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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독립군 토벌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이는 대법관들만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다.

  • No : 59840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09-02-08 23:39:26
  • 조회수 : 4557
  • 추천수 : 2

대법원 판결 有感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이는 대법관들만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다.
趙甲濟   
 박정희가 滿軍 시절에 독립군을 토벌하던 부대에서 근무하였다고 글을 쓴 사람에 대하여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하였다.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박정희가 그런 부대에 근무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는 식으로 비켜갔다.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눈을 돌린 셈이다. 박정희가 滿軍에서 활동한 상황에 대하여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였던 동료들의 증언이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역사적 사실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대법관들만 모르는 모양이다. 대법원이 "李承晩 대통령은 하버드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어 진상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논고를 한다면 우리는 그런 대법원을 게을러빠진 기회주의자라고 공격할 것이다. 박정희 장교가 독립군 토벌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버드 대학원에 다녔다는 사실만큼 확실하다. 미국 대법원이 링컨과 관련된 재판에서 "링컨이 변호사를 했는지의 여부는 논란거리이다"고 했다면 미국 시민들은 대법원 해산 운동을 펼지 모른다.
 
 5년 전에 썼던 글을 다시 싣는다.
 ___________________
 
 *박정희는 독립군이 아니라 팔로군과 싸웠다.
 
 박정희는 滿軍 장교로 임관된 뒤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배치되어 毛澤東의 이른바 8로군과 대치했다. 박정희는 만주의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대에 근무했던 적도 없고 독립지사들을 수사하는 부서에 근무한 적도 없다.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반벽산
 
  박정희는 1944년 7월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8단으로 배속되었다. 단은 연대규모의 부대를 가리켰다. 반벽산은 만리 장성의 바로 북쪽 산악지대에 있었다. 반벽산에서 북쪽으로 40㎞쯤 가면 청조의 이궁이 있는 승덕, 북서쪽으로 가면 몽골이었다. 모택동(모택동) 의 팔로군 제17단이 만군 8단의 주적이었다. 8단의 당제영 단장은 중국 인이었다. 상교(대령)인 그는 박정희를 부관 겸 기수로 임명했다. 부관 이하는 일은 작전참모의 보좌였다.
 
  머리 좋은 장교가 맡는 자리였다. 박 정희로서 반가웠던 일은 이 8단에 만주군관 1기 출신 조선인 장교 두 사 람이 먼저 와서 근무중이란 점이었다. 박정희에게 난생 처음인 군대주먹 맛을 보여주었던 방원철은 중화기 중대(연이라 불렀다)의 선임장교였다. 이주일(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감사원장 역임)은 대대 부관장교였다.
 
  보병8단은 1944년 1월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목단강 영안에서 열하 성으로 이동한 부대였다. 그때는 장백산 밀림 지대에서 활동중이던 중국- 조선 공산계열의 항일빨치산 부대가 소련으로 밀려난 뒤였으므로 8단은 작전지역을 바꾼 것이었다. 이주일, 방원철 두 조선인 장교도 이동하는 8단을 따라왔다. 만주와 중국의 접경지대를 관할하게 된 이 부대는 팔로 군의 공격으로부터 촌락들을 방어하는 것이 임무였다. 만주국의 용병처 럼되어 중국공산군과 싸우게 된 박정희로서는 신바람이 날 수 없는 임무 였다.
 
