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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腸液으로 쓴 글, 林語堂을 다시 생각한다

  • No : 69067
  • 작성자 : 華山
  • 작성일 : 2010-01-17 14:09:26

 

젊은시절 회상하면 林語堂(린 위탕)이 생각나는 까닭은?

--이념으로 뒤 얽혀 치고 받고하는 오늘 우리 사회풍토에 염증을 느낀 탓일까?
어느 해보다 우울한 추석연휴, 가슴 메지르는 시국 이야기 떠나서 가슴 설레는 얘기로 한 발, 반세기 아니 한 세기쯤 뒤로 물러서서 지금의 우리 내면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조명해 봤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써 봅니다.-- 그리고,

도회지의 요란한 샹드리 밑에서 수선스럽게 먹어대는 뷔페요리보다는 차라리 시골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상큼한 열무김치에 풋고추 된장 찍어 찬물에 밥 말아 먹는 맛이 더 좋지 않을까. 아무리 바빠도 급히 걷지만 말고 지나가는 가을 들녘의 만개한 코스모스 꽃길에 잠시 서서 나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2004.9. 26.)

길어 지루하실지 모르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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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어당은 1895년 나서 1976년 죽었다.
중국 복건성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상해 聖 존스대학, 미국 하버드대학,
독일 라이푸치히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 철학박사가 되었다.
북경대학 영문학 교수, 싱가포르대학 총장도 지냈다. 당대 명문필 魯迅과 함께 산문 논문을 다수 발표했고 1936년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했다. 2차대전 종전 후 유네스코 학예부장을 지냈고 중화민국 유엔대표 고문역도 했다.
저서로는 <人間世-인간세> <論語-논어> 등 잡지도 발행했고, <우리 國土 우리 國民> <北京好日-북경호일> <폭풍 속의 나뭇잎> 등 다수, 詩文集(시문집)으로 <大荒集-대황집> <剪拂集-전불집> 등이 있다.
50년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처세술>은 당시 젊은이들의 애독서였다.
그는 노년에 저술활동을 접고 홍콩의 딸네 집에 의탁, 거기서 82년의 생을 마감했다.


임어당의 참모습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지만 그의 아버지 장사 지내든 날 고모의 하나님에 대한 맹신적인 모습을 보고 신앙을 접었다. 동기는 이러했다....

마침 장례 치르는 발인 날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고모가 비 그치게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한참 뒤에 비가 멎었다. 고모가 말했다. 거 봐 ! 기도 드렸더니 장례 잘 치르라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신거야....

임어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집안의 장례 치르는 일만 생각하고 수 백만 사람이 홍수에 떠내려간다는 생각은 안하신거냐? 이건 말이 아니다.
이것이 임어당의 背敎(배교) 동기였다고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자술하고있다.
그러나, 말년에는 다시 기독교에 귀의했다.

임어당은 말한다
 
그 시대의 문화가 지향하는 바는 한 가정의 가장 훌륭한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자녀들을 잘 부양하는 것이라고 임어당은 서두에서 밝힌다. 그리고 군데 군데 아래 이야기들을 이어나간다.

꽃에 나비가 있고, 산에 샘이 있고 , 바위에 이끼가 있고, 물에 부초가 있고, 큰 나무를 휘감는 덩굴이 있고, 인간에 道樂(도락)이 있다. 이거 절대 필요한 것들 아닌가.

꽃은 美人들과 더불어 즐기고, 달밤에 술은 유쾌한 벗들과 즐기며, 눈 내린 雪景은 기풍 있는 선비들과 즐긴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름이오
돌을 쌓는 것은 구름을 부름이오
소나무를 심는 것은 솔바람을 부름이오
연못을 파는 것은 수련을 부름이오
툇마루를 놓는 것은 달을 부름이오
芭蕉(파초)를 심는 것은 비를 부름이오
 버들을 심는 것은 매미를 부름이다
 
사람은 높은 누각에서 산을 바라보고
성 위에 올라 구름을 감상하며
촛대 옆에서 달을 보고
조각배에 타고 노을을 감상하며
방 안에서 美人을 대한다
 정경에 따라 정취가 스스로 달라진다.

참으로 비켜 갈 수 없는 노릇 세 가지가 있다.
거울이 醜女(추녀)를 대했을 때
희세의 名硯(명연)이 속물의 소유물이 되었을 때
名劍(명검)이 졸장의 손에 쥐어졌을때
이거야말로 참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본능

미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을 사랑하면 꽃의 각별한 아름다움이 더한다.
꽃을 사랑하는 기분으로 미인을 사랑하면 참사랑의 맛을 안다.
미인은 사람 말을 알아들어 꽃을 이기고, 꽃은 향기를 뿜어서 미인을 이긴다.
양손에 두 꽃을 들 수 없을 때는 향기 꽃을 버리고 사람 말 알아 듣는 꽃을 들어라.
 
