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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게재] 조지 테닛 美 CIA 국장의 9·11 手記 - 폭풍의 한복판에서

  • No : 59838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08-09-12 10:59:13
  • 조회수 : 41592
  • 추천수 : 1

독점게재/美 CIA 국장의 9.11 手記
폭풍의 한 복판에서
趙甲濟   
 [독점 게재] 조지 테닛 美 CIA 국장의 9·11 手記 - 폭풍의 한복판에서
 
 
 
 
 비극의 9월 11일, 그리고 아프간에서의 ‘CIA 전쟁’
 
 
 
 <注: 9·11테러 7주년을 맞아 당시 美 CIA(중앙정보부) 부장 조지 테닛의 회고록 <폭풍의 한복판에서> 중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조지 테닛은 1997년 CIA 국장에 임명돼 이후 7년간 재직하면서 9·11 테러사건을 처리했다.
 
 이 수기에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9·11부터 아프간 전쟁의 개시에 이르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의 번역권은 조갑제닷컴이 갖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테러공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여 있다.
 
 
  9월 11일 아침. 이 하루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나는 오전 8시30분 워싱턴市(시)의 16번가와 K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상원의원을 지낸 데이비드 보렌을 만나 아침을 먹고 있었다. 대통령은 워싱턴을 떠나 플로리다를 여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매일 있던 대통령 브리핑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1987년 당시 무명이었던 나를 뽑아 그가 의장으로 있던 상원 정보위원회의 수석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날 아침에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우리가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날 내 경호팀을 지휘하고 있던 팀 워드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걸어왔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중단시켰을 때의 태도가 너무 긴박했던 만큼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테이블에서 걸어 나오자 그는 비행기 한 대가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사우스타워에 충돌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첫 충돌을 비극적인 사고로 생각했을 것이다. 두 번째 비행기가 노스타워에 충돌한 후에야 사람들은 무언가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실종 비행기 한 대 더 있다”
 
 〈폭풍의 한복판에서〉표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 가능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즉시 그것이 알카에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보렌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에게 빈 라덴을 언급하면서 무사위와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즉각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팀 워드와 함께 차로 돌아가서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본부로 달려갔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하나의 패턴을 만들기 시작했다. 재빨리 연결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즉각 태평양 상공에서 12대의 미국 여객기를 폭파시키려던 ‘보진카’ 음모와, 1994년 소형항공기로 CIA 본부에 돌진하려다가 적발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안전했던 우리의 미국은 뒤집혔다. 테러에 대한 전쟁은 우리 해안에 닥쳤다.
 
  본부로 가는 도중 나는 수석보좌관 존 모스먼을 전화로 불러 고위 간부들을 對(대)테러센터의 핵심 직원들과 함께 내 사무실 옆 회의실로 집합시키라고 말했다. 대참사가 벌어지자 보안전화로 전화하기도 힘들었다.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CIA 본부까지 가는 동안 사실상 통신두절 상태에 있었는데, 내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12분이었다. 나는 조지워싱턴 파크웨이를 시속 120km 정도로 달려 본부에 도착한 다음에야 두 번째 비행기가 노스타워에 충돌한 것을 알았다.
 
  오전 9시40분, 존 맥라플린과 코퍼 블랙이 백악관에서 온 딕 클라크와 함께 保安(보안)비디오 회의에 참석했다. 그 무렵 펜타곤이 공격을 받았고, 우리는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비행기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펜타곤에 대한 공격이 있자 전화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보가 아니라 워싱턴에 나돌고 있는 소문을 전하면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 친구와 동료들의 전화였다. 백악관 웨스트윙에서 폭탄이 폭발했다든지, 의사당과 국무부가 불타고 있다든지 하는 소문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지상관제소의 통신에 반응하지 않는 항공기가 몇 대 있고, 그것이 워싱턴을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CTC(대테러센터) 근무자 몇 사람은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CIA 본부 건물에 항공기를 돌진시키는 계획을 토의한 일이 있었다고 알려 주었다.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2001년 9월 11일 폭탄테러로 붕괴된 미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에서 구조요원들이 건물 더미에 깔려 부상한 한 남자를 구조하고 있다. 사건 발생 직후 CIA는 이 테러가 알카에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 수천 명의 우리 직원들 대부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나갔다. 이들은 곧 워싱턴의 길을 메운 엄청난 교통체증을 겪어야 했다. 백악관도 펜타곤이 공격을 받은 직후인 15분 전에 대피했다. 뉴욕市(시)에서는 UN본부 건물에서 근무하던 1만20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오전 10시13분부터 대피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D.C에서는 국무부와 법무부 그리고 세계은행이 몇 분 후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에 우리 고위 간부팀은 내가 있던 7층 회의실에서 좀 더 안전한 1층으로 옮겨 갔지만, 비행기가 돌입할 경우에는 너무 취약했다. 우리는 본부 건물의 남동쪽 출구를 통해 빠져 나가 구내를 가로 질러 임시로 운영시설을 해놓은 인쇄공장으로 갔다.
 
  한 그룹은 본부 건물에 남아 있었다. 코퍼 블랙은 그의 CTC에서 일하는 200명 가량의 직원들이 대부분의 CTC 시설이 모여 있는 본부 건물 아래층에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대피명령을 내리자 그는 내게 말했다.
 
  “대피명령에서 CTC는 제외했으면 합니다. 우리 직원들이 컴퓨터를 조작해야 합니다.”
 
  나는 좋다고 하면서 글로벌대응센터는 위험하다고 대답했다.
 
  “직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위기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대응센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알겠네. 하지만 죽을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겁니다.”
 
  코퍼의 회상에 의하면 내가 한순간 숨을 돌리더니 말했다는 것이다.
 
  “자네 말이 맞네.”
 
  이제 우리는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방대한 데이터뱅크와 정교한 통신시설을 갖춘 대테러센터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대피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는 중에도 CTC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우리 스테이션들에게 경보를 발신하면서 연락 정보기관이나 공작원들과 접촉해서 입수 가능한 모든 첩보를 빠짐없이 수집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들의 확고한 용기와 헌신에 감탄했다. CIA 본부 건물은 사실상 유리집이었다. 만약 항공기가 본부를 목표로 했더라면 글로벌대응센터에 있던 직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인쇄공장 안의 상황은 상당히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전화기를 붙잡고 백악관의 CIA 파견 브리핑담당관 마이크 모렐과 통화하려고 했다. 첫 번째 항공기가 공격했을 때 그는 조지 부시와 함께 플로리다에 있었다.
 
