑 모두 인사드리고 있는데 1212쿠테타가 터진거죠. 쿠테타가 터졌어요. 아하 쉽사리 가는 것이 아니구나. 이게 좀 뭔가가 잘못가고 있아. 이게 괜히 헛꿈꿨던 것은 아닌가 민주화 가능성에 대해서 낙관했던게, 무색하게 돼 버린거지 인제 그래서 아 빨리 내가 부산을 가봐야겠다. 부마항쟁의 연행되기 전에 갈라 그랬는데, 연행된 바람에 못 갔는데 이제라도 가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현장확인을 해야겠다. 그러고 인자 마음먹고 그때 겨울비가 부슬부슬한테 내가 부산에 갔죠. 부산으로 가서 부마항쟁에 시위대들의 진출경로중에서 중요한 뭐인제 국제시장이라들지 남포동이라든지 이런데를 혼자 비맞고 돌아다니면서 팥죽 끓이는 아줌마들한테 얘기해보고 사람들 거기 또 부산에 운동하는 친구들 이야기도 듣고, 거그 거쳐서 마산으로 가려다가 부산에서 홀연히 깨달은 것이 아하 이래서 내가 못내다봤구나, 그렇게 돼서 인제 아 마산에 갈 필요 없다. 그라고 광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였죠. 그 그과정 그과정부터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올때까지의 이야기는 여가 다 쓰여져 있어요. 인제 그 현장 갔다온 것부터가 끌려가서 10월달 거기 거까지가 여가 들어있어요. 이 이야기는 뭐 길게 할 필요 없는거요. 다만 이 책에서 빠진 부분이 그 518이후에 내가 수배당하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도피생활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없었던가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조직의 명령에 그 이야기는 빠져있었다고 여가. 요고 쓸데만 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있었던때라 그걸 못다룬 거죠. 그리고 인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조끔 더 하고 5월 관련 이야기 등등.

