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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난장판 같았던 대한민국 건국 시기 정치상황과 오늘의 현상은 어떠할까?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본 내용은 2015년 6.25일 대불총이 주최한 '나라사랑 한마음 운동' 세미나에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기조연설 내용입니다.

작금의 시국 상황에서 참고가 될 수 있는 귀중한 내용으로 판단되어 게재합니다.


      해방공간의 혼란 부터 지금까지 역사와 우리의 할 일이 잘 정리 되었습니다.



원 제목  : 해방 70주년, 6.25한국전쟁 65주년, 그 때를 회상하며


금년은 8.15해방 70주년, 6.25한국전쟁 6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지난 70년간 공산주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가난을 물리치고 풍요한 선진경제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피어린 전장(戰場)에서, 힘들고 고통스럽던 건설과 생산현장에서 피땀 흘려 싸운 장본인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입장에서 오늘의 나라 형편을 보면 안심과 만족의 흐뭇함 보다는 불안과 걱정이 앞서는 것은 디지털 현대 문명의 글로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 늙은이들의 노파심 때문일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해방 후 6.25전쟁까지의 3~4년간 우리가 겪었던 혼란과 파괴의 그 시절이 재현되는 같은 느낌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어찌하여북괴의 남침이 있으면 즉각 반격하여 조반은 해주(海州)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호언했던 국방당국이 막상 북한군이 남침하자, 3일 만에 서울이 떨어지고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 원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결론지었습니다. (북괴의 6.25 남침)


하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창궐로 우리 내정(內政)이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혀

김일성 일당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을 구축하지 못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위시한 우호적인 국가로부터 외면당해 고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관계로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만 첫 번째로 내정의 극심한 혼란은 해방직후 등장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白南雲)의 남조선 신민당, 그리고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이라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좌파세력의 계획적인 반미, 반보수, 반민족의 난동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도선 북쪽은 소련군, 그 남쪽은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이를 기화로 소련은 북한을 극동지역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크레믈린에서 작성한 적화계획에 의해 김일성 일당을 중심으로 이른바혁명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반면 남쪽은 미국의 이상인 자유, 민주주의, 인권을 명분으로 각종 이념정당과 사회단체의 등장을 허용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라 위에서 열거한 남쪽의 좌익정당은 각 당별로 남한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면서, 3당별로 또는 3당 연합하여 민족보수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94511월이 되자 3당이 연합한 강력한 전위부대로 40여 개의 전국노동조합이 참가했다는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全評)이 등장하더니, 1개월 후인 12월에는 21개 도시의 지부, 188개의 군 단위 지부, 1,740여 개의 면 단위 지부를 망라했다는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全農)이 등장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전국청년단총동맹(전총),“프롤레타리아 문학가동맹”,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영화동맹”,연극동맹”,조선부녀 총동맹등등 수 없는 공산당 산하 외곽단체 또는 좌익사회단체가 등장합니다.


이들 빨갱이 조직들은 19451228일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미3개국 외상회의가

조선민족에 대한 5개년 신탁통치에 합의하자 2~3일 동안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반탁(신탁통치반대)을 선언하더니 그 다음 날 소련의 지령이 떨어지자 46년 정초부터는찬탁(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이승만 박사가 주도하는 민족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북쪽의 민족세력인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주도하는 민주당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탄압으로 고당(古堂) 조만식선생은 1월 감금되고 그 산하 활동가들은 체포를 면하기 위해 월남함으로 일거에 북한 내 민족진영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모스코바 결정에 따라 19463소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좌익은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연합을 조직하고 57개 단체 60여 만 명을 동원하여 반미, 민족진영 규탄 데모를 전개하여 결국 동년 10월에는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좌익 세력의 투쟁성과가 입증되자 468, 군정당국이 제시한국립서울대학교창설 안을 빌미로 조선공산당의 조직인민주학생연맹이 주도하는미국인 총장반대”,식민지교육 반대,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동맹 휴학에 돌입합니다.


