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에 한국사회는 고액의 TV 등 인터넷 언론광고 배너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구호하자고 전국민을 상대로 모급을 해오고 있다. 한 달에 3만원씩을 기부하라는 운동이다.
중견 탈렌트 등이 TV 광고에 등장하여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자고, 국민을 향해 음색을 슬프게 하는 연기로 광고를 하는 것이다. 뼈만 앙상히 남은 아프리카 어린이가 다 죽어가는 듯한 사진을 보여주며, 중견 탈렌트는 말한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매월 8천 여명이 넘게 영양부족으로 죽어간다면서 매월 3만원씩 돕자는 것이다. 어떤 광고에 나온 젊은 남자는 “당신은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어린이에 돈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 이상한 광고도 한다.
대륙 아프리카에 태어나는 어린이들의 영양공급을 해주는 책무를 느끼게 해주는 광고에 동정심을 유발시켜 “매월 3만원씩을 내라”는 광고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과연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 과거 6,25 전쟁 때 어느 미국인이 우리의 전쟁 고아인 걸레같은 의복에 뼈만 남은 어린이들의 사진을 미국 등 선진국 언론에 보여주고, 비참한 동정을 느끼게 한 후 동정의 구걸같은 돈을 모금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우리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내세워 동정의 돈을 국민들을 상대로 매월 3만원을 내라는 모금(募金劇)을 연출하고 있어 경탄과 의아심이 들기도 한다.
첫째, 의아심이 드는 것은 무슨 돈으로 고액의 TV 등에 광고비를 들여 국민들에게 동정의 모금을 하느냐는 것이다. TV광고만이 아니다. 인터넷 언론 등 언론사에 고액의 광고를 계속한다. 아프리카의 대륙의 어린이를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인사들의 통 큰 도량, 사랑, 자비심에 경탄이 나올 정도이다.
아프리카의 불우한 어린이를 내세워 고액의 TV 등에서 모금하는 단체가 어느 단체인지 국민들에게 선명하게 밝혀주기 바란다. 불쌍한 어린이를 내세워 모금을 벌이는 또하나의 고급 “앵벌이”가 아닌지 배후를 국민들에게 석명(釋明)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냉정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통찰하면 어찌 작금의 한국사회가 아프리카 어린이만을 상대로 모금을 할 처지인가?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 빈부의 격차는 나날히 심화되고, 부자는 부(富)를 사회에 통 크게 기부하지 않고, 오히려 빈부갈등을 조장하는 측면도 없지 않은 한국사회이지 않는가?
예컨대 미국의 부자들인 빌게이츠와 워렛 버핏 등은 이유없이 거액으로 사회에 선행의 기부를 해오고 국제사회에 찬사의 화제를 받고 있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한국부자들의 대명사인 현대, 삼성 등은 “탈세” 등으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게 되고, 언론에서 맹비판을 해대고, 국민들이 지탄하면 비판하는 국민 여론을 잠재우고, 무마하기 위해 약간의 기부금을 정부에 내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기부금이 어디로 쓰여지는 지는 국민은 소상히 알 길이 없다. 직설하면, 한국의 부자들은 제잘못이 발각 되었을 때, 무마용 돈을 기부하겠다 나서는 추한 자들의 속셈이 있을 뿐이다. 빌게이츠, 워렛 버핏적인 통 큰 기부는 없지 않은가?
얼마전 삼모녀가 가난의 고통속에 신음하고 절규하다가 살길의 대책이 없자 월세사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극빈의 고통속에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해주지 않고 모른척 하는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비판 목소리가 비등했다. 어찌 삼모녀만의 비극뿐일까? 불우한 인생에 희망이 없자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하는 남녀가 년간 1천오백이 넘는다고 한다. 어찌 한강 뿐일까? 전국 도처에서 대물림하는 가난의 고통속에 신음하다가 스스로 통곡하며 목숨을 끊는 남녀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일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자국민이 도처에서 불우한 가난의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목숨을 끊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외면하고, 오직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구하자고 고액의 광고를 내고 모금 활동을 벌이는 작태가 문제이다. 자국민(自國民)은 선행의 대상이 못되는가? 저 거대한 대륙 아프리카의 어린이들만이 동정심으로 모금운동을 벌여야 하는 한국사회인가? 그렇게 해야 돈지갑을 열어 보시하는 한국인들이라는 분석의 결론에서인가?
아프리카의 성인 남녀들은 대책없이 아이를 낳고, 한국인은 그 아이를 위해 동정론을 펴며 모금하자는 것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돈을 몽땅 아프리카 어린이의 구호를 위해 바쳐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연속하여 태어나는 어린이들을 전부 구호할 수는 없다고 분석한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부모가 생활비를 벌어 자신이 낳은 어린 자녀들을 영양가 있게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주장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 섹스의 즐거움, 즉 남녀궁합은 왜 맞추나?
결 론
이 글은 한국인들이 매월 3만원씩 불우한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돕자는 선행에 쌍지팡이를 짚고 반대론을 펴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 우리의 불우한 어린이를 미국 등 선진제국에서 도와주었듯이, 이제 우리보다 못한 불우한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것은 설득력 있는 인류애에 대한 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는 불우한 경제사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남녀들, 고통속에 신음하는 어린이가 너무도 많다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선의 순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디서 고액의 TV 등의 광고비가 나오는 것일까?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동정 모금극의 광고는 재벌 회사보다의 광고보다 더 크다. 대다수 국민들은 아프리카 어린이를 팔아 부정 축재하는 고질적인 “앵벌이”가 아닌 깨끗한 선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항설(巷說)은 너무 큰 광고비를 쓰는 수상한 운동에 사직당국(司直當局)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한다. 불우한 자국민은 선행의 대상이 아닌가? 나는 주장한다. 아프리카 어린이도 구호해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한국사회 도처에 가난의 고통, 불우한 고통속에 구호의 손길을 고대갈망하면서 죽어가는 자국민(自國民)과 어린이부터 구호해야 할 것이다. ◇
이법철(대한불교언론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