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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소식

간다라의 불교를 찾아서(3)

알렉산더와 현장의 유적 / 마라난타의 고향 - 초타 라호르 / 대승불교의 발흥지 – 페샤와르 / 불상의 유래 - 페샤와르 박물관

대승불교의 발흥지-페샤와르

송재운(동국대 명예 교수)



훈드(Hund) - 알렉산더와 현장의 유적

4월30일 우리가 이슬라마바드에서 훈드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였다. 훈드는 스와비 지역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인더스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페샤와르와 약 80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은 일명 알렉산더 포인트(Alexander Point)라고도 부른다. 알렉산더가 BC 323년 군대를 이끌고 이곳 인더스(Indus)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훈드 박물관 앞 넓은 광장에는 상당히 높은 원주의 알렉산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스 정부에서 세웠다 한다. 또 당(唐)의 현장(玄奘)도 여러필의 말에 불경을 싣고 이 지점 인더스 강을 건너다 말들이 강으로 넘어져 경전을 물속에 빠뜨리자 다시 인도로 가 같은 경전들을 구해 싣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곳 훈드에는 불교를 비롯해 많은 역사적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훈드 박물관은 2003년에 개관 했다고 한다. 인더스강 바로 강가에 세워진 이 박물관에는 이 지역내에서 출토된 많은 불상과 보살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불 보살상들도 우리가 처음 대하는 것이지만, 전혀 낯선 감이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불 보살상들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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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난타의 고향 - 초타 라호르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침류왕(枕流王)원년인 384년 동진(東晋)에서 백제로 들어와 불법을 크게 전파 하였다. 그런데 그가 파키스탄 간다라 사람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기록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본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甲申 東晋 孝武帝 大元 九年)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진(晋)나라에서 오자,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인 을유년(385)에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지어 도첩을 받은 승려 10명을 두었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시초이다(후략)”. <삼국사기>의 기록도 내용은 이와 같다.

점심 후 우리가 초타나호르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좀 지나서 이다. 초타 라호르는 마라난타의 고향이다. 그래서 찾은 것이다. 이곳의 옛 절터라고도 전해 오는 부디(Budhi) 언덕 낮으막한 평지에 우리는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과일을 진설하고 모두 모여서 법요식을 가졌다. 아주 정중하고 장엄하게 1600여년 전에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을 기리면서 일종의 재(齋)를 올린 것이다.

이날 우리들의 행사에는 이곳 마을 주민 200여명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이곳을 ‘미라노’라고 한다며 우리를 환영했다. 오늘 날 전남 영광 법성포에는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공원을 만들고 간다라 유품관을 열었으며 간다라식 수투파 등 많은 불상을 조성해 놓고 있다. 간다라를 4번이나 방문하여 그곳 가람의 형식과 똑 같게 재현 한것이라 한다. 간다라 지역에서 가져 온 여러 불상과 조형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미라노 마을 마라난타의 고향을 떠나 우리가 페샤와르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가 지나서 였다.


대승불교의 발흥지 - 페샤와르(Peshawar)

페샤와르는 파키스탄 북서부에 위치한 카이버 팍툰카와(Khyber Pakhtunkhwa)주의 수도인 동시에 파키스탄 부족지역 연방행정의 중심지이다. 이곳의 옛 이름은 푸루샤푸라(Purushapura)인데, 싼스크리트어로 푸루샤(Purusha)는 ‘인간’, 푸라(Pura)는 ‘마을’로 ‘인간의 마을’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오늘 날 ‘페샤와르’는 이 ‘푸라샤푸라’에서 유래 했다.

2세기에 쿠샨왕조의 카니슈카(Kanishka, 재위 AD128 - 151)왕은 이 푸루샤푸라에 수도를 정하고 불교 왕국을 건설 하였다. 옛날 간다라국은 페샤와르가 있는 이 카이버 팍툰카와 지역이다. 페샤와르는 예로부터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동서의 다양한 문명 교차점이었다. 간다라 왕국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교통 요충지로서 상업이 발달 하였다. 불교사에서 보면 이곳은 대승불교의 발흥지이다.


현장(玄奘 602 - 664)이 이 푸루샤푸라를 찾은 것은 630년경. 현장은 이 지역을 "간다라국(健馱邏國 )"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간다라국은 카피샤국의 속국이다. 동쪽에는 인더스강이 있으며 서리나 눈이 내리지 않는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 된다. 사람들은 겁이 많고 나약하며 경전과 예법에 관한 글 공부를 즐긴다. 주로 외교를 믿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적다. 아상가, 바수반두(伐蘇畔度), 여의(如意), 파르시바(波栗濕縛)같은 귀한 사람들이 이곳 출신이다”(대당서역기, 권덕녀 옮김, 서해문집).