매화는 사람에게 고결한 감을 주고, 蘭(난)은 은둔, 菊花(국화)는 소박, 蓮花(연꽃)는 知足(지족)을 암시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의 정렬을 불태우고, 모란은 용기와 의협을 북돋우며 竹(죽)과 芭蕉(파초) 는 청숙함을, 가을 해당화는 우아한 氣稟을 자아낸다.

소나무에서 세속을 등진 사람 같은 느낌을 받으며, 오동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해 주고, 버들은 사람의 감상을 부른다.

山水情景(산수정경)과 생활의 情緖(정서)

책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독서를 하는 것이오, 술이 있어 말을 할 수 있고 마시고 취해서 유쾌해 질 수 있다. 만일 꽃과 달이 없다면 무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다행히도 꽃과 달이 있어 좋다. 그래서 꽃과 달을 즐기고 이들과 더불어 노닐지 않고 배기랴.

만일, 才士 佳人이 없다면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 힐 것인가. 그런데 다행히도 재사 가인이라는 것이 있다. 때문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한다.

거울이 醜女(추녀)의 적이 아닌 것은, 거울에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있다면 추녀의 손에 박살이 날 것이다.

실생활의 智慧

여행 길에 지나치는 風光(풍광)은 예술적으로 선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거처를 정하고 生涯(생애)를 보낼 내 주거지는 잘 골라 자리잡아야 한다,
봄 새우는 소리, 여름 매미 소리, 가을 풀벌레 울음소리, 겨울 눈 내리는 소리, 산에 들어
솔바람 소리, 물가에 서서 잔잔히 이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우리라. 다만, 젊은 무뢰한들의 싸우는 소리, 역정내는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에는 귀머거리가 되라.

휴가는 생명의 재충전의 기회, 많이 사색하고 대화하라 

바쁜 현대새활에서 閑暇(한가)를 얻어 심신을 누구러뜨리는 것처럼 즐거움은 없다.
한가를 이용하여 책을 읽고, 명승지를 여행하고, 좋은 벗을 맺어 술을 맛이며 담소를 나누고, 山寺에 들어 參禪(참선)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 글을 쓰고, 산과 들에 나가 사진을 찍는 것,  세상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또 있으랴.

夕陽(석양)의 落照(낙조)를 멀리 감상하며 계류가 벼랑을 만나면 폭포가 되는 굴곡을 겪으며 生(생)을 가는 旅路(여로)에서 박식한 벗과 담소를 즐기고, 詩情(시정)이 배인 벗과 담론을 펼치거나 詩文(시문)을 읽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機知(기지) 발랄한 벗과 나누는 문학 이야기, 心友(심우),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벗은 집안 고민도 함께 나누고 남의 악담 악평을 서로 론박해 줄수 있는 사이다. 심우야말로 <나를 아는 사람>, 처자보다 벗 가운데 있다.

煩惱(번뇌)는 우주의 토대를 지탱 해 주고, 才能(재능)은 그 지붕을 덮어준다.
君子(군자)에게 경멸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市井小人(시정소인)에게 창피를 당하는 것이 낫다.
유명한 학자로 인정 받지 못하기보다 차라리 시험에 낙방하는 것이 낫다.

사람은 詩(시)처럼 살고 그림처럼 事物(사물)을 봐야한다.
심야 조용히 홀로 앉아 달을 불러 내 슬픔을 이야기하고, 좋은 밤 獨居(독거)하며 벌레를 불러 나의 悔恨(회한)을 밝혀본다. 이 얼마나 생의 진지한 맛이냐 !

진미요리를 급히 먹고, 화려한 景勝(경승)을 서둘러 보고, 심각한 감정을 천박하게 나타내고, 아름다운 하루를 마시고 먹는 일로 보내고 낭비해서 富(부)를 탕진하는 것은 神意(신의)를 거스르는 일임을 알자.



學識(학식)과 識見(식견)-(지식과 상식 식견) 智慧(지혜)와 叡知(예지)

배움의 통조림과 배움의 응용은 판단력 배양의 차이다.
明瞭(명료)한 사상은 불명료한 언어로 포장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명료한 사상이 명료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 文體(문체)는 명료하게 불명료하다.
불명료한 언어로 표현된 명료한 사상은 濟度(제도)하기 힘든 독선자의 문체다. 아내에게는 아모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이마뉴엘 칸트 같이, 사무엘 버틀러 마저도.....

