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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정호용은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리트머스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민주화세력의 위세는 유신시대의 위세보다 더 강했다. 민주화세력이 일으킨 여론에 반하는 말을 하면 곧 이단자요 몰매를 맞아야 하는 마녀사냥의 시대였다. 판검사들도 예외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 만일 판검사들이 민주화세력의 마녀사냥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반역으로 매도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바로세우기재판에서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12.12에도 관여했고, 5.18에도 관여했다는 죄로 1심에서 10년, 2심에서 7년형을 받았다. 죄목은 반란, 내란 중요임무 종사, 내란목적살인죄였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다. 정호용은 12.12에도 관여한 바 없고, 5.18에도 관여한 바 없다.

12.12사건 당시 정호용은 대구에 소재한 50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2심판결문도 이를 인정은 하고 있다.“피고인 정호용은 12.12 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피고인 전두환을 추수하였으므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참으로 어이가 없는 판결문인 것이다. 12.12에 직접은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전두환을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기 때문에 12.12에 대해 책임을 크게 져야 한다는 판결인 것이다.

5.18에 대해서도 그에게는 죄가 있을 수 없다.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단지 7개 공수여단을 전투준비상태로 양병하였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그가 거느리고 있던 3개 여단을 육군본부가 보내라는 곳으로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3개공수여단은 육군본부가 명하는 대로 광주로 이동하여 광주지역의 작전을 관장하고 있던 31사단 사단장 정웅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그가 키우고 있는 병력을 정웅 소장에게 파견시켰을 뿐, 실제로 공수부대를 시위진압 작전에 투입시키고, 이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도록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정웅이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과잉진압의 책임은 정호용에게 있는 게 아니라 정웅에게 있었다. 과잉진압의 원흉이 정웅이었던 것이다.

이는 2군사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의 증언에도 나타나 있다. 5월19일 광주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2군사령관 진종채 장군은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을 대동하고 사태 파악 차 광주 전교사로 갔다. 전교사 사령관 실에는 당시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 2군사령관 진종채, 2군사 작전참모 김준봉, 이렇게 셋이 앉아 사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때 31사단장 정웅으로부터 윤흥정 사령관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난동중인 학생들이 MBC방송국으로 몰려와 경계병의 총을 뺏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에 대해 윤흥정 장군은 “아 여보시오 나보고 어떻게 하오리까 하면 내가 뭐라고 할수 있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사단장 당신이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나에게 물어보느냐는 말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김준봉 작전참모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준봉 장군은 하루 전인 5월18일에도 31사단을 방문했었다. 그 때에도 작전 상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우왕좌왕 하는 것을 보았는데 19일에도 이 모양이니 사태를 그냥 방치하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전이 지속되는 동안은 당분간이라도 31사단장을 전교사 부사령관인 김기석 장군으로 교체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건의했다. 김기석 장군은 정웅 장군 바로 전에 31사단장을 18개월이나 했기 때문에 정웅 보다야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의를 듣고 진종채 사령관은 작전참모 말에 일리가 있다면서 윤흥정 장군에게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그렇게 하면 사태가 진압된 후에 정웅 장군이 무슨 체면으로 부대를 지휘하겠느냐”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광주지역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던 사단장이 스스로 판단할 문제를 멀리에 있는 윤흥정 사령관에게 물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지휘관인가? 자연히 장군들 사이에 화제 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진실이 이러한데도 청문회 시국에서는 정웅이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 국회의원이 되어 영웅노릇을 하며 온갖 거짓말을 지어냈고, 그 거짓말은 여과 없이 언론을 타고 다니며 마녀사냥의 화살로 이용됐다.

