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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사와 이승만” 사실대로 알기-이주영 박사

  • No : 67666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12-09-07 17:25:32
  • 조회수 : 2114
  • 추천수 : 0

 

건국사와 이승만사실대로 알기

 

이주영 박사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건국이념보급회 부설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

 

 

 

우리 사회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애당초 태어나서는 안 될 나쁜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때문에 국가가 정체성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들의 주장 가운데서 몇 가지를 골라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1)건국은 북한에서 먼저 이루어졌으므로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소련과 북한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선포일, 즉 건국일이 1948815일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일이 같은 해 99일이라고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영구화의 책임을 남한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북한과 좌익들이 파놓은 함정입니다. 실제로는 북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움으로써 분단을 고정시킨 것입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정부가 세우기 위해서는 3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건국은 해방이 한 달 조금 지난 1945920일에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에서 부르주아정권, 좌우합작 연립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제2차 대전 직후에 폴란드 등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공산정권을 세운 것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우선 좌우합작 연립정부를 세웠다가 나중에 좌익으로 하여금 정권을 잡게 한다는 전략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소련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조만식의 우파 세력이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군은 전략을 바꾸어 19462월에 김일성 등의 공산주의자만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공산정권을 세우게 했습니다.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화폐개혁과 같은 엄청난 혁명적 조치들이 정부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정규군인 인민군을 창설하고 헌법초안을 만들고 국호도 제정했습니다. 국가를 만들어 놓고도 선포는 미룬 것입니다.

 

 

(2)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운동은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19484월 좌우합작파인 김구와 김규식은 510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워 보겠다고 평양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정부를 세우고 공산혁명을 추진한 북한이 새 정부를 세우기 위해 그것들을 허물어뜨릴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이 열자고 요구한 4자회담에는 대꾸도 안 하고 570명이나 모인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모란봉 극장에서 열고 두 김 씨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요 지도자들이 논의하는 회의가 아니라 수백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결의안을 채택하는 군중집회였습니다. 분개한 김규식은 회의에 참석조차 안했고, 김구는 한 번만 참석해 짧게 연설했을 뿐입니다. 김 씨는 남한정부를 수립을 방해하려는 북한에게 이용당한 셈입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두 김 씨는 통일정부수립촉진회를 조직해 건국에 계속 반대하고, 그것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막기 위해 별도의 대표단을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하려고도 했습니다. 후 두 김 씨의 민족주의적인 행동은 남북협상, 평화통일, 연방제 통일과 결부되어 대한민국의 해체를 노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유엔이 계획한 510선거에 북한이 참여했더라면 통일정부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북한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선거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건국조차 되지 못할 뻔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해방 후에 남한에서는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북한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컸습니다. 당시 미국의 한국 정책은 소련과 합의하여 남북에 걸친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당시의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이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소련은 점령지인 북한만이라도 확실하게 공산화함으로써 나중에 남한마저 공산화할 계획이었습니다.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 혼란이 일어나 미군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은 미국이 요구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시간을 끌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탁통치를 반대한 남한의 우익 세력이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고, 그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켰습니다. 남한의 좌익들도 친일파 숙청, 농지개혁 같이 당시로서는 당장 실현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들을 내놓음으로써 우파들과의 협상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소련 측과 좌익의 속셈을 간파한 인물이 이승만이었습니다. 그는 좌우합작의 이름 밑에 좌익과 우익이 손을 잡게 되면 조직이 약한 우익이 먹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좌우합작 연립정부를 세웠던 동유럽 국가들과 국공합작을 시도했던 중국이 공산화한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반공반소련의 기치를 확실하게 내세웠고, 그 노선은 건국세력들(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보수 세력(한민당)이 따라 주었습니다. 이승만의 일관되고 확고한 노선 천명이 없었더라면, 허약한 보수 세력들은 나라를 세울 만큼 힘을 결집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4) 북한은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공산당을 노동당으로 위장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은 자유선거입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의 510선거라는 자유선거를 통해 세워졌기 때문에 일단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건국초기의 어려운 여건 때문에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자유 보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자유민주국가라 할지라도 국가를 전복하려고 혁명을 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자유까지 허용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국가로 불릴 위험성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그와 같은 자유선거가 시행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 때문에 북한은 민주주의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그 국호에도 민주주의를 붙이는 등의 방법으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항상 전면에 내세워 왔습니다.

 

북한이 민주국가가 아니면서도 민주주의를 외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해방 당시 북한 주민들은 공산주의는 소련에서처럼 혁명으로 재산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련군과 김일성은 공산주의란 말을 사용할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민주주의로 위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당을 노동당으로 바꾸어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공산혁명을 획책하는 공산당이 영국의 노동당과 같은 부드러운 복지정당으로 위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위장이 너무 오래 계속되어 잘못된 생각이 굳어진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주의 국가를 민주국가로, 세습왕조를 진보로 잘 못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2011년 새로운 중학교 역사 교과서 편찬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을 때, “민주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의 논쟁이 일어나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로 위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사용하도록 우파 학자들이 제의 한 데 대해 좌파 성향의 학자들이 반발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하는 방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났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5) 이른바 친일파 숙청은 역사의 본질을 모르는 허구적인 관념입니다.

 

역사는 단절(斷絶)과 혁명(革命), 그리고 연속(連續)과 개혁(改革)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해방 후, 북한의 역사를 본다면, 남한은 과거와의 연속을 토대로 하여 개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혁명이니 숙청이니 하는 끔찍한 말로 삶의 연속성을 끊어 버리면서 특이하고도 비정상적일 길을 걸어 왔습니다.

 

북한이 단절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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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