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운동권 세력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계열은 북한의 주체사상 추종 여부에 따라 다수파인 NL주사파와 소수파인 NL비주사파로 분류된다.
憲裁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에서 “피청구인(통진당) 주도세력의 다수가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주요 구성원들로서 과거 민혁당 및 영남위원회, 실천연대, 일심회, 한청 등에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자주, 민주, 통일 노선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북한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고 摘示(적시)했다. 따라서 해산된 통진당의 주도세력은 NL주사파로 분류된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지도이념이다. 북한 憲法의 서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노동당규약’에서는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 ▲조선로동당은 주체사상을 당건설과 당 활동의 출발점으로 당의 조직․사상적 공고화의 기초로,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는데서 지도적 지침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배경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모택동의 공산주의 사상에 이론적 배경을 두고 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1844년《경제학-철학 원고》에서 “인간이 자기의 노동에 의한 생산품을 자기가 완전히 統率(통솔)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讓渡(양도) 한다면, 바꾸어 말해서 노동자가 자기를 위해 물건을 생산하지 못하고 자본가를 위해 생산한다면 이는 자기 생활에 주인이 못되고 從(종)이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또 “인간은 思惟(사유)기관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며 물질세계를 자기의 의도에 따라 合目的的(합목적적)으로 개조하고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며 “인간이 인간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공산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意識的(의식적)인 것만이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닌은 여기서 시종일관 프롤레타리아에게 계급의식과 혁명사상을 주입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임을 자각시키고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투쟁을 전개시키기 위한 혁명 지침서와 같은 것으로 여기에서도 주체사상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모택동은 1938년 10월 黨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아래와 같이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이른바 ‘주체적 사상’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이론을 하나의 공식으로 보지 말고 행동 강령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의 文字(문자)를 배울 필요는 없으나, 그들의 관점이나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중략) 그리하여 중국의 특수성에 맞도록 마르크스주의를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 4월 제7차 黨대회에서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 혁명 실천의 통일된 사상인 모택동 사상을 自己(자기)의 모든 사업의 지침으로 삼고 어떠한 敎條主義(교조주의)적 또는 경험주의적 偏向(편향)도 이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주체성을 강조하며 모택동 일인독재의 기초를 확립했다.
주체사상의 형성과정
북한에서 ‘주체성’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북한은 1955년 ‘사상에서의 주체’를 시작으로 1956년 ‘경제에서의 자립’, 1957년 ‘정치(내정)에서의 자립’, 1962년 ‘국방에서의 自衛(자위)’, 그리고 1966년 ‘정치(외교)에서의 자주’를 표명하면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이후 ‘주체사상’이라는 명칭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에 접어들면서부터이며 1970년 제5차 黨대회를 통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등한 위상을 점하며 노동당의 공식이념으로 채택됐다. 이후 1980년 제6차 黨대회에서 주체사상이 북한의 독자적인 통치이념으로 자립 잡게 됐다.
주체사상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제국주의 사상과 문화 침투에 대한 민족주의적 대응의 성격을 강하게 표출하며, 이른바 북한주민의 주체의식을 확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치적으로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소련 및 중국 내 수정주의자들에 의한 일인독재 체제의 비판을 촉발시킴에 따라 이러한 비판을 차단하면서 북한의 독재체제를 옹호하는데 주력했다. 대외적으로는 中蘇(중소) 간 교조주의자 대 수정주의자의 이념분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독자적 생존을 위해 中蘇사이에서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외교적 대응이 정치 이념적으로 표출된 측면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은 김일성 개인 우상화에 치중하며 주체사상의 ‘김일성주의’로의 이론적 변환작업을 시도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적 인간형으로 김일성의 소년시절이 제시되는가 하면, 인간에게 육체보다 더 중요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주는 존재가 바로 김일성 수령이라는 우상화 논리가 전개됐다. 혁명과 건설을 추진하는 주체인 인민대중의 정점에 수령이 존재하며, 인민대중을 인도하는 知的(지적) 영도자의 역할을 수령이 담당한다는 ‘수령론’은 개인우상화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수령론’은 인민대중이 개별적 이해관계의 차이를 상호 극복하는 데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수령의 올바른 지도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을 우상화하기 위해 세습수령에 대한 지속적 충성심을 강조하는 작업이 더해졌다. ‘주체의 위업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만큼 代(대)를 이어가며 주체의 위업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유례없는 부자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습왕조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시각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동구 사회주의권과 소련이 연속적으로 붕괴됨에 따라 북한은 체제의 위협을 느끼고 주체사상의 논리적 보강을 통해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체제수호를 위한 대안논리로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해석된 주체사상은 북한식 사회주의가 이미 붕괴한 동구권 사회주의와 어떻게 차별화 되는지를 설명하고, 북한 사회주의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주력했다.