위 김준봉 장군의 증언만 보아도 광주작전은 31사단장 정웅이 지휘했고, 정웅은 참으로 한심하게 지휘한 것이다. 그는 무기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는 또한 작전지휘를 무능하게 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5월18일, 그가 7공수여단 2개 대대에 내린 명령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를 완전봉쇄하고 주모자들을 가차 없이 체포하라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시위대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그 길을 향해 몰이를 하는 작전을 택했을 것이다. 이것이 군에서 통하는 시위진압 작전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정웅은 소수의 특전사 장병들을 가지고 수100배 단위의 대규모 시위대들을 포위하여 주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런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열 충돌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과잉진압의 책임은 전적으로 정웅에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호용은 3명의 과년한 딸을 정웅에게 시집보냈을 뿐이다. 며느리를 부린 사람은 시아버지 정웅이었다. 단지 정호용은 명에 따라 오음리에 있는 11공수 여단을 동국대학으로 보냈고, 다시 명령에 따라 동국대에 있던 11공수여단을 광주로 보냈다. 이때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고생하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국대로 가서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했고, 광주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가서 고생한다고 위로를 해주었을 뿐이다. 이는 마치 시집보낸 며느리를 격려하는 친정아버지의 역할과 같은 것이며, 군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지휘관의 도리인 것이다.

필자 역시 포병 소위로 베트남전에 참여했을 때 3명의 병사를 데리고 보병중대에 파견 나가 보병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필자의 원래 소속은 포병대대이다. 포병대대장에게 인사권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병의 작전지역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친정어머니라 할 수 있는 포병 대대장이 작전지역에 와서 필자의 손을 만져주고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 주곤 했다. 이 와 똑같이 정호용이 정웅의 휘하로 파견 보낸 예하부대를 몇 번 찾아간 것은 작전지휘를 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친정아버지로서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해 간 것이다. 마치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가 부대를 찾아가 자식을 면회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를 놓고 재판부는 정호용이 지휘권을 이원화하여 정웅을 제치고 현장에 나타나 살육 작전을 총지휘했다고 판결한 것이다.

왜 많은 시민들과 법관들은 그가 광주학살의 수괴라고 생각했을까?

일반 국민들은 광주에서 시민들을 악랄하게 폭행하고, 발포하여 학살한 원흉이 공수부대들이고, 그 공수부대의 총사령관이 정호용이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크게 부각시킨 사람들은 소위 민주화세력이었다. 이들이 일으키는 노도와 같은 공세에, 진실을 말해봐야 이단자로 몰리거나 변명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몰매만 더 맞아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마치 거대한 홍수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훑어가듯이 민주화세력 앞에서 정호용은 발언권 자체를 잃고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정호용을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찍었을까?

전두환을 광주학살(?)의 수괴로 몰아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두환은 광주작전에 참견한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여가도 없었으며, 그럴 환경도 아니었으며, 참견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런 전두환을 광주학살의 수괴로 몰아가려면 "광주에 죄 없는 전두환"과 "광주작전의 현장 지휘관(?)인 정호용을 두 개의 객체가 아니라 한개의 공범적 객체인 것으로 몰고 가야 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령관겸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주에서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복잡한 사태에 대해 챙길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광주작전은 전문 지휘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수행한 작전이었다. 광주사태는 정규전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어, 일반 작전개념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통상적인 작전이 아니었다. 그런 복잡한 작전을 전두환이 두 개의 중책을 겸직하면서 슬쩍슬쩍 쉽게 관여하고 지시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당시의 지휘체계 하에서 그렇게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그가 광주작전에 개입한 증거도 전혀 없다. 전두환에게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인 것이다.

전두환을 무리하게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끌어들이고, 정호용을 무리하게 12.12에 끌어드린 재판부의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필자에 생각은 이렇다.

민주화세력은 전두환 일당이 12.12로부터 시작해서 5.18을 거쳐 1980년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의 장장 9개월간 최규하를 껍데기로 이용하여 쿠데타를 했다고 주장했고, 역사바로세우기 법관들은 이 민주화세력의 주장을 판결문에 그대로 반영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12.12와 5.18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반역적 쿠데타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몰고 가기 위해서는 먼저 전두환을 광주학살의 수괴로 만들어 가야만 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광주작전에 개입한 증거는 전혀 없다. 전두환을 광주학살에 끌어넣는 유일한 길이 바로 정호용을 이용하는 길이었다.

연결전략은 이러했을 것이다. 전두환을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두환과 정호용이 한 패로 12.12와 5.18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12.12와는 무관했던 정호용을 12.12의 공범자로 몰아가기 위한 근거는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정호용이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한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반란군 수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호용이 12.12이후 전두환을 따르고 도왔다는 것이다. 정호용에게도 광주작전에 아무런 책임이 없고, 전두환에게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결되면 민주화세력이 가장 증오하는 전두환에게 광주학살 즉 내란목적살인죄를 씌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게도 정호용을 12.12 반란죄와 5.18내란목적살인죄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생각한다. 정호용은 필자가 보기에 너무나 억울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바로 정호용의 케이스가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인 것이다.

