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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창룡 장군께 분향하여 위령(慰靈)한다

-대한민국은 김창룡장군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 주제로 삼는 김창룡(金昌龍; 예비역 소장, 전 특무부대장)장군은 반공 척결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충성을 바친 장군이다. 그러나 무심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그를 망각해가고, 그 사이 북한정권이 조종하는 진보 좌파단체들은 집요하게 김창룡장군을 매도하고, 대전 현충원에 있는 묘를 이장(移葬)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그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어느 단체가 선봉이 되어 김창룡장군의 묘지 이장을 집요하게 외치며 시위를 하는 것인가? 김창룡장군의 미망인 도상원(都相媛:85)여사는 통탄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 잡은게 왜 죄인가요? 조작하지 마세요. 민족문제연구소 사람들, 이해할 수 없어요. 해마다 대전 현충원에 몰려와서 데모하고 남편 묘를 파내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들이 묘를 파헤치기도 했지요. 억울하고 부끄럽고 분통 터지고 나라 꼴이 한심합니다.“

김일성이 가장 이를 갈며 증오하는 사람은 첫째, 이승만 대통령이요, 둘째, 김창룡 특무부대장이다. 왜냐면 한반도에 김일성왕조를 건설키 위해 해방직후부터 비밀공작을 해온 것이 앞서 두 명의 반공정신에 박살 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로당 총책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부추길 때, 남로당원들과 군부 좌익들이 합세하여 일백만이 무장봉기로 내응 한다고 호언 장담 했었다. 그러나 김창룡장군이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무장폭동으로 내응하려는 남로당계 세력들을 모조리 잠재워 버린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은 물론,북한 빨갱들과 당시 남한 지하에 숨은 빨갱이들도 이를 갈며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룡장군은 중국에서 일본 헌병으로서 대공사찰을 하면서 대륙을 거의 석권한 중국의 장개석군(軍)이 모택동군(軍)에게 패전하여 대만으로 내쫓긴 원인에 대해서 너무도 환히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군이 부패하고, 좌경화 되면 중국처럼 공산화 된다". 중국처럼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한 대(大)를 위해서-나라를 좀먹고 필경은 망치는 소(小)인 군부 내의 부패와 좌익수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소신의 주장을 펼쳤다. 마침내 대를 위한 소(小)를 수사하는 길목에서 괴한들에게 총격을 당한 것이다.

반공척결의 선봉장 김창룡장군은 어떻게 총격을 받았나?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30분 특무부대로 출근하기 위해 지프차로 부대본부인 옥인동 10번지로 향하던 중 원효로 1가 3거리 부근에서 번호판 없는 지프차가 길을 막았다. 지프차에는 군복 차림의 범인들(운전사 포함 3명)이 있었다. 이중 육군 소령 복장을 한 송용고 와 중위 복장을 한 신초식 두명이 차에서 내려 순식간에 미제 45구경 권총 뽑아 김창룡장군의 가슴을 향해 난사했다. 김창룡장군은 가슴과 목 등에 치명적인 4발을 맞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당시 김창룡장군의 나이는 40세였고, 부인 도상원(都相媛)여사와의 사이에 1남 3녀가 있었다.

김창룡은 누구인가? 기록에 의하면, 김창룡은 1920년 11월 23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영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신경의 만주철도회사에서 1년 근무했다. 그 뒤 중국에서 맹활약을 하던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시험을 쳐 합격, 입대했다. 그는 헌병대에서 주로 대공사찰(對共査察)을 담당했다. 그는 헌병대에서 4년 4개월간 복무하면서 군조(중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해방 후 곧바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소군정(蘇軍政)과 인민위원회의 체포였다.

김창룡장군은 고향에서 일본 헌병 노릇을 한 친일파라는 경력 탓에 두 차례나 공산당원들에게 체포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꿈에도 그리운 고향은 그를 죽이려는 공산당의 세계였다. 그는 용케 탈출하여 38도선을 넘었다. 그는 고향에서 겪은 공산당에 대한 치유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지고 남한에서 제3연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부연대장(김백일)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3기에 입교했다.