  방원철은 자신의 회고록(미발표)에서 이때의 진중생활을 자세히 기록 하여 놓았다. 이 기록은 박정희가 처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방원철이 소속된 중대의 대장은 일본인 장교 오노키 상위(대 위)였다. 방원철은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명령을 받아서 중국인 군인들 을 지휘하여 또 다른 중국인을 공격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곤혹스러웠 다. 더구나 팔로군은 인민들 가운데 숨어 있고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되 지않아 사관학교에서 배운 군사학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방원철 은한 경험을 통해서 현지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는 것이 가장 안전한보신 책임을 알게 되었다. 8단 소속 6중대의 중국인 중대장이 당천이란 마을 에 주둔하면서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 중대장은 한 과부 집에 놀러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팔로군 공작원 에게 피살당하였다. 단본부에서는 6중대 병력을 물리고 방원철 중위로 하여금 1개 소대를 끌고가 당천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주민들은 새 부 대가 들어오자 겁을 먹고 있었다. 방원철은 마을의 유지들을 모이게 하 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전에 있었던 중대장 피살 사건과 이 마을 주민들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 부대원들이 행패를 부리면 저한테 알려주 십시오. 부대원들의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도록 지시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번호를 붙이지 않는 자가 약 탈을 하면 때려죽여도 좋습니다. 마을에서 공출하는 땔감과 식품에 대해 서는 월2회씩 그 대금을 지불하겠습니다.".
 
  방중위는 출입증을 유지들에게 주어서 부대로 놀러오도록 했고 자신 도 마을에 놀러가서 마작도 하고 아편도 빨았다. 노인들이 가르쳐주는 요령대로 아편을 빨았더니 중독도 되지 않고 금단현상도 없어 오히려 건 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루는 중국인들과 마작을 하다가 불 쑥 이렇게 떠보았다.
 
  "내가 여기 놀러나오는 것을 팔로군이 알고 있을텐데 왜 안 잡아가는 지 모르겠어.".
 
  "부대장님은 안심하십시오. 팔로군이 잡으러 오면 우리가 막겠습니 다.".
 
  그때부터 방 중위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하루는 일본인 중대장 오노키가 저녁을 먹다가 호주머니에서 엽 서를 꺼내더니 방중위에게 보여주었다. 일본에 살고 있는 그의 여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요지는 '오빠, 만주에는 쌀이 많다는데 다음에 고향에 오실 때는 좀 가져오세요. 쌀밥이 먹고싶어요'였다. 오노키는 "이 정도 면 전쟁은 다 끝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글쎄요, 그것 참 심각한데요." "우리도 적당히 하면 돼.".
 
  해방의 그날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군8단의 네 조선인 장 교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본부에 있던 단장부관 박정희 중위였다. 그는 7월1일자로 중위로 진급했었다.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병력(약4천명)을 흥륭에 집결 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몽골의 다륜으로 북진하라는 작전임 무를 부여받았다. 박정희는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 하 부대에 전달했다.
 
  그때 방원철이 속해 있던 중화기중대는 만리장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일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신 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만군은 대대급 부대만이 발전식 무전기를 갖고 다녔다. 한 30분간 발전기를 돌리고 통신기를 틀어야 송수신이 되는 퇴물이었다. 방원철이 선임장교로 있던 중화기중대가 만리장성 남쪽 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쯤 떨어진 고산자의 본부로 돌아 온 것은 8월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 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 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 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흥륭에 집결했다가 다륜으로 진격하게 되 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흥륭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 시오.".
 
  이 순간 방원철도 아차 했다. 그 한 달 전 평천에 주둔하던 헌병 상위 문용채가 엽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 책인 문용채는 이 엽서에서 '나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봉천으로 간다.
 
