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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청문회 당시의 민주화시국

5공시대는 공안과 민주화 세력이 용호상박으로 충돌하는 전환기의 시대였다

5공시대는 그야말로 공안과 민주화 세력이 용호상박으로 충돌하는 전환기의 시대였다.
사회주도세력이 5공으로부터 소위 민주화세력으로 전환되기 위해 치르는 비정규전 시대였던 것이다. 1985년에는 김근태가 언론을 장식했다. 민청련의장으로 학내시위와 노사분규를 조종한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이근안으로부터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1986년에는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 불거졌다. 위장취업을 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고, 인천 5.3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한 것이다. 1987년 2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군을 "민주화" 사건 관련 주요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알기 위해 취조하다가 사망시킨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이련의 사건들은 민주화세력에게 5공을 공격하기 위한 절호의 빌미가 되었고, 이로 인해 5공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5공은 마지막 정공법을 택했다.
그해 4월,‘4.13호헌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일체의 민주화요구를 거부할 것이고, 개헌논의를 중단할 것이며,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는‘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5공화국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되었다. 다급해진 민정당은 6·29선언으로 새로운 국면전환을 꾀했다.

1987년 8월5일, 노태우가 정식으로 민정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5공화국의 집권세력과 야당 및 재야세력 간의 팽팽한 대결국면은 어느 정도 완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결국면이 완화되었다는 것은 곧 목이 졸린 군사정권이 항복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시점이, 민주화세력이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하는 전환점(Turning Point)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돌리는 주자들의 바통이‘반공의 군사정권’에서 ‘용공의 민주화세력’으로 넘어간 것이다.

드디어 10월12일에는 국회에서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단임제를 골간으로 하는 새 헌법안이 확정됐고, 이는 10월27일 국민투표에 의해 93.1%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2월16일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직접투표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6년 만에 되찾은 직접선거였던 것이다.

한편 1987년 12월의 대선에서 패한 민주당과 평민당은 패배의 후유증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그 책임을 지고 김영삼 총재는 2월8일에, 김대중 총재는 3월17일에 총재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야당은 5공비리 청산에 대한 들끓는 여론의 덕으로 1988년4월26일에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다.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이 되어 이른바 여소야대가 출현한 것이다.

여소야대의 국회가 형성되면서 민주화세력의 공세가 가일층 업그레이드 됐다. 5공비리와 광주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터졌다. 야3당은 6월 국회에서‘5공특위’를 발족시켰다.
88년6월27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했고, 민정 12명, 평민 7명, 민주 5명, 공화 3명, 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을 특위에 선임했다.
광주사건의 철저한 진상을 규명하고, 광주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자에 대해 배상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것들이‘5공특위’에 부과된 임무였던 것이다.

88년7월8일, 특위는 평민당의 문동환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그해 12월30일까지 6개월여 동안 진상조사활동을 폈다. 13대 국회가 국정조사에 동원됐고, 조사의 일환으로 청문회가 뜨겁게 열렸다. 17년 만에 부활된 청문회였다. 권력비리조사특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문공위원회들이 연이어 청문회를 열고 이는 TV로 생중계되어 모든 안방을 흥분시켰다.

11월2일에 열린 국회 5공비리특위의 제1차 청문회에서는 일해재단에 대한 비리가 다루어졌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이 차례로 발언대에 나가 5공비리의 확실한 청산을 다그쳤고, 전두환의 증언은 “증언이 아니라 변명이다” “알맹이 없는 말을 계속해서 뭐하자는 거냐” 등등 고함과 삿대질이 난무했다.

TV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각자마다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비리와 광주사태에 대한 인식을 창조했다. 전두환과 그 일가는 비리로 돈을 챙긴 집안이고,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살인집단의 수괴로 인식됐으며, 공수부대 총사령관 정호용은 전두환과 육사 동기로 광주학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살인마가 되었다. 불확실하고 검증되지 않은 의혹들이 확신으로 굳어진 것이다.

청문회는 민주화세력의 의도대로 각색되었고, 허위를 말하는 사람들은 증언대에 섰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증언대에 설 수 없었다. 진실을 모르는 국민들의 머리는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민주화세력이 작성한 시나리오에 따라 여론이 형성돼 있는 상태에서 5공 역사의 당사자들이 하는 말은 모두가 거짓이요 변명으로만 들렸다.

“죽여라 죽여!”88년10월과 11월에 전두환 및 이순자를 구속 처벌하라는 투쟁이 개시됐다. 학생들이 전두환 체포조를 구성했고 연희동 근처는 연일 계속된 시위로 최루탄 가루로 범벅이 됐으며,
연희동 골목은 화염병에 의해 불바다가 됐다. 드디어 1988년3월31일 전경환이 구속되고, 이어서 맏형인 전기환, 처남인 이창석, 사돈, 동서 등 등 친인척 20여명이 그해에 모두 구속되었다.

이에 전두환은 4월13일,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집안 동생 하나 단속하지 못한 것은 나의 불민함과 부덕함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는 국가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을 포함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렇듯 상황이 악화되자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서울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드디어 전두환은 11월23일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그는 사과문에서 재임기간 중 발생한 모든 비리와 과오를 시인하고, 공식 사과하며 어떤 비난과 추궁도 각오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민에게 속죄하는 뜻에서" 사재와 남은 자금 139억원을 헌납하겠다고 밝혔다. 노태우로서는 전두환의 사과성명과 백담사 은둔으로 5공청산은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광주의 발포책임자를 처벌하고, 12·12사건과 5·17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5공비리의 책임자인 전두환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1989년1월27일 그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이 구속됐고, 이어서 이학봉마저 구속되었다.

반면 88년6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광주특위는 1989년12월31일, 백담사로부터 온 전두환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특위활동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고서는 91년5월에 나왔다.
광주특위는“신군부는 12.12에서 5.17로 이어지는 정권찬탈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미국은 이를 방조한 의혹이 짙다. 80년5월 광주항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완전한 진상규명은 역사의 과제로 남는다는 뜻이었다.

문동환 위원장은 보고서의 권두언에서 "많은 증인들의 출석 거부, 정부의 자료제출 거부, 제출된 자료의 조작, 많은 증인들의 위증 혹은 궤변으로 조사는 계속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기술하여 특위의 조사가 완전치 못했음을 자인했다.

이들은 규명하기를 원했던 핵심 이슈는 누가 발포명령자였는지, 누가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들은 가해자들이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국회가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며 규명의 한계를 노태우 정권에 돌렸다

2008.3.26.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