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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크로아티아 여행

나의 크로아티아 여행

한승조 ()아시아태평양공동체 이사장

 

 

 

2014620일부터 72일까지 나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85세의 고령에 이런 먼 여행을 함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을 내 평생의 동반자인 老妻(노처)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면서 이 여행을 꾸며낸 것이다. 평소에 아내의 아들사랑이 극진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의 아들 한정희가 코트라(KOTRA) 직원으로 그 지역에서 기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들이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엄마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들은 아무래도 자신을 예뻐해 주는 엄마를 더 좋아하지 아버지인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아들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기 이전에 방문의 기회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계획을 알려주었더니 자신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하여 보낸 것이 620일부터 74일까지의 일정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나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20일부터 고대 안암산우회를 따라서 지방산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아들이 만들어 보낸 계획이니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여행계획에서 2일만 단축하여 크로아티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비행기표를 프레스티지급으로 예약해서 보내준 것이다. 이 좌석은 이코노미급의 2.5배 정도로 비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코노미 클래스 항공료를 아들에게 주려고 2,000달러를 은행에서 바꾸어 가져가기로 했다. 620일 오후 115분 비행기라 아침을 먹고 넉넉하게 공항버스로 가려고 했는데 큰딸과 사위가 굳이 그들의 차를 가지고 왔다. 그 차를 탔고 탑승수속도 편리하게 처리되었다. 탑승구를 지났더니 KAL 라운지라는 곳이 있어 들어가서 편하게 먹고 마시고 쉴 수가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프레스티지 클래스의 특권과 좋은 대접을 즐길 수 있었다. 비엔나 도착은 오후 620분이나 시차가 7시간이나 되기 때문에 비행시간은 훨씬 더 길어, 인천에서 유럽 비엔나까지 11시간이 걸리므로 그리 쉬운 여행은 아니었다.

KAL에서 내리자 스튜어디스는 지상근무자가 우리를 크로아티아공항으로 안내해 준다는 것이었다. 크로아티아항공은 매우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아하! 참 오랜만에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는구나. 올라가보니 좌석도 3열이며 매우 좁았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50분 후 우리를 자그레브 비행장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다. 짐을 찾고 나가자 아들 내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620,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다가 6시가 되는 것을 보고 집 밖으로 나와 보았다. 집은 중간 고지에 있었고 주변이 깨끗했다. 하늘은 높고 지상은 온통 신선한 녹색의 숲이었다. 이런 맑고 신선한 공기를 참으로 오랜 만에 마셔본다는 느낌을 가졌다. 새들의 노래 소리도 참으로 고왔다. 숲 사이에 보이는 주택들은 모두 빨간 지붕에 흰색 내지 회색의 건물이었다. 이런 신선한 아침공기와 광경은 아마도 5-60년 전 한국의 농촌에서 느꼈든 풍경이었다.

이래서 크로아티아는 첫째산업이 공업이나 농업이 아니라 觀光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래 地球에는 이 같은 나라가 많아야지. 한국이나 중국은 가난퇴치를 위하여 공업화를 서둘렀다. 그래서 가난은 면했지만 우리에게는 맑은 물, 맑은 공기가 없어졌지 않은가? 중국은 한국보다도 훨씬 심하다. 한국은 중국에 인접해 있음으로 인하여 받는 이익보다도 손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가? 세계의 유수한 富國强兵의 나라가 되려는 중국인들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이 좋지 않아 보인다.

