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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5.18 도청진압진전의 진실

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



5.18사기꾼들이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때 과연 그들은 확인된 객관적 사실을 말하였는가 아니면 허위사실을 유포하였는가? 5.18사기꾼들이 전두환이 광주에서 오천 명을 죽였다고 말하였을 때 과연 그들은 그들이 본 사실을 말하였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와 관련하여 진실은 5.18광주시민군 중 그 누구도 전두환이 누군지 알지 못하였다. 전두환의 얼굴은커녕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란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광주사태 당시 광주를 방문하신 적이 없으셨다.

1989년 광주청문회가 끝난 후 5.18측이 시민군 증언을 채증하였을 때 시민군 이수범은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고 증언하였다 (
http://cafe.daum.net/518cafe/8Xu0/37). 시민군 최진영도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고 증언하였다. 시민군 김행주도 "5·18 당시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었다"고 증언하였으며, 시민군 김용균도 수사관에게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말하였다고 증언하였다 (
http://cafe.daum.net/518cafe/8Xu0/37).

광주사태 당시 5.18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으며, 그저 막연하게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고 외쳤을 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인물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구호를 따라 외쳤을 뿐이었다. 그러면 전두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심지어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던 자들이 "전두환이 광주에서 5천명 학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때 과연 그런 유언비어가 권위있는 학설로 대우받는 것이 가능한가?

그럴진대 광주사태에 대한 학교교육이 잘못되어 왔다. 전두환이란 인물에 대하여 무지하였던 사기꾼들이 퍼뜨렸던 유언비어는 사실도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정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 그런 거짓을 사실처럼 믿도록 강요하려는 거대한 사기행각이 있어왔으며, 사기꾼들에게 속아온 신세대 중에는 광주사태 당시가 전두환 정권 시절인 줄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때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면 어째서 국민이 그 당시까지 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리 있겠는가?

5.18거짓말을 옹호하는 사기꾼들은 학생들이 1980년 봄을 전두환 정권 시절로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그런 역사왜곡은 결코 교육일 수 없다. 오늘 미국에서 대선이 진행 중이지만 누가 당선되든 미국에서 오바마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다. 하물며, 만약 1980년 봄이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면 어째서 국민이 그 모습을 보았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이처럼 5.18사기꾼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은 작전 완료직후 상무관에 안치된 관들과 시체 사진들 및 그 장면에 대해 사실을 왜곡하는 설명으로만 알려져 왔다. 사실을 왜곡하는 설명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당한 이들의 모습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도 되는가? 1980년 5월은 전두환 정권 시절이 아니었으며,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때였는데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고 말하면 되는가? 역사는 결코 그런 거짓말로 기술되어서는 아니된다.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직후 찍혀진 사진은 또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데 이용되어 왔다.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은 보병부대 20사의 작전이었지 결코 공수부대의 작전이 아니었다. 그 작전의 주체는 20사였고, 공수부대는 보병부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약간의 인원의 차출되어 부분적인 지원만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망자 수에 대한 누명까지 공수부대가 뒤집어 써왔다. 도청진압작전 완료 직후 전남도청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는 관들의 시신들은 마치 공수부대원들에게 사살당한 시신들이었던 것처럼 왜곡되어 왔으며, 방송되어 왔다.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시 발생한 사망자 수 및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관들에 대하여 시민군측과 계엄군측 증언이 상반됨을 본다. 그러면 과연 1989년 1월 27일의 광주청문회 때 어느쪽이 거짓말을 하였으며 어느쪽이 진실을 증언한 것이었을까? 바로 위 사진에서 우리는 시민군 실탄을 보는바, 시민군은 실탄 30만발을 보유하고 있었던바, 그렇게 많은 실탄은 국가와 국가간에 전쟁할 때 필요한 것인지 평화시위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흘간 반납을 호소한 후에 시민군의 저런 무기들과 저런 실탄들을 회수할 유일한 방법은 도청진압작전밖에 없었다.
 
- 위의 사진은 5월 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이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도청진압작전이다. 도청진압작전 완료와 더불어 계엄군은 5.18무장단체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회수하였던바 광주에 치안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시민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를 회수함과 동시에 군인들은 폭도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힌 광주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여 주었다.
 
