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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對北풍선 막은 정부 편든 판결은, 북한정권의 공갈에 재판이 영향을 받은 첫 사례

北이 南의 애국자를 잡아서 북송시키지 않으면 서울을 포격하겠다고 나온다면?

며칠 전 의정부지법 민사9 단독 김주완 판사는 對北전단 활동 방해로 입은 정신적 피해 등에 대해 배상금 50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이민복(탈북자) 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6일 기각했다.


이와 관련, <문화일보>는 지난 7일자 사설에서 “북한의 협박을, ‘김정은 체제 반대운동’ 제약의 근거로 삼은 것은 문제가 많다. 이를 확대해석하면 북한 권력이 반대하는 일은 정부가 막아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문화일보>는 “재판부가 원고의 행위를, 기본권 제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헌법 제37조 2항의 비례 원칙을 거스른 위법 소지까지 짚인다”며 “당국의 제지가 과연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 피해의 최소성 및 법익 균형성을 두루 갖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재판부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다.

<문화일보>는 이어 “재판부는 북한의 위협을 강조할 게 아니라, 당국이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은 북한 위협임을 짚은 뒤 손배 다과(多寡)를 판단했어야 했다”며 “대한민국 사법부가 독재자 협박에 장단 맞추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對北풍선에 대한 북한군의 협박에 한국 판사가 영향을 받아 신성불가침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내용의 선고를 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에서 표현된 고상한 법정신과는 사뭇 다른 '겁쟁이' 법치를 연상시킨다. 가령 북한정권이, 김정은을 모독하는 드라마를 방영하면 방송국이 있는 상암동을 포격하겠다고 공갈 치고 이에 굴복한 정부가 방영을 강제로 중단시킬 때 이런 판사는 정부의 越權을 적법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정권이 김정은을 비판하는 애국자를 특정, 북송하지 않으면 서울에 장거리 포격을 하겠다고 공갈 칠 때 이런 판사는 정부의 北送 행위도 적법한 것이라고 선고할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북한정권을 主敵으로 삼는 국군을 해체시키지 않으면 서울을 核미사일로 공격하겠다고 나올 때 이런 판사는 정부의 국군 해체 행위 같은 이적 반역 행위도 정당하다고 판결하지 않을까? 反인도범죄집단으로 낙인된 북한정권에 대한 분노나 정의감이 느껴지지 않은 판결이었다.

이번 선고는 反국가단체의 공갈에 사법부가 굴복한 최초의 경우일 것이다. 국가생존 차원에서 묵과할 수 없는 판결이다.

비슷한 故事가 있다.

12세기 초, 北宋은 金과 연합, 宿敵(숙적) 거란(遼)을 친 뒤엔 비밀리에 거란과 동맹, 金을 공격, 失地를 회복하려 하였다. 일종의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꾀는, 거란의 天祚帝(천조제)가 金에 붙들려 宋이 보낸 密書가 발각되면서 파탄나기 시작하였다. 배신당한 金은 宋을 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켜 宋의 수도 개봉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개봉에선 主戰派와 강화파가 서로 싸웠다. 宋이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하자 金은 일단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나 宋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남침하였다.

靖康 원년(1126) 11월, 金軍은 한 해에 두 번째로 황하를 渡河(도하), 개봉을 에워쌌다. 金軍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자 開封城은 籠城(농성) 40일 만에 함락되었다. 재화를 약탈당하고, 부녀들은 끌려가 욕을 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가 대번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金軍에 복무했던 燕京의 漢人들이 약탈의 안내역이었다. 역대 황제, 특히 徽宗의 콜렉션이었던 書畵·골동품 등은 인기 있는 약탈물이었다. 휘종과 흠종 父子는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金國이 필요로 하는 기술자·예술가 등 수천 명이 북쪽으로 끌려갔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靖康의 變(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렇게 宋왕조는 개국 167년 만에 멸망했다. 이 왕조를 중국史에서는 北宋이라고 한다.