나는 아침산책을 위해 골목을 올라가 더 높은 윗동네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집집의 건물을 감상하며 정성스럽게 가꾼 庭園(정원)들도 들여다보고 다녔다. 이곳은 중산층이 사는 동네인데 이 정도구나. 한국은 온통 아파트의 숲들로 충만한데 여기 자그레브에는 아파트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일곱 시가 되어서 집으로 들어와 아침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직장을 쉬는 아들이 우리를 차에 태우고 자그레브의 구 도시 쪽으로 안내하였다. 유난히 크고 높은 성당과 그 주변에 신부들이 많이 보인다. 박물관 공연장이 있다. 거리에는 전차가 다니는데 전차가 안 다닐 때는 찻길이 되거나 사람들이 다니는 길도 된다. 해가 높이 뜨자 거리의 카페들은 시민들로 가득 채워진다. 시민들은 별일이 없으면 집안에 있기보다는 이렇게 거리에 나와서 카페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남슬라브 인종들이라는데 유럽사람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남자들은 체격이 크고 잘 생긴 얼굴이다. 여자들은 그 외모가 남자들만은 못해도 침착하며 매우 유능해 보였다. 복장은 모두 수수하며 특히 잘 입은 사람도 너무 못 입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옛날 소싯적부터 軍事强國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이태리 독일 프랑스 영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주요 長技(장끼)였다. 과거 유고슬라비아란 나라가 있었을 때 최고 지도자 티토가 바로 자그레브 남쪽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국으로 일하고 돌아다니다가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높은 지위에 오른 다음 남슬라브 사람들을 묶어서 독일의 침략에 맞서서 싸웠다. 그러다가 처칠의 눈에 들어서 그 도움으로 유고슬라비아라는 연방국가을 묶어세울 수가 있었다. 티토가 대통령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다가 스탈린 독재에 제일 먼저 항거하여 튀어 나왔으며 동방과 서방국가의 중간에 서서 중립노선을 취해온 사람이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용맹을 찾아내자면 내가 아는 한 축구와 핸드볼뿐이다. 크로아티아 축구는 러시아를 포함하여 어느 나라의 축구팀도 패배시킬 수 있는 저력을 가져서 러시아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강팀이다.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선수들이 여러 나라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날 점심은 산 위의 일류음식점에서 내가 내는 100불로 매우 잘 먹을 수가 있었다.

 

621, 토요일

오늘 아침도 어제처럼 아침 일찍 나와서 높은 산동네 주택을 보고 다녔다. 이러다가 길을 잃고 迷兒(미아)가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말이 전혀 안 통한다. 나의 아들집 주소도 모르니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평소에 길을 잘 찾는 나의 실력으로 아들집으로 무사히 돌아 올 수가 있었다.

오늘은 나의 며느리 안내로 자그레브의 변두리 구 시가지를 구경하는 날이었다. 사실 어제도 구 시가지를 다녔는데 오늘도 () 시가지를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어제는 주요 도로이고 오늘은 서민층이 사는 동리라고 할까? 옛 시가지의 특징은 좁은 도로이다. 3미터도 안되는 좁은 길을 지금은 사람도 말들도 자동차도 다녀야 한다.

시민들이 잘 오르는 산길인지는 몰라도 산책로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었는데, 며느리는 그 근방에서 쌀 등 부엌살림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용무인 듯이 보였다. 자동차로 바람을 쏘이기와 집에서 TV축구를 보거나 앞으로 간행될 나의 글 손질로 하루를 보냈다.

 

622, 일요일

오늘은 크로아티아가 자랑하는 예제라(Jezera)공원 관광이다. 이곳은 UNESCO가 세계자연관광지로 지정한 景觀(경관)지이며, 이 나라가 자랑하는 국립공원 중의 하나이다. 그 특징은 絶壁(절벽)같은 큰 바위산 여기저기서 폭포수가 내려오는 것이다.

산 밑에는 산과 호수사이에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호수에는 큰 붕어들이 놀고 있고 산 밑 길을 계속 가면 호수의 나루터가 있었다. 배를 타서 건너가면 또 새로운 산길과 마주치게 된다. 호수 건너 산들은 물론 위아래 산길에서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은 볼 수가 있다.

그 산길을 올라가니 거기에는 또 버스로 갈 수도 있고 또 조금 더 올라가면 또 건너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길도 나온다. 이 산길은 경치가 더 좋아서 사진을 찍기에 좋다. 예제라 국립공원은 이처럼 볼거리도 많고 걷는 거리도 만만치가 않다. 이곳을 한국의 설악산 국립공원과 비교하면 어떠할까? 나는 한국의 설악산이 훨씬 더 웅장하고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국립공원과 비교해 본다면 한국의 경관이 훨씬 더 뛰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설악산은 威嚴(위엄)을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여기는 사랑스럽고 친근감은 느껴지나 한국과 같은 莊嚴(장엄)한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보기 좋은 마을이나 가족풍경 같아서 好感(호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인상적인 野生花들의 아름다움일 뿐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장엄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크로아티아의 축구팀이나 핸드볼팀도 주변지역에서 손꼽히는 강팀임이 사실이나 세계를 制覇(제패)할 정도의 강팀은 못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명소 관광보다도 더 큰 볼거리는 브라질 월드컵 축구가 아니었던가? 저녁 6시와 밤 10시에 열리는 월드컵 축구는 참으로 감동스러운 운동경기라서 우리는 사실상 세계여행에 못지않게 TV관람을 즐길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경기를 새벽에 보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저녁이나 밤에 시청할 수가 있으니 아주 좋았다.