  방 중위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휴가를 얻어 서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했다. 방 중위는 이 편지를, '이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으니 휴가를 내어 후방으로 빠졌다가 거사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상부에 휴가를 신청 했더니 일군의 합동작전이 끝난 뒤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 을 받았던 것이다. 방원철의 중화기중대 약2백50명은 당나귀 50마리 에다가 짐을 싣고서 14일 새벽에 반벽산으로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 지기 시작했다. 반벽산에 집결한 8단 병력은 행군대열로 재편성하여 바로 흥륭으로 출발했다. 반벽산 흥륭은 약60㎞의 거리였지만 강원 도 산악지대처럼 험했다. 차는 다닐 수 없었다. 당나귀와 보병으로 구성된 긴 행렬이 연일 계속되는 폭우를 뚫고 걸어갔다. 절벽과 계곡 을 따라 난 길을 걷자니 하루 50리가 고작이었다. 방원철의 중대에서 는 졸면서 걷던 병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급류를 건너 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신현준의 중대도 식량과 탄약을 실은 당나귀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야간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우군부대가 오인사격을 해온 것이었다. 8월15일, 16일도 행군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폭우 를 맞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전기를 한참 돌려야 작동하는 무전기를 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8월17일 방원철의 부대가 흥륭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 무전기를 작동시켰다.아 무 방송도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중국어 방송이 나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장개석의 육성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방원 철은 그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 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선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에게 빌붙어 나쁜 짓을 한 사 람도 있습니다만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동북변사처를 조직하여 왕장군(중국군 소속 조선인 김홍일장군을 지칭)을 파견하기 로 하였으니 자중자애해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라오던 신현준은 흥륭에 당도하여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현 준,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8단장은 매우 원만하게 이 사태 를 관리했다고 한다.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 네 명은 일본인 장교 13 명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다. 당제영 단장은 일본인 장교들을 흥륭 소재 일본군게도 부대에 인계했다. 다른 만군 부대에서는 일본인 장 교들이 중국인 사병들에 의해서 피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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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다
 
 조국근대화의 기수였던 朴正熙 전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는 5년 남짓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장교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관학교 생도로서, 또 북중국에 주둔한 만주국 부대의 장교로서의 신분이었다. 이 사실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日帝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국인을 보호할 나라가 따로 없었다. 한국인은 親日이냐 조국이냐를 선택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냐 日帝냐의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日帝를 선택했다면 그런 한국인은 반역자로 불려도, 친일파라고 불려도 좋다. 그때 한국인은 친일이냐 反日이냐의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이 경우 反日은 투옥이나 죽음을 의미했다. 어떤 절대자도 보통인간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너는 그때 反日의 영웅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할 자격을 가진 인간은 없다.
  대한민국이 없었던 시절인데 일제를 거부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였다. 하나는 만주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反日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길이었다. 이 험난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
  들이 있다면 그런 인간들은 위선자이다.
 
  모두가 영웅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지하철에 떨어진 아기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어 아기를 살리고 자신은 죽은 시민이 있다면 그는 영웅이다. 그런 영웅의 용기는 길이 길이 기려야 한다. 이는 산 자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그때 왜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지 않았느냐고 욕을 하고 그런 방관자들을 비겁자라고
  두고 두고 매도한다면 그러는 이는 자신도 지킬 수 없는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위선자이다.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상 천국이 이뤄지기 전에는.
  日帝 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죽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日帝에 형식상 순응해야 하는 것이 그중의 하나였다. 일제가 만든 법이 비록 아니꼽더라도 지켜야 했다. 日帝의 교육제도가 비록 皇國臣民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더라도 학교에 다녀야 했다. 日帝가 만든 경부선을 타고 電氣와 水道를 이용하여야 했다.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는가. 朴正熙가 대구사범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 문경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는 나라 없는 朝鮮人으로서 日帝에 겉으로 순응하면서 살아간 것뿐이다. 그가 이 무렵 金九처럼 초인적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국인 전부가 金九처럼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만 했다면 해방이 왔을 때 누가 공장을 돌리고 누가 군대를 만들었겠는가. 日帝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그 日帝로부터 先進 과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기량을 대한민국 건국 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썼던 많은 사람들은 만주의 독립운동가 못지 않은 애국자들이다.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던 만군장교였다
 