11월이 되자 한양대, 연희대, 동국대 등 서울시내 각 대학 뿐만 아니라 경복, 중동, 배제, 덕수, 선린 등 서울시내 고등하교까지 무려 4만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으며 다음해인 475월까지 학원가의 반미 데모가 계속됩니다.


결국에는 서울시내 국립대학 학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4,956명이 제적되고 380명의 교수가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의 학교교육은 크게 멍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투쟁역량이 강화되는 것이 확실하자 467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일당은수세에서 공세로 투쟁을 선포하고 대규모 미군정, 민족보수 세력과의 투쟁을 전개합니다.


공산당의영향하에있는<조선인민보>,<현대일보>,<자유신문>,<중앙신문>,<공립통신> 등 언론을 앞세운 대규모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에 끝나지 않고 9월에는전평산하

철도노조를 선두로 쌀 배급량 증가, 임금인상, 해고/감원 반대, 민주주의 노동법 제정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하더니 전평산하 251천여 명, 미조직 노동자 5만여 명, 여기에 대학생 45,000여 명 은행/회사/병원 근무자 등이 참여하여 남한 전역의 총파업으로 확대됩니다.


9월 총파업의 연장선상에 101일 조선 공산당 대구시당과 전평 경북지부가 주도하는 폭력데모가 일어납니다.

결국 경찰과의 전면대결로 경찰관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동지의 주검에 대한 복수 수단을 취할 때는 이때를 두고 다시없다고 선동하며 대구시 전역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시작됩니다.

1,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성주, 칠곡, 왜관, 고령, 의성, 군위, 경산 등 경북 전 지역으로 확대되더니 105일부터 부산, 군산, 목포, 여수, 마산, 통영 등 심지어 충청, 강원, 경기 등 전국 동맹파업이 모든 도시에서 일어납니다.


당시 참가 인원은 100만이 넘었고, 파업노동자 15, 학생 33천여 명이 참가한 결과 경찰과 군중 수 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5,000여 명이 체포됩니다.


이로서 공산당과 좌익세력의합법, 비합법 투쟁의 결합,“작은 규모와 대규모 투쟁의 결합”,모든 경제투쟁, 사회투쟁을 정치투쟁으로!라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전략전술과 그들이 노리는 목표가 백일하에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적으로 통일정부 수립한 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한반도의 사태악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승만 박사가 주장한남쪽에서 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19466월 정월)는 발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남한 민족진영의 의견을 받아 194710월 유엔은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내용하는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11월에 개최된 제2UN총회는“UN임시 조선위원단을 설치하여 그 감시 하에 19483월까지 자유선거를 실시하며 국회와 정부를 세우고 미소 양국군을 철수 한다.고 결의 했다.


19481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8개국으로 구성된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미군정 당국과 민족진영과 회합 한 후 북한 입북을 시도하였으나 소련군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228UN총회를 개최하고임시조선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남한)에서 만이라도 임무를 수행한다.고 결의하고 선거일은 194851일로 결정하였습니다.


19482월 초 이미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도하는“2.7폭동을 일으킵니다. 경남지방의 경찰관서를 습격하는가 하면 전신전화선을 절단하고유엔조선위원단의 입국반대이승만김성수 타도를 외치며 당장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선동했습니다.


이어 4월에는 저 유명한“4.3제주 무장폭동이 일어납니다.

제주도에 주둔해 있던 제 9연대의 일부 장병(문상길 중위 등)과 남로당 제주도당책 김달삼의 주도하에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 군인들은 194511월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군 간부 양성기관인군사영어학교가 개교되던 당시부터 공산당을 심어 놓은 프락치들이었습니다.


“4.3제주도 무장 폭동으로 토벌작전이 전개되던 시기에 유감스럽게도 남한의 민족진영의 두 거두 이승만 박사와 김구선생간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김구선생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북한의 김일성과 회동하기 위하여 김규식 박사와 일부 민족진영인사들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향합니다김일성이 제안 한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419일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동한 김구선생은 한마디로 북로당의 통일전선전술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55일 김구선생 일행은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로 인해 민족진영이 입은 타격은 적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에서의 무장폭동은 더욱 격화되어 제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제주도청이 방화로 소실되었고 방송국과 발전소가 습격 받아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주시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탁한 정세 하에서 48510일 유엔 감시 하에 남한에서 만의 선거가 실시되었고 531일 제헌국회가 개최되고 730일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습니다.

