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런 저런 사연 있어 한동안 미루었다가 옛노래(가요 가곡)들을 발굴해서 틈나는대로 시리즈로 엮어볼까 한다.
노무현 이후 참을길 없어 된글 안된글 칼럼이랍시고 쓰다가 요즘 와서는 현실정치가 기대와 엄청난 괴리를 보여 차라리 침묵이 금이라는 생각에 입 다물어 왔는데,
어제 여의도에서 열린 공권력정당집행 촉구 시민대회와 사회악 染病C(MBC) 추방 촉구대회에서 오랫만에 목청 높혀 부른 愛國歌가 되색여지기에 먼저 <동해물과 백두산이....>
차라리 현 시국과 무관하게 애국가 작곡에 얽힌 사연부터 풀어가 볼까한다.
안익테는 누구?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로서 작곡 지휘 재능을 겸비한 安益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나 제1보통학교 시절부터 독창과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崇實중학교에 입학, 거기서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왔으나 2학년 때 무능교사 추방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학교를 쫓겨난다.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東京 간다(神田)의 마사노리(正則)중학 2학년에 편입, 졸업을 하고 고학으로 東京音樂學院에 입학해서 첼로를 전공했다.
음악학원 졸업 후 귀국하여 평야과 경성에서 독주회를 여는등 국내 활동 후 음악공부를 심화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간 안익태는 첼로와 작곡 그리고 지휘를 배우고
오하이오주 Cincinati오키스트라의 단원으로 활약하면서 한때 명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콥스키에 사사하기도 했다.
샌프런시스코의 한인교회에 나가고 있던 안익태는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송곡으로 애국가를 쓸쓸히 부르는 것을 보고 약소국의 비애를 씹고 애국가 작곡에 몰두하여 전반은 미국에서 후반은 유럽에서 완성하여 <대한 애국가>라 이름 지어 발표하게 된다.
당시 새프런시스코에 살고 있던 한인 유지들이 악보를 입수하여 발표회 開唱式을 갖게 됨으로써 마침내 오늘의 우리 고유의 애국가는 제 모습으로 미족의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4절로 이뤄어진 우리 애국가 가사를 누가 모르랴만은 노파심에서 여기 옮겨본다.
1)동해물과 배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保祐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 렴: 무궁화 삼철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氣像일세
후 렴:
3)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달은 우리기상 一片丹心일세
후 렴:
4)이 기상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 렴:
1936년 8월 마침 배를린올람픽에서 이곡을 알려야겠다고 작심한 안익태는 배를린으로 달려가 개막식 직후 일본 대표선수로 출정하고 있던 손기정 남승룡 김용식 이규환 장이진 등이 모여있는 스탠드를 바라보며 한장의 메모를 꺼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힘찬 평안도 사투리로 목청것 불렀다.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 월계관을 쓰고 남승룡이 동메달을 따자 안익태는 응원석에서 여러명의 동포를 지휘하여 미친듯이 <다한 애국가>를 열창했다.
<대한 애국가>는 마침네 미국의 대한국민회와 중경의 임시정부에 가사와 곡이 보내지면서 이윽고 해외망명정부의 공식 국가로 불리어지게 된다.
불멸의 민족혼이 담긴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를 비롯, 베를린 필하모니오키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 활동하다가 1957년 20년만에 조국땅을 밟게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귀국 후 국내 음악인들과 교감이 어려웠던 안익태는 다시 조국을 떠나 스페인으로 가서 1965년 9월 60년 생을 마감하지만 애국가와 세계적 명작 <코리아 판타지>에 실려 그의 혼은 지금도 조국 강산에 흐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누가 잘났거나 잘되거나 하면 말도 많고 탈도 믾고, 사촌 논 사면 배아픈 민족인 것 모르지 않지만 애국가의 곡에 대해서도 민족적이지 않다느니 가사가 퇴앙적이라느니 하는 그런 투정을 다 삭혀가며 애국가는 애궁인들에 의해 지금도 열창되고 있다.
혹시 잘못 전달되는 사연 또는 부족한 사연이라 보시는 분은 기탄 없이 댓글로 지적 해주십시오. 안중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