전문가와 학자, 작가와 思想家 사이

독자가 著者(저자)를 싫어하면 그 저서에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은 이거
알야한다. 문필가들은 더더욱. 언어의 광산, 콘사이스 옥스퍼드, 포킷 옥스퍼드사전 그밖의 각종
사전을 열심히 뒤져라.

전문가의 지식이 넓어지면 학자가 되고, 작가의 叡知(예지)가 깊어지면 사상가로 진급한다.
학자의 저술은 다른 학자에게서 빌려오는 것으로 가능하며 인용原典(원전)이 많을수록 좋은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사상가의 저술은 자기 뱃속의 觀念(관념)으로 이루어진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 腸液(장액)에 의존한다.

따라서, 학자는 입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서 새끼를 기르는 크낙새 같은 것이고, 사상가는 뽕잎을 먹고 소화해서 비단을 토해나는 누에같은 것이다. 이것이 학자와 사상가의 차이다. 집필 전에는 관념의 懷姙(회임)기가 있다. 일정 기간 지나 진통을 겪으며 출산하는 것이 역작품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self) 또는 人格이라는 것은 四肢(사지), 筋肉(근육), 神經(신경), 理性(이성), 感情(감정), 敎養(교양), 理解力(이해력), 經驗(경험), 偏見(편견) 따위의 묶음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은 저절로 갖춰지는 것도 있지만 수양에의한 것도 있고 타고나는 것도 있으며 硏磨(연마)에서 얻어 지는 것도 있다.

美(미)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것은 항상 움직이고 변화한다. 움직이고 벼하는 것 자체가 善(선)이며 美(미)다.
天意(천의)를 거스르지 않는 運行(운행)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思考(사고)하는 방법

인간의 叡知(예지)는 단순한 전문가적 지식의 集積(집적)도 아니며 통계적 평균치의 연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예지는 단지 식견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상식, 기지, 솔직, 미묘한
직감이 보다 널리 보급됨으로써 비로서 예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 간에는 아카데믹한 사고는 얼마든지 많으나 詩(시)적 사고의 예는 오늘 날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고대 그리스지성은 현대사상의 조상인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적 사물판단력이 있고 중용설을 따른 점도 있으나 현대적 교과서의
저자따운 면모로써 의학, 식물학, 윤리학, 철학, 정치학, 생리학 등 지식을 모조리 갈라 놓아 구획한 최초의 인물이다.

한편, 플라톤은 참으로 인간적 통찰력 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新 플라톤학파에서 보듯이 관념이나
추상적 개념을 숭배하게끔 만든 책임자인 것이다.
결국 누구도 인생을 전체로써 바라볼 수 있는 예지를 제공하지 못한 죄가 있는 것이다.

청년의 독서는 창문을 통하여 달을 바라보는 듯
중년의 독서는 집 뜰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듯
노년의 독서는 창공 아래 정자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듯
이렇틋, 독서의 깊이가 체험의 깊이와 비례하한다는 이야기다.

문자 없는 책(인생 그 자체)을 읽는 것만이 지현지묘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말로써 설명 할 수 없는 길을 찾아내는 자만이 佛陀(불타)의 지고지선의 예지와 만날 수 있고, 고금 불멸의 문학은 나름 나름 피 눈물로 쓰여져 있다는 것 알아야한다
.
옛 어느 문인은 말했다

"10년은 독서에 바치고, 10년은 여행에 바치고, 10년은그 체험을 보존 정리하는 데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그 보존과 정리에 10년씩 바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2.3년이면 족 할 것이다. 대신, 독서와 여행에 욕심 같아선 그 몇배라도 많은 시간을 바쳤으면 오즉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은 너무 짧다. 2.3백년을 살아야 한다면 너무 욕심일까.

<참詩는 시인이 가난이나 불행에 빠져서 비로서 걸작이 나온다>고 고인이 말했다.
심장을 어이는 듯 인생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피 눈물 어린 시구가 그에게서 나오기 힘들다는 뜻이다.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은 불우한 사람보다 시상이 깊지 못하다. 즉, 체험보다 좋은 스승 없다는 말과 같은 이치일께다.