 
  승객 명단서 알카에다 요원 확인
 
  나중에 대통령 전용기에서 대통령은 마이크에게, 언론에서 그 공격을 주도한 것으로 보도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 그룹인 PFLP(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마이크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PFLP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알겠다고 하면서 만약 이 공격에 대해서 무엇이든 명확한 정보가 있으면 자기에게 먼저 알려 달라고 말했다. 강인하면서 젊은 모습에 명랑한 성격을 가진 마이크는 기관총 같은 속도로 이 사건의 핵심을 신속하게 설명했다. 그와 조지 부시는 금방 죽이 맞았다. 마이크는 위기 속에서 우리가 최고사령관 옆에 두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공격에 배후가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에 CTC는 무기로 돌변한 여객기의 승객명단을 요청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관료조직의 일부에서 나온 첫 반응은 프라이버시 문제 때문에 명단을 CIA에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기구의 이름은 잊어버린 것으로 하겠다. 공손하게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욕설까지 퍼부어 결국 명단은 입수되었고, CTC(대테러센터)의 한 분석관이 인쇄공장으로 달려갔다.
 
  “그 비행기를 타고 있던 몇 사람이 지난 몇 주일 동안 우리가 찾고 있는 녀석들입니다.”
 
  그는 특히 두 사람의 이름, 칼리드 알미다르와 나와프 알하즈미를 지적했다. 그것은 내가 공격에 대한 보고를 받은 순간 사실상 확신하고 있던, 배후자에 대한 최초의 확고한 증거였다. 우리는 알카에다의 음모 한복판에 있었다.
 
 
  아내의 친구도 승객 명단에
 
  같은 시간에 부통령이 전화를 걸어 추가 공격의 가능성을 물었다. 그 무렵 네 번째 여객기인 유나이티드항공 93편이 펜실베이니아의 생크스빌에 추락했다. 그 뒤론 더 이상의 활동은 없어 나는 더 공격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오늘은 공격이 끝난 것으로 판단한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내게는 아무런 자료가 없었다. 그러나 동부 아프리카의 대사관이나 다른 곳에 대한 공격의 사례에서 경험했듯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스펙터클한 多發(다발)공격을 하는 것은 알카에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사건은 엄격한 스케줄에 따라 발생한 후 종료된다.
 
  내 아들 존 마이클은 당시 의사당에서 멀지 않은 곤자가 고등학교에서 9학년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 CIA 경호팀이 그를 학교에서 찾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날 내 아내 스테파니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을 겪었다. 아내는 정오경 톰 하이덴버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와 그의 아내 미셸은 우리와 오랜 친구였다. 우리의 아이들은 함께 초등학교에 다녔고, 곤자가 고등학교에서는 동급생이었다. 미셸은 아메리칸항공사의 스튜어디스였다. 톰은 그녀가 그날 아침 펜타곤에 돌진한 77편에 탈 예정이었다고 생각했다. 톰은 자신이 US항공의 조종사이지만, 자기 회사나 아메리칸항공으로부터 미셸이 그 비행기를 타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나와 통화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방금 우리가 입수한 승객명단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름은 알파벳 순서로 나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승객들의 명단이 있었고, 그 밑에는 승무원들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미셸 하이덴버거란 이름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스테파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톰 하이덴버거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서 직접 톰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미셸은 57세였고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 명단에서 금방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내 고등학교 동창인 봅 스파이스맨도 77편의 승객이었다. 나는 간부들과 함께 그날 오후 1시 인쇄공장을 떠나 본부 건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는 대부분 회의를 하면서 보냈다. 기록을 보면 오후 3시30분 보안회선을 통해 대통령과 원격회의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네브래스카의 오퍼트 공군기지에 착륙한 다음 지그재그로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통령은 미국전략사령부의 지하 본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백악관 벙커
 
  나는 그가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몇 시간 전 부통령에게 했던 대답과 똑같은 말을 했다. 알카에다라고. 모든 작전이 빈 라덴의 모습과 냄새, 맛을 상기시켰고 승객명단이 우리의 의심을 확인해 주었다. 내가 대통령에게 특히 알미다르와 알하즈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그는 “나는 내가 최초로 보고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하는 표정으로 CIA 파견관 마이크 모렐을 바라보았다. 마이크는 화가 나서 일을 시작한 지 이틀밖에 안 된 내 행정보좌관인 테드 지스타로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그 대화를 위해 준비한 요점메모를 보자고 했다. 테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발표금지로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마이크는 반문했다.
 
  “미국 대통령에게도 발표금지란 말인가요?”
 
  원격회의가 끝날 때까지 대통령은 이 사태에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제심을 잃지 않았다. 이날 저녁 그와 대면한 회의는 내 첫 인상을 확인해 주었다.
 
  저녁 9시가 조금 지나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무장한 요새였다. 나는 브리핑 문서를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어떤 추가적인 방어 시설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내 차가 정지하자 경호원이 나를 안내하여 길고 복잡한 통로를 통해 벙커로 갔다. 나는 그곳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앞으로 다시 방문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그곳에 있었는데, 딕 클라크,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럼즈펠드, 합동참모회의 의장 휴 셸턴 장군 그리고 린 체니와 로라 부시 등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백악관의 벙커는 기본적으로 간소하고 견고하게 만든 상황실이었다. 그러나 그 방에는 분명히 전쟁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 생애에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거친 감정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데 대한 분노, 그것이 지닌 충격, 죽은 사람들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시급히 대응해야 한다는 강한 절박감,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지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그날 알카에다의 작전은 끝났고 또 우리는 그렇게 믿었지만, 많은 정보자료는 그것이 며칠에 걸쳐 계속될 공격의 시작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 첫날부터 공포는 부풀려지고 있었다. 며칠 안에 테러리스트들이 대량파괴무기를 어떤 방법으로 미국에 몰래 들여와 폭발시킨다는 소문이 퍼질 수 있었다.
 
  그날 저녁 8시30분,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최초로 국민들에게 감동적이고 진지한 어조로, 후에 부시 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된 선언을 했다. 그는 전 세계의 청중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우리 모든 정보기관과 법집행기관에 이 사건을 일으킨 자를 찾아 법정에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이 행위를 한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상적인 부시의 단호함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 중인 조지 테닛. 그는 부시 대통령이 전대미문의 테러공격을 당하고도 단호하고 흔들림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고 회고했다(백악관 공식 제공 사진).
 