정호용에 대한 마녀사냥은 이런 식으로 전개됐다. MBC 드라마“제5공화국”은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정호용이며, 그에 의해 4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묘사했다.

1999년5월호 말지는 주영복, 이희성, 전두환이 광주대책회의를 열었고, 거기에서 정호용이 광주사태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서 3여단 및 7여단의 동시 증파를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제4권 29면에서31사단장이었던 정웅의 말을 인용하여 정호용을 광주사태의 수괴로 묘사했다.

”정호용은 5월19일에 광주에 내려가 11공수 3개 대대를 증파하자고 요청했고, 20일에는 3공수 5개대대를, 21일에는 20사단을 증파하자 요청했고, 25일에는 최종진압작전을 하자고 요청하여 주영복과 이희성의 승인을 받아냈다. 발포명령은 윤흥정 전교사사령관과 정호용이 결정한 것으로 안다“

단지 공수부대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정호용은 1988년에“5공특위”(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되면서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급부상하였으며, 이에 따라 야당은 무조건 정호용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4월26일의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야당은 민주화 세력을 업고, 노태우 정권을 코너로 밀어 부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태우 정권은 기상천외한 3당합당에 대한 물밑작업을 벌였다. 3당합당의 전제조건은 내각제 채택과 정호용 및 이원조의 용퇴였다. 정호용은 광주학살을 주도한 총사령관이었고, 이원조는 권력비리의 핵심이라는 이유에서였다.

3당합당에 임하는 김종필과 김영삼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김종필은 내각제를 통해 권력을 잡아보려 했고, 김영삼은 일단 들어가서 여당의 힘을 업고 대통령이 되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적은 정호용이었다. 정호용이 민자당에 있는 한, 차기 정권은 정호용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명분은 광주학살의 수괴인 정호용과는 당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호용 축출에 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3당합당은 노태우에게 절체절명의 명제였다. 노태우는 정호용이 12.12에도 관련되어 있지 않고, 5.18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정호용을 광주학살의 수괴인 것으로 확고하게 형성돼 있었다. 만일 정호용을 당에 둔 채로 3당합당을 하게 되면 김종필, 김영삼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입지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노태우에게도 이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

결국 정호용은 “한번만 봐 달라”는 노태우의 끈질긴 설득으로 1990년1월8일에 의원직을 사퇴했고, 2주 후인 1월22일에는 합당이 선언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정호용의 부인은 자살을 기도했다. 이후 정호용은 4월3일 대구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안기부의 밀착감시와 방해로 중도에 사퇴했다. 이렇듯 정호용은 민주화세력에 의해 광주학살의 수괴로 몰려있었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역시 이러한 여론을 뒤집지 못하고 여론 그대로 판결문에 반영했다. 그야말로 마녀사냥인 것이다.

2005년 어느 기자가 정호용을 인터뷰했다.“온화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인상이 너무 좋다”“저런 분이 사령관이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정호용은 뿔이 달리고 우락부락한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가 그렇지 않아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에 대한 이미지는 민주화세력에 의해 완전히 왜곡돼 왔던 것이다.

잠시 특전사에 대해 알아보자. 특전사의 모체는 특전부대로 1958년에 창설됐다. 당시 미국에 유학하여 특수레인저 코스를 받은 최초의 장교들은 전두환, 차지철, 장기오, 최세창 등이었다. 이들은 한국군 최초로 윙 배지를 달았다. 1968년1월21일, 김신조가 1개소대를 이끌고 청와대로 침투했다. 그 때 처음으로 북한에 비정규전특수부대인 124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같은 해에 즉시 특수전사령부가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공수는 김포에서, 3공수는 거여동에서, 5공수 및 9공수는 인천 근방에서, 7공수는 논산 부근에서, 그리고 11여단은 오음리에서, 13여단은 증평에서 창설되었다. 도합 7개 여단인 것이다. 초대 사령관에는 조문환, 2대에는 조천성, 3대에 정호용, 5대에 박희도, 8대에 민병돈 장군이 역임했다. 이들 사령관들은 모두 온화한 인물들이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