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49년 1월 12일 엄동설한,
어제의 동지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카에사르는 건너서는 안될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의 잔혹성이, 건너지 않으면 우리의 파멸이...."
비장하게 병사들에게 외치고 루비콘강을 앞장서 건넌 카에사르는 일사천리로 이탈리아
최남단 항구도시 브린디시로 진격, 자기를 國敵으로 내몬 원로원의 적들과 쌍벽의
무장 폼페이우스를 그리스로 도망치게하고 로마공화정을 종식시키면서 로마제국으
로의 문호를 열었다.
BC.509년 로마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유니우스 브루터스에 이어 로마의 政體를 바꾼 두번째 인물이 된다.
율리우스 카에사르(Julius Caesar BC.100-44)
몰락한 가난한 귀족가문에 태어나 젊어서 여자를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남의 빚더미
속에서도 기개가 꺾이지않고 야망을 불태운 사나이, 그의 생애 마지막 모험인 당대
명장 폼페이우스와의 일전 중 중대고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토막이 지도자 결핍증에 고민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잠시 신선한 청량제가 되었으면 해서 여기 소개한다.
政略家이며 戰略家인 2000년 전 로마사의 영웅 카에사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 로마의 레미스(Lemis) 방위선을 쳐놓고 팍스 로마나(Pax-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를 구축한 영웅 카에사르는 문장력이 뛰어난 문학적 재능까지 겸비한 당대의 지성인이기도 했다.
1월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 전토를 석권한 카에사르는 3만 군단병력을 이끌고 다시 뒤돌아서 북상하여 西方屬國 스페인에 잔존하는 폼페이우스 휘하 9만 병력의 정벌까지 쉽게 끝냈다. BC.49년 10월이었다.
인솔한 제7 제8 제9 제10, 4개 군단 중 카에사르가 가장 신임하는 제9군단을 먼저 로마로 발진시키고 나머지 3개 군단을 인솔하고 귀국하는 도중 뜻밖에 불길한 전문을 받았다. 이탈리아 북부 내륙도시 피아첸자에 머물고 있던 선발 제9군단 병사들의 집단
종군거부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병사들은 즉시 제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물론 그들도 서방 스페인을 제압하고 드디어 그리스로 도망친 폼페이우스 본진을 치기 위해 東方으로 진군하는 상황에서 사령관
카에사르가 단 한 명의 병사도 제대시키고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시 제대를 요구했으나 본심은 급료 인상이었던 것이다.
피아첸자에 도착하여 그들 앞에 나타난 카에사르 사령관은 예에 따라 단도직입적우로 입을 열었다. 그의 자전적 종군기 [갈리아 戰記]와 더불어 2대 저작의 하나인 [內亂記]에 있는 명연설의 한 대목이다.
"전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사랑 받는 사령관이 되고 싶다. 나민큼
여러분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으며, 경제적으로 넉넉하도록 애써 주는 일을
잊은 적이 없고, 戰士로서의 명예가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다.
인간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지시를 내리는 자와 지시를 받는 자로. 지시를 내리는
자에게는 책임이 있고 지시를 받는 자에게는 의무가 있다.
선생과 학생,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사이와 같은 것이다.
어느 쪽도 각각의 의무를 다함으로써만이 좋은 성과도 기대된다.
폼페이우스와의 항쟁에서는 公正은 내쪽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여기 나를 따라주었다.
그러나 입장은 공정하드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에서 공정을 잃는다면 어찌되는가.
여러분은 로마시민이다. 로마시민이라면 스스로 자세를 바로 갖는 것을 잊는 따위는
용서되지 않는다."
이어 카에사르는 물을 끼얹은듯 침묵에 잠긴 병사들을 향해 분명한 어조로
" 요구는 수락할 수 없다." 고 단정적으로 잘랐다.
더구나 카에사르는 병사들의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군단의 군률로는 최고의 중죄로 다스리는 [10분의 1刑]까지 선언했다.
[10분의 1형]이란 추첨으로 10분의 1의 사람 수를 골라 그를 나머지 10분의 9의 사람이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打殺刑을 말한다.
군률이 엄하기로 유명한 로마군단에서도 아주 무거운 중죄가 아니면 적용하지 않는
형벌이었다.
육중한 침묵이 주위를 압도했다.
카에사르는 그런 것쯤은 신경도 안쓴다는듯이 어서 추첨해서 사형에 처할 병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군단장을 비롯해 대대장 百人隊長 등 군 막료들의 용서해 달라는 탄원이 사령관에게 쇄도했다.
아직 정신연령이 낮은 병사들의 일시 잘못된 생각에서 벌어진 일이니 한번 용서해달라는 막료들의 탄원에 카에사르는 한참만에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30대의 그들과 50대에 접어든 카에사르와는 15 20년의 연령차가 있다.
입을 연 사령관의 말은 [10분의 1형]의 취소가 아니라 집행 연기였다.
"형의 집행을 연기한다. 여러분의 얼굴을 다음 집결지 브린디시에서 다시 보느냐 아니냐는 여러분에 달렸다."
그리고, 카에사르 자신은 수도 로마로 향했다.
북부 이탈리아 속주에서 휴식 중이던 카에사르군의 장병들은 전원 남부 항구도시 브린디시로 출발했다. 도착했을 때 말썽부린 제9군단 장병 중 낙오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말할나위 없이 무서운 [10분이 1형]은 없던 일로 되었다.
2000년을 앞서 로마인들은 法治와 遵法을 생활화 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자화상은 어떤가?
지도자가 지도자따우면 국민도 국민따와진다.
우리는 지닌세기 박정희 하에 그것을 넉넉히 경험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