  CIA에 있던 우리에게 그 독트린은 마침내 제약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이미 알카에다와 그들의 보호자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추격할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날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가 임무에 필요한 권한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통령은 연설에 이어 같은 벙커 안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 전원회의에 참석했다. 갑자기 戰時(전시) 각료회의를 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모호한 말로 얼버무릴 시기는 끝났다고 명확히 통보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앞서 나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파키스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장 가깝고, 가장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탈레반과 대화를 할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빈 라덴과 그의 그림자 군대를 추격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숨어 있는 커튼을 없애 버려야 했다. 대통령은 그 나라들에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안에 공격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찾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날 회의에서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태도였다. 그는 책임감을 가지고 단호했으며 옳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긴급성을 강조하고, 말과 사례를 통해 우리의 대응책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9·11이 부시 대통령에게 획기적인 순간이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그를 아무도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국의 친구들
 
  9·11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스테파니와 나는 시간을 내어 톰 헤이덴버거가 아내 미셸이 죽은 뒤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그것을 믿기 힘들어 했다. 톰은 직접 아내가 죽은 곳에 가보고 싶어했지만, 민간인이 펜타곤 근처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물 안에서 사망자의 유해를 회수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내 차를 타고 경호팀이 운전하여 펜타곤으로 향했다. 무수히 설치된 검문소마다 배지를 내어 흔들며 통과해 펜타곤 옆에 찌그러진 잔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까지 갔다. 톰은 자기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에 놓을 화환을 가지고 왔다. 톰과 함께 그곳에 서서 수천 명의 미국인 가족들이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으로 느끼는 가장 슬픈 일이었다.
 
  미국행 비행에 많은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 12일 영국의 MI6(정보기관) 책임자인 리처드 디어러브 경, MI5(방첩기관)의 부책임자 엘리자 해닝험 불러, 그리고 블레어 총리의 외교정책 고문 데이비드 매닝이 왔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어떻게 미국행 비행허가를 얻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개인비행기를 타고 단지 위로를 전달하고 단결을 보여 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날 밤 CIA 본부에서 만찬이 열렸다. 두 나라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한 행사였는데 내가 CIA 국장으로 근무한 7년 동안 경험한 일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지지를 다짐하는 신호가 쏟아져 들어왔다. 요르단의 압둘라 왕과 라니와 왕비는 위로의 전화를 했다. 알제리의 정보국장 모하메드 메디에네는 알카에다 공격이 있을 당시 워싱턴에 있었다. 그는 테러리즘의 고통과 도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역시 우리의 고통에 대해 정중하고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9월 12일, 대통령은 NSC(국가안보회의) 회의를 주재하고 그 전날 저녁 텔레비전을 통해 말했던 것을 더 강력한 어조로 강조했다. 그는 전날 공격의 배후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세계에 걸쳐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을 색출하기를 원했다.
 
  다음날 나는 백악관 상황실에서 대통령과 전쟁 각료들에게 처음으로 우리의 전쟁계획을 설명했다.
 
  “우리는 단시일 안에 공격적인 비밀작전으로 알카에다와 그의 탈레반 보호자들에게로 옮겨 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에 CIA 準(준)군사팀을 배치해서 대부분 북부동맹군으로 구성된 대항세력과 협력하고, 미군의 특수군을 투입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나는 각료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9월 9일 아메드 마수드가 암살되어 북부동맹군은 강력하며 널리 존경을 받았던 중심인물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 편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이미 그 나라 안에 광범위한 정보망이 있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을 도약대로
 
  코퍼 블랙이 내 뒤를 이어 파워포인트를 사용한 브리핑으로 우리의 비밀작전 능력과 배치계획 같은 것을 설명했다. 코퍼는 나와 마찬가지로 알카에다뿐만 아니라 탈레반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그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우리는 그 둘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전력을 다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에 대해 단순한 수색섬멸 작전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것이다. 주로 적을 체포하기보다는 폭파해 버리는 전쟁이었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 쪽에 희생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통령은 물었다.
 
  “CIA팀을 얼마나 빨리 투입할 수 있나요?”
 
  “곧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빨리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패배시킬 수 있습니까?”
 
  “몇 주일이면 됩니다.”
 
  코퍼가 대답했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랬다. 대통령은 국방부가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공격할 수 있는 비상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실망했다. 조지 부시는 그 무렵 시속 100마일로 달려가면서 全力(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대통령의 관심권을 벗어났다.
 
  코퍼와 내가 모두 원했던 것은 단순히 무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주체가 되는 전쟁이었다. 이 도전은 적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도전은 적을 찾는 것이었다. 일단 적을 발견하면 패배시키는 일은 간단하다.
 
  9월 14일 금요일, 우리는 계획을 다시 검토해서 아프가니스탄을 국제적인 테러리즘과 싸우기 위한 종합적인 전략의 첫 장으로 규정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그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했다. 그날 저녁 NSC는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하기 전에 검토할 대량의 문서를 우리에게 보냈다. 정부의 모든 정보기관과 군사부문에서 한 마디씩 한 것을 모은 자료 같았다. 나는 그 문서를 훑어보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수백 그루의 나무를 죽여 버리자는 계획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문서는 내가 말하려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당시 나는 우리의 접근방식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기관에서 내놓기 시작한 불완전한 방책과 전략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9월 15일 토요일, 나는 존 맥라플린과 코퍼 블랙을 대동하고 캠프 데이비드로 가서 전쟁각료들에게 브리핑을 했다. 대통령은 간소한 캠프 데이비드 회의실에 있는 커다란 사각 테이블의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부통령과 콜린 파월은 그의 양쪽에 앉아 있었다. 다른 출석자 중에는 럼즈펠드와 폴 월포위츠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콘돌리자 라이스, 스티브 해들리, 리치 아미티지, 검찰총장 존 애시크로프트와 새 FBI 국장 로버트 뮐러도 앉아 있었다.
 
  브리핑의 제목은 ‘국제 테러리즘의 분쇄’였다. 첫 페이지의 제목은 “‘첫 갈고리’ 알카에다를 분쇄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폐쇄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코퍼 블랙과 나는 이 계획의 특이한 내용을 설명했다.
 
