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구걸하면 ‘전쟁의 신’이 미소 짓는다!

  • 등록 2012.04.03 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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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을 지원했으나, ‘2002 한일월드컵’ 대회기간 중 제2차 연평해전으로 되돌아왔다.

요즘 어느 정당이 총선캠페인 캐치프레이스로 “평화냐 냉전이냐”를 외치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전쟁이냐 평화냐” 캐치프레이스로 상당한 재미를 본 학습효과이리라. 평화에 대한 국민적 감성을 자극하여, 국가안보를 인기영합에 호소한 레토릭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그 1년 뒤 북한이 저지른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을 지원했으나, ‘2002 한일월드컵’ 대회기간 중 제2차 연평해전으로 되돌아왔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북한과 합의한 ‘10.4남북정상선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포함된 내용가운데 서해NLL을 제거하여 이 수역을 공동어로수역으로 하여 평화수역으로 하고,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이 소요될 남북 경제협력 사업(대부분 북한의 사회 인프라구축 사업)이 남한에 되돌아올 것은 또 무엇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평화를 구걸하거나 돈으로 평화를 샀을 때, 되돌아온 건 거의 모두 전쟁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를 들어본다.

(1) 고대 로마제국 말기 (4세기~5세기)

이때의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 야만족의 일부인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반달족, 그리고 동방의 야만족인 훈족이 로마제국을 괴롭힌 시기이다. 이 시기의 새로운 특징은 로마가 도나우 강 북쪽의 게르만 야만인들에게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이 일상화된 것이다. 즉, 로마가 야만족들에게 약속한 연공을 바치지 않으면 야만족들은 언제라도 게르만방벽을 넘었고, 안전하고 명예롭게 평화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동로마 황제들의 생각이었다.


도나우 강을 따라 구축한 게르만방벽을 북쪽의 게르만 야만족들이 침입할 때마다, 로마제국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5현제 시대에 애써 개척해 놓은 영토(트라키아 지방)를 서고트족에게 정착하도록 양보했고, 또 연공을 바치며 달랬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세력을 키워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갈리아지역을 짓밟고 에스파냐(스페인) 북부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갈리아(프랑스) 남부를 통합하여 서 고트 왕국을 세웠다.

훈족의 Attila대왕이 동로마를 침공했을 때도, 동로마는 막대한 보상금 지불과 연공을 약속하고 Attila는 물러갔다. 그러나 훈족이 패망한 이후에는 다른 게르만 야만족인 동고트족이 동로마제국의 영토(다키아·모이시아·판노니아 지방)를 침략하였으나, 동로마제국 역시 유화정책으로 이들을 달랬다. 그들은 다시 이탈리아까지 점령하여 동고트왕국을 세웠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이렇게 한탄했다. “자신들(로마인들)의 나약함을 예의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변명하던 타락한 인간들은 사나운 야만족의 무력과 법률(프랑크족의 야만적인 살리카법률)에 노출되었으며, 야만족들은 그들(로마)의 재산과 자유와 안전을 경멸하며 침해했다.”


(2) 중국 송나라 (960~1279)


송나라(북송)는 1004년 북쪽의 요나라(거란족)가 대거 침입해 오자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澶淵之盟]. 또한 요나라의 침공에 때맞추어 서쪽의 서하(탕구트족)가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慶暦和約]. 그 결과 평화는 유지되고 인구는 늘었지만(추정인구 1억)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 뒤 여진족이 세력이 커져 금나라를 세우자 송나라(북송)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금나라와 함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나라에 주던 공물을 금나라에 주게 된다. 그러나, 과도한 공물에 대한 약속불이행으로 송나라(북송)는 금나라와 갈등이 커졌다. 금나라는 1127년 결국 송나라(북송)를 침공하여 송나라 황제를 잡아가고 황족이 남쪽으로 도망가 남송시대가 열린다[靖康의 變].


남송은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조약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평화조약의 댓가는 처참했다.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양보하고, 남송의 황제는 앞으로 군신(君臣)의 예(禮)로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막대한 조공을 해마다 바친다는 조건이었다. 명나라 때 진회는 매국노로 낙인찍혔고, 지금은 그의 동상이 악왕(악비) 묘에 포박된 채 꿇어앉아 전시되고 있다.


1233년 송나라(남송)는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패망시켰으나, 그 후 송나라(남송) 군이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開封)을 회복하였는데,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었으므로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군사력이 약한 송나라는 결국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처럼 송나라는 1억이라는 거대한 인구와 상당한 경제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관우대정책으로 군사력이 저하되었고, 전쟁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돈으로 평화를 샀으나 결국 100만 정도도 안 되는 부족 국들(요, 서하, 금, 몽골제국)과 차례로 굴욕적인 화평조약으로 연명하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3) 1차 세계대전의 31개 연합국(1936~1941)

베르사유조약 [Treaty of Versailles]은 제1차 세계대전 후 1919년에 체결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주도한 전승국인 31개 연합국과 패전국 독일의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 가운데, 라인란트(Rheinland)는 비무장지대로서 15년간 연합국의 점령 하에 두고, 자르지방(Saarland)은 15년간 국제연맹의 관리 하에 두게 하는 등 패전국에 매우 가혹한 일방적인 조약이었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1936년 이 조약을 어기고 군대를 진입시켜 점령해 버렸다. 이는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발 행위이었으나, 연합국은 평화를 깨트린다는 명목으로 이를 묵인해 버렸다. 사실 당시 나치독일의 군사력은 전쟁을 치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훗날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진주한 후 48 시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신경이 곤두섰던 시간이었다. 만일 프랑스가 반격을 했더라면 우리 독일군은 그 즉시 퇴각했을 것이다. 그때 독일군은 아직 약체였기 때문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는 전쟁을 치를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결단력이 없었고, 소극적인 외교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를 간파한 나치독일은 둑 터진 봇물처럼 밀어닥쳤다.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 합병, 10월에는 체코 주데텐 지방(Sudetenland)을 점령하고, 1939년 3월에는 드디어 체코도 공갈 협박하여 무혈점령 합병해 버렸다. 이 역시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은 평화를 깨트린다는 이유로 수수방관하였고, 그 결과는 나치독일이 1941년에 폴란드를 기습 공격하여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배용 : 대불총 회원 yoyob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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