  그러면 누가 친일파인가. 日帝에 순응한 정도가 아니라 日帝에 적극적으로 복종하여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조선인을 괴롭힌 사람들이 친일파이다. 두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 日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복종한 것과 조선인을 괴롭힌 일.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친일파이다. 일본의 경찰에 취직하여 파출소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도적을 잡는 일을 했다면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日帝 경찰의 特高형사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에 종사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친일파 조사 입법에 앞장섰던 여당의 두 의원 아버지는 헌병간부와 특무경찰로 밝혀졌다. 그런 사람이 친일파이다.
  또 하나 대한민국이 건국하여 조국이 생겨났는데도 일본에 계속 충성하겠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朴正熙가 조선인 탄압과는 무관한 만주국의 장교가 되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몰아가려는 사람들은 만주국 장교로서 朴正熙가 독립군을 사냥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朴正熙 전기를 쓰면서 그의 하루 하루 행적을 추적했던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북중국의 만주군에 배치되어 毛澤東 군대와 싸웠다. 毛澤東 군대와 싸운 것을 가지고 친일파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毛澤東 군대는 당시 일본의 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엔 대한민국의 敵이 되었다.
  朴正熙가 만주국 장교 군복을 입고 있을 동안 그가 장교로서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인을 괴롭히거나 日帝에 아부했다는 증언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증언은 많다. 즉, 비록 만주국 군인이었지만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고 독립군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만주군내
  의 독립운동 조직이 그를 포섭대상으로 여길 만큼 민족정신이 강했다는 등등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를 부정하려는 역사파괴 행위
 
  그가 만주군의 장교가 되어 군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득을 본 점이 있다. 朴正熙 장군이 주도한 근대화 혁명은 군인으로서 그가 갈고 닦은 기량과 지도력 덕분에 가능했던 측면이 많다. 조직운영에 대한 탁월한 리더십, 국가개조에 대한 비전, 實事求是의 정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국가 운영술, 군사문화에서 우러나오는 책임감,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민감한 개방적 정신 등등은 그가 군인으로서 배운 것이다. 朴正熙가 장교가 아니었다면 그가 주도한 한국의 근대화는 이처럼 성공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朴正熙가 만주국 장교였다는 사실로 해서 失보다 得을 더 많이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친일파가 아닌 것이다.
  참고로 중국 사람들은 蔣介石이 청나라 시절 한때 일본의 예비사관학교에 3년간 유학을 했었고 사관후보생으로 일본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지 않는다.
  朴正熙를 친일파라고 부른다면 나는 매국노이다. 왜냐 하면 어제 저녁에도 나는 日食을 먹었기 때문이고 나의 부모가 일본에서 7년간 일했으며 창씨개명을 했고 나도 일본의 사이다마縣에서 났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아니 朴正熙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다
  조국이 없던 시절 식민지의 한 청년이 일본의 괴뢰국 군인이 되어 공산군과 싸웠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려는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룩한 조국 근대화의 업적을 말살함으로써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한 章을 없애려는 의도를 깐 역사파괴 행위이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모독
 
  人生의 복잡하고 기복 많은 본질을 무시하고 일순간의 약점을 캐내어 그 사람과 한 시대의 모든것을 깡그리 부정하려 드는 선동술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40년 전 한일수교를 결단함으로써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낙후한 한국경제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경제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진 三星은 지금 일본의 대표기업인 소니를 능가하는 세계최고의 전자회사로 컸다. 이것도 親日인가. 경제발전으로써 우리가 일본인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큰 공로자는 朴대통령이 아닌가. 그런 그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고 도요다로 창씨개명한 전 대통령도 나을 것이 없다.
  한 나라의 품격은 국민들이 어떤 사람을 기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동족 600만 명을 희생시킨 金日成 金正日 부자를 추종하던 자들이 민족사에서 처음 보는 경제적 풍요와 국가적 自尊을 가져온 위인을 온갖 악랄하고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여 매장하려고 한다. 이런 세력의 득세를 보면 한국은 내일이라도 망할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이 다수라 朴대통령은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역대 인물 1위로 꼽히고 있다.
  민주 국가에서 70%가 넘는 지지는 전체주의 국가의 100% 지지보다 더한 거의 우상숭배 수준의 인기이다. 그런 朴대통령을 무덤에서 불러내 조사하겠다는 자들은 그 무덤에 대신 파묻히고 말 것이다. 죽은 朴대통령과 결투하여 살아남은 선동가를 본 적이 없다. 국민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있는 朴正熙를 거짓선동으로 말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반드시 그 代價를 치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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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