 
  우리는 준비돼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오벌오피스)에서 주기적인 데일리 브리핑 모습을 위에서 찍은 사진. 시계방향으로 왼쪽아래부터: 조지부시 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고문, 앤드루 카드 백악관 참모총장, 필자, CIA 발표자, 그리고 딕 체니 부통령.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안에 있는 그들의 안전한 피난처를 파괴하고, 국경을 봉쇄하며, 그 지도부를 추적하고, 그들의 자금줄을 끊고, 전 세계 91개국에 걸쳐 있는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를 추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모든 활동을 즉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계획 덕택으로 잘 준비되어 있었다. 적절한 권한과 정책 및 결단 그리고 훌륭한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도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되어 있었고, 대통령은 모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정책수립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위험한 제안일 수 있었다. 우리는 CIA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많은 권한을 요청해서 그것을 획득했다. 세상일은 틀어질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직원들이 우리의 새로운 권한을 감시하는 의회 위원회에 출석하여 변명을 하느라고 우리 생애 최악의 나날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날 캠프 데이비드와 그 이후에 우리가 요청한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목표에 대해 아무도 우리만큼 알고 있지 못했다. 우리처럼 몇 년 동안 그곳에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없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에 걸쳐 테러리즘과 싸울 수 있는 통합된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 계획에 국한시켜 볼 때 작전상의 위험은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인명손실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코퍼는 그 점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옳은 길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이었다.
 
 
  “우리 편이 아니면 敵으로 간주”
 
 2002년 1월 16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왼쪽)에게 중요사항을 전달 중인 조지 테닛. 아프간 전쟁 과정에서 CIA와 국방부는 수 차례 마찰을 빚었다. 아프간 전쟁은 전적으로 ‘CIA의 전쟁’ 이었다.
 
  9월 16일, 나는 ‘우리는 전쟁 중이다’란 제목의 메모를 우리 본부와 전체 정보기관의 고위간부들에게 보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성공을 가로막는 관료적 장애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규칙이 달라졌다. 첩보와 아이디어 그리고 능력은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공유해야 한다. 문제를 고치기 위해 회의를 열 시간은 없다. 신속하고도 지혜롭게 고쳐야 한다. 각자는 전례가 없었던 수준의 개인적 책임을 맡아야 한다.>
 
  9월 20일, 대통령은 양원합동회의에서 행한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테러리즘에 대한 우리의 전쟁은 알카에다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든 테러리스트 집단을 찾아내서 저지하고 패배시킬 때까지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전쟁체제가 되었으므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힘들었던 일들이 갑자기 쉬워진 것처럼 보였다. 파키스탄 문제가 하나의 그 예다. 9월 13일, 국무부의 리치 아미티지는 파키스탄 대사 말레하 로디와, 아직 워싱턴에 남아 있던 파키스탄 정보국장 마무드 아메드를 국무부로 초청해서 폭탄선언을 했다. 조지 부시는 국민에 대한 9·11 연설에서,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나라를 구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파키스탄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敵(적)일 수밖에 없다. 아미티지는 파키스탄이 국경에서 알카에다 공작원을 적극적으로 막기 시작해야 하며, 미국에 군사 및 정보작전에 필요한 총괄적인 영공비행과 착륙 권리를 허용하고, 미국과 동맹국 정보공작원들이 영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탈레반에 대한 모든 연료 출하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마무드는 리치의 사무실을 떠날 때 마치 황소 떼에 짓밟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리치가 (나중에 마무드 장군이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보도된 것처럼) “파키스탄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나는 마무드를 만나서 착한 순경, 좀 점잖은 순경 노릇을 했다. 최소한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만나서 계속해서 알카에다와 빈 라덴을 보호하겠다고 고집하면 무서운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분명히 전해 달라는 부탁 정도는 했을 것이다.
 
  대통령 역시 그 공격이 있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일을 했다. 그는 9월 13일 아침 브리핑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와 빈 라덴에 대한 싸움에 관한 국가별 검토 자료를 요청했다. 그들의 정보기관이 지난해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더 요청할 것인가? 대통령이나 다른 고위 정부관리가 전화를 하는 것이 유용할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파키스탄이 그 목록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 모든 요소는 마무드가 우리의 입장으로 기우는 데 한 가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 공격이 있었을 때 그가 워싱턴에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펜타곤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그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았고, 그 공격에 대한 미국인들의 뼛속까지 사무친 감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마치 다친 짐승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계속해서 우리를 견제하던 일을 중지했던 것은 아니다. 마무드는 그 공격이 있은 다음에도 탈레반을 구하려고 했다.
 
 
  탈레반 본부로 들어간 CIA 요원
 
  빈 라덴은 인도되지 않았다. 이제 미국의 전 군사력이 탈레반의 머리를 향해 돌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경 너머 파키스탄에서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우리가 보내고 있던 메시지를 받았다. 그 공격이 있은 후 마무드가 즉시 파키스탄으로 보낸 메시지였을 것이다. 아미티지가 최후통첩을 보낸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일부 격렬한 내부적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샤라프는 동의했다. 파키스탄은 정책을 180도 바꾸어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에서 우리의 가장 귀중한 동맹국이 되었다. 10월 8일 무샤라프는 알카에다를 뿌리 뽑으려는 미국을 돕기로 결심하고 최종적 수단으로 그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마무드 아메드를 ISI(파키스탄 정보부) 국장의 자리에서 해임했다. 무샤라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적 현실 속에서는 그의 정보책임자가 지나치게 적과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항상 무샤라프의 정책전환이 아프가니스탄 聖域(성역) 그 자체의 와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전략적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9·11 직후 우리는 자체의 정보수집 절차를 간소화했다. 평시에는 정보원과 그를 지휘하는 공작원은 가끔 만나서 첩보를 교환하며,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휘계통을 통해 직접 본부에 있는 분석관의 컴퓨터에 입력하거나, 공작원이 소속된 원격지휘 계통을 통해서 보고한다. 모든 관료적 모델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결점이 있다. 주로 시간에 관한 문제인데, 가장 빠른 채널을 이용한다고 해도 늦어져서 신선한 소식이 맥빠진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모든 관련자들에게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장점이 있다.
 
  9·11사건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다면, 우리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고 정상적인 안전수칙을 지키면서 우리를 파괴하려는 자들이 안전한 피난처에서 편히 지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선으로부터 실시간의 보고가 필요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과서를 던져 버려야 했다.
 
