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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에게 사살당한 이들의 관들과 시신들이었던 것처럼 5.18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들이 지난 20여년간 국민에게 보여주어왔던 상무관의 관들과 시신들에 대하여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 대대장이 분명히 알며 증언하는 사실은 그 관들과 시신들은 그 이전부터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며,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인가? 「5.18광주 의거 유가족 」 전계량 회장이 그 단서를 명확하게 증언하여 준다. 1988년 4월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신문기자가 전계량 회장에게 "5.18 광주 의거 유가족 회는 언제 발족 되었습니끼?"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태동은 1980년 5. 24일경입니다. 당시 상무관에는 많은 시신들을 옮겨왔었는데 처음엔 청천 병력 같은 현실에 유가족은 그저 넋을 잃고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향이 시작되고 부터는 7. 8 명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26일부터 분양 소를 지키기로 하고 한편으로는 도청에 있는 수습 대책위와 첩촉 하며 장례식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일단은 27일 도민 장으로 치르기로 합의를 했지요. 그러나 27일 새벽 저들의 가공할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27일 망월동에 무더기로 안장되고 말았지요. 그후 삼우제인 3.1일 망월동 묘지에 90여명의 유가족이 다시 모여 그 자리에서 "광주 사태 유가족 회" 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지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804.html). 그렇다. 그간 군인들이 누명을 써왔던 도청 상무관의 관들은 실제로는 5월 24일부터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시민군이 5차례 교도소를 습격하였을 때 사고를 당한 시민군 시신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교도소 습격 사건은 광주 외곽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5월 21일 야간에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부터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 이전까지는 광주에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떻게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말인가? 전남대 총무과에서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가 추정할 수 있는 사망사고 원인들은 시민군이 일으킨 사고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하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침투하였던 북한군이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이도록 유도했다는 증언이 있거니와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시민군이 반납하지 않은 실탄 수로 계산한다면 시민군은 하루 평균 일만 발씩 발포하였다. 그리고 희생자 총상 역시 대부분 명확하게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그간 공수부대가 누명을 써왔던 5월 27일 아침의 상무관 관들의 진실은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장이 증언하는 대로 그 이전부터, 그리고 전계량 5.18광주 의거 유가족 회장이 증언하는대로 5월 24일부터 이미 상무관에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진실의 토대 위에서 관찰할 때 도청진압작전시 사망자 수에 대해 과연 시민군과 계엄군 중 어느 편이 진실을 말하였는가? 시미군측 증인 정상용은 "적어도 100명 이상은 거기서 죽은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증언이 아니었다. 5.18사기꾼들은 처음에는 수천 명 사망설을 주장하다가 광주청문회 때는 슬그머니 그 수치를 100명 이상으로 내리면서 "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 정확한 숫자도 모르면서 수년간 전국에 수천 명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말인가? 모르면서 숫자 부풀리기하는 시민군측 증인과 달리 계엄군측 임수원은 "시민군 측은 4명 이상 사망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객관적인 사실을 밝힌다. 숫자 부플리기 장난을 하는 시민군측과 달리 임수원은 자신이 들은 보고 그대로 밝힌다. 광주청문회 당시 운동권 방송은 무조건 시민군측 증언만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청문회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밝혀졌다는 말인가? 시민군측 증인 정상용은 시민군 사망자 수 100명 이상을 주장했지만 광주청문회 이후 20년 지난 지금 5.18 단체들도 그 수를 15명으로 축소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상무관의 시신들이 실제로는 도청진압작전 이전의 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청진압작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5명 이하로 내려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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