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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작금에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내가 그동안 입어왔던 해묵고 색바랜 낡은 내복과 승복을 골라 대형 쓰레기 봉투에 넣어 쓰레기 수거장에 버리고, 나의 첫 번째 재산이며 읽고 또 읽은 헌책을 골라 필요한 단체에 보내고, 또 쓰레기 소각장에 처분하고 있다. 언제고“ 빈손의 몸만 세상을 떠나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의 주변 정리를 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준비하는 원인은, 나의 지병에 대해 한국의 명망있는 대학병원의 여기저기에서 친절한 전문교수로부터 조언을 받아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승려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이고, 법계(法階)는 종사(宗師)급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비구, 비구니 모두 결혼하지 않은 독신(獨身)을 원칙으로 한다. 나는 조계종 승려의 원칙대로 결혼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에게 처자(妻子)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혼자서 세상을 살다가 떠날 뿐이다.

나는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접령지역인 전북 고창군 고수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의 향리에서는 인민군의 백을 믿고 설치는 토착 빨갱이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평소 미운 털 박힌 이웃들을 “인민재판”이라는 명분으로 죽창과 몽둥이 등으로 마구 죽이는 시절이 있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경찰과 국군을 학수고대 히면서 하무하고 고통스럼게 죽어갔다.

나는 이제 솔찍한 고백을 해야겠다. 내가 처자가 없는 것은 조계종의 원칙을 준수한 결과만은 아니었다. 나는 돈 만드는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이다. 지구상에 돈에 무능력한 승려인 나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플 여성은 과연 존재할까? 중생에게 대자대비를 베푼다는 관음보살이 아니고서야 과연 살아있는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세연이 다한 것을 나는 글로 쓰면서, 잊을 수 없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추억담이 있어 고백한다.

1976년, 당시 나는 26세로서 합천 해인사 교무국장직과 경남 함안군의 군북면 소재의 원효암(元曉庵)주지를 겸임하고 있었다. 당시 원효암은 너무도 가난하여 공양주도 고용할 수 없는 절이었다. 나는 사제에게 원효암을 맡기고, 해인사 교무직을 보고 있었다. 당시 해인사는 주지에 도광(導光)큰스님, 총무에 일미스님, 교무에 나, 재무에 진천제(陳闡提)스님이 있었다. 당시 해인사 방장은 성철(性徹)큰스님이었다.

당시 해인사로 오르는 매표소 쪽에는 다리가 없이 시냇가에 큰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사람들은 징검다리 위를 흐르는 시냇물을 피해 다리의 바지를 걷고 건너야 했다. 나는 그곳에 시멘트 다리를 놓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주지스님의 직인이 찍힌 권선문(勸善文)을 들고 평소 아는 당시 상공부 장관 부인을 만나러 서울행을 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전화로 서울에온 사정을 말하니 상공부장관 부인의 말이 어머니가 전날에 사망하여 초상집이라는 것이었다. 초상집에 권선문을 어떻게 들이밀겠는가. 빈손으로 해인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서울의 아는 스님이 위로하며, “아들 백일잔치를 하는 집이 있는 데, 함께 가서 밥이라고 얻어먹고 가라”는 권유했다.

백일잔치가 있는 집에 가보니 승려들이 5∼6명이 먼저 와 있었다. 나도 잔치상에 끼여 열심히 밥을 억으려니 50대 초반의 뚱뚱하며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인사를 했다. 화사한 여인은 내곁에 다가와 음식을 더 갖다주며 “많이 먹으라” 다정히 권했다. 그녀는 내게 “어디 계신 스님이냐?“ 고 물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해인사에서 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는 밥을 먹고 바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인사에 돌아온 다음날 낮에 “서울에서 찾아온 소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가보니 어제 백일잔치에서 본 화사하 옷을 입은 그녀가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가용 승용차로 새벽부터 운전기사를 재촉하며 해인사에 도착한 것이다.