  우리는 탈레반과 접촉하기 위해 자체의 통로를 만들었다. 마무드가 물라 오마르와 회담을 준비하는 동안 이 지역의 고위 CIA 요원인 봅 그레니어는 탈레반의 칸다하르 부대의 사령관이며 물라 오마르 다음으로 강력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물라 오스마니를 만나기 위해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산 속에 있는 한 호텔로 여행을 했다. 물라 오스마니와 그의 소규모 수행원은 칸다하르에서 육로로 도착했다.
 
  5성급 호텔의 화려한 사치품이 널려 있고, 물라 오스마니의 수행원이 회의 내용을 오마르에게 보고하기 위해 열심히 기록하는 가운데, 그레니어는 먼저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설명했다. 알카에다는 미국에 한 행위에 대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탈레반이 그것을 방해하면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몇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다. 탈레반은 빈 라덴을 미국에 인도하여 법정에 세운다. 만약 그것이 손님을 잘 접대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에 배치된다면, 스스로 사법절차를 밟아서 그를 제거하면 된다. 체면을 잃고 싶지 않으면 비켜서서 미국인들이 빈 라덴를 찾아내서 데려가도록 하면 된다.
 
 
  현장의 냄새
 
  1997년 조지 테닛은 CIA 국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CIA 국장 임명 직전 부인(스테파니), 아들(존 마이클)이 보는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모습. 맨 왼쪽은 美 연방수사국(FBI) 루이스 프리 국장.
 
  그날 밤 봅은 그가 ‘냉혹한 살인자’라고 이름 붙인 오스마니가 묵고 있는 방에서부터 홀 하나 건너에 있는 호텔방에서 불안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스파이 소설의 한 장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나는 그 보고서를 백악관으로 가지고 갔다. 부시 대통령은 열심히 그것을 읽었다.
 
  예상했던 대로 오마르는 우리 제안을 일축했다. 10월 2일 발루치스탄의 한 빌라에서 오스마니와 만난 그레니어는 대안을 제시했다. 오마르를 실각시키자는 것이었다. 오스마니는 그의 부대로 칸다하르를 장악하고 그곳의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여, ‘알카에다의 아랍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친구가 아니며 이 나라에 해를 끼칠 뿐이므로 빈 라덴을 즉시 체포하여 인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방송하는 것이다. 이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오스마니와 같은 살인자를 만나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레니어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9·11 이후 우리는 그런 노력을 배가했다. 나는 전쟁지역에서 돌아와 비행기에서 방금 내려 손톱에 때가 끼고 구겨진 옷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백악관이나 캠프 데이비드에 가곤 했다. 다른 어떤 정부기관도 완전히 수평조직으로 운영할 수는 없지만 CIA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던 우리는 조직을 가능한한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을 일선에 나가 있는 요원들에게 적용했고, 그들이 적과 접촉하는 곳에서 직접 전화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권위의 피라미드를 무너뜨린 후 우리는 실시간으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다. 테러리즘은 단순히 알카에다가 아니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전쟁을 해야 한다면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싸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전 세계에 걸친 위협에 직면하고 있고, 이미 위험한 수준으로 엷게 배치된 인력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말했다.
 
  “신속히, 강력하게 그리고 가볍게 들어가야 합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1980년대 소련군과 같은 방식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대규모 침공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희생자가 생기면 우리가 철수하고, 절대로 백병전을 벌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없었던 기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9월 17일 월요일, 우리의 건의를 승인하고 우리에게 알카에다와 싸울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주었다. CIA 대테러 책임자 코퍼 블랙은 나중에 의회에서 이날은 ‘결투 신청’의 날이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백악관 회의에서 대통령은 CIA가 가장 먼저 투입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로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당시 CIA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매일 대통령을 만났고, 그는 계속 계획을 추진하라고 했다. 나는 그 외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결투 신청의 날
 
 아프간의 反탈레반세력인 북부동맹군 지도부의 한사람인 모하메드 파힘 칸.
 
  속도가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팀을 북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해 그곳에 있는 여러 종류의 反(반)탈레반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마수드의 암살이 북부동맹군에게 미친 영향을 평가해야 했다. 우리의 아프가니스탄 전문가팀은 강력했지만 깊이는 부족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그것을 향상시켜야 했다. 우리는 이 임무를 지휘할 수 있는 적임자를 은퇴교육 중인 직원 가운데에서 발견했다. 이 지역에 정통한 게리 슈론은 유력한 아프가니스탄 군벌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그 지역의 언어인 다리語(어)와 파르시語(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게리는 9·11 이전에 계획했던 공직 은퇴를 철회하고, 공격이 있은 지 2주일 후 소규모 팀을 이끌고 북부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했다. 이 팀은 그 후 수년간 수행된 CIA 작전의 효시가 되었다.
 
  게리는 3성 장군에 상당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평균 연령이 45세이고 근무경력이 25년인 요원 8명을 데리고 선두에 서서 현지에 들어갔다. CIA를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게리는 협정을 체결하고, 요구를 하면서 가지고 간 수백만 달러를 조금씩 뿌렸다.
 
  게리 슈론이 이끄는 CIA 북부동맹 연락팀은 9·11사태 1년 전 이 지역에서 이동 시 사용하기 위해 구입했던 낡은 러시아제 헬리콥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NALT라고 명명된 이 팀은 해발고도가 6700~9000피트나 되는 산들로 둘러싸인 바라크의 마을에 기지를 설치했다. 바라크의 생활여건은 좋게 말해서 검소했다. NALT는 위생상태가 ‘12세기 중반 정도’라고 보고했지만,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사기가 높았으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그곳에 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그곳에 도착한 직후 MI-17 헬리콥터의 꼬리에 ‘091101’이란 식별번호를 붙였다.
 
  게리는 곧 마수드의 암살 이후 浮上(부상)한 북부동맹 지도자 중 하나인 파힘 칸과 접촉했고,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도 만나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반대편인지 알아보았다. 동시에 NALT 팀 멤버는 그 후에 시작될 軍(군)의 항공작전에서 목표를 선정할 때 필요한 정보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수백만 달러의 돈 더미 위에서 잠을 잔 CIA 대원
 
  부족지도자들과의 접촉은 직접 만나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전기나 위성전화를 통해 진행되기도 했다. 우리는 부족 지도자들에게 물었다.
 