그는 1947년 4월 19일 소위로 임관한 뒤 제1연대 정보장교로 임명됐다. 당시 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정신을 봉대하여 관동군 헌병시절 대공사찰에 경험이 풍부한 김창룡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1948년 대위로 육군본부 정보처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 때부터 본격적인 ‘반공 투쟁’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창룡장군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1949년 중령으로 정보국장을 맡아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첫 대면에서 이 대통령은 김창룡에게 “공산당은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집단이야”, “이 나라는 반공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 나라야”라며 무엇보다 군부 내 좌익들의 척결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후 김창룡장군은 군내 좌익척결의 선봉장이 되었다.

김창룡장군의 공과(功過)는 있다. 부지기수의 공(功)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여순반란 사건 직후 남로당 박헌영이 심은 군내 좌익세력을 수사하기 위해 강도 높은 숙군(肅軍)을 감행했다. 1948년 12월 30일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검거와, 1949년 4월 1일 이중업(남로당 중앙간부)을 검거했다는 공적으로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이 해 김창룡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 합수부장으로 우리 군 내에 득실거리던 좌익 군인들을 말끔히 청소했다. 이같은 좌익군인들 청소는 이듬해 일어난 6.25 전쟁에서 남한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김창룡의 숙군이 결과적으로 자유대한민국과 이승만 대통령을 살린 것이 되는 것이다.

또 김창룡 장군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던 남로당 조직의 고위층 김삼룡, 이주하, 성시백, 김수임, 남도부, 등 거물들을 모조리 직접 잡아내는 혁혁한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김창룡장군은 박정희 대통령도 절대절명의 죽음 앞에서 구했다. 숙군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던 박정희 소령을 직접 서울 신당동 지하방에서 검거했다. 박정희 소령(당시)이 청렴하고 실력 있는 장교라는 것을 알고 있던 김창룡은 박정희에 간청하듯 말했다. “사상을 바꾸어 자수하세요. 우리가 함께 나라를 살립시다. 내가 박소령을 살리겠다는 약속을 꼭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창룡은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호소했다. 그 결과 박정희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다시 형집행정지로 자유의 몸이 되고, 훗날 군에 복귀하게 된다. 김창룡장군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경제를 살린 박정희, 두 대통령을 살린 것이다.

김창룡장군의 과(過)도 있다. 그는 ‘군내 좌익세력 척결’을 부르짖으며 많은 사람들을 수사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수사도 있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29일 서울시 동대문구 민보단장 고희두는 육군정보국 제3과에 연행돼 수사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검찰의 조사 결과, 고문치사였다. 당시 육군정보국 제3(방첩과)과 이등중사였던 도진희는 주범으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 받았고, 도진희의 상관이었던 김창룡은 육군본부에서 공군본부로 좌천됐다.

또 군내에 일부에서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1950년 10월 김창룡은 대공 전담기구인 육군 특무부대를 창설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을 만큼 신임을 얻고, 막강한 기구를 동원하여 군내 방첩활동이라는 본래의 임무를 넘어선 영역까지 권한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특무대는 각종 선거나 ‘족청계 제거’ 등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였고, 이승만의 독재 강화에 이바지 했다는 것이다. 또 장성 임관 등 군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 시켰다는 과오가 컸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그 불만세력이 김창룡장군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설도 있다.

김창룡 장군이 6·25전쟁 발생부터 1956년 1월 30일, 저격을 받아 사망하기까지 "이승만 대통령 저격범 유시태 사건 처리, 군부의 세 차례 쿠데타 모의 수습, 군의 부정부패 척결, 좌익척결 등 이승만을 중심한 당시 대한민국 체제 전복 예방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장군의 시신앞에 이승만 대통령은 잠옷차림에 외투만 걸치고 달려와 오열하며 이렇게 말했다.“김 장군, 악과 싸우다 악한 자의 마수에 피를 흘리고 가다니! 세상에 대의를 위해 자기를 이렇게 희생하다니!”
이승만 대통령은 오열하면서 격노하여 이렇게 명령했다. “즉시 범인을 체포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장례식 조사를 포함해 3차례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의 시대는 끝나고, 김창룡장군의 묘소는 온갖 지탄속에 안양 야산에 버려지듯 40여년간 묻혀 제행무상을 절감케 했다. 김창룡장군은 1998년에서야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당시 임재문(林載文) 기무사령관의 노고가 빛을 보았다. 임사령관은 김창룡장군이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공덕을 기억한 것이다. 김창룡장군이 현충원에 이장 된 후 진보, 좌파 시민단체들이 몰려들어 이장 해야 한다는 규탄시위를 부단히 열고 있는 것이다.