주체사상의 한계
북한의 공식포털 사이트 <내나라>에 게재되어 있는 주체사상 강좌에 따르면“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주체사상은 이 원칙에 입각해 혁명과 건설의 주체와 원동력을 인민대중에게 歸着(귀착)시키고 있다. 주체사상의 이 같은 내용은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주체,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自衛(자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주체사상에서 자주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며, 이 집단의 의지는 수령의 것이어야 한다. 결국 자주의 주체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귀결된다. ▲사상에서의 주체 및 정치에서의 자주는 북한이 다른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경제자립, 국방에서의 自衛도 북한의 3대 세습체제에 대한 외부 간섭의 근거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
결국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의 당위성을 전개하는 논리체제에 불과하다. 조선노동당의 남한 지하당인 한국민족민주전선(現 반제민전)은 1987년 3월 <구국선언>을 발표하면서 “남조선의 오늘의 정세는 8·15 해방 이후보다 낫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남한 내 從北·左翼세력이 주체사상으로 무장됐으며, 그 조직이 매우 강화됐음을 북한이 인정한 것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곳이고 그 모습대로 남한의 從北·左翼세력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김일성의 敎示(교시)는 그 자체로 많은 오류를 낳았다. 그의 교시는 이른바 ‘주체농법’, ‘주체공업’ 등의 강령적 지침이 되어 실천됐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주체의 경제가 파산됐음을 우리는 직접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주체의 경제’(김일성의 敎示에 따른 경제) 탓이 아니라 舊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로 사회주의 경제권이 무너진 데다 미국과 남한의 ‘反北정책’ 때문에 북한이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혁명의 계승문제에 대해 김일성은 “혁명은 한 世代(세대)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代를 이어가며 성사해 나가야 한다. 혁명 성패의 관건이 후계자의 문제에 있다”면서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雪上加霜(설상가상)으로 김정일은 2011년 사망하기 전 자신의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삼아 3대 세습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권력세습은 과거 봉건적 신분제도의 유물로 공산당의 강령인 ‘反帝’(반제), ‘反봉건’에 위배되는 것이다.
셋째, 남한 내 左傾세력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주체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국통일’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다. 남한 사전에는 ‘조국’과 ‘통일’이란 낱말은 있어도 ‘조국통일’이란 낱말은 없다. 그러나 북한 사전은 ‘조국통일’이란 낱말이 따로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통일’은 단순히 군사분계선을 없애고 갈라졌던 민족과 국토를 재통합하는 분단국 재통일이 아니라, 外來(외래) 제국주의 세력(대표적으로 美國)에게 빼앗긴 영토와 인민을 되찾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북한과 남한의 從北·左翼세력이 주장하는 ‘조국통일’은 ‘남조선 혁명’과 表裏一體(표리일체)의 관계이며, 투쟁대상도 外來(외래) 제국주의세력과 現 대한민국 정부이다.
이 때문에 從北·左翼세력은 북한식 ‘조국통일’의 전제조건으로 국보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국정원·기무사 등 공안기구 해체, 사상범 석방, 연방제 통일, 3대 부자세습 인정 등 북한 정권의 주장과 동일한 요구를 하고 있다. 따라서 從北·左翼세력은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통일노선을 추종하며, 國體(국체)를 변경하려는 諸(제)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정리/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운동권의 주체사상 수용과정
<주> 아래 논문은 이동호(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자유민주연구학회 이사가 2006년 5월25일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출범식에서 발표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과 80년대 학생운동>의 일부이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이 시기 학생운동은 이전의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가장 큰 특징은 운동권의 지도사상으로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그 혁명노선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이다. 그 이전의 학생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이후의 학생운동은 主思派(주사파)가 장악해 학생운동의 대세를 형성했다.
주체사상의 학생운동권 내의 수용과정은 1983년에 학원가에 유포됐던《예속과 함성》이 그 시작이었다. 1985년 9월 공안당국에 의해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진 김성만, 양동화 등이 북한의 혁명론을 남한의 학생운동에 소개한 것이다. 이들은 책자에서 한국은 1945년 이래로 미국의 식민지 이며, 한국의 군부독재정권은 미국에 의해 양성되고 조종되는 괴뢰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자는 당시 학생운동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주장은 학생운동 내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수용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의 ‘단재사상연구회’로 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김영환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집중적으로 청취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는 남한혁명론을 토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LPDR)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이는 1960년대의 통혁당, 70년대의 남민전 이후 최초의 조직적 형태를 띤 反제국주의세력의 등장이며, 학생운동을 모태로 출발하는 것으로는 최초였다.