  “알카에다와 그들의 보호자 탈레반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축출하는 일을 도와주겠습니까?”
 
  돕겠다고 대답하면 우리는 곧 식량, 의료보급품, 군사장비, 무기 같은 것을 공중에서 투하해 주었다. 2001년 10월 중순~12월 중순 사이에 미국 항공기들은 108회의 공중투하로 아프가니스탄 내 41개 지점에 169만 파운드의 물자를 제공했다. 이 모든 작전은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던 팀의 구체적인 요청과 필요에 맞추어 조정되었다. 한 우즈베크 부족 지도자는 가장 필요한 것이 말 사료라고 했다. 다른 부족은 안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기, 이동식 병원, 식량과 함께 보내주었다.
 
  한 직원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편을 바꿀 때 필요한 수백만 달러의 현금 더미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미국 편을 든 한 부족지도자는 자신의 부족이 원하던 것이 몇 시간 안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조직 내에서 그 군벌의 권위를 크게 강화해 주었다. 그러나 부족 지도자가 우리와 협조하기를 거부하면 그와 그의 부족은 우리의 적으로 간주되어 다른 종류의 공중투하 목표가 되었다. 우리 공군이 투하하는 2000파운드 폭탄이다.
 
  이밖에도 아프가니스탄 내 CIA 직원들은 여러 군벌들과 협조했고, 비밀리에 탈레반 간부들과 접촉해 빈 라덴을 인도하도록 공작했다. 한번은 한 CIA팀이 탈레반의 고위 정보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카불 외곽의 무인지역으로 갔다. CIA 본부에서는 그에게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이 탈레반 간부는 나타나지 않고 그의 부하를 보냈다. 이 회담에서 그들이 우리를 도울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이 CIA팀은 문자 그대로 대낮에 그를 양탄자에 싸서 트럭 뒤에 싣고 미국 장악 지역으로 돌아가 신문을 했다. 그 탈레반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기초로 감행된 미군기의 공습으로 알카에다와 탈레반 조직원 수십 명이 죽었다.
 
  9월 26일, 부시 대통령은 CIA 본부를 방문했다. 그는 본부건물 로비의, 근무 중 사망한 CIA 직원을 추모하는 벽 앞에서 연설을 하고 우리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민들이 “우리 국토의 안전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어디에 살고 있고, 어디에 숨어 있든지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100%의 노력, 중단 없는 풀타임 노력”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 시작 2개월 동안 원래의 NALT팀 이외에 6개의 CIA팀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첫 번째 팀과 마찬가지로 각 팀은 파르시·다리語(어),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아랍어를 할 줄 아는 노련한 요원을 포함하여 평균 8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직원들은 북부와 서부 아프가니스탄의 넓은 지역에 있는 부족 군벌과 협조하는 임무를 받았다.
 
  우리 전략의 열쇠는 아프가니스탄 동맹 세력들을 봉기시키는 방법이었다. CIA 요원들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그 지방 부대들이 싸우도록 만드는 방법은 각 부족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위신과 명예심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자면 신뢰와 신용에 기초를 둔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10월 17일, 미군 특수부대가 도착했다. 10월 말경 이들은 CIA 요원들이 제공하는 목표정보를 활용하여 용감하게 탈레반과 알카에다 부대에 접근하여 레이저로 목표를 지시하고 전투기가 정밀무기를 투하했다. 전쟁은 곧 활기를 띠게 되고 적을 압도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관료적인 긴장도 많이 있었다. 10월 초 내가 부통령, 국방장관 및 다른 사람들과 보안원격회의에 참가하고 있을 때 럼즈펠드가 아프가니스탄 내 지상작전의 책임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CIA와 국방부는 서로 다른 권한 아래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국방장관의, 지휘체계와 명령계통을 명확히 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기회를 잡아야 하고 유연성이 있어야 했다. CIA와 특수부대 병사들은 작전을 하면서 잘 융합되었다. 그들은 누가 책임자인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전장에 투입된 팀에 대해서는 필요한 전술적 자율성이 필수적이었다.
 
 
  베트남戰의 악몽
 
  워싱턴에 있던 우리의 임무는 지원과 지침을 주는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장애물을 치워 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결국 CIA가 현지 미군사령관 토미 프랭크스의 노력을 지원하고 그의 지휘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부족에 관한 CIA의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나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럼즈펠드가 계속 이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자 부통령이 개입해서 말했다.
 
  “돈, 그냥 CIA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그는 그때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으로 이 문제를 끝내지는 않았다. 몇 주일 후 프랭크스가 CIA 본부를 방문했다. 그는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당신 요원을 내게 배속시켰으면 합니다.”
 
  그것은 ‘당신 부하를 내가 지휘하겠다’는 군대식 표현이었다.
 
  나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북부동맹군이 아직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지 않은데다 북부지방에 대한 폭격이 탈레반 전선에 아직 타격을 주지 못하자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의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지 비관론이 일기 시작했다. 10월 25일, 럼즈펠드는 국방정보국이 그를 위해 작성한 문서를 배포했다. 그는 상황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 사본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읽어본 다음 내 뒤에 앉아 있던 행크 크럼턴을 돌아보았다. DIA(국방부정보국)의 주요 논점 중에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북부동맹군이 북부 아프가니스탄, 특히 전략적 도시 마자리샤리프에 있는 탈레반의 저항을 극복할 능력이 없다”고 굵은 글씨로 주장한 것이 있었다.
 
  이 문서는 또 “북부동맹군은 겨울이 오기 전에 카불을 점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포위해서 고립시킬 수 있는 충분한 병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단언했다. DIA는 남부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파시툰 족에게는 탈레반에 대항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이 문서는 요약에서 “광범위한 이반이 없다면 북부동맹군은 겨울이 오기 전에 중요한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관론은 공식 정보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10월 31일, 뉴욕타임스 특파원 R. W. 조니 애플은 이렇게 썼다.
 
  “불행했던 과거에서 온 불청객 망령처럼 국내외에서 정부관리와 외교정책 전문가들 사이에 ‘진창’이란 불길한 단어가 대화 속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또 하나의 베트남이 될 것인가?”
 