19488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정부가 공식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당과 좌익의 반정부 무력투쟁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제주도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주둔 제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1020일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112일에는 대구주둔 제6연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들 여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1125일 광주에호남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국군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다행히 진압작전은 성공하여 패배한 반란군 패잔병들은 지리산, 팔공산 등으로 잠입하여 산악 근거지를 설치하고 게릴라 작전을 전개하게 되는 데

여기에 북한에서 파병된 2,400여 명의 침투 병력이 가세하여 호남, 영남 일대의 치안이 크게 교란됩니다.


이에 끝이지 않았습니다.

19495438도선 가까운 강원도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여단 8연대 제1대대장 표무천 소령, 홍천 주둔 제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일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군 반란이 일어나 위기 상황이 조성되었던 그 시기에 또 하나의 심각한 반정부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제헌국회 내에서 일어난국회 프락치사건입니다

 공산당 프락치 국회의원들의 이른바의회투쟁이 전개된 것입니다. 소장파 의원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등 4명은 남로당 중앙위원인 이상혁, 이제남 등과 접촉하여

주한 미군철수와 남북통일 협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62명의 서명을 받아 제헌국회 명의로미군사고문단 잔류반대 청원서를 유엔한국위원단 아이만 사무총장에게 청원하려 한 것입니다.

다행이 이들의 공작은 62113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됨으로서 좌절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참가자 여러분 !

19458월부터 19506월까지의 근 4년여 동안에 일어난 공산당과 좌익의 반정부, 반체제, 반보수, 반민족, 반미투쟁, 동맹휴학, 파업, 폭동, 심지어 군사반란 등 파괴행위가 수 천 건 일어났습니다. 그 중 신문 톱기사로 게재된 사건만 해도 4~500건이 족히 됩니다.

이처럼 내부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19496월 주한미군의 철수가 완료됩니다. 그리고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게 됩니다.

과연 출범한지 1년이 갓 넘는대한민국호가 제대로 순항할 수 있을까요?


이웃 중국은 194910월 모택동의 중공군에 의해 대륙이 적화됩니다. 우리 국민 중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냉전이 현실화 되면서 자유세계 각국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연 미국의 국무성과 최고위 미군부의 판단은 어떠했을까요? 대한민국호의 항해를 대단히 불안하게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신뢰하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을까요

 

나는 당시의 미국이 바라보고 있던 한국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하여

19501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연설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확실히 일부 우리국민 아니 북한 김일성 일당이한국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은 애치슨 국무장관의 언급입니다.

 

태평양지역의 정세는 군사적 안전보장 정책의 시각에서 볼 때 어떠한가?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어떠한 것인가”, “……미국은 미국과 전 태평양지역 및 일본의 안전 보장을 위해 필요한 일본의 군사적 방위를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은 일본의 방위를 포기한다던가 약화시킬 의도는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항구적인 해결, 기타 방법의 협정을 체결한다면 일본 방위는 반드시 유지될 것이라는 결의를 갖고 있다.

이 방위선은 아류산열도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져 다시 오키나와 제도에 이루고 있다. 우리는 류큐(오키나와)가 방위상의 요지를 점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것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키나와의 인민을 위해 적당한 시기에 오키나와 제도를 유엔의 신탁통지 하에 둘 것을 제안한다. 오키나와 제도는 태평양 방위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는 금후에도 이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방위선은 오키나와 제도에서 필리핀 제도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태평양지역의 다른 지역에 대한 군사적 안전보장에 대해 말한다면 누구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이 지역의 안전을 보증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전 보증은 실제적인 관계의 영역에서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만일 공격을 받는 다면 첫째로 의지해 할 것은 공격받은 지역 인민의 저항이고 그 다음 의지해야 할 것은 유엔헌장 하에 전 문명세계가 주고받은 서약이다.