3-6. 박기순의 죽음

그러고 인제 78년 12월에 25일날 인자 박기순이가 죽는데, 그것만 오늘 이야기하고 끝냅시다. 그 기순이는 완전히 내 대신 죽었다는 것 때문이 기순이 이놈 빚이 많은데 내가 인제 78년 이렇고 뛰어 다닐때 이제 여전히 똥가방 매고 다니면서 동가숙서가식하고 다니는데 자꾸 인제 주변에서 인자 나이 묵어갖고 그라고 다닌다고 방 얻으라고 돈을 준거예요. 근디 그때마다 활동비로 써버린거지. 그러니깐 세 번째 똑같은 방을 얻으라고 준 돈을 준 사람이 있더라고요. 미안해블더라고 이놈 써불고 두 번째 준 놈 써블고 세 번째는 할 수 없이 내가 방을 얻었어요. 전남대학교 의대 앞인데 전남대 앞인데 골목길에 들어가가지고. 또 인자 방을 얻어놓고 있으면서 들어가서 잘 안자고 그러는데 겨울이 서서히 다가오고 그러니까 내가 인제 연탄을 안 때고 있으니까 연탄 때라고 인자 띠어서 쓰라고 이사람 저사람 돈을 주는데, 또 계속 활동비로 써버리니까 어느 날 어디 갔다 와보니까는 송백회 여자분들 중에서 한 사람이 아예 연탄을 딱 떼서 쟁여놨더라고 부엌에다가. 그랬더니 후배들이 용아하고 삼용이하고 누가 서인가 혹시 가스 샐지 모른다고 해가지고 오래 안스던방이라고 그래가지고 문간방이라고 방을 전부 손을 봤다고요. 연탄대라고 나보고 그런데 인제 연구소에 다음날인가 내가 앉았는데, 도청에 주택가 시청 시청에 주택과엔가 관계된 친구가 있어갖고 연탄개스 걱정을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그 친구가 그래요. 자기들이 국민주택인가를 지은데 단지로 서민들을 위해서 염가로 팔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연탄개스 샌가 안샌가를 확인하는데 기가 막힌 것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그랬더니 요만한 쪼그만한 노랗게 생겼어요. 구멍 뽕뽕뽕 뚫어지고. 얇고 요놈을 연탄불 타오르는 연탄불 위에다 놓고 뚜껑을 딱 덮으면 방에 연탄 개스 샐만한 구멍이 있으면 요 노란 연기 같은것이 다나온다는 거야 거기만 막으면 된다는 거야. 연탄개스는 눈에 안 보이는데 요건 색깔이 노란연기가 올라오는 거여. 그럼 여지없이 찾아낸다. 이걸 가지고 써보라고 날 주더라고. 두 개를. 그래서 인제 집에 와서 연탄불 큰 집주인한테서 빌려가지고 그래갖고 인자 불을 붙였어. 그때가 열한시가 좀 넘었는데, 인자 이미 후배들이 손봐놔서 안심하고 잘라고 했다가 가만있자 그 친구가 준거 한 번 실험을 해보자 그래갖고는 나가서 그걸 얹어본 거예요. 그래갖고 뚜껑 덮어 놓고 인자 누워있는데, 웬걸 여기 저기서 노랗게 나와브러. 그러고는 바로 그길로 나와 가지고 인제 열두시 그때는 통금이 있을 때라 황석영씨 집으로 갔어요 기독병원 뒤에가 있었는데 양림동. 그 골목 이렇게 돌아가면 여기가 철길, 논 그땐 암 것도 없었어 지금 봉선동 자리. 거기를 가는데. 거기 갔더니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동네방네 떠들어요. 시끄럽게 나버려요. 저놈의 빌어먹을 여편네, 아이고 그래갖고는, 안되겠어요. 또 다시 얼른 골목길 빠져 나와갖고는 통금이 다 되가니까 택시타고 인제 주월동에 내 여동생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형선이가. 그 부부가 시에서 지은 국민주택 같은 데에 거기서 살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단층. 글쎄 거길 갔더니 마침 잘 왔다고. 내 여동생 하는 말이 기순이 아가씨가 이틀째 안 들어온다는 거에요. 그 들불야학 일이 바빠갖고. 크리스마스 앞두고 성당으로 가서. 그러니까 연탄 따뜻하니 때놨으니까 노골노골하니 여기서 푹 쉬고. 그러니까 문칸방이, 방이 두갠데. 큰방에서 잠을 자고. 근데 내가 바로 그 방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오래간만에 봤으니까 형선이랑 여동생이랑 앉아서 좀 있다 들어가서 자기로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12시 좀 지났는데 기순이가 온 거야. 기순이가 인제 애들하고 같이 들불야학에서 쓸 난로에 쓸 솔방울 줏으러 애들이 오고 주워오고 어쩌고 늦게사 버스타고, 외곽도로에 왔는데 버스가 두갠가 자기가 손을 들어도 지나쳐 불드라는 거여.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에이 한번만 더 기달려보자 또 지나가버리면 들불야학 거기 가서 잘란다. 근데 마지막 세 번째 온 차는 태워줘서 그래서 타고 왔다. 그래갖고 피곤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러면 아가씨 얼른 씻고 자세요 그런게 나는 내 잘 방이 없어져 부렀지. 나는 이제 큰방에 형선이 옆에서 자고 기순이는 씻고, 그때 씻는다는 것이 발 닦고 손 씻는다는 것이지 뭐 샤워하고 그런 것은 그때는 그런 것은 없었으니까. 샤워라는 말 자체를 나는 미국에서 처음 들었으니까. 목욕이지 뭔 놈의 샤워야. 요즘은 이상하게 샤워샤워 하대. 그리고 잤어. 아침에 여동생이 불러요. 아무리 봐도 기순이 아가씨가 이상하다고. 아무리 문을 흔들어도 안 일어난다고. 예감이 이상해서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뚜든게 안 열려. 발로 차보고 영화에서처럼 하고 들어갔더니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쪽을 향해서 아마 소변보려고 나오려는 모양이었는지 엎어져 있는데 가서 뒤집어 보니까 입에서 거품이 나와요. 막들쳐 업고 뛰고 병원으로 갔는데 병원에서 사람들은 수속을 밟아라 어째라 염병하고. 화가 나가지고 원무과 그 사람들 뺨때리고 난리가 나고 이미 의사들이 두시 두세시경에 가버렸다는 거야 (죽었다는거야). 근게 피곤해가꼬 탁 떨어져 자는데 이미 가스는 이틀 동안 무겁잖아요. 쌓여있었던 거에요. 그대로 눕고 가버린 거에요. 그날 기순이가 안 왔으면 내가 그 방에 들어가서 좋다고 노골노골 하다고 누운 순간에 가버린 거지. 기순이가 들어와 가지고 내가 큰방에서 자면서 산 거지. 사람 운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순간에 갈리는 구나. 근게 나는 묘하게 연탄가스를 피해서 나와 갖고 연탄가스에서 죽을뻔한 것을 기순이가 대신 딱 죽어버린거야. 그러니 운명이란것이 내가 배타고 비행기타고 가면서도 느꼈는데, 야~ 내 팔자가 이상하다. 그래서 박기순이처럼 아까운 사람인데 아주 순수한 사람인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최초의 위장취업잔데. 광주에서. 그렇게 갔어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http://trollwall.egloos.com/4237820

추천

네티즌 의견 0

스팸방지
0/300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