위의 사진 역시 5월 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이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도청진압작전인바 광주사태가 열흘간 지속되는 동안 광주 시내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생겼으며, 5월 27일 아침 성공적인 도청진압작전으로 도청과 시청이 광주시민에게 되돌려지고, 공무원 출근이 정상화되자마자 군인들은 광주시민들에게 생필품을 배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내외신 기자들에게 공개되었던 상무관의 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운동권 방송은 마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가 미리 마련해 온 관들이었던처럼 보이도록 그 장면을 방영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위의 동영상에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 대대장은 그 관들은 도청진압작전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며, 그 시신들은 5월 27일 새벽의 도청진압작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마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에게 사살당한 이들의 관들과 시신들이었던 것처럼 5.18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들이 지난 20여년간 국민에게 보여주어왔던 상무관의 관들과 시신들에 대하여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 대대장이 분명히 알며 증언하는 사실은 그 관들과 시신들은 그 이전부터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며,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인가? 「5.18광주 의거 유가족 」 전계량 회장이 그 단서를 명확하게 증언하여 준다. 1988년 4월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신문기자가 전계량 회장에게 "5.18 광주 의거 유가족 회는 언제 발족 되었습니끼?"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태동은 1980년 5. 24일경입니다. 당시 상무관에는 많은 시신들을 옮겨왔었는데 처음엔 청천 병력 같은 현실에 유가족은 그저 넋을 잃고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향이 시작되고 부터는 7. 8 명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26일부터 분양 소를 지키기로 하고 한편으로는 도청에 있는 수습 대책위와 첩촉 하며 장례식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일단은 27일 도민 장으로 치르기로 합의를 했지요. 그러나 27일 새벽 저들의 가공할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27일 망월동에 무더기로 안장되고 말았지요. 그후 삼우제인 3.1일 망월동 묘지에 90여명의 유가족이 다시 모여 그 자리에서 "광주 사태 유가족 회" 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지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804.html).

그렇다. 그간 군인들이 누명을 써왔던 도청 상무관의 관들은 실제로는 5월 24일부터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시민군이 5차례 교도소를 습격하였을 때 사고를 당한 시민군 시신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교도소 습격 사건은 광주 외곽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5월 21일 야간에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부터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 이전까지는 광주에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떻게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말인가? 전남대 총무과에서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가 추정할 수 있는 사망사고 원인들은 시민군이 일으킨 사고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하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침투하였던 북한군이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이도록 유도했다는 증언이 있거니와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시민군이 반납하지 않은 실탄 수로 계산한다면 시민군은 하루 평균 일만 발씩 발포하였다. 그리고 희생자 총상 역시 대부분 명확하게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그간 공수부대가 누명을 써왔던 5월 27일 아침의 상무관 관들의 진실은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장이 증언하는 대로 그 이전부터, 그리고 전계량 5.18광주 의거 유가족 회장이 증언하는대로 5월 24일부터 이미 상무관에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진실의 토대 위에서 관찰할 때 도청진압작전시 사망자 수에 대해 과연 시민군과 계엄군 중 어느 편이 진실을 말하였는가? 시미군측 증인 정상용은 "적어도 100명 이상은 거기서 죽은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증언이 아니었다. 5.18사기꾼들은 처음에는 수천 명 사망설을 주장하다가 광주청문회 때는 슬그머니 그 수치를 100명 이상으로 내리면서 "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 정확한 숫자도 모르면서 수년간 전국에 수천 명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말인가?

모르면서 숫자 부풀리기하는 시민군측 증인과 달리 계엄군측 임수원은 "시민군 측은 4명 이상 사망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객관적인 사실을 밝힌다. 숫자 부플리기 장난을 하는 시민군측과 달리 임수원은 자신이 들은 보고 그대로 밝힌다. 광주청문회 당시 운동권 방송은 무조건 시민군측 증언만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청문회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밝혀졌다는 말인가? 시민군측 증인 정상용은 시민군 사망자 수 100명 이상을 주장했지만 광주청문회 이후 20년 지난 지금 5.18 단체들도 그 수를 15명으로 축소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상무관의 시신들이 실제로는 도청진압작전 이전의 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청진압작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5명 이하로 내려갈 수 있다.