오늘날 유엔 헌장은 외부의 침략에 대하여 독립을 사수하려는 굳은 결의를 갖고 있는 인민들이 의지 할 수 없는 지푸라기가 아님을 입증해주고 있다.”

 

좀 길게 인용했지만 위 연설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일본열도, 류큐(오키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군사적 방위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한국과 대만은 미국방위선 밖에 있는 듯한 오해(?) 할 여지를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한국방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나 지원이 없을 것임을 명백히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만약 외부 공격을 받을 경우 유엔헌장에 의한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어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자 침투공작에 대해 말하면서 한국방위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며 태평양의 어떤 지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사실은 북부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우리의 책임과 기회가 남부 태평양지역과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북부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우리들은 일본에 대하여 직접책임을 지며 직접 행동할 기회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정도는 다소 낮으나 한국에 대해서 적용된다고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과거에도 우리는 직접 책임을 졌으며 또 행동했다. 한국에서는 남부태평양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다.”

 

이 애치슨장관의 언급은 한국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직접 책임을 졌다. 즉 미국이 직접 책임을 지고 유엔 감시 하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지면이 길어지지만 애치슨 장관의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원조(경제, 정치부분)에 대한 언급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우리는 뛰어난 방법을 강구하여 군사점령을 끝내고 유엔과 협력하면서 거의 전 세계로부터 승인을 받은 독립주권국가를 세웠다. 우리는 한국이 독립하도록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가 확고한 체제를 굳힐 수 있도록 원조할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고 이를 위한 입법화를 의회에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일부에서는일체의 지원을 폐기해야 한다.” 또는이 나라의 건설을 중도에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지독한 패배주의자의 얘기라고 나는 주장한다. 아시아에 있어서 우리나라(미국) 이익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주장은 바보 같은 넋두리라고 말 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책임은 가장 직접적이고 우리의 기회는 일층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위 애치슨 장관의 연설을 읽으면서 해방 후 6.25가 일어나던 4~5년의 기간 미국은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변화, 특히 소련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확장 정책과 중국의 공산화를 보면서 동북아 지역의 안전보장 (일본과 한국)에 대한 방위의지가 강화되어 왔구나 하는 점을 명백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지역에 가해지고 있는 소련의 침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 요체는 바로 이 지역 대중의 자위의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치슨 장관은 이 연설을 시작하면서 그 화두를 미국국민과 아시아 국민으로 잡았습니다.

대중이 믿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그 것이 군사적 협력이던 정치, 경제적 협력이던) 아시아 각국 국민들이 신뢰하는 원조가 되지 않는 한, 아시아 국가의 대중이 자기 나라의 정부를 신뢰하고 스스로 안전을 보장하려 나서지 않는 한 성공 가능성은 희박함을 중국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왜 중국국민이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를 버리고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편이 되었는가? 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의 붕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의 저술이나 연설에서미국이 무능했기 때문이라느니, 미국이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느니,“미국의 원조가 적었기 때문이라느니, 미국은 시간과 방법에서 잘못했다느니,“아니다, 미국의 모장군이 장개석을 싫어했기 때문이다.”또는대중국 정책에서 많은 무인들이 입방아를 찧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군대의 공격에 직면했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대국적 관점에서 그 원인을 평가하기 바란다.


장개석 총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당시에는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중국인민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중국 공산당 만이(산악지대에서 장비도 열악하고, 누더기를 입고 있던 소수의 군 세력 이었음에도) 장개석의 지위에 반대의 논리를 제기하였다.