김창룡장군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진원지(震源地)는 북한 세습독재정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반도를 김일성왕조로 음모하여 "6,25 남침을 한 김일성의 야욕을 물거품으로 만든 김창룡에 대해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앙심으로 북한정권은 김창룡장군이 친일파이고, 역도라는 선전을 해대는 것이다.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종북 진보 좌파들이 이를 복창하는 것이다.

김창룡이 친일파라는 지탄은 받을 수 있다. 왜냐면, 그는 일제 강점시절에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서든 출세를 위해서든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한 것이다. 그것은 20대 때의 일이다. 미소(美蘇)군의 남북 진주로 남북 분단 상황이 되었고, 하루가 멀다 국지전(局地戰)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은 김창룡의 과거를 허물치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 장군의 20대 때의 친일행적을 환히 알면서 대한민국에 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며 김창룡을 중용한 것이다. 따라서 김창룡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충성을 바쳤다.

김창룡장군을 총격한 범인들은 누구였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범인체포에 대한 특명을 받은 특무대는 마침내 김창룡장군의 옛부하였던 허태영 대령을 1956년 2월 23일 체포했다. 특무부대에서 허태영 대령은 자백했다. 권총으로 총격한 행동대 송영고와 신초식, 지프차 운전사 이유회 등이 체포됐다. 그 외 지프차를 제공했던 105범죄수사단 허병익 중위, 특무대 수사방향을 알려주고 피의자들을 숨겨줬던 육군 정병감 이진용 대령, 허태영의 집을 드나들었던 안정수 소령 등이 연행됐다. 또 사건 직후 허태영으로부터 지프차를 샀던 현직 민의원 도진희도 구속됐다. 배후 지시자로 강문봉 중장까지 체포되었다. 최종보고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려는 ‘6,25 남침’, 직전, 직후 남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 총격전을 벌였고, 국지전이 벌어졌다.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이 월북하여 미제와 이승만 타도를 위한 대남방송을 하는가 하면, 대대장이 대대병력을 훈련을 빙자, 장병들을 속여 집단 월북을 하기도 하여 민심이 흉흉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반공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소신을 받들어 실천하는 좌익척결의 악역을 담당하는 군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였다. 그 때 김창룡장군이 악역을 자처하여 좌익척결을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정신은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 까지 전승되었다. 반공의 울타리속에 대한민국은 경제번영을 위해 전심전력하여 오늘의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YS, DJ, ,노무현, MB에 이르는 20년 가까이 진행되는 문민정치는 첫째, 경제난으로 붕괴되가는 북한 세습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지원을 계속하고 있고, 둘째, 임기내에 대졸부(大猝富)가 되는 것이요, 셋째, 북한정권에 보비위하기 위해 대공수사관을 수천명 길거리로 내쫓고, 특무대의 후신인 기무사(機務司)를 위시한 정보기관의 고유한 수사권을 폐지하여 잇빨빠진 호랑이 신세로 전락시킨 것이다. 한국정치에 좌우대결 시대를 열어놓고, 북한에 돈갖다 주는 것이 민주화를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김창룡장군이 목도하면 어찌 격분하지 않을 것인가?

끝으로, 자유대한으로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민주주의가 절정의 꽃을 피우는 평화시에는 김창룡장군 같은 좌익척결의 악역을 자원하는 장군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좌우대결을 조장하는 문민정치 탓에 국내 종북주의자들은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고무된 김정일이 제2 남침의 불장난을 언제 벌일지 예측불허이다. 20대 때의 과오를 씻고 대한민국에 충성하기 위해 좌익척결을 위해 신명을 바쳤던 김창룡장군이 그리워진다. 그같은 장군이 다시 이땅에 등장할 수 있을까? 억울하게 타계한 비운의 김창룡 장군 영전(靈前)에 애도하고, 삼가 분향하여 위령(慰靈)하며, 저승에서라도 대한민국을 수호하여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이법철(bubchul@hotmail.com)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