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11시 서울 종묘공원에서 月南 李商在 先生 제 82周忌 追募會를 가졌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호(季皓) 아호는 월남(月南)이다.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상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8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승지 박정양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사랑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한다. 조정의 신임을 받는 젊은 선비이자 개화파 지식인인 박정양을 만난 사건은 이상재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당시 박정양은 엉뚱하리만치 개성이 강한 이상재 청년을 아꼈다고 한다. |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어윤중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이 사귀었다.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지식인인 유길준, 윤치호, 고영희 등이 이상재와 함께 따라갔다. |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가자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박정양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다. 1887년 박정양이 미국에 전권대사로 파견되었을 때, 이상재는 2등 서기관으로 수행하여 1년여 동안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당시 월남은 미국 청소년들이 외교관인 자신에게 돌을 던진 무례한 행동으로 경찰조사를 받게 되자, 나이어린 청소년들이 한 행동이니 용서해달라며 선처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은 나중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념이 되었다. |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는 보수파들과 결탁한 보부상들의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앞세운 보수파들의 탄압으로 해산되었고,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
장재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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