 
  함락
 
  국방부와 조니 애플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우리는 목표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국가안보팀에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고 있다고 확신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을 4개의 주요 목표로 축소해 정리했다. 북방의 마자리샤리프를 점령하고, 남쪽으로 칸다하르(물라 오마르의 본부)를 향해 전진하며, 북부동맹 지배지역의 동쪽과 서쪽 지역을 통합하고, 궁극적으로는 카불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계획에 대해 대통령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11월 9일 금요일 아침, 국방부 관리들은 백악관에 마자리샤리프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브리핑했다. 그 브리핑에 함께 갔던 행크 크럼턴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단언했다.
 
  “마자리샤리프는 앞으로 24~48시간 안에 함락됩니다.”
 
  그러나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행크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행크의 판단은 옳았다. 마자리샤리프는 다음 날 함락되고, 탈레반 저항세력은 급속히 다른 곳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너무 늦다고 불평하던 워싱턴의 관심이 ‘너무 빠르다’로 옮겨갔다. 이들의 걱정은 북부동맹군이 남부 아프가니스탄의 미숙한 저항을 앞질러 나아가고, 그들이 너무 빨리 카불을 점령하면 부족 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영토경쟁이 일어나 대혼란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카르자이의 등장
 
 현대 중동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요르단의 왕, 후세인(오른쪽)과 필자.
 
  나는 콘돌리자 라이스와 다른 NSC 관계자들에게, 설사 그런 위험이 존재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탈레반에게 저항해 온 북부동맹에 멈추어 서서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나는 우리가 모든 주요 군벌에 팀을 파견하여 면밀하게 사태 진전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부동맹군이 11월 4일 카불에 진입했을 때 이들은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남부의 다른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은 많은 협조를 해주었다. 그중에서 중요 인물은, 타린 코우트 지방에 근거를 둔 포팔자이 부족의 지도자 하미드 카르자이였다. 비록 카르자이의 추종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충성심이 강했고, 다른 아프가니스탄 파벌들로부터 광범위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1999년 탈레반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10월 9일, 카르자이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파키스탄에서 35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4일 후 이들은 카르자이가 소속된 부족의 발원지인 오루즈간성의 먼지투성이 수도 타린 코우트를 점령했다. 탈레반 군은 칸다하르에서 남하해 카르자이의, 장비가 충분치 않은 부대에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카르자이는 압둘 하크와는 달리 우리가 제공한 위성전화를 사용하여 곤경에 빠진 상황을 설명하고 무기와 탄약을 다시 보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즉시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부에 있던 CIA 요원들은 북부 아프가니스탄 부대의 긴급한 물자보급 요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0월 30일 카르자이는 절박하게 요청했던 물자를 공중투하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린 코우트 주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1월 3일, 카르자이는 ‘그레그 V’라는 CIA 연락원을 불러 헬리콥터로 구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레그는 신속히 CIA 본부와 접촉해 카르자이가 남부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저항지도자라고 설득했다. 그레그는 카르자이의 생존이, 남부의 봉기가 활력을 잃지 않고 계속되도록 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레그는 11월 4~5일 밤 미국 특수부대와 함께 타린 코우트로 날아가서 카르자이와 그의 고위 부족지도자 7명을 파키스탄의 안전 지역으로 공수하는 허가를 받았다. 카르자이는 그의 철수가 잠정적인 것이고 며칠 안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겠다고 우리에게 확언했다. 그는 일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으므로 자기가 전술적인 후퇴를 한 소식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불행히도 당시 럼즈펠드는 우연히 파키스탄에 있었고, 비밀을 지켜 달라는 카르자이의 요청을 전하기도 전에 기자들에게 철수 이야기를 해버렸다.
 
 
  포로들의 역습
 
  남부의 상황은 하미드 카르자이를 중심으로 안정되었지만, 북부의 지역은 대부분 아직 유동적이고 혼란상태에 있었다. 콘두즈 마을이 11월 24일 함락된 후 북부동맹군은 수백 명의 포로를 마자리샤리프 외곽에 있는 칼라이장기라고 부르는 19세기 요새에 수용했다. 탈레반 포로 중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아랍인 50명을 비롯해서 카타르, 이라크,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서 온 많은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인, 중국인 그리고 소수의 아프리카인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탈레반 지지자가 아니라 알카에다의 핵심분자였다. 우리는 후에 포로 중에는 존 워커 린드라는 미국인도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폭발성이 있는 장소에 있는 폭발성이 짙은 혼합물이었고, 실제로 머지않아 폭발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을 상세하게 보고한 電文(전문)을 받았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1월 25일, 일요일 알파팀의 두 CIA 요원인 조니 마이클 스팬과 ‘데이브’라고 내가 부르는 또 한 사람이 그 요새로 파견되어 포로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명의 북부동맹군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요새의 광장에서 억류자들을 신문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수비병들은 수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억류자들의 무기소지 여부를 확인하는 신체수색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신문을 시작한 지 2시간 가량 지났을 때 데이브는 몇 차례 폭발음과 자동화기 발사음을 들었다. 그는 마이크 스팬이 몇 명의 포로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데이브는 그의 9밀리 피스톨을 꺼내 4발을 발사했다. 그중 한 발은 스팬의 AK-47소총을 탈취하려던 포로에게 맞았다. 데이브가 한 포로로부터 소총을 빼앗는 사이 최소한 세 명의 포로가 마이크를 덮쳤다.
 
  내가 우리 요원 한 사람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나는 즉시 본부로 가서 상황을 주시했다. 9·11 직후 코퍼 블랙은 CIA가 공격전략을 시행하면 30~40명의 요원이 희생될지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처럼 비교적 소수의 인력을 가진 조직에는 그것이 엄청난 수였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다행하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는데, 최초로 CIA 요원이 희생되었다는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CIA 본부에 있는 행크 크럼턴의 조그만 사무실로 가서 몇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기다리면서 현장으로부터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다.
 
  마이크 스팬이 탈출했다고 한 그 기자의 낙관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틀 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동맹군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새 안으로 진입하여 마이크가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반란 소식과 미국 관리의 사망 가능성에 대한 보도는 확인하기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충돌 보도는 곧 온 세계에 전파되었고, 국방부 대변인은 재빨리 언론에 미국 군인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이 발언에서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CIA 요원이 그 희생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이크 스팬은 32세의 해병대 출신으로 CIA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샤논 역시 CIA의 비밀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공격이 있었을 당시 아기와 함께 서부해안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고 있었다. 샤논은 차를 운전하다가 CIA 요원 한 명이 실종된 것 같다는 방송 뉴스를 들었다. 그녀는 즉시 차를 길 옆에 세우고 본부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그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직원 몇 명을 캘리포니아로 보내 그녀와 함께 있도록 하고, 다른 직원은 앨라배마로 보내 마이크의 부모를 돌보게 했다.
 