 

623-25, -수요일

오늘은 우연히 손녀들이 다니는 The 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of Zagreb의 교내 신문을 보았다. 며느리가 자신의 큰 딸과 작은 딸의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린 학교신문을 자랑삼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신문을 내 방으로 가지고 가서 모두 읽어 보았다. 손녀가 미국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Frieda” 라는 시를 읽었는데 나는 그 가 어디가 좋아서 금상을 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제에 Frieda가 누구인지 그녀가 왜 유명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 보았다. 그녀는 미국인 아버지와 멕시코 여성을 어머니로 가진 여자인데 어려서부터 지체가 부자유로운 여성이고 초현실파 畵家(화가)로 유명했으며 또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그 여인을 버리고 딴 여자와 깊은 관계를 가져서 그녀는 평생 불행하게 살다가 죽은 모양이다.

나는 큰 손녀가 왜 그런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고 를 썼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문제와 관련해서 토론을 하고 싶었다. 또 작은 손녀가 그의 친구와 합작해서 어떤 영상물을 만들었는데 그 영상물로 은메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작품도 구경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施賞(시상)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손녀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런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고, 또 특히 그의 어머니가 그런 대화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아들이나 며느리는 말하자면 386세대이다. 그들은 老人세대는 낡고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대상들이 아니라는 偏見(편견)을 가지고 살아온 세대이다. 언론이 조작해서 유명해진 좌경성향의 글이 아니면 별로 관심도 받지 못하는 한국의 왜곡된 문화풍토에 영향을 받아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들이다. 과거를 무조건 불신하는 사고방법이 옳은 사상이 아닌데도 말이다.

참고삼아 나의 아들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고 며느리는 고려대 영문학과를 나왔다. 그들의 심성은 좋은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세대는 구시대, 딴 세상 사람들이며 오늘의 정치사회와는 무관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니 노부모로서 가끔 돌보아 주는 것으로 족하며 깊이 대화하거나 생각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부모는 情感(정감)의 대상은 되나 지식적 대화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해 온 세대들이다.

그러나 우리 노인들 세대는 이런 관념이나 인생태도가 천박한 소견이며 이것이 국가와 사회가 잘못 되어가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더 말할 것 없고 세계가 잘 개선 발전되어 나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낙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실권자들이나 40-50대의 장년세대들도 전통사상이나 문화를 따라야 하는 사상이나 문화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내 자신도 그 연령에는 그와 같이 생각하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忠孝思想(충효사상) 등 과거의 사상을 무조건 따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도덕을 절대시하는 것은 크게 오도된 사상이며 묵인할 수가 없는 구시대의 사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朝鮮王祖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조선시대는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당연히 망했어야 하는 王朝였다. 진작 교체되었어야 할 왕조를 교체하지 않고 忠孝사상에 따라 무조건 보존해 왔기 때문에 조선이 18-9세기 세계 정세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일본에게 合邦을 당했던 것이 아니냐?

孝道도 그렇다. 부모자식간의 愛情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그것을 억지로 강제하려고 드느냐? 이것이 현대사상을 받아들이는 본인의 사고방법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은 서양의 현대사상에 영향을 받은 편의주의적인 短見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현대사상이 분열과 파행을 계속하다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국가차원에서나 그리고 세계차원에서 잘못되어감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 미래도 잘되어간다는 것이냐 아니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이냐? 한국도 무조건적인 충효사상을 버려야 한다는 현대사상을 다시 재검토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 한국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不忠不孝의 사회풍조인데 이래가지고 세계가 온전하게 유지될 수가 있겠는가? 한국이 미래사회의 지도국가가 될 수 있으려면 忠孝禮의 전통문화를 다시 살려내는 길뿐이다.

