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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지석

  • No : 67604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09-08-23 21:20:00
  • 조회수 : 1962
  • 추천수 : 0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해와 함께 묻히는 지석(誌石)의 문안이 공개됐다.

 

김 전 대통령 지석(誌石)에는 성함과 호, 출생일과 부모, 성장과정과 정치역정,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 일본 납치 사건 등 다섯 번의 죽을 고비, 15대 대통령 취임과 6·15남북정상회담, 퇴임 후 남북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한 왕성한 활동, 저서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일자와 내용, 장례형식이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국장으로 진행된 내용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점 등도 기록돼 있다. 아울러 아들들을 비롯한 자손의 이름도 모두 기록돼 있다. 다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석(誌石) 문안 전문이다.


[김대중 前대통령 지석(誌石) 문안]

 

公의 성은 金氏, 본관은 金海, 휘는 大中, 호는 後廣이다.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암서당과 하의도 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대중의 영특함을 살리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고, 대중은 전학 간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9년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유망한 청년실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50년 9월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들의 무차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탈출,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산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장면박사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선거에서 거푸 낙선을 하다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의 꿈이 무산되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인 이희호와 결혼했다.

 

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요한 낙선 공작에도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후보로 뽑혔으나 이듬 해 치른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 중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나 망명길에 올랐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국에 끌려와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잡혀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되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85년 망명 생활 2년 만에 귀국을 강행,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야당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그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처음 국장으로 모셔졌고,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히셨다. 자손으로는 아들 홍일, 홍업, 홍걸이 있고, 손자와 손녀는 지영, 정화, 화영, 종대, 종민, 종화, 종석이 있다. 수많은 학위를 받았고, <옥중 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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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