北宋의 잔존세력은 양자강 남쪽으로 피란하여 南宋을 세웠다. 南宋엔 秦檜(진회)라는 權臣이 나타나 利敵행위를 하였다. 그는 1127년 北宋이 金에 멸망할 때 어사대장관(감찰원장 격)이었는데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 金軍에서 부역하다가 가족을 데리고 南宋으로 넘어왔다. 金 나라 군인들을 죽이고 탈출하였다고 했으나 金이 간첩으로 써 먹기 위하여 살려 보냈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 眞僞(진위)는 알 수 없지만 南宋의 재상으로 복귀하여 한 행동은 간첩질이었다. 문제는 간첩질이 늘 평화와 화해를 앞세운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기 싫어하는 황제에겐 달콤한 정책 대안이었다. 진회는 황제를 설득, '對金 햇볕정책'을 펴면서 主戰派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1140년과 이듬해 金軍은 올출 장군의 지휘하에 南宋을 치기 위하여 남하하였다. 이때 南宋軍은 여러 방면에서 金軍을 격파하였는데 그때마다 진회가 고종에게 아뢰어 이기고 있는 남송군을 철퇴시키고 勝將을 좌천시키거나 파면하였다. 올출은 진회를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

'강경론자 岳飛를 죽이지 않으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진회는 악비 父子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宋의 눈물' 저자 정순태씨는 秦檜(진회)를 '金의 고정간첩'이라고 단정하였다. 진회는 제 명(65세)대로 살고 죽었는데 최후까지 利敵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한 從北派 거두의 일생 같다.

南宋의 영종 시절 대신 한탁주는 主戰論을 내세우고 1206년 金을 쳤으나 대패했다. 金은 이 침략사건의 책임을 물어 영종에게 韓의 목을 요구했다. 宋朝는 韓을 암살한 뒤 그 목을 상자에 넣어 金에 보냈다. 金은 韓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일본의 중국사 大家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이렇게 평했다.

<무력에 자신이 있었던 여진족의 국민주의는 敵國의 입장을 인정할 정도로 아량이 있었으나, 국력이 쇠퇴하여 敵國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南宋은 강력한 민족주의에 눈을 떴으나 이것은 단순히 신경질적인 적개심으로서만 발로되었다.>

宋은 경제적·문화적인 富國이었으나 지도층이 文弱, 경제력을 自主국방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끝내는 몽골에 망하였다. 돈으로 決死抗戰 정신을 만들지 못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송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

*宋과 한국은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자주국방과 尙武정신을 잃어간 점에서 같다.
*경제, 문화, 예술은 발달하였으나 애국심과 단결심과 지도층의 청렴성이 부족하였다.
*文尊武卑(문존무비)의 폐단이 많았다.
*외교에 의리가 없었다.
*지도층이 敵前분열하였다. 화평파가 金의 공갈에 넘어가 利敵행위를 하였다.
*진회와 같은 간첩이 애국자들을 죽였다.
*웰빙 체질의 살찐 돼지 같은 宋을 노린 야윈 늑대 같은 북방민족들이 있었다.

宋이 중국 역사상 가장 부자 나라였듯이 대한민국도 韓民族 사상 최고 부자이다. 宋의 패망은, 배부른 군대가 배고픈 군대에 먹힌 경우이다. 한반도의 '배고픈 나라'는 북한이다. 세계사의 한 법칙은 남북 대결에선 거의가 정신력이 강한 北의 승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런 점에서는 예외적이다. 풍요를 즐기면서 강건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풍요를 즐기던 영국의 전성기에 '영웅 숭배론'을 쓴 토마스 칼라일은, '가난을 이기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한 명도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한국인들도 가난과의 싸움에선 이겼지만 풍요와의 정신적 싸움에선 지고 있다. 對北풍선에 대한 북한군의 공갈에 넘어가 풍선을 보내는 애국자들을 핍박하고 제약하는 판사, 정치인, 언론인들을 보면서 야윈 늑대에 끌려다니는 살찐 돼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출처 조갑제 닷컴 조갑제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