오늘은 며칠인가? 아침에 산책 나가려는데 밖에 비가 와서 주저하다가 아들이 주는 우산을 쓰고 산책을 강행했다. 낮에는 동네길을 걸어서 손녀들과 함께 마트에 다녀왔다. 나도 무언가 살까하고 점원에게 미국 돈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을 팔면 될 것인데 미국달러라고 물건팔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사람들이 자국이 EU에 가입해 있는데 대하여 엄청나게 긍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그레브 사람들은 親美 , 反美 반의 나라이므로 EU라는 현질서나 충실하게 지키려는 자세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내가 준비한 글을 PC에 입력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컴퓨터가 다르니 입력이 너무나 더디고 어려웠다. 그래서 둘째 손녀 수영에게 시키려고 했다. 손녀에게도 쉬운 일인 것 같지가 않았던 것 같다. 점심식사는 중국요리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오늘이 첫 손녀 서민(Jane)이 생일이라고 해서 나의 아내가 두 아이에게 10만원씩 주었다고 했다. 나는 수영(Sue)에게 아르바이트비로 10만원 주었고 큰 손녀에게는 20만원을 주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중국식당은 내 아들의 단골집이라고 했다. 우리가 가니까 제일 좋은 위치에 예약해 놓았다. 우리는 잘 먹고 나왔다. 그러나 손녀들의 교육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체념해야 하는 처지가 마음에 걸렸다고 할까?

 

626, 목요일

쾌청한 오늘은 크로아티아의 북방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에 간다고 한다. 여권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해서 나와 아내는 여권을 꺼내 들었다. 차는 아들 정희가 모는데 시속 140km를 넘어서 앞차들을 계속 추월했다.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이 지역은 차들의 왕래가 적으니 그래도 되는 모양이나 나는 급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과속하느냐는 생각이다. 이것도 젊은이와 노인 세대의 사고방법의 차이이라고 보아야 할 일이다. , 내 아들이 이제는 젊은이가 아닌가?

가는 도중에 Lubiana라는 도시가 있고 그쪽을 들렸다가 간다고 했다가 계속 달리더니 Tito의 별장이었다는 Villa Bred라는 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였다. 그리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왕년에 이곳이 연합국 국가 원수들이 와서 회의도 하고 묵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건물안에 안치된 티토의 큰 좌상을 보았다. 그리고 나와서는 그 주변 호숫가를 산책하였다. 호수 한 가운데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이 바로 멋있는 으로 축조되어 그 湖水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말이 여기에 문자 그대로 통용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와서 호숫가를 돌며 주변 경치를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았던 그림 같은 안도 구경하였다. 다시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도중 Lubiana 시에 들러서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그 도시를 오고가는 크로아티아 시민들의 옷차림이나 표정들. 나는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이다. 그들 역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평화애호적인 시민의 표정은 저래야 한다. 우리가 자그레브로 돌아온 것이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다시 브라질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다가 잤다. 이날 한국 축구팀이 벨기에와 시합을 했다고 한다. 혈전 끝에 10으로 패배했다. 벨기에는 한국팀을 우습게 봐서 그들 主戰선수들을 모두 빼고 제2진을 내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녹화된 경기를 보았는데 한국팀은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계속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러시아와 무승부를 한 다음 알제리와 벨기에를 깨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본 대 알제리전은 더 큰 스코어 차로 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대 벨기에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이 증명되었다. 결과적으로 FIFA축구 H12패로 최하위라 32강전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홍명보호가 최소한 16강에 들 수 있다고 큰 소리를 해댄 것은 외부사정을 너무나 모르고 한 말이었다. 한국 축구가 세계 16강에 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란 나라와 그 국민들이 지어 놓은 이나 功德(공덕)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번 성적으로 드러난 격인데 우리의 욕심만 부풀리며 소망이 부풀렸던 것이 아닌지?

 

627, 금요일

어제 아침 잠시 비가 온 탓인지 날씨는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였다. 이미 6월 말인데 아침과 저녁은 날씨가 덥지 않고 오히려 선선한 편이어서 만일을 생각해서 긴 팔 내의를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추위에 고생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은 자그레브시 남쪽 Tito 대통령의 生家와 그 주변 민속촌을 들러본다고 아들이 나와 아내를 태우고 두어 시간 달렸다. 티토는 그 지역 貧農8남매 중의 한 명으로 일찍부터 외국을 돌아다니며 노동을 하며 돈벌이를 하던 중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나라 지역의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역시 觀相(관상)은 제 값을 하는 모양이다. 그 관상과 체격 덕에다가 또 크로아티아인의 겸손함과 사교성이 주효하여 티토는 계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공산당 고위층으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독일군이 이 슬라브 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티토는 주변 여러 소국가의 저항세력을 묶어서 독일군에 저항하는 전투를 벌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소련의 공산당원이 아닌 티토의 武力抵抗 활동을 여러 모로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다가 티토는 여러 남슬라브 민족을 엮음으로써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하였고 티토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그를 열심히 지원하였다. 生家 근처에는 민속촌이 있었으므로 일종의 티토기념관을 세울 수 있는 기본여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왜 티토기념관도 세우지 않고 또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도 않는지. 또 티토 生家 주변 지역을 개발하지 않는지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크로아티아 정부가 똑똑하다면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해체하지 않고 다시 묶어서 강소국 행세라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관광으로 먹고 살면서도 왜 그렇게 자국 PR와 홍보선전에 무관심한지 알 수가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아니아 기타 나라들과 공존을 즐기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이 나라는 EU의 회원국이 된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공연히 큰 나라로 키워서 강대국 행세를 하다가 보다 큰 강대국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小國으로서 겸손하게 여러 나라 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짐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것이 크로아티아 스타일인가?