그리고 신라의 혜초(慧超)는 이곳을 들러 기록하기를 “나라의 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 족이다. 토착민은 오랑캐족이고 바라문(인도 종족)도 있다. 큰절에는 천진보살과 무착보살이 살았고, 큰 탑이 있는데 항상 빛을 내뿜고 있다. 또 동쪽 마을엔 부처님이 과거 시비카왕이 되어 비둘기를 날려 보낸 곳이 있다”(신왕오천축국전, 하권, 페샤와르, KBS특별취재반, 한국방송사업단, 1983).
현장은 7세기에, 혜초는 8세기에 각각 이곳을 찾았다. 두 분다 불교국가 쿠샨왕조가 망한(5세기)뒤 한 참만에 여기를 찾은 것이다. 불교가 이미 쇠퇴하여 힘을 잃었을 때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장의 기록에서 2세기-5세기경까지의 대승불교 논사들의 면모를 찾아 볼수가 있다. 역사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말하는 波栗濕縛은 파르시바(Parsva)로서 중국에서는 협존자(脇尊者)로 불려지기도 한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시바는 원래 브라만으로서 80세가 지나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늦게 출가한 까닭에, 그는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며 정진에 몰두 하였다.

그리고 3년뒤에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팔해탈(八解脫)을 이루었다. 승려가 된후 그는 절대로 눕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를 협존자라 불렀다고 한다. 파르시바는 카니슈카왕에게 권하여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오늘날 카슈미르)에서 500의 비구들을 모아 세우(世友)와 함께 제4결집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우는 이름난 <비바사론>의 논사였다.

이때 결집된 것이 <十만송우파데샤론> <十만송비나야비바사론> <十만송아비달마비바사론>등 총960만자이다. 파르시바는 또 마명(馬鳴, Asvaghosa)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명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승기신론> <대장엄경> <불소행찬>등의 저자로서 중인도 마가다국 사람인데 카니슈카왕이 중인도를 정복하고 배상금 대신에 그를 데리고 간다라로 와서 스승을 삼고 대승불교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마명은 파르시바와의 불교 대론에서 패배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소카 대왕에 이어 제2의 전륜성왕이라고 칭해지는 카니슈카왕은 원래 이교도였는데 우연히 탑을 쌓고 있는 한 목동에게서 부처님의 예언을 듣고 독실한 불자가 된다. 카니슈카왕은 여래의 사리탑을 세우라고 말한뒤 홀연히 사라진 목동의 말을 따라 도성의 동쪽 8-9리쯤 떨어진 곳에 큰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 하였다. 헤초의 기록에 “큰 탑이 있는데 항상 빛을 내뿜고 있다”고 한것이 이것이며 천진보살과 무착보살이 살았다고 하는 큰 절은 그 대탑 옆에 카니슈카왕이 세운 것으로 파르시바나 마명도 거기에 주석했다고 한다. 현장이 기록한 간다라국 인물들을 좀더 살펴 본다.

아상가(阿僧伽 Asanga)=약 310-390년경 인물로 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한 불교사상가. 중국에서는 무착(無着)이라 부른다. 소승으로 출가하여 대승으로 전향하고 그의 동생 세친을 교화 했다. <섭대승론> <금강반야경론>은 그의 대표작이다. 후일 아유타국에서 활동했다.

바수반두(伐蘇畔度 Vasubandhu)=우리가 잘 아는 세친(世親)을 말한다. 무착의 아우로서 소승에서 500부, 대승에서 500부 론(論)을 지어 천부론사(千部論師)라 일컷는다. <구사론> <십지경론> <유식론송> <금강반야바라밀론> 등 저술이 있으며 아유타국에서 80세에 입적했다. 그리고 무착, 세친 형제의 막내 동생으로 사자각(師子覺 Buddhasmpa)이 있다. 그도 간다라국의 유명논사,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다.

파르시바와 마명이 카니슈카왕과 함께 2세기 중반경 대승을 일으킨 사람들이라면, 무착 세친 사자각 3형제는 4-5세기경에 불법을 보다 심오하게 체계화한 간다라의 논사들이다.
여의(如意)= 역시 간다라 출신으로 유명한 논사이다. 박학다식하기로 이름난 세친이 그의 제자이다. <비바사론>은 그의 주저다.


불상의 유래 - 페샤와르 박물관

페샤와르 박물관은 1907년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간다라 문명의 가장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이 박물관의 자랑 거리다. 간다라 시대의 불상과 불교 조각, 석가모니 부처님에 관한 가장 많은 조각품을 소장하고 있다. 부처님의 석상및 스투코 조각상, 자타카 이야기를 조성한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대개는 이 지역 출토품이다. 불상은 카니슈카왕때에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유래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간다라에서 쿠샨왕조를 일으킨 쿠샨족은 이란계 유목민이다. 고대에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인란계 부족들 사이에서는 죽은자의 영혼을 ‘후라와시’라고 불렀고 죽은 자의 초상은 바로 이러한 후라와시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이란계 부족의 사상은 카니슈카 왕때에 불상이 조성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방면의 연구가 민희식 교수에 따르면 ‘후라와시’는 조상의 영으로서 모든 생물에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고,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적 요소다. 그래서 그들은 특히 국왕이나 영웅의 후라와시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 하였다.