상식으로 돌아가라

진리를 논증하다보면 논리적 사고에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언어를 만들어야하고 그 언어를 또 설명하려면 논리가 딸아야하고 이렇게해사 진리는 언어에 의해 모호해지고 왜곡되고 잘못 표현되어 진리라는 것이 죽도 밥도 안되고만다.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말만 많이 만들어내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려면 또 새로운 학파가 생기고 모순당착의 일이 일어나기 일수였다. 그렇게 해서 철학은 어려워지고 인간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학문임에도 가장 멀리 떨어져나가 심지어는 철학무용론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賢者(현자)는 무언, 能者(능자)는 담화하고, 愚者(우자)는 논한다>는 중국 룡자진의 말처럼 말을 많이 하면 어리석어진다는 걸 알고나 지내자. 이리하여 성현은 스스로 직접 체득한 인생을 말하고 능자는 현자의 말을 말하고 우자는 능자의 말을 말한다. 그래서, 多言數窮(다언수궁) 말이 많으면 탈이 많다는 경구이다.

山水(산수)와 生涯(생애)에 대하여

우주만물 중 인간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움직이는 것 중 하늘에 달, 음악에 琴(금), 금수에 뻐꾸기, 초목에 버들이 있다.

달과 더부러 구름을 염녀하고, 책과 더부러 좀벌레를 두려워하고, 꽃과 더부러 폭풍우를 피하고자 하며 才士(재사) 佳人(가인)과 더부러 가혹한 운명을 두려워 하는 것은 불타의 대자비심을 내세워서만도 아니다.

이 세상 단 한 사람일지라도 <心友>를 가져라. 심우 즉,知己(지기) 하나 있으면 어데든 못갈 데가 있으랴. 옛 문인은 꽃과 달과 미인이 없다면 이 세상 태어날 생각 없다 하였고, 더하여, 필묵과 장기와 술이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날 이유가 뭐람이라고 하였다.

산의 색깔, 물의 소리, 달의 빛, 꽃의 향기, 문인의 매력, 미인의 자태, 이런 것들이 갖춰진 바에야 살 맛 나지 않겠는가.

우주와 나의 존재에 대하여

우주 자연의 모두는 종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실낙원이란 말은 아담과 이브가 신에게 버림 받아 쫓겨나기 전에 살던 곳. 그러면 그 후예들이 살고 있는 현세 지구는 낙원에 對하는 낙원이 아니라는 뜻일게다.
 
하지만 보라 !
지구는 낙원이다. 현존하는 지구인들은 자연이 베풀어 주는 饗宴(향연)에 초대되어 즐기고 있잖은가. 진수성찬이 차려진 마당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이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향연에 초대 되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은 철학자의 형이상학에 맡기고 머리 좋은 녀석의 할 일은 음식이 식기 전에 배불리 먹는 것이다. 공복은 언제나 건전한 상식을 동원한다.

천지조화 우주자연의 정연한 질서에 저항말라

첫 째, 晝夜朝夕(주야조석)의 순환이 있다. 바빠질 아침을 예비하여 조용한 黎明(여명)이 온다.
이 기막힌 조화가 아닌가.

둘 재, 여름과 겨울의 변천, 그 자체,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조화다. 어데 그 뿐인가. 봄은 여름으로,
가을은 겨울로, 두말 없이 옮겨가니 완전 무결한 사계의 변화 모습,春秋迭代(춘추질대)와 四時盛衰(사시성쇠)의 질서정연한 운행, 이 얼마나 모범적인가.
 
세 째, 삼엄 숭고한 樹林(수림)이 있다. 여름의 녹음, 겨울의 햇볕, 이것 정말이지 뭣하고 바꿀 수 있겠는가.

네 째, 다달이 꽃이 피고 과일이 영근다. 이것 엄연한 사실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다섯째, 구름 짙고 안개 깊은 날, 하늘 맑아 쾌청한 날, 약속이나 한듯 서로 바뀌어 가는 날씨의 변화, 이것 얼마나 확실한 일인가.

여섯째, 봄의 보슬비, 여름날의 장대비, 가을의 선들바람, 그리고 겨울의 하얀눈, 이것 있잖은가.

일곱째, 소쩍새. 비둘기, 뻐꾸기, 종달새, 카나리아의 오묘한 노래, 이소리들 듣고 있잖은가.

여덟째, 동물원에 가면 원숭이, 호랑이, 곰, 낙타, 코끼리, 악어, 그밖의 짐승들, 그리고 집에오면 소, 말, 검둥이, 고야이, 염소, 닭, 별별 짐승다 볼 수 있잖은가.

어데 그뿐인가.......

아홉째, 상어, 고래, 가오리, 홍어, 뱀장어, 갈치, 돔, 오징어, 대합, 피조개, 가리비, 거북, 새우 그밖에 상상을 넘는 온갖 생물들 여기 失樂園(실낙원)에 다 있잖은가.

열 째, 하늘 떠받치는 장대 거목들, 불을 토하는 화산, 웅대한 동굴, 장엄한 산봉, 만물 형상의 기암 괴석, 잔잔한 호수, 높다란 둑방, 긑 모를 사막, 기복 이룬 구릉, 이런 것들 다 있잖은가.

