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0 (수)

  • 맑음동두천 -3.3℃
  • 맑음강릉 -1.2℃
  • 맑음서울 -1.4℃
  • 맑음대전 -3.2℃
  • 맑음대구 1.5℃
  • 구름조금울산 4.5℃
  • 맑음광주 0.0℃
  • 구름조금부산 5.0℃
  • 맑음고창 -2.8℃
  • 구름조금제주 5.4℃
  • 맑음강화 -4.7℃
  • 흐림보은 -1.0℃
  • 맑음금산 -3.3℃
  • 맑음강진군 0.9℃
  • 맑음경주시 4.1℃
  • 구름많음거제 4.6℃
기상청 제공

불교소식

간다라의 불교를 찾아서(2)

라호르 박물관 - 싯다르타 고행의 영혼을 재현/다르마라지카 대탑과 아소카 대왕

라호르Lahore 그리고, 고행의 왕자 싯다르타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파키스탄의 따듯한 환영
라호르(Lahore)는 파키스탄 동북부에 있는 펀잡(Punjob)주의 주도이다.

이슬라마바드가 파키스탄의 상징적인 수도라면 라호르는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 이다.
카라치에 이어 파키스탄에서 둘째로 큰 이 도시는 인더스 강 지류인 라미강 좌안 인더스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파키스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이 도시다. 타이 항공편으로 4월 27일 아침 9시40분에 인천 공항을 출발, 라호르에 도착한 것은 한국 시간으로 28일 새벽 3시, 모두 18시간이 걸렸다. 파키스탄까지 직항로가 없어 태국 방콕에서 5시간이나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고 오니 더 늦을 수 밖에. 파키스탄은 한국 보다 표준시간이 4시간 늦다. 그러니 여기 현지 시간으로는 27일 밤 11시에 온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합실에 나가니 우리를 마중 나온 현지 인사들이 많은데에 깜작 놀랐다.

간다라 예술문화협회 줄피가르 라힘(Zulfigar Rahim) 회장과 박교순 동사무총장, 그리고 관광부의 컨설턴트 몇분, 우리로 말하면 옛날 내무부 치안 담당과장 1명,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직함을 가진 분들이 나와서 우리들 목에 긴 화환을 걸어주면서 박수로 맞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초청 한것이 카이버 팍툰카와((Khyber Pakhtunkhwa)주 정부이고 또한 연방정부도 거기에 관여 하였기에 이처럼 국빈 대우 못지 않은 영접을 하는 것이었다. 목에 걸린 화환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코를 스치며 긴 여정의 피로를 풀어 준다.


펀잡주 주지사와의 만남

5성급인 펄 콘티넨탈(Pearl Continental) 호텔에서 파키스탄의 첫 밤을 보내고 28일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맑고 덥다. 여행은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자는 것이 우선 좋아야 한다. 우리는 대접을 받는 처지였지만 이 분들의 호의로 국빈급의 경호와 숙소, 음식이 모두 일류였다. 아침 후 첫 방문지는 펀잡주 주지사의 영빈관. 모두 정장을 하고 나오라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이곳 주지사가 우리 한국 방문단을 환영하는 뜻으로 초청했다는 것이다.

영빈관은 영국 식민시대에 지은 건물이라는데 벽돌 2층으로 아담하게 꾸며졌다. 일행 19명은 2층 널직한 홀에서 주지사와 차를 들며 한. 파키스탄에 대한 우정 어린 담소를 나누었다.

주지사는 “여러분을 환영한다. 파키스탄은 위대한 불교문화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간다라는 불교인들의 메카이다. 이제 그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지금부터 2700년전에 세계 최초의 대학을 세운 곳이 간다라라고 자랑 하였다.

이에 우리 박희도 단장은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다. 우리는 한. 파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대승불교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백제 불교의 시조인 마라난타의 고향도 찾아 경배를 드릴 것이다” 라고 답사를 했다.