장개석 총통은 유구한 중국 역사에서 다른 그 어떤 지배자보다도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도 받고 있었다. 이런 그가 4년 후 군대도 인민 대중의 지지도, 외국의 절대적 지지도 모두 잃어버리고 잔존 부대와 함께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나의(애치슨) 판단은 중국 인민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중국 대중은 이 정부(장개석 정부)를 타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전 지역에서 자기 동리에서 일어난 문제를 정부 대리인과 충돌할 지라도 스스로 결정하였다. 중국인들은 완전히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되자 모든 군사기구가 붕괴되었다. 군대와 도시에서 지지를 잃게 되자 군사령부가 전례 없이 무능하게 되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상황이나 중국국민들의 혁명정신을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정세를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중국 공산당은 실제로 이러한 대중의 기세에 편승하여 권력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빈틈없는 철저함과 융통성 있는 그릇을 아울러 준비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현실에 근거한 중국정세(공산화)의 설명이다


나는 위 애치슨 장관의 연설이야 말로 당시 우리 정부와 우리국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면 공산 침략자에게 먹힐 수밖에 없다. 아무리 미국의 거대한 군사지원, 정치/경제적 지원을 해준다 하여도 정부가 신뢰를 잃으면 붕괴하고 국가는 망한다는 경고였습니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 유엔의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아 6.25남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일부 인사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던가? 원조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아냥거리던 관계요원 인사들의 의구심은 우리 국군과 국민이 김일성 일당의 남침과 필사의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국민은 국민당 정부하의 중국 국민도 아니고 월남 전쟁 때 사이공 정부의 국민도 아니었습니다. 김일성 일당의 적화통일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강력하고 처절한 우리 국민들의 저항 의식을 보고 우리나라에 대한 신뢰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537월 휴전이 되고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국민의 대공의식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그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리어 1960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학원가에서가자 판문점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통일문제를 납북협상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듯 착각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북한의 선전과 남한 내 친북 좌경세력의 선동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4.19혁명이 일어나자 김일성은 그 때까지 남한 내 지하당 조직을 재건하지 못하였음을 크게 후회하면서, 대남 공작 강화를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정권 하의 혼탁한 정치, 사회적 사건이 계속 일어났고 그 결과 1961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면서 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현대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외자가 필요하게 되자 19656월 국민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 않은 채 한일국교정상화를 실시하고 이어 월남전 파병을 단행합니다.


그러자 북한은 남한 내 지하당 조직 공작을 다그쳤고통일혁명당과 같은 조직이 등장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월남전 파병을 저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편승하여 무장공비를 빈번하게 남파하여 우리사회를 교란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19681, 31명의 124군 부대 특수요원들이 청와대를 기습하는가 하면, 이 해 가을에는 131명의 무장공비들이 울진/삼척 지역을 교란합니다.


그러나 우리군은 이러한 북한 특수부대의 무력도발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 1960년대가 끝날 무렵 미국은 베트남전의 종결을 위하여 공산월맹과 협상하고 70년대 초에는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고 우리 국군도 철수합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자,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이루어져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협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도 남북대화를 제의하고 7.4공동성명에 합의하여 남북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60년대 기간 중

북한이 추진해온“4군사노선<전인민 무장화, 전국토 요쇄화,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

3대 혁명역량강화 노선<북한의 혁명기지 강화,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지지역량 강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경제를 성장시켜, 동서독 관계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경제성장에 전력을 쏟아 부으면서자주국방에 주력합니다.


선 경제 후 통일의 구호가 바로 이 때 나왔습니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노선을 추진하기 위하여“10월 유신을 선포합니다. 다소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더라도 전력을 경제성장에 투입하여 동서독 관계처럼 남북 관계에서 우리가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야 정치인과 젊은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강력한 반 정부운동이 일어났고 급기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태가 발생합니다.


그 후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등장하자 5.18광주민주화사태가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386세대의 반정부, 반체제 운동이 일어납니다.


전쟁의 피어린 투쟁 경험도 없고,

보리고개의 배고픔도 경험하지 못하고,

부모세대가 이룩한 경제 성장으로 풍요로운 경제생활에 익숙한

이들 386세대 학생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종북세력 그리고 진보라 하는 좌익 지식인들의 선전선동에 놀아나 우리나라 학원가를 새빨간해방구로 도색했습니다.


