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의든 타의든 간에 앉았다 하면 텔레비전을 키는 것이 자동습관이 된지 오래다. 눈에도 나쁘고 건강에도 나쁘고 시간낭비고 바보같이 되어버린다고… 그렇게 해롭다고들 하는데도 고쳐지질 않는다. 얼마나 좋지 않길래 글쎄 영어사전에 텔레비전을 가리켜 ‘Idiot Box’ 즉 ‘바보상자’라고 했을까…… 하면서도 너무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보는데 빼앗기고 있다. 뉴스, 일기예보, 국제정세, 기타 유익한 프로그램들처럼 꼭 봐야 하고 또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가지고 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떨 땐 우두커니 앉아서 보고 있노라면 “뭐 이런 형편없는 것 들을 만들어 놓고 보라고 하는지 정신 나간 사람들 아니야……” 라는 험구가 터져 나오고 마는 일들이 날이 갈수록 빈번해진다. 옆에선 “그냥 조용히 보던지 싫으면 안보면 될 것 아니에요” 하는데 그러지도 못한다. “내가 늙어 빠져서 요즘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현상이겠지 하고 반성을 해보려고도 하지만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왜냐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상식, 이성, 도덕관, 유머감각, 국제감각이 결코 나의 연령과는 관련이 없다고 내 딴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장 방송드라마의 해(害)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나의 취향, 기호가치관에 관한 한 ‘저질화일로’로 치닫고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기준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함양하고 힘있는 나라로 국가구심력을 길러내고, 이를 위해서 국민의식을 선진화 하는 것 이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지상파 방송이 보여주고 있는 내용들이 이러한 국가적 우선과제 달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국력을 약화 시키고 있거나,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때론 완전히 파괴적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혹 국가경제엔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발전, 사회윤리, 공중도덕, 특히 차세대교육 면에서 볼 때에는 얼마나 심각한 해(害)를 끼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도 국민의 대다수가 본다는 방송드라마들이 시청률경쟁에 눈이 어두워져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추악하고 비상식적인 스토리와 악랄하고 막가는 대사들과, 퇴폐적인 몸놀림들과, 부자연스럽고 오버하는 연기들이 범벅 되어 마치 ‘아마겟돈’을 연상케 하고 있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중하다지만 이럴 수는 없다. 이것들은 오락의 수준을 넘어서 우리국민들을 서서히 마약중독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에 필자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방송개혁시민연대’라는 조직이 생겨서 ‘막장드라마퇴출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막장드라마’ 확산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높아지면서 전문가들이 대책마련을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시민연대가 주관한 ‘TV드라마의 위기와 발전방향’ 이란 제하의 토론회에서 모 대학교수는 발제 문을 통해서 ‘막장드라마’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사유를 “매출액감소와 경쟁력 약화로 위기에 처해있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생존을 위해 막장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고 분석하고, ‘일종의 말기적 현상’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또 어느 교수는 “공영방송 KBS와 MBC에서 막장드라마를 앞장서서 만들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시청자들은 말로만 방송의 주인이지 방송의 노예나 다름없다”는 말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 토론회에서 필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 낸 논지는 용인송담대 오명환교수가 지적한 ‘막장드라마의 해외수출’의 문제점이었다. 몇 개의 막장드라마가 한류를 타고 외국에 수출되고 있다고 좋아들 하고 있는 모양인데 돈은 좀 벌게 될는지 몰라도, 외국인들이 우리의 실상도 아닌 이런 막장드라마를 보고 한국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될지 걱정이 아니 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에선 엄청난 돈을 들여 국가이미지(Korea Branding)개선에 올인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지상파 방송들은 한국의 대외이미지 먹칠경쟁에 광분하고 있는 셈이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말하기를 방송문화는 그 나라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내 생각에는 오히려 못된 방송이 들어서 사회악을 조장하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불신과 극단적인 분열과 혼란의 “씨”가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나 순박하고 착하디 착한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처럼 포악하고 사악하고, 타락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탈바꿈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의 개가(凱歌) 그런데 우리방송에도 희망이 없는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 우연히 SBS (토,일)에 방영되는 ‘찬란한유산’이란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 ‘바로 이거야’ 하고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재미있고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방송드라마를 오래간만에 보게 된 것이다. 