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암살사건과 반탁운동

  • 등록 2009.01.27 22: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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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전국민이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했지만 28일 스탈린의 지령이 떨어지자 박헌영, 여운형 등은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입장을 보였고, 반탁 = 좌익 = 매국노라는 등식이 떨어졌다.

송진우 암살사건과 반탁운동

신탁통치 찬성 반대의 과정에서 신탁통치에 찬성하거나 찬성의 입장을 보였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가 차례로 암살당했다. 뒤이어 1949년에 김구도 암살당함으로서 피해자로 규정되어 의심하지 않지만 사실 김구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사건때 용의자로 의심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 배후로 김구가 의심받았고, 송진우 암살때는 군정청 하지에게, 장덕수 암살때는 미군정청 법정에 불려가기도 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은 이승만, 김구 등 우익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하게 주장한 김구 계열이 주도적으로 나갔다. 탁치반대운동이 진행되면서 안재홍, 김규식, 김원봉, 박헌영 등은 암살위협을 피해 하루에도 다섯, 여섯 번씩 침소를 옮겨다녀야 했고, 김원봉은 화장실을 가는 듯 하면서 거처를 옮겨다녔는가 하면 김규식은 선친의 산소에 벌초하러 가지도 못할만큼 신탁통치 반대 열기는 거세게 불어닥쳤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서 한반도를 남북 분할하여 미소가 5개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의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김구는 바로 신탁통치반대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바로 1945년 12월 30일 김구는 포고령인 국자 1호, 국자 2호를 발표하여 미군정청 내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에게 파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946년 1월 1일에는 반탁운동에 대한 격려를 신년 연두사로 발표하여 동아일보 1946년 1월 1일자에 발표됐다.

45년 12월 30일 임시정부가 언론에 발표한 국자 1호, 2호의 내용이다. 이 내용에는 분명 군정청 한인 직원들에게 파업을 지시 하고 있다. 권유나 호소가 아닌 지시 형태다.

國字 제 1호
현재 전국 미군정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행정관청의 한국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의 지휘하에 예속케 한다.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한다.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한다.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실걍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을 확보하여 운영하는 것을 금지한다.
불량상인과 폭리매점 등은 엄중 취재한다.

국자 제2호
이 운동은 반드시 우니릐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필요로 하며 일반 국민은 금일 이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산업을 부흥케 하기를 요망한다.

국자1호와 국자2호는 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자 기사를 통해 보도됐다. 그러자 미군정청 내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총파업을 하며 조퇴하거나 출근하지 않았고 미군정청의 행정은 마비되고 말았다.

그보다 앞선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의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간의 3상회담 결과 한반도는 5년간 분할해서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단안이 결정되었다. 김구는 즉각 신탁통치반대국민회의, 반탁국민회의를 결성하여 탁치찬성은 매국노라고 했다.

처음에는 전국민이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했지만 28일 스탈린의 지령이 떨어지자 박헌영, 여운형 등은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입장을 보였고, 반탁 = 좌익 = 매국노라는 등식이 떨어졌다. 28일 우익단체간 모임에서 송진우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우익인사 중 신탁통치 찬성에 가까운 의사를 발표했던 고하 송진우는 45년 12월 30일 한현우에 의해 암살됐다.

송진우의 암살자인 한현우는 어느 단체 소속인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심문에서 한현우는 좌익에서는 여운형이 우익에서는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는 매국노라서 그 두명을 암살하려 했다. 여운형을 저격하려 했지만 여운형이 먼저 현우군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차마 쏘지 못했다고 그렇게 증언했다. 송진우는 신탁통치 찬성도 아니며, 신탁통치에 찬성할 수 있어야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을 뿐이다.
김구와 임시정부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는 시점에 와서 신탁통치를 찬성해야 한다는 투의 발언을 했다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12월 30일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발생했다.

46년 1월 2일 김구, 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이 미군정청 하지에게 불려갔다. 하지는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했고, 김구는 그 자리에서 차라리 죽겠다며 하지에게 대들었다. 그리고 김구와 임시정부 주도의 신탁통치 반대 총파업은 취소되고 3일만에 복귀하라는 명령을 발표한다.
1946년 1월 1일 저녁 8시에 결국 김구는 중앙방송국에 성명서를 보내 평화적으로 직장에 복귀하자는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선전부장 엄항섭을 대신 보내 대독 발표케 한다. 제목은 반탁은 평화수단으로, 동포여 직장에 복귀하자. 이는 자유신문 1월 3일자 저녁 기사에도 발표가 나갔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했고, 좌익인 여운형 박헌영이 모두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탁치는 매국노라는 인식이 확산된 가운데 송진우는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암살됐다. 그리고 미군정은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백범 김구를 의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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