 
  희생
 
  우리는 마이크의 시체를 회수하고 그의 가족에게 통보한 다음 언론에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확인은 軍(군)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CIA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마이크가 CIA 직원이라는 사실이 이미 누설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의 헌신에 대해 긍지를 표시했다. 우리는 CIA 관련내용을 감출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문가들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전투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국인 사망자를 이용해 홍보활동을 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마이크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미국에 대한 추가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긴급정보를 받고 무샤라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비행기를 마이크의 시체가 운반된 독일로 돌렸다. 12월 2일 우리는 그와 함께 마지막 귀국길에 올랐다. 내 평생 그렇게 침울했던 여행은 없었다.
 
  마이크의 죽음은 아프가니스탄 전투의 첫 수개월 동안 CIA 요원들이 보여 준 많은 영웅적 활동 이야기 중 하나다. 비록 그들은 많은 지원이나 하부구조 없이 일하는 데 익숙해져 있긴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CIA 요원들은 기병들의 돌격에 참여했고, 말을 타고 가면서 공중공격을 요청했다. 한 CIA 의료요원은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도구인 대형 레더맨 포켓나이프를 사용하여 병사의 다리를 절단하는 긴급수술을 하기도 했다.
 
 2005년 8월 16일, 8명의 前 중앙정보부 (CIA) 국장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포터 고스, 존 듀치, 로버트 케이츠, 윌리엄 웹스터, 스텐스필드 터너, 제임스 울시, 제임스 슐레싱어, 조지 H.W. 부시. (CIA 공식 제공사진)
 
 
  카르자이 구출
 
  CIA의 전체 작전 중에서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아프가니스탄의 미래 지도자의 생명을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 초 하미드 카르자이는 그가 두려움을 모르는 戰士(전사)일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세력균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결과 CIA와 미국 특수부대는 단순히 그를 지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을 보장하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12월 5일, 카르자이는 자기 병력을 이끌고 탈레반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인 칸다하르를 공격하고 있었다. 미군 요원은 공격 지원을 위해 GPS 장치를 사용하여 공중공격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 병사가 자기 GPS의 배터리를 바꾸면서 이전에 입력했던 데이터가 지워지고 현재의 자기 위치가 입력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 결과 B-52에 그 병사 자신의 위치를 폭격하도록 요청한 셈이 되어버렸다. 이 실수로 미국인 3명과 아프가니스탄인 5명이 사망했다. 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레그 V’가 자기 몸을 던져 땅에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카르자이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날은 카르자이에게 중대한 날이 되었다. 같은 날 그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임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빈 라덴을 찾아서
 
 희생당한 CIA요원 마이크 스팬.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몇 주 동안 패주시킬 수 있었던 것은 110명의 CIA 요원과 316명의 특수군 요원, 그리고 20여 명의 합동특별작전사령부 특공대원이 적의 전선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CIA 계획에 따라 미 공군력의 지원을 받은 일단의 형제들이 이룩한 성과이며, CIA 역사에서 위대한 성공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 지도자를 성역에서 축출한 뒤에도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거나 살해하는 노력에 계속 집중했다. 우리는 그가 파키스탄 국경에서 몇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남부 낭가하르의 산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 특히 토라보라 산맥의 잘랄라바드 남쪽은 오랫동안 알카에다의 보루였다.
 
  11월 초 우리의 정보보고는 빈 라덴이 토라보라 지역으로 도망한 것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카불이 11월 14일 함락되자 우리는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파키스탄의 정부 권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피신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CIA는 급히 북부동맹군 戰士(전사)와 미국 고문들로 구성된 대테러리스트 추적팀을 만들었지만 지역이 너무 넓어서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빈 라덴은 훌륭한 은신처를 찾아낸 것이다. 토라보라의 험준한 산에는 10여 개의 터널과 동굴이 있었다. 한 CIA 요원이 말했다.
 
  “그는 등에는 산맥을 업고 있고, 앞에는 탁 트인 시계를 가지고 있는데, 현지인들은 그와 대결하거나 축출하려 하지 않고 있다.”
 
  CIA와 군 요원들은 아프가니스탄 군에게 흔히 하던 것처럼 권고를 하고 현금을 뿌리기도 하면서 알카에다의 거점으로 믿어지는 곳을 공격하도록 했다. 5명으로 구성된 한 합동 CIA·JSOC팀이 적의 영역 심장부로 침투하여 72시간 이상 공중공격을 지시했다. 한 번은 이 팀이 자기 위치에서 1200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B-52 폭격을 요청하기도 했다. 12월 4~7일 사이에만 합계 70만 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수백 명의 알카에다 추종자들이 죽었다. 그러나 현장에 나가 있던 CIA 요원들은 이 중대한 작전을 아프가니스탄 지상군에게 의존할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부 아프가니스탄 부대가 적극적으로 알카에다 공작원과 협조하여 그들이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는 빈 라덴이 토라보라 지역에 있고, 곧 완성될 터널을 통해 신속히 도망갈 계획을 하고 있다고 강력히 시사하는 민감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공군력이 이 험준한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공중폭격은 한계가 있다. 동굴망 안에 숨어 있는 적과 대결하려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와 협조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군은 그런 위험한 작전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이슬람의 성스러운 라마단 기간이었고,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은 공격에 관심이 없었다.
 
  현장과 본부에 있는 CIA 요원들은 그 일을 끝내기 위해 미군의 투입을 강력히 요청하기 시작했다. 행크 크럼턴은 토미 프랭크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 상황을 토의했다. 토미는 미군의 대병력을 그 지역에 투입하려면 몇 주일이 걸릴 것이며, 빈 라덴은 그 사이에 빠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현지에 투입된 부대가 밀고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파키스탄에 대해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따라 군대를 배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빈 라덴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탈출로를 지도에 그려 넣었다.
 
  나는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아침 행크에게 파키스탄이 국경을 봉쇄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대답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지역에서 탈출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파키스탄군은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알카에다 조직원 수백 명을 체포했지만 정작 우리가 가장 원하고 있는 사람은 잡지 못했다.●
 
  <번역: 李南圭> /조갑제 닷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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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