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은 불의한 권력에 항거한 성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5·18정신을 기리는 것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한국 정치권은 후자로 가고 있어 걱정이다.
정부·여당이 5·18 관련 이슈에 더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해 정치투쟁의 빌미를 주는 것도 문제지만, 야권이 이때만 되면 별의별 이유를 내세워 정국을 대결로 몰고 가는 건 더 큰 문제다. 이는 결국은 5·18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야권은 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이 열린 18일 광주에 총집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0대 국회 당선인 전원이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국민의당 당선인들은 아예 1박2일로 날을 잡아 전원이 기념식장으로 향했다.
국민의당은 4·13총선에서 완승을 거둔 호남 텃밭을 다지겠다는 의지가, 더민주는 빼앗긴 호남 민심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충일해 보였다. 5·18정신을 잇는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두 야당이 광주 방문에 사활을 건 것은 결국 호남 민심 잡기 경쟁 차원에서 5·18정신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6년이 지난 현재까지 5·18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죽 이어져 왔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광주를 찾는 정치인들이 줄을 이었다.
지난 대선을 앞둔 2012년 유력대권 주자 신분인 박근혜 대통령도 5·18 묘지를 방문했다. 이번에 야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장에서 제창하는 문제를 여·야·정 협치의 전제조건으로 삼겠다며, 그렇지 않으면 협력은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5·18=호남 정치’라는 계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광주와 호남 현지에서도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비판이 나온다.
5·18의 의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전국적인 이슈가 되고 이런 이슈가 저성장과 청년실업 등 민생 의제를 앞서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한 비극적 단면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 현대정치에 내재하는 전근대성에 기인한다는 시각도 있다.
우리 정치가 해방 이후 서구에서 이식된 ‘외삽(外揷)형’ 민주주의와 대의제도에 의존해오면서 근대정치의 정체성을 여전히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허약성과 불안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치가 언제까지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갈등하는 ‘다중(多重)적 시간’에 빠져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5·18정신을 당리당략과 정파적 대결의 수단으로 이용할 것인가. 언제까지 미래를 창안하는 대신 과거에만 기댈 것인가. 한국 정치, 이제는 5·18을 놓아주어야 할 때다.
출처 문화닷컴 / 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