몇 회분을 보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집사람보고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잠잠해 있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고 했을 정도이다. 이 드라마로 인해서 그 동안 통념으로 여겨졌던 이른 바 “재미있는 방송드라마란 문란하고, 폭력적이고 불륜이고, 사치하고 퇴폐적일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괴변적 고정관념도 통쾌하게 깨뜨려 버릴 수 있게 됐다. 이 드라마야 말로 건전하고, 합리적이고, 교육적이고, 감동적이고, 자연스럽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만든 작품이다. 이 점에서 극본을 쓴 소현경씨와 연출을 맡은 진혁씨를 극찬하고 싶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 분들에게 국가 최고의 문화훈장과 교육훈장을 달아주고 싶다. 전체적으로 도덕성이 살아있고 가족간의 끈끈한 정과 존재의 소중함이 감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자식의 참다운 유익을 위해서 당장의 냉정과 반항을 지혜롭게 다스려나가는 진정한 자녀교육법까지도 제시되어 있고 혼란한 성장기에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갈등과 상처를 겪으면서도 조건 없이 주는 성숙한 사랑과 절제된 애정표현으로 바람직한 사랑의 모습들이 자연스럽고 현실감 넘치는 연기와 함께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군더더기 없는 대사들이다. 모든 대사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억지가 없으며 자연스럽고 향기롭기까지 하다. 그야말로 버릴 말이 하나도 없다. 거기다가 새롭게 다가오는 힘있는 대사들이 있어 감흥 도를 상승시키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할머니가 병상에서 의식을 찾으면서 은성이를 향하여 던진 딱 말 한마디 “기다려” 라던가, 준세가 라이벌인 환이에게 한 “은성이 흔들지마” 라고 한 것 이라던가. 할머니(반효정)가 퇴원하고 반기는 가족들의 변한 모습을 보고 “한번 죽다 살아 볼만하네” 라던가 승미가 은성이 향하여 터뜨린 “살려줘”라고 호소하는 것 이라던가, 환이가 구름다리 위에서 은성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믿는데…좋은데…갖고 싶은데…”등, 평범한 말 같지만 그때그때 장면에 따라 너무도 절절하고 힘있게 가슴에 와 닿는다. 내용이 좋고 대사가 적절하고 흐름이 자연스러우니까 연기자가 연기하기도 좋았던가 보다. 연기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할 수가 있을까. 전문가도 아닌 내가 여기서 그들의 연기까지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 데로, 내 마음에 드는 연기들을 짚어본다면 역시 제일먼저 선우환의 할머니 반효정씨의 연기를 높이사고 싶다. 대한민국의 어른들이 반드시 본 받아야 할 모든 품성을 갖춘 집안어른으로, 교육자로 기업의 관리자로의 이미지를 그 보다 더 훌륭하게 표출해 낼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 동안 반효정씨의 그 많은 역할 중에 가장 뛰어나고 호감이 가는 연기였던 것 같다. 한편 연기만 갖고 따지자면 김미숙의 피도 눈물도 없는 상상도 못할 그 악역을 누가 따를 수 있을까 싶다. 한국 방송에서 보통 악역 하면 소리소리 지르고, 망가지는 몸놀림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김미숙씨는 여성다움과 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과 예절까지 갖춘 세련된 인테리여성의 매력까지 지니고, 여자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리얼하게 연기하여 웬만한 남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릴 정도로 여성적 악의 극치를 그려내는데 성공 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바라는 착하고 다정하고, 예의 바르고 공사구별 할 줄 아는 분별력까지 있고, 또 절제 할 줄 알고, 지혜롭고 명랑하고 재미있는 그런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은 이상적인 젊은이 상을 극중의 은성(한효주)이와 준세(배수빈)로부터 발견 할 수 있어서 참으로 흐뭇했다. 연기를 잘해서인지, 본래 좋은 사람을 잘 택한 것인지 몰라도, 제발 이 나라에 고은성, 박준세 같은 젊은이들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 외에도 출연자 모두가 주어진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이 ‘찬란한 유산’ 이라는 작품 속에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 즉 정직, 믿음, 인내, 용기, 절제 그리고 공정성 같은 원칙을 중시하는 “혼”이 들어가 있기에 연기자 모두가 공감하고 감화 받아서 그 속에 몰입 할 수 있었던 결과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 ‘찬란한 유산’을 관찰 하면서 우리나라 방송과 젊은 세대에 대해서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게 된 것은 이렇게 원칙에 충실한 연예물들이 일반적으로는 상업성이 없다고 보여지는 풍토에서 시청률이 40%를 초과하는 놀라운 기록까지 세웠다는 사실이 놀랍고 자랑스러워 하는 말이다. 규범, 원칙, 정도(正道)를 추구하면서도 얼마든지 재미와 오락성을 갖춘 방송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극본을 쓴 소현경씨와 연출을 맡았던 진혁씨와 책임프로듀서인 허웅씨에게 또 다시 큰 박수를 보내며, 심심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애국을 실천한 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으론 ‘찬란한 유산’과 같은 양질의 방송드라마들이 많이 생산되어, ‘망조’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방송문화를 바로 잡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http://monthly.chosun.com/) 차 윤(주.CPR 대표ㆍ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