나는 이 때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마치 해방 이후 6.25직전까지의 그 시대가 그대로 되살아났구나! 하고 한탄하며 학생들 설득에 나섰지만 이른바 민주화 투쟁으로 위장한 좌익세력의 준동과 확장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신군부 정권하에서도 민주주의 회복이 불가피함을 인식한 정치인들의 노력으로“88선언이 발표되고 국제정세의 변화 즉 중국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페레스트로이카(재건),“글라스노스트(공개)에 따른 개혁, 개방 정책이 전개되어 동유럽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1당 독재가 무너지고 이어 소련연방이 해체되어 16개 국가로 분리되면서 전 세계적 규모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소리를 내며 무너지자 1989서독 통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막연한 생각으로 좌익세력에 가담했던 학생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학원 내 386 좌익세력 즉 NL, PD파 등 급진 세력이 타격을 받아 종북세력의 세력 확산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세 명의 문민정부 하에서 이들 세력은 재건확장의 계기를 잡아 오늘날 우리들이 염려하는 통진당 세력, 전교조, 범민련 등 1,500여개의 좌익 종북단체가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 좌익 종북세력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2012년 총선에서 통진당의 득표율이 10.3%로서 219만의 지지표를 획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비록 작년 헌재의 판결로 통진당이 해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지 세력이 우리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종북 세력을 연구한 전문가의 발표를 보면

이들 중 핵심세력은 5% 내외(비노출)

추종세력은 20% 정도(100여 개 단체)

나머지 심적우호 추종세력은 75%정도(1,500 개 단체)라고 하며

이들이 학원, 언론, 법조계, 교육기관, 문학예술계, 종교계 심지어 군에 까지 잠복해 기회가 되면 언제나 표면에 등장하여 국가와 체제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세종로에서 개최하는 각종 데모와 집회에는 반드시 이들 종북세력이 끼어 있습니다.

여러분도조갑제 닷컴에서 출판한종북 백과사전을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 국회의원 중 좌익 종북세력으로 낙인 된 사람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중점을 두고 일본에 대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는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주요 인물들의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기사를 읽고 놀랐습니다.


금년 513일자 주간지미래한국(496)을 보면,<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양 상임대표의 남편이

1994년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징역4년을 선고 받은 김삼석씨이고,

손미희 대회협력위원장 남편 한충복은 맥아더동상 철거 집회 등 각종 반미투쟁을 주도하다가 실형을 받았다고 하고,

손미희 대회협력위원장 자신은 400여 차례 방북하였고 통진당 해산 결정 반대 시위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김정일 사망 시 조문하지고 주장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미래한국>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위안부 문제로 위장한 반정부, 반체제, 좌파 종북활동에 전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 미국 소고기 수입문제, 최근의 세월호 문제, 메르스 문제 또는 민생문제, 인금인상 문제 등을 명분으로 대규모 촛불시위, 폭력시위를 전개하는 단체와 주동인물을 보면 처음에 제시한 구호와 데모가 격화될 때쯤부터 제시하는 구호와 행동이 바뀜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투쟁을 정치투쟁으로!라는 해방직후 공산당이 전개하던 데모와 유사합니다.

이들은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을 적대하는 세력들임을 스스로 확인해 줍니다. 태극기 게양 시 일어나지 않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극기를 불태우는 자,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자, 바로 이들이야 말로 종북세력들 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 좌파 종북세력의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제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

 

첫째로 전 국민이 친북, 종북 세력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혹시나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우위를 믿고 그까짓 몇 명의 종북세력이 날 뛴다고 우리나라의 안전보장과 사회 안정에 무슨 큰 영향이 있겠는가?

공권력만 제대로 발휘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일단 사상적으로 종북화되면 좀처럼 벗어나가 어렵고, 이들의 활동이 합법과 비합법 한계를 교묘히 넘나들기 때문에 공권력만 가지고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국민은 의식화된 이들 종북세력에 대해서 항상 깊은 경계심을 돌려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경고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합니다. 특히 총선이나 지자체 선거 시에 명백하게 입후보자의 언행과 정치적 노선을 검증하여 투표로 제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들 보수 세력은 스스로 우리 대응태세를 강화시켜야 합니다.

특히 보수정당과 보수단체들은 젊은 세대에 대한 사상교육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자금은 과거의 반공 교육적 이론이나 방법으로서는 젊은 세대를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논리, 인류가 창조한 보편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IT/SNS와 같은 새로운 기기와 수단을 이용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청소년에게 쏟아야 합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입니다.