펀잡주는 넓이가 20만 평방키로를 넘는다 거의 한반도와 맞먹는 땅덩어리다. 그런만큼 여기 주지사는 우리나라의 도지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주정부의 권한도 거의 독립적이라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이런 주지사의 영접을 일개 관광단인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생각 되었다.


라호르 박물관 - 싯다르타 고행의 영혼을 재현

주지사와의 만남이 끝나고 우리는 기대하던 라호르 박물관을 찾았다.
우리가 오래도록 흑백사진으로만 보아 온 부처님의 고행상이 있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도 하시기 전의 고행이니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상이라고 해야 맞다.

라호르 박물관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박물관으로 1894년에 지어졌다. 모두 8개의 전시실에는 간다라 불교 예술품과 인더스 강 유역의 각종 출토품,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 온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파키스탄 각지의 민속의상과 무굴제국의 예술품 등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박물관은 간다라를 방문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꼭 둘러봐야 할 곳이다.

부처님, 아니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상은 중앙 홀 왼쪽 끝의 간다라 방으로 들어서면 왼쪽 유리 진열장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우선 우리 일행은 박물관의 1층 한 가운데 전시된 높이 2m가량의 스투파 앞에서 법회 의식을 가졌다. 활안(活眼) 법일(法日) 두 스님이 집전, 삼귀의로 시작 반야심경. 그리고 법성게를 송(誦) 하면서 탑돌이를 하고 사홍서원으로 마쳤다.

필자는 이때 두 가지를 크게 느꼈다.
첫째는 박물관에서 감히 종교의식을 행할 수 있는 곳이 세계 박물관 치고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대개는 박물관 안에서 사진은 물론 찍을 수 없고, 말 소리도 크게 낼 수 없이 조용하게 관람하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는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할 수 있다니 아! 파키스탄은 아직도 어수룩하구나 하는 생각과
또 하나는 이슬람 국가에서,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이토록 불교의식을 거침없이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 불자들의 그 용감성에 놀랬고, 이곳 이슬람 교도들의 너그러움에 감복 했다. 법요식을 마치니까 우리 일행들 대부분은 고행상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합장 배례하면서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어느 한 보살은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계속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고행상은 편암(片岩 Schist)에 새겨진 부조(浮彫)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양손은 단전(丹田)에 모은채 앞면을 응시하며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앉은 상(像)의 높이가 80cm를 좀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등신대(等身大)이다. 건장한 중년 성인이 앉으면 거의 비슷한 크기가 아닐까 싶다. 얼글 모습은 당시 간다라인이 아니면 필시 희랍인상 같고 두상(頭相) 뒷면에 광배가 있으며, 결가부좌한 아래의 대좌에는 공양상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불상의 양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동양사회의 불교에 미친 간다라의 영향을 알만하다. 상을 보면 앉은 자세가 곧고 눈의 광채도 살아 있다. 모습은 갈비 뼈가 앙상히 드러나고 가죽과 뼈와 힘줄만 보인다. 그러나 가죽에 드러난 힘줄에서는 하나하나에도 긴장감이 흐르고 뱃가죽은 완전히 등에 붙어 있으나 그래도 힘이 들어 있어 보인다. 육체적 고뇌와 욕망에 맞서 싸우는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모습을 영웅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이지만 싯다르타는 29세에 왕성을 나와서 설산으로 들어가 고행한다. 이 고행은 레란자(尼蓮禪河)강가에서 수자타란 처녀한테 유미죽(乳糜粥)을 공양 받을 때까지 계속된다. 성도(成道) 직전까지이니 6년을 계속 한 것이다. 인도 전통에서 고행은 타파스(Tapas)라 한다. 타파스는 본래 열(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행은 욕망을 억제하고 육체를 제어 하므로써 얻어지는 열, 즉 에너지를 통해서 신비하고도 절대적인 각(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라호르의 고행상은 뼈와 가죽만 남았지만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열기에다 영혼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타파스의 위력인가. 고행상은 AD2-4세기의 작품으로 추산되지만, 이 불상을 조성한 간다라의 조각가야 말로 싯다르타 타파스의 위대한 영혼을 마음으로 보고 그것을 이 세상에 다시 살려 낸 것이다. 그래서 작가이기 이전에 그는 고행상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우리들의 큰 보살이라 하겠다.

