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4 (금)
잊어서는 안될 6.25 그날- 그리고 6. 30. 05:00가 우리를 살렸다.
백악관 블레어하우스 무대에 등장한 軍服과 私服들--4--(完)
콜린스 장군의 보고는 장내를 한때 숙연케했다.
지상군 투입은 피할 수없는 무거운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에서조차 아시아본토에의 전투부대 투입은 피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다.
브래드리 합참의장이 대통령에 그와같은 중대 결정은 며칠 기다렸다 내리는 것이 어떤가고 제안하자
트루먼은 합동참모본부에 문제 검토를 지시했다.
그 장면의 무거운 분위기를 반영하여 트루먼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참전하고 싶지 않아"하고 고정을
토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대통령은 참전 최종결단 앞에 서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6월 27일, 트루먼과 에치슨은 의회 지도자들과 만나 이제까지 내려진 여러 결정사항을 설명했다.
의회측 반응은 전적으로 호의적이었다.
뉴저지주 출신 공화당의 알렉산더 스미스 상원의원은 대통령더러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에
관한 合同決議 가결을 의회에 요청할 의사가 있는가고 질문했다. 참 좋은 질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만 이틀에 걸쳐 회의를 했건만 누구 하나 그것을 염두에 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머리는 의회는 배려 밖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도 유의하지 않았던 돌출 사안이다.
트루먼은 잘 점토하겠다고 스미스의원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날 늦게 트루먼 대통령은 이 안건을 애치슨 국무와 해리먼 특별고문에게 검토하도록 맡겼다.
국제적 난제 발생시 전 세계를 누비며 해결사 역할을 맡아온 순회대사 애버럴 해리먼은 북한의 남침 즉시
대통령의 특별고문에 취임해 있었다.
애치슨과는 달리 대부호가인 해리먼은 미국정치에 늘 민감했다.
그는 트루먼에 의회결의를 요청하도록 강력히 조언했다.
아치슨은 시간이 없다고 이에 반대했다
의회 신봉자 트루먼은 전쟁과 평화문제를 다른 대통령이 그의 머리 넘어로 주무른다면 틀림없이 격노했겠으나
애치슨의 의견쪽으로 기울었다.
트루먼은 참전준비를 지연시키고싶지 않았고, 장개석 문제로 늘 의회와 부대껴왔기 때문에 상원의 정적들과의
협상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어떤 결의안을 얻어내는데는 참 좋은 時流였으나 그 순간은 자꾸만 지나가 버리고 의회 전원일치는 무산될
분위기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둘러싼 정치 操舵가 쉬울리야 없지만 지지층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프랑크 베이스 육군장관은 대통령이 그래도 의회의 결의를 얻어야한다고 조언했다.
트루먼은 "프랑크 장관 , 그건 필요없어. 의회는 내편이야"라고 대답했다.
"네, 대통령 각하. 하지만 언제까지 각하편이라고 확신할 수없습니다"고 베이스는 응수했다.
잠시동안 회중은 吳越同舟 기분이었다.
대통령이 한국에 무기를 보낼 결정을 내렸다는 보고가 하원에 전해지자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크리쳔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조셉 허슈 기자는 와싱턴의 민완기자였다.
그는 "나는 이처럼 안도와 단결심이 와싱턴에 팽배한 분위기를 느낀 적은 예전에 없었다"고 썼다.
그 주에는 지상군 투입이 가까왔다는 것을 대통령 측근들은 이해했다.
군복 사복 가릴 것없이 바라던 일이었다.
地上軍 투입 가부문제는 와싱텅 정가에 날이 갈수록 점점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미국의 해공군력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없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증거이다.
맥아더는 한국에 가서 전선유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해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30일 이른 아침에는 도쿄로부터 회신이 올참이었으나 정세는 생각하고싶지 않은 바일것임은 불문가지였다.
와싱턴 시각 오전1시 30분경, 존 무쵸 대사는 애치슨 국무에게 맥아더가 병력증강을 요청할 채비임을 알려왔다.
한반도 사태는 절망적이라고 무쵸는 보고했다.
그 1시간 반 뒤, 한국방문에서 도쿄사령부에 돌아온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미국은 주한병력의 발본적 증강이
필요하다고 타전했다.
다음은 맥아더의 결정적 말들이다.
[현 전선유지의 보증 및 실지회복 능력은 미국 지상병력의 한국전투지역에의 투입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지상군의 효과적 투입 없이 해공군을 이용한다 하드라도 결정력이 미흡하다.]
맥아더 말은 이어진다.
[이미 교전지대에 1개연대를 보내 참전시킬 전투부대를 당장 투입하고 나중에 반격을 실시할 때 주일 미군으로
부터 최대 2개 사단을 가급적 빨리 수배하고싶다. 우리가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의 임무는 인명
자산 명예의 모든 면에서 잘해서 무용의 희생을 수반하고 최악의 경우 실패할 공산이 있다.]
와싱턴에서는 국무성 극동담당차관보 딘 러스크, 육군참모총자 조 콜린스가 새벽 3시부터 4시까지 수신되는
위 맥아더의 전신에 대응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둘은 상사 결재없이 회답을 주지못했다. 시간은 흘러 도쿄의 맥아더는 속이 탔다.
"빌어먹을 것같으니, 내가 참모총장일 때는 후버 태통령을 화장실에서 끌어내 할 말 다했다.
전쟁과 평화문제 아닌가. 그런데 어떤가. 꾸물대는 자는 육참총장뿐만 아니라 육군장관도 국방장관도다."
와싱턴 시각 오전 4시 30분 경, 맥아더는 콜린스에게 지상부대 요청을 밀어붙였다.
콜린스(육참총장)는 베에스(육군장관)에 베이스는 트루먼 대통령에 연쇄전화를 했다.
육군장관의 전화를 받은 트루먼은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벌써 며도를 마친 참이었다.
1950년 6월 30일 오전 5시 전(한국시각 7월 1일, 서울함락 4일 째),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지상군의 한국파견을 승인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미 극동군 맥아더 사령관은 와싱턴이 자기에게 맡겨만주면 북한의 침략군을 단칼에 처치하겠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2개사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맥아더도 적을 과소평가하고 미군을 포함한 휘하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잘못을 한참 뒤에 깨닫게된다.
어두운 가운데 그나마 한 줄기 빛은 미군이 유엔 기치 하에 싸우게 된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한국문제를 둘러싼 유에의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어리석게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안보리에 잔류하는 데 대한 항의였다.
소련의 거부권이 사라짐으로써 미국 측은 6월 27일 화요일 이미 희망대로 유엔 결의안을 손에
쥐었고 최종적으로 미군 주도 하의 군대에 유엔기가 주어지면서 그 깃발 아래 국제연합군은
침략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상 4회 연재를 통해 미 육군의 한국전 참전결정 과정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자료는 한국전에는 아직 조군하지 않았으나 뉴욕 타임즈의 민완 기자로도 필명을 날린 작가 故 David Halberstam
의 최후작 The Coldest Winter-American and Korean War-에 근거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서 다리우스왕처럼 군림하는 맥아더가 늘 마음에 거리면서도 그의 화려한 軍歷이 발하는
그의 독특한 권위를 봐주었다. 그러나 군통수권자로서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해온 맥아더의 전략적
오판에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노병은 죽지않고 살아질뿐이다'는 군가의 한 대목을 외우며 떠난
맥아더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의 은인임을 6.25발발 60주년을 맞아 더욱 가슴에 새겨야할 줄압니다.
장문을 읽어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2010. 4. 7. 華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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