쿠샨족도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왕의 초상을 제작하여 신전에 모셨으며, 탁월한 인간의 후라와시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다고 믿었다(민희식 박교순 저, 불교의 고향 간다라, 가이아,1999).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란계 쿠샨족이 개종하여 불교도가 되었을 때, 그들이 믿는 종교의 창시자, 즉 부처님의 초상(肖像)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었다.

그리고 부처님은 석가족의 왕족이므로 쿠샨족의 뛰어난 지도자와 동등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생겨 나는 것이 부처님의 초상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후라와시가 이 세상에 내려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욱 부처님의 초상(불상)을 만들어 받들었던 것이다. 부처님 후라와시의 위대한 힘으로 자기 나라와 자손의 번영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그러므로 절을 지어 부처님의 초상, 즉 불상(佛像)을 조성하여 거기에 모셨던 것이다. 당시 그들이 불상을 만드는 것은 의무이자 최대의 공양이었다. 쿠샨족에 의해 처음 태어난 불상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불상은 부처님의 후라와시, 곧 부처님의 영혼과 마음이 깃든 ‘영원의 상(像)’이다.


스와트 - 속인 보다 스님이 많던 나라

페샤와르 박물관을 나와서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탁트히 바이(Thkht-e-bahi)승원을 보고 바로 스와트(Swat)로 향했다. 파키스탄 북서부의 스와트 협곡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은 남쪽의 간다라와는 산악으로 구분된다.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외래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쿠샨왕조 시대부터 8세기 경까지 불교가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 험준한 말라칸드(Malakand) 고개를 넘어 우리가 스와트 지역에 들어선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현장은 이 스와트 지역을 웃디야나국(烏仗那國)이라고 칭하고, 대승불교를 믿으며 불교유적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혜초는 “이 나라는 왕도 삼보를 크게 공양한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며 재(齋)를 올려 공양하는데 매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절도 많고 중도 많은데 속인보다 승려의 수가 더 많다”고 적고 있다(왕오천축국전). 간다라국에 비해 이 나라는 더 오랫동안 불교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진신 사리 - 싱가다르 수투파

말라칸드 고개를 넘어 얼마를 가다 보면 도로에서 우측으로 약 200m 지점에 원형으로 된 아름답고 웅장한 탑이 보인다. 바로 그 유명한 싱가다르(Shingardar) 수투파다. 우리가 차에서 내려 가보니 탑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이었다. 이 수투파의 건축은 특이 하다.

기단부는 방형을 이루고, 몸통은 원통형. 정상은 돔으로 되어 있다. 원통형의 탑신은 둘레 12m, 높이 27m 이다. 이 아름다운 싱가다르 수투파는 부처님 입멸 후 모두 여덟 나라로 나뉘어 분배된 당시의 부처님 사리를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한다.

웃디야나 국왕이 부처님 입멸 당시 구시나가라에 가서 사리를 분배 받아 흰코끼리에 싣고 오는데, 코끼리가 마침 이곳에서 쓸어져 죽어 바위로 변했다. 그래서 왕은 여기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싱가다르 수투파라는 것이다. 아소카대왕은 8개국으로 나뉘어 봉안되었던 사리탑중 7개를 모두 헐어 사리를 다시 수습, 여러 곳으로 재 분배 했는데, 이 싱가다르만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오래된 역사적 기념물이 아닐 수 없다. 이 탑을 소개하는 영문 간판에는 현장의 기록에 나오는 탑이 바로 이 탑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웃디야나국’조에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이 수투파의 연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웃디야나 국왕은 ‘석가족’으로서 현장은 그를 상군왕(上軍王)이라고 한다. 상군왕의 어머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멀었던 눈을 떴는데, 아들을 위해서도 법을 설해달고 부처님께 청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상군왕은 나의 일가이므로 설법을 듣지 않아도 깨칠 것이니, 여래가 곧 열반에 들거든 사리를 갖다 공양하라 이르면서 외출한 상군왕을 기디리지 않고 구시나가라로 떠난다. 사냥을 갔다 돌아 온 상군왕은 어머니에게서 이런 사연을 듣고 곧장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여래는 이미 열반에 든 뒤였다.

그리고 일곱나라의 왕들이 각기 여래의 사리를 분배하고 있었다, 늦게 온 상군왕은 간신히 신선들의 도움을 받아 여래의 사리를 나누어 받아가지고 돌아 온다. 그러나 사리함을 싫은 흰코끼리는 전술한 대로 길에서 죽어 돌이 되어 거기에 여래의 수투파를 세운다. 싱가다르 수투파에 대한 전설은 결국 현장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5월 2일 아침 햇살이 맑다. 우리는 9시경 BC 2세기에 조성되었다는 부트카라 수투파(Butkara Stupa)의 유적을 찾았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힌두쿠시 산맥에 백설이 눈부시다. 저 산맥을 넘어 이곳에서 건너 간것이 곧 티벳 불교란다.

우리는 길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간다라의 위대한 불교유산의 숨결을 맛 보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후라와시를 재현한 쿠샨왕조의 불상들에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또 옛날 간다라의 불교와 오늘날 우리 한국의 불교가 결코 먼데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끝)
(2012. 8. 9.)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