518광주사태 계엄군 희생자 김응래씨 이야기
 


   광주사태 현장 증인이셨던 이법철 스님은 그가 5월 22일 목격한 계엄군 희생자들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소 장군의 사령관실에서 나오니 하늘에서는 헬기가 무수히 오르내리고, 5월의 잔디밭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병사들이 적국(敵國)의 총탄이 아닌 자국(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관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비 오는 잔디밭에 판초우의 아래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독자여 상상해보시라, 빗속의 잔디밭에 피 흘려 죽어있는 젊은 국군들을……. 그들은 국방의 의무에 채 피워보지 못한 꽃으로 광풍(狂風)에 꽃이 지듯이 죽어 있었다. >

   이어 그는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이 대자보로 폭동을 선동하던 방식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거리의 도처에는 벽보의 대자보(大字報)가 시민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대자보는 하얀 대형종이에 검은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선동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자보에 강조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의 전국의 도시의 시민이 무장봉기하여 광주를 지원하고자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결사투쟁하자는 선동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고 하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허망한 새빨간 거짓말로 시민군의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시민군을 주검으로 내모는 세력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진실한 민주화 세력이었을까? 광주사태에 북한에서 밀파된 북한군의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정권을 잡으려고 환장한 그 지역의 정치인들의 배후 선전선동이었을까? 순진한 민초들의 시민군은 피 흘려 죽어가며 구원의 미군을 기다렸고, 각지의 무장봉기군들이 지원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바람대로 전국적 무장봉기가 현실화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내전과 함께 김정일이 무혈입성하는 호기(好機)가 되었을 것이다. 시민군은 무장을 하여 버스와 트럭에 탑승하여 교도소를 해방하고, 전남의 시군읍(市郡邑)으로 진출하여 무장봉기를 시도하려 했다. 바람에 번져가는 들불을 막듯이 국군은 확산되어가려는 무장봉기를 원천봉쇄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

  이어 이요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착한 간호사로 등장하는 신애의 실제 인물 전옥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광주사태를 목도하면서 여자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절감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데모와 폭동의 발화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여자이다. 일제시대의 광주학생 사건도 한국여학생이 못된 일본 학생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한국학생들을 분기(奮起)하게 만들었다. 일본 동경의 데모대가 폭도로 돌변하여 일본국회로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 폭도들은 데모대 속의 여대생을 죽이고서는 책임을 경찰에게 전가했다. 그것을 선전선동으로 데모대는 폭도로 돌변하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사태에도 여자는 시민군의 분기에 이용되었다. 총을 멘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를 타고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여자가 광주시내를 돌고 돌면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난자하고, 유방을 도려내었다”는 선전선동을 했다. 이러한 선전선동은 광주시민을 분기하게 하였다. 화려한 휴가의 영화 속에서는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에 탑승하여 마이크를 잡고 광주시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다닌다. 그것은 허위요, 날조이다. 진짜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무서운 여자는 간호사가 아니었다. >

   무장세력이 점령하고 있었던 전남도청을 다시 광주시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5월 27일의 상무충정작전은 결코 희생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폭동을 선동하였으며,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무장시민군에게 근 열흘간 무기 반납을 호소하였어도 듣는 이가 없었다.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자들을 위하여 오십 년 백 년 기다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내 5월 27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의 군 자위권 발동 재가가 떨어졌다.  그러나 군인을 향하여 마구 쏘아대는 총탄을 무릎쓰고 돌진하는 작전은 피아간에 20명의 전사자를 내었던 바 그 중에 김응래씨 전우도 있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하러 왔다고 김대중 세력이 퍼뜨렸던 유언비어와 달리 김응래씨는 전라도 여수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군과 국군이 대치하고 있던 지점에서 차마 시민군의 총탄에 맞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시민군의 총탄은 비정하게도 그의 옆에 있던 전우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민군의 총탄이 친구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그에게 또한 안겨주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치료는커녕 위로조차 해주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병들어갔으며 마침내 열차 사고로 그으 불우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광주사태 당시 도청을 광주시민에게 되찾아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군인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들 역시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하였으며, 시민군의 총탄은 그들을 빗겨가지 않았다.  그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있으나, 김응래씨처럼 국립묘지에도 가지 못하고 시민군처럼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에게 가난을 물려주어야만 했던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광주사태의 진정한 피해자들이요 이제라도 그들의 가족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건만, 영화 "화려한 휴가"는 상처 치유는커녕 그들에게 "사람 죽이는 기계" 누명을 씌워 두 번 죽이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유언비어로 선동하고 유언비어에 선동되며 1980년 5월 18일 화염병과 돌을 던지던 시위대



열띤 토론마당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본 518무장시민군의 무장시점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윤기권의 증언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