교무실에서 나는 작설차를 대접하는 데,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산속에서 여생을 살기 보다는 젊으니까,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 때 나는 “일본의 불교대학에 유학하여 10년간 공부를 하고 돌아왔으면 하는 데, 유학자금이 없습니다.“ 고 희망을 말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이 ”유학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녀는 나에게 “즉시 상경하라”는 독촉이었다. 나는 며칠간 장고(長考)를 했다. 그녀는 하루에 몇 번 “상경하여 일본유학을 하라”는 불같은 독촉이었다.

나는 마침내 아무도 몰래 어느날 새벽을 기해 걸망을 등에 메고 해인사 교무직과 원효암주지를 버리고, 상경하고 말았다.

서울에 도착하니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의 이름은 최순제(가명)이었고, 당시 한국 애 몇 안되는 재벌회장 부인의 하나였다. 어느 날, 그녀는 4∼5명의 스님들에 승복을 보시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사찰도 지어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불교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돈이 얼마나 들던 무제한으로 법철스님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나는 말이 앞서는 그녀를 근심스럽게 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지원을 믿고 종로 일본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43일만에 그녀는 나로부터 사라졌다. 그녀가 지어준 사찰의 주지가 재벌회장에게 “회징 사모님이 나에게 수백억대의 돈을 주었다”는 허위날조의 무고를 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학인해본 결과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중병에 든 환자였다.

나는 일본어 학원을 다녀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조계종단에 나쁜 구설수기 쓰나미처럼 퍼졌다. 내가 “재벌회장부인으로부터 수백억을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10만원의 지원도 받지 못한 나에게는 기가 막힌 무고의 악소문이었다. 나는 해인사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지병으로 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왜 나에게 “무제한 지원”의 말을 마구하고 죽었을까?

나는 나이가 들면서 강호(세상)에는 입으로 만금(萬金)을 주는 언어는 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너무도 세상을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나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를 무고한 승려, 그리고 일본유학을 무제한 지원하겠다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푸짐한 언어에 현혹어 되어 해인사 교무직과 원효암주지를 팽개치고 서울로 떠난 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닫고 보니 모두 “우치한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부처님게 참회할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왕생극락을 기원해온다.

나는 이제 죽을 준비의 주변정리를 하면서, 지나온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일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인간은 종교를 믿어도 죽고 안 믿어도 결국은 죽고만다. 부처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마호멧도 죽고, 공자님도 죽고마는 것이다. 인류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찬양됳 뿐이다. 나의 마지막 일은 모든 종교가 자유가 있는 “자유대한”을 수호하고, 서민경제와 서민복지향상을 기도하며, 서민들을 위해 주장하는 글을 써 오는 일 뿐이었다. 어던 사람은 나를 극우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나는 대학병원에서 진단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절감하면서 주변정리를 해오면서, 세상에 전해오는 악소문을 해명하고저 하는 것이다. 나는 거듭 1976년도에 재벌회장부인에게서 수백억의 유학비를 받은 바가 없고, 거듭 나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살다가 이제 인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내생이 정말 있을까?" 나는 의문속에 자문하면서 ”진짜 나에게 내생이 주어진다면, 고달픈 비구승 생활은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인연있는 착한 여자를 만나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나는 고달픈 내 운명이 붉은 완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고 반공투사로 살아온 내가 나의 사주를 분석하니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었다. 나의 사주팔자는 부모에게 송곳 꽂을 땅도 물려받을 복이 없고, 처자도 없이 살다 죽는 기막힌 팔자였다. 근거는 내가 태어난 일주와 시주가 무신일(戊申日)에 을묘시(乙卯時)이다. 을묘시는 무신일에 귀문이요, 공망살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숙명대로 나의 인생을 살다가 조상이 걸어보인 죽음의 세계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살아온 추억은 고달픈 인생뿐이었다. 이 글을 애써 읽어주는 남녀들이여, 붉은 완장이 없는 자유대한에 건강과 행운만 있기를 나는 간절히 기원한다. ◇



이법철(대불총, 지도법사)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