 

628, 토요일

오늘 하루는 외출을 쉬는 날이다. 그러나 아침 산책은 나갔다. 오늘도 새로운 길을 탐색하고 다녔다. 나는 왜 남들의 집 구조, 모양과 정원을 보고 다니기를 좋아하는지. 이 지역, 셰스네 지역의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국민의 대표는 아닐 것이나 나는 이들의 문화수준과 실속 차림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서거나 잘난 체 하지 않고 그저 실속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라가 부강하면 무엇 하나? 개인이 자유롭고 잘 살아야지. 海洋국가의 국민들은 거의가 실용주의자들 실리주의자들이다. 일본이 그렇지 않은 것은 또 복잡한 이유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자.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산다. 그래서 누구나 당신 잘났소. 훌륭하오 하면 좋아하지만, 당신은 아주 못난 사람이오.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소 하면 이를 갈며 분해한다. 사람은 누구나 優越(우월)에의 의지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남들에게 멸시당하거나 천대를 받을까 크게 걱정하고 긴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성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아침 산책에서 사람들의 가옥과 정원을 보고 다니면서 누구나 남들에 지지 않는 각자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그런 노력에 대하여 好感을 느끼며 이 지역 사람과 그 문화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세계축구의 祭典(제전)이 벌어져서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매일 벌어지는 축구의 熱戰(열전)에 열광하고 있다. 그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後進國(후진국)들도 얼마나 잘 싸우는지. 스포츠 강국선진국의 축구팀을 혼내주며, 그들의 優越(우월)성을 보여주려고 죽기살기로 싸워대는지. 또 그 국민들은 자국 팀을 얼마나 미친 듯이 응원하고 있는지. 이것이 모두 자기 우월에의 의지이며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세계축구의 제전을 보면 크게 보아 歐美의 선진국과 南美中進國, 아프리카 흑인들의 후진국, 3파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각국의 자존심과 우월에의 意志(의지)가 맹렬하게 발현됨을 볼 수가 있다. 딴 것은 모르나 이것만은 너희들에게 질 수가 없다. 모두가 자신들이 못지않게 우월함을 증명해 보려는 熱情(열정), 그리고 그 경기에 거의 미친 듯이 열광하는 온갖 人種(인종). 나의 크로아티아 여행은 월드컵 제전으로 더 좋았던 것 같다.

 

629-30, -월요일

옛날 로마와 카르타고가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을 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그 싸움을 관망하면서 생존을 중요시하여 실리추구에 전념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태도에 화가 났던지 관망만 하는 지중해 동부를 점령하려는 공격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중해 해안가에 방벽용 을 쌓게 되었고 그 성벽 안에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라는 해안도시가 유지되어 온 것이다. 문자 그대로 동지중해 연안에 세워진 무역항구였다.

두브로브니크 도시는 크로아티아의 남부 도서이며 이곳이 地中海 무역의 中心地 역할을 해왔다. 그 도시는 해안의 防禦城壁(방어성벽)으로 보호되고 왔는데 지중해 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곳일 뿐만 아니라 바로 해안성벽에 보호받는 港口都市이며 따라서 觀光의 중심도시가 되어 왔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남단의 항구도시로 가는 비행기는 다른 공항과는 달리 프로펠러 비행기가 아닌 최신형 여객기였다. 우리 일행은 우리 부부 이외에 아들네 부부와 두 딸을 포함하여 6명이었다. 비행장에서 내리자 아들은 렌터카로 우리를 태워서 호텔로 인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짐을 풀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모두 나가서 많은 계단을 계속 올라 성곽을 따라 지중해 경치를 감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이 성곽은 만리장성은 아니나 거리는 천리장성은 되는 것 같았다. 걷고 쉬며 가는데 지중해의 바다와 하늘이 너무나도 깨끗하였다. 앞과 뒤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보아하니 문자 그대로 여러 인종박물관 격이었다. 내 눈에 띈 동양인들은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그리고 한국인들이었다. 물론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식별하는 능력을 가짐을 마음속으로 자랑하고 있었다. 어딘지 당당하고 호기 있게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 종자들이다. 얌전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곧장 잘 걷는 사람들은 일본인 종자들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만큼 잘 입은 것도 아니고 얼굴에서 고생으로 찌든 흔적을 보이는 것이 중국인이었다. 표정이나 옷차림에서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뒤지지 않는 것이 대만인들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시아 태평양에서 중심국가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자신이 없어 보인다. 그들에게는 의 주도정신이 없다.

