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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指月 큰스님의 추억



▲고창 선운사 큰법당.


해인사를 추억하면 내게는 못잊을 스님이 계신다. 지월(指月) 대선사이다. 나는 1960년 중반, 고창 선운사에서 우연히 지월큰스님의 호남 만행길에 만나뵙게 되었고, 해인사로 인도받게 되었다. 사미승인 나는 그 때 해인사가 어디 있는 절인지를 까맣게 모르고, 선운사에서 식당 보이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생의 인연인지, 나는 최초 입산출가의 산문을 두두린 사찰은 선운사였다. 눈내리는 겨울 날, 목탁새 소리가 신비하게 들려오는 숲 길을 걸어 선운사를 찾았다. 훗날, 나의 사형이 될 재정스님, 동철스님, 철웅스님이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맨 나중에 훗날 은사가 될 당시 선운사 주지인 운기(雲起)스님이 누비옷을 입고, 호두알만한 단주를 구을리며 모습을 드러내어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는 등 이것저것 질문했다. 마침내 통과 되었다. 나는 통과된 후 말단 행자로써 온갖 잡일을 시키는데 복종해야 했다.

지금은 선운사가 24교구 본사이다. 그러나 내가 출가할 당시에는 전라북도에는 본사가 김제 금산사 한 곳 뿐이었다. 선운사는 금산사 수말사였다. 그때도 선운사는 동백꽃으로 유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경을 동원하여 비구승에게 해인사를 장악케 한 후, 해인사를 방문, 수복을 축하하고, "해인사는 영원한 수도장"이라는 뜻의 기념휘호를 하고 떠났다. 해인사 해탈문 안쪽.

일제(日帝)는 36년간 이땅을 강점하면서 통치방법의 하나로 우리 전통불교인 비구(比丘)불교를 대처승(帶妻僧) 불교로 만들었다. 1954년, 몇 안되는 비구승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 뵙고 일제불교에서 우리 전통불교로 회복하는데 도움을 간절히 청했다. 일제를 싫어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무려 6차례의 유시(諭示)를 발표하여 “전국 모든 전통사찰은 비구승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힘으로 마침내 소수의 비구승은 승리했다. 오늘의 ‘조계종’이란 비구불교는 이승만 대통령이 세워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출가할 당시에는 아직 전국 도처에 비구, 대처의 대결이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선운사에도 비구승 보다는 대처승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깨달을 때면, 대소 법당 앞에 석유로 불밝히는 장명등(長明燈)의 유리를 매일 깨끗이 닦고, 새벽 도량석과 조석 예불을 하고, 불목한이 노릇, 식당보이의 겸업을 오래 했을 때였다.

당시 선운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운사는 관광객들에게 여관 노릇을 자처했다. 돈을 벌기 위해 당시 선운사는 여관업을 하면서, 영산전(靈山殿) 앞에서 장어요리의 달인, 영광양반이 하루종일이다시피 풍천 장어 대가리에 못을 박아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장어의 배를 갈랐다. 배를 가른 장어에 양념을 하여 숯불 위 석쇠에 구웠다. 장어 굽는 냄새가 영산전을 물론, 온 도량에 진동했다. 보양주라며 복분자라는 술도 팔았다. 나는 그 때 대처승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나는 절대 대처승이 되지 않겠다고 영산전 부처님께 맹세했다.

나는 너무도 서책과는 거리가 먼 불교생활이어서 실망하여 하산을 결심했다. 그 때, 선운사에 지월큰스님이 홀연히 나타났다. 지월큰스님은 나를 대웅보전 뒤로 데려갔다. “자넨... 지금 중노릇을 하는 게 아니야. 여관 보이 노릇을 하구 있구먼.” 지월큰스님은 내게 해인사에 가서 공부할 것을 엄명했다. 나는 그 때 해인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진짜 수도승 노릇을 하기 위해 마침내 나는 선운사를 도망쳐 해인사로 향했다. 그 때 해인사는 총림(叢林)을 시작하고 있었다. 성철(性徹)큰스님이 방장으로서 승속의 대중을 교화하고 있었다. 해인사에서 지월큰스님을 만나니 해인선원장이었다. 그는 나를 해인강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해인강원 강사는 지관(智冠)큰스님이었다. 차제에 지관큰스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나는 해인승가대학’의 11회 졸업생이 되었다. 나는 졸업장을 받은 그날 오후 해인선원에 들어갔다. 지월스큰스님과 선객들이 환영해주었다.

지월큰스님은 어떤 분인가? 삼의일발(三衣一鉢)로 만족하면서 옷은 평생을 기워 입어 누데기 옷이었고, 속옷은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열반할 때 까지 해인사 선원을 떠나지 않은 참선객이요, 진짜 무소유 스님이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다. 선운사에서 만난 은사, 사형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선운사는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범의 수행도량이 되었다. 불교전문강원과 선원이 있다. 젊은 초짜 승려들은 영산전 앞에서 장어를 구워 팔던 나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호랑이 담배 먹든 이야기가 돼버렸다. 어쨌거나 선운사는 이제 비구도량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나의 인생길을 바꿔주신 지월 큰스님도 오래전에 열반에 들었다. 나는 아직도 지월 큰스님이 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나는 지월큰스님의 사상을 본받기로 했다. 나도 만행길에 공부하지 않는 젊은 승려를 만나면, 불교공부 길로 인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엇이 올바른 선배 승려의 인생인가? 아직 깨닫지 못한 후학들을 깨닫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올바른 인생이 아닐까? 인도해주는 대상이 어찌 후학의 승려 뿐일까? 불교를 물어오는 속세 선남선녀들에게도 바른 공부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法徹(대불총 지도법사, bubchul@hotmail.com)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