다행히 정부가 초고교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우리들 보수 세력은 각 학교에 포진하고 있는 전교조 계열의 좌파 교사들의 역사 교육을 비판적 시각에서 감시하며 즉시 이의를 제기하는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실제로 각 급 학교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야 합니다.


셋째 우리나라 기업, 특히 대기업에 대해 경고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기업은 항상 자신을 보호하는 보수 세력에 대한 협력과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지켜주는 핵심세력은 정부가 아니라 바로 보수 세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연구비 지불에는 열심이지만 자기들을 지켜주는 보수단체 지원에는 지극히 인색합니다.

반면, 약점을 잡아 위협하는 진보단체, 예를 들면 노동단체, 오염방지 운동단체, 자연보호 운동단체 심지어 민노총과 같은 강경 노조들에게는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뒷돈을 거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정면에 나서 피땀을 흘리며 좌파 종북세력과 싸우는 보수단체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립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좌파 종북세력의 풍부한 활동자금을 공급하여 사회불안, 기업규탄, 재벌타도 여론을 확장하는 부메랑 결과로 되는 것입니다.

나는 대기업과 재벌들이 보수 진영에 대한 대담한 지원이 없는 한 기업의 처지는 더욱 어렵게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넷째로 우리나라 3대 종교단체(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자기들 내부에 들어와 있는

좌파 종북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하고 대응책을 강구해 주기를 바랍니다.

사찰과 교회에 숨어 가장 강력한 종북 이데올로기와 사회활동, 대정부 투쟁을 부추기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1997516일 대법원 판결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아직도 버젓이 해산하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데 이 단체를 당초에 조직한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기독교의 문익환 목사가 아닙니까?


이 단체가 속한 인물들이 무슨 주장, 어떤 행동, 북한에서 어떤 기도를 했는지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자인 나로서는 다른 종교단체의 좌파 종북세력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삼가하지만 각 종교단체 대표 여러분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합니다.

 

시간관계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겠습니다.

북한인권법 제정 문제입니다. 우리국회에 10년 동안이나 계류된 채 통과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전 세계 자유 애호국가에게 무슨 낯으로우리도 자유민주주의 국가 국민이라고 나설 수 있을까? 주저합니다. 이미 유엔이 김정은 정권의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탄압을 몇 차례 경고 했고 작년부터 김정은을 양민학살자로서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겨야 한다는 결의까지 채택했습니다.


이런 국제여론을 외면한 채 우리나라 국회는 북한인권법 채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이미 국회 내 야당 의원 중에는 친북 종북성향의 국회의원이 많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하루 속히 통과시켜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 기조연설을 끝내면서 우리가 대북전략 전개에서 취약부분을 다시 생각합니다.


하나는핵무기라는 비대칭적 무기를 북한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6.25전쟁 때에 242대의 북한군 전차를 대항할 수 없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당하고 말았던 쓴 기억을 상기하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라는 비대칭적 무기에 대응 할 수 있는 무기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둘째는 우리내부에 포진하고 있는 비대칭적 무기 즉 종북세력입니다.

이 두 가지 북한의 비대칭 무기를 제거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안전보장은 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관계는 65년 전 19506.25남침이 자행되던 그 때의 남북관계가 아닙니다. 이미 남북 간의 체제 경쟁에서 우리가 승리한지 20년이 넘었고 남북 간 경제적 격차는 40:1로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큼 니다. 우리의 안보는 우리 스스로 감당할 결의를 갖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견고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중국대륙에서 국민당 정권이 무너졌던 역사, 베트남에서 사이공 정부가 무너진 원인을 되새겨야 합니다.

나는 이번 메르스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계획이 취소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내정이 중요하구나, 내정의 연장이 외교이고 대북정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사랑 한 마음 운동에 참여한 종교지도자와 참가자 여러분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 세운 이 대한민국, 피땀 흘려 건설한 이 자유, 민주주의, 풍요한 우리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 앞장서 싸워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제 두서 없는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