우리는 그 긴 성곽코스를 다 가는 것이 아니라 중도에 시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서 성곽 아래로 내려왔다. 地中海와 그 연안의 주거지 경치를 본 것도 좋았지만 성 아래 시장이나 식당가도 구경할 만했다. 우리는 식사 후에 주차해 놓은 곳에 가서 그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나와 아내는 널찍하고 편안한 침대에서 잤고, 아들은 보조 침대에서 잤는데 우리가 잠자는 동안 컴퓨터에 앉아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나와서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 섬을 일주하였다. 이 곳 두브로브니크는 항구도시 외에 비교적 넓은 면적의 섬이다. 오르막 내리막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주변의 多島海(다도해)를 보았는데 아름다웠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 통영 부근에서 본 다도해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남단 다도해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섬에는 다른 도시들도 있었지만 한국 남단의 多島海 만큼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다.

오후. 우리는 네 시 비행기로 자그레브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지만 떠돌아다는 것도 피곤함이라 두시 반경 도착하여 쉬다가 항공기에 올라탔다. 우리들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관광지를 모두 구경한 셈이다.

 

71, 화요일

오늘은 집에서 쉬며 TV를 보거나 짐을 싸며 하루를 보냈다. 지난주부터 보지 못했던 KBS 드라마 정도전을 모두 볼 수가 있었으며, 또 브라질 축구경기도 모두 再放으로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은 TV조작을 잘 못하는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보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다.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은 지역적으로 지중해 沿岸지역 관광과 브라질 월드컵 축구구경으로 흥미롭고 알찬 기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72-3, -목요일

나와 아내는 자그레브공항에서 오후 315분에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비엔나공항에 오후 45분 도착했다. 다시 비엔나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출발은 저녁 750분이라서, 출발까지 3시간을 무엇을 하며 기다리나 염려가 되었으나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비엔나공항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KAL 탑승장으로 걸어가는데 힘이 들었다.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통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로표지가 없고 또 문의해 볼만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환승하는 시간이 3시간이나 있어서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었지만 전화로 우리를 마중 나와서 안내해 준다는 항공사 직원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영어로나마 의사소통을 하며 이렇게 세계를 돌아다닐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또 길 찾아 헤매는 나를 아무 소리 없이 무조건 따라다니는 아내가 있으니 나로서는 또 얼마나 좋았던가?

그 수십 개의 항공사 중에서 KAL의 탑승구를 찾아낸 것은 좋았는데 KAL 398은 인천에서 오는 시간이 한 시간이나 연착하였으므로 출발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행기가 한 시간 반 정도의 연착 연발이 있었지만 프레스티지급 좌석이라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포도주를 시켜서 마셨으며 아내는 저녁식사를 하고는 들입다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프레스티지 클래스는 앉은 의자를 조작하면 침대처럼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어서 그렇게 비싼 것 같다. 나는 잠시 졸았다. 잠을 자던 아내가 눈을 떠서 여기가 어디냐.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두 시간만 더 가면 인천공항이야라고 대답을 하니 아내는 힘이 솟아난 모양이다. 한국시간으로 74일 오후 110분에 착륙할 예정이었는데 약 한 시간 반 정도 연착을 한 격이니 우리로서도 감내할 만한 여행이 된 것이다.

인천공항에는 둘째딸이 마중 나와 있어서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자그레브에서 아들 내외가 계속 전화를 해대니 아내는 잘 도착해서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등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고 즐거워했다.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해외 나들이가 아니었던가 생각을 하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불총 상임고문고려대 명예교수)

 

 

출처 ()아시아태평양공동체 www.aprc.or.kr 입력2014.7.11. 최종수정 2014.7.23.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