김영환 그룹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DR(민족민주혁명론)과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해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은《반제민중 민주화 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소책자를 학생운동에 광범위하게 전파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대사 100년은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요,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역사다. 한국사회는 美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간의 학생운동이 美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과 민중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주시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학생운동 내부에 커다란 충격과 파급을 가져왔다.
이제 까지 학생운동은 주요한 운동의 대상 즉 주적이 독재정권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독점자본이라고 보았으나, 이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적은 미국, 다시 말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反美운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고,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386 핵심운동권의 우리사회에 대한 인식의 주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다. 주사NL파는 치열한 사상투쟁으로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하는 한편 서울대를 필두로 지하 지도부를 건설했다. 1986년 3월29일 서울대에서 非합법 지도부인 ‘구국학생연맹’(이하 구학련)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합법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일명: 자민투)를 1986년 4월에 발족시켰다. 그 산하에 ‘반전반핵투쟁위원회’ 등 5개 투쟁위원회를 두었다. 구학련의 투쟁기구인 자민투는 1986년 4월 ‘반전반핵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반전반핵투쟁과 전방 군부대 입소 반대투쟁을 감행하면서 김세진, 이재호 등이 분신을 감행했다. 자민투의 선도적인 구호와 투쟁은 당시 학생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를 토대로 자민투는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급속히 장악했다. 또 기관지로《해방선언》을 발행해 전체 학생운동에 그들의 혁명론을 파급시켜 나갔다.
1985년 하반기 민족민주혁명(NDR)론 하에 ‘삼민혁명론’으로 통일됐던 학생운동은, 1986년 초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론으로 무장한 자민투가 反제국주의직접투쟁과 반전반핵투쟁을 선언했다.
이에 MT(민주화투쟁위원회)계열은 NDR론을 기본골간으로 계승하면서 反帝·反파쇼투쟁을 선언하는 ‘反帝·反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일명: 민민투)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서《민족민주선언》을 발행했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1986년 상반기 이후 ‘자민투’와 ‘민민투’로 양분되었으며, 각자의 기관지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했다.
1986년 상반기 투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주사NL진영은 서울대 ‘구학련’을 필두로 연세대의 ‘구국학생동맹’,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등을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의 결성식을 감행한다.
그러나 건국대 투쟁으로 주사NL진영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당시 내걸었던 구호가 국민정서와 매우 동 떨어진 것이었다. 북한방송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구호가 집회장소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모험적인 구호와 투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고, 대규모 검거선풍으로 당시의 지도부가 대부분 구속되고 수배를 받았다. 건대 사태로 구속된 학생만 1290명에 이르고, 각 대학의 학생운동은 3, 4학년 실질주도 그룹이 대거 구속 됨 으로써 심각한 차질을 낳았던 것이다. 건대투쟁에 대한 주사파 내부의 평가를 보자.
건대 항쟁은 주․객관적인 정세와 유리되고,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지 않은 반공 이데올로기 분쇄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등을 제기함으로써, 정권에게 엄청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고, 사상 유래 없는 탄압을 촉발시킨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고 대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탄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구학련, 애국학생회 등의 혁명적 대중 조직들도 구성원이 건대항쟁 이후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와해지경에 이른다.
주사NL진영은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건대사태를 통해서 두 가지의 결론에 이른다.
첫째, 투쟁노선에서 左편향의 문제다. 1986년 초 반전·반핵투쟁으로 시작해 서울대에서의 <민주조선> 대자보 게재 사건, 애학투(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발족식에서의 반공 이데올로기 분쇄투쟁 선언에 이르기 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된 투쟁노선상의 심각한 좌편향은 건대투쟁을 계기로 더욱 극대화되어 대중과의 심각한 괴리를 초래했다. 아무리 反美투쟁이 절박하다고 할지라도 주․객관적인 정세와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게 투쟁을 조직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정에 의거하지 못한 전략적인 구호의 남발은 대중을 투쟁으로 고무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둘째, 조직노선상의 左편향의 문제이다. 지도조직은 대중조직 속에서 단련되고 대중조직의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급히 지도조직을 건설하고 그 산하에 투쟁위원회를 건설해 선진적 활동가를 끊임없이 투쟁으로 내몰아 조직의 붕괴를 자초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그동안 문제로 제기 되었던 선도투쟁론의 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NL진영은 이러한 편향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이론이 이를 계기로 제기되고 확산되었다는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론이란 북한의 주체사상과 혁명론을 지칭하고 있다.
출처 조갑재 닷컴 김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