탁실라(Taxila)-고대의 대승 불교국
고행의 왕자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상을 뒤로 하고 라호르 박물관을 나온 것은 오후 1시경. 우리 일행은 이곳의 재력가 한분의 초청으로 로얄 팜(Royal Palm) 컨트리 클럽 하우스에서 점심을 잘 대접받고, 2시 30분경 이슬라마바드로 향했다. 도착은 밤 8시반경. 꼬박 6시간을 관광 버스로 달려 온 것이다.

이슬라바드는 파키스탄의 수도이다. 투숙은 세레나(Serena) 호텔. 이 호텔은 파키스탄 제1의 호텔로서 국빈급을 맞이 하는 곳이란다. 호텔에 들어 가는데 두 번의 검색을 받았다. 마치 공항에서 하는 것처럼 몸과 짐을 검색하는데, 한번은 국가기관, 그 다음은 호텔자체의 검문인 것 같다. 만의 하나라도 안전을 위해서 이겠지만, 이 나라의 치안이 불안한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29일 아침 우리가 탁실라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좀 지나서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탁실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견줄만 하다. 고대 왕국의 도시로서 많은 유적과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탁실라의 원래 지명은 ‘탁샤실라’로 ‘자른 돌의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현장(玄奘 602-664)도 그의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탁샤실라국(咀叉始羅國)’이라고 적고 있다. 현장은 627년 26세의 나이에 서역으로 불법(佛典)을 구하기 위해 순례길에 올라서 장장 18년만인 645년에 당경(唐京)인 장안(長安)으로 돌아 온다. 그는 이 기간 동안 5천축(天竺) 80개국중 75개국을 역방하였으며, 이와같은 구법행적을 기록한 ‘대당서역기’에는 모두 서역의 138개국 풍토와 전설, 관습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불경은 자그마치 640질(帙)이다. 현장이 이곳에 들른 것은 630년경. 그의 기록에 따르면 “탁샤실라국은 둘레가 2000리며 도성의 둘레는 10여리다. 전에는 카피사국에 속해 있으나 지금은 카슈미르국의 지배를 받는다. 토지가 비옥해 농작물과 과일이 많이 나며 기후가 온난하다. 이곳 사람들은 불교의 삼보를 숭상하며 대승불교를 연구한다. 이 나라에는 불교 유적이 많다”(현장, 대당서역기, 권덕녀 옮김, 서해문집)고 한다. 1400여년 전 기록인데 지금은 불교는 없고 오로지 그때 화려했던 유적만 남아 있다. 9세기 때부터 이슬람의 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BC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하여 헬레니즘을 전파시켰고, BC3세기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들어와 아소카(Asoka)대왕이 불교 문명을 심었으며, BC2세기에는 그리스 문명, 그리고 AD1세기에는 쿠샨왕조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 하였다. 탁실라는 고대에 매우 번성한 도시로 동서양을 잇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학문과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시르캅(Sirkap), 줄리안(Julian)사원, 탁실라 박물관을 관람하고 다르마라지카대탑으로 이동 하였다.