어디 그 뿐인가. 구름, 바람, 비, 눈, 안개, 그리고 또 있지. 풀잎에 내린 영롱한 아침 이슬, 이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지구는 결코 잃어버린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 다 증명되었다.


어째서 나는 예수를 떠났나?

*眞理(진리)를 위해 정진하다 보면 스스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그 결과가 어떠하던 상관할 바 없다. 이런 입장은 마치 살인자의 처지와 닮은 데가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전혀 똑같은 것이다.

살인을 하였으면 다음에 해야할 최선의 길은 罪(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謙虛(겸허)의 念(념), 이지적인 겸허의 념이 기독교를 배반케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다.

즉, 우주의 極微分子(극미분자)의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 태양계, 거기의 또 하나의 극미분 자의 한 조각에 불과한 지구, 또 다시 극미분자의 또 다른 한조각인 개개의 인간이 大造物主(대조 물주)의 눈에 그토록 소중한 것으로 비쳐진다는 것은 우리의 天文學상 지식으로 보아 벌써 믿기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초라함과 그 교만스런 尊大(존대)함은 나로하여금 아연케했다.
전체의 백만분의 일도 알지 못하는 至高的(지고적) 존재의 성질을 생각한다거나 그 속성을 가정 하는 따위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山上說敎(사상설교).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얼마나 짜릿한 시구인가.
걸작 중 걸작이다. 예수 이후 과연 이런 멋진 시구를 누구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 의심할 바 없다. 그런데,

神學者(신학자)들은 그토록 간단하고 명료한 말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 예수교 牧者(목자)들로 하여금 신도들을 목매두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천국이니, 원죄니, 속죄니 하며 가장 보편적 인간도덕의 실천을 어렵게 이유 있게 만들어 신도들을 유혹해 왔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 선행은 당연한 것이지 속죄하고 천국 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하는 유별난 動機行爲(동기행위)가 아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전 구성이 사과의 존재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아담이 사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원죄는 없었을 것이며, 원죄가 없다면 속죄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고, 굳이 신앙이라는 것이 더구나 필요했겠는가. 사과라는 상징적 가치는 그렇다치고, 이 사실은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또 하나의 命題(명제)는 아담과 이브가 밀월에 사과를 먹었다. 신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벌했다. 이 두 남녀의 하찮은 죄때문에 그 후예들인 인류는 世世代代(세세대대)로 말세죄를 질머지고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신이 벌한 그 후예가 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죽였을 때 신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뭐라고 논의 해석하더라도 이런 앞 뒤 모순된 이야기는 묵인 할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非(비)크리스챤들의 善行(선행)은 선행 그 자체일뿐 거기에 아무런 동기를 부여 할 필요는 없다.

*異敎(이교)가 선행을 인정하는 것은 선행이 선행 자체를 인정할 필요를 없앰으로써 선은 스스로 선인 것이다.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찮은 자선행위를 시키는데도 기독교적인 일련의 가설이나 가정 즉, 원죄, 속죄, 십자가 천국의 저축, 천국에 있는 제3자를 위한 인간적 상호주의라든가 이런 저런 동기, 이유를 달아 빙빙 돌려서 아무도 직접 증명 할 수 없도록 인간을 끌고 다니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는다.

*선행은 선행인고로 선행이라는 설을 받아드린다면 옳은 생활에 대한 모든 신학상의 미끼는 한낱 閑談(한담)으로 도덕적 진리를 흐리게 만들려는 잔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애는 최종적으로 절대적 사실이다. 따로 천국의 제3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치는 제 이치이며 자연에 순응하고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사랑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천의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인간은 이미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종교가 아니오 신앙의 대상이 아님음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다. <天道는 運行>하는 것, 이 세상에 영원 不正한 것은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뭘 더 필요로 하는가.

이상 20세기 최후의 지성 임어당의 사상이 어떻게 전달되고 위로가 되는지 조금이라도 느낌이 온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1.2십분이면 다 읽어버릴 이 하찮은 글을 쓰느라 필자는 옛날 노트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원저를 수 차레 뒤저가면서 꽤 많은 시간을 드렸으나 혹시 반세기가 지난 時代에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라면 어쩌나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졸필이 단 한분에게라도 생의 여로에 어줍잖은 길잡이가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해 주십시오.
2004.9. 26. 쓰고 그 5년 후 2010.1. 17.일요일아침 세종시문제에 온통 신경이 쏠려있는 많은 분들 머리 좀시켰으면해서 약간 수정, 재록합니다. 華山 안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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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