다르마라지카 대탑과 아소카 대왕
우리 일행은 탁실라(Taxila)의 다르마라지카(Dharmarjika)를 오후 3시경 찾았다. 이 대탑은 탁실라 박물관에서 3km쯤 떨어져 있는데 얕으막한 고개 길을 조금 올라가니 장엄한 모습을 드러 내었다. 간다라 최초, 최대의 스투파로서 영국의 고고학자 존 마샬(John Marshall) 에 의해 1930년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대탑을 조성한 주인공은 역시 아소카(Asoka) 대왕. 아소카 대왕은 인도의 통일 국가를 이룩한 마우리아 왕조의 제1세 찬드라 굽타의 3세(손자)손으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불교의 대중흥조다. 아소카의 대제국은 인도는 물론 오늘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으로는 페르샤 제국의 일부까지를 지배영토로 하였으니 그의 제왕으로서의 위력과 당시 국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런 아소카 대왕에게도 후회 막급한 일들이 많았다.

그 첫째는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며, 다음은 카림카 국을 정복 할 때 잔혹한 학살을 자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죄업들이 그에게 주는 마음의 고통은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가 바라문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것도 바로 이러한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이후 그의 정치는 불교의 다르마에 따라 행하고 불법을 널리 전파하는데 있었다. 해서 다르마라지카의 대탑은 아소카 대왕이 형을 죽인 죄과를 참회 하기 위하여 조성했다고 전해 진다.
아소카는 부처님 사리를 부처님 열반 당시에 나누어 졌던 8곳에서 자신이 다시 수집하여 세계에 재분배 할 때,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 하였으며 따라서 탑을 중심으로 거대한 절을 세웠던 것이다.

탑은 원형으로, 돌을 깍아 둥글게 2층의 기단을 높이 쌓고, 그 위로 자연석과 흙을 올려 만들었다. 기단의 석축들에는 불상, 보살상, 공양상 등 정교한 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탑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나는 탑을 한 바퀴 돌면서 큼직한 벌걸음으로 탑 둘레를 재어 보았다. 모두 180여보, 미터로 치면 한 120미터 정도는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높이는 눈으로 보아 한 20미터쯤 되어 보인다. 둥글고 높고 장엄하다. AD 2세기 중엽 쿠샨 왕조의 그 위대한 카니슈카 왕이 이 스투파를 증축하였다고 하니,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대 탑의 모습이 아소카 당시의 것과 똑 같다고는 말 할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봉안된 사리와 기본 형태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불교의식을 봉행하였다. 활안(活眼), 법일(法日)스님을 법주로 모시고 박희도 회장, 이원종 회장, 민희식 교수, 이건호 회장, 이석복 장군, 조상현 회장 등 전원이 목탁에 맞추어 삼귀의례로 시작하여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다음은 법성게를 송(誦)하면서 탑돌이를 하였다. 물론 법요식은 사홍서원으로 마쳤다. AD 6-7세기경 이곳에서 불교가 말살 된 후 아마도 간다라의 산하대지와 저 푸른 창공에 목탁과 염불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 예는 우리들의 이번 법회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여기는 오래 전부터 무슬림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감개가 깊었다.

아소카는 36년간 왕위 재직시 불교의 전법사를 페르샤, 이집트, 말레이, 실론, 미얀마에까지 보냈다고 전해 진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다르마라지카는 더욱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이 탑에 지금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973년 파키스탄에서는 이 탑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캐내 미얀마로 보냈다는 것. 아소카의 위대한 유산 다르마라지카에서 부처님 사리가 빠져나갔다고 들으니 왠지 사지에 맥이 풀린다.

그러나 어쩌랴, 법신(法身)은 온 우주에 상주하니 그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해는 뉘엿 뉘엿 석양에 기울고 서늘한 초여름의 바람이 가슴을 적시니 어쨌든 나그네의 마음도 시원한 기분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 탁샤실라국에서 사두탑(捨頭塔)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두탑은 여래가 이곳에서 보살행을 행할 때 찬드라브라바(戰達羅鉌刺婆)라는 왕이 되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자기 머리를 베어 다른 사람에게 보시했다. 아소카 대왕이 그러한 여래의 뜻을 기려 이 사두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사두탑이 바로 오늘 우리가 친견한 다르마라지카는 아닐런지--. (2012.7.17)

-태고종 "한국불교"신문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