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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독립운동가 김구도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확신 없었다

 
김효선 이승만연구가
이 기사는 "한국논단 8월호"에 게재된 김효선 한국논단 편집위원의 소논문입니다



실종된 건국이념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오늘날 대한민국은 건국이념의 실종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위로는 대통령부터 ‘이념’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념이란 거부하거나 거추장스러워 할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듯이, 국가라는 공동체에도 그 구성원이 지키고 추구해야할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념인 것이다. 그리고 건국 당시 건국 원훈들이 국가를 건설하며 최고의 가치 개념으로 삼은 것이 바로 건국이념인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을 건국할 당시 우리의 건국 원훈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다.건국 원훈들이 추구한 민족주의는 김정일과 그 아류들이 주창하는 배타적(排他的)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요, 이타적(利他的) 민족주의였다.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정신에 기초한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건국이념의 다른 한 축은 반공·반탁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주의는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의 전유물처럼 소위 ‘우리민족끼리’로 변질되어 정체성 혼란을 부추기는 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체제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민주라는 말이 오남용(誤濫用)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공·반탁에 바탕한 자유민주주의가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노선으로 선회(旋回)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지난 10년간의 친북좌익정권과 그에 편승한 김구 추종세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오늘날 양대 세력인 친북좌익세력과 김구 추종세력이 추구하고 있는 좌우합작 노선으로의 회귀 움직임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과 북은 한 민족이니 이념이나 사상을 따져 묻지 말고, 민족공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친북좌익세력뿐만 아니라 헌법정신을 수호해야 할 청와대를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학계, 법조계 등 사회 전반에 넓게 퍼져 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배은망덕지국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7년 3월,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이 국회 재경위를 통과하면서 10만 원권 화폐 도안 인물로 김구 선생을 모시자며 백범김구재단 관계자들이 범국민 서명 캠페인을 벌였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효창동에 김일성의 금수산 궁전을 방불케 하는 백범기념관을 정부 재정으로 지어 성역화 했고, 정부로부터 매년 십 수억을 지원받고 있다.
좌익정권 10년 동안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백범을 부각시켰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는 김구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이승만 박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정부의 무관심도 여전하다.

좌익정권 10년간의 패륜적이며 反대한민국적 작태에 직면한 국민의 각성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현상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건국 60주년을 경축하는 정부 주관행사에서도 건국 대통령의 업적은 거론되지 않았다. 건국을 주도적으로 이끈, 주빈이 빠진 객들의 잔치판을 벌였던 것이다.

각종 국가 기념행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도 김구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홍보매체에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의 초상은 찾아볼 수 없고 김구의 초상만 들어있다. 이러니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김구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으로 착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구의 초상이 들어간 10만 원권 화폐마저 발행되었더라면 꼼짝없이 김구가 대한민국 국부로 자리 매김 될 뻔했다. 이는 명백한 역사날조이며, 왜곡이다.

금년 6월 26일, 정부를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와 김구 관련 단체에서는 백범 서거 60주기를 맞아 성대한 행사를 벌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추모사를 비롯하여 김양 보훈처장, 김형오 국회의장 등 정계 실력자가 두루 참석했고, 백범기념관과 인천대공원의 백범광장 등에서 김구를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거국적으로 펼쳐졌다.

전국 곳곳에는 백범이라 명명된 광장이며, 동상 등 김구를 추억케 하는 상징물들이 즐비한데, 정작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북한공산군의 남침을 막아내어 대한민국을 수호했으며, 한미동맹이라는 안보우산을 장만하여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아 오늘날의 자유와 풍요를 구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아준 건국대통령의 상징물은 전무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매년 김구 추모식에 참석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들 가운데 자유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오늘날 자신들이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최소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안다면, 건국의 주도자이며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에 대한 예의를 차렸어야 했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이 아닌 배은망덕지국이 된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버리고 김구를 선택했다.

물론 백범의 서거를 추모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백범 역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임에 틀림없다. 그의 불굴의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 건국 전후의 행보와 국가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박사와 건국 원훈들에 대한 불공정성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곁가지가 줄기를 침식(侵蝕)한 나라

오로지 백범만이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독립투사로 미화되고, 그 밖의 독립운동가들은 백범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백범이 추구한 행적은 그 무엇이 되었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행위였고, 여타 인물들의 행적은 부수적인 것으로 과소평가되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어쩌다 백범의 잘못을 거론했다가는 신성불가침 영역을 침범한 매우 불순한 자로 매도되거나 친일파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백범이 추구했던 노선이 자유대한민국 건국이념에 합치되는지, 자유대한민국 건국 전후(前後)의 김구 행적을 다시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구를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려줘야 하며, 인고의 세월 끝에 건설된 자주독립국가 탄생의 배경을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올바른 역사를 알아야 올바른 역사관이 형성되고, 그 바탕 위에서 올바른 국가관 더 나아가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불철주야 국가 건설에 매진한 건국대통령은 실종되고,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건국이념을 훼손한 세력들이 득세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노리개로 전락한 김구

지난 6월 16일자 신용하 백범학술원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남·북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먼저 ’남북협상‘을 해보자고 주장하며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것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참으로 큰 오해이다.”

신용하 씨의 주장은 김구 초상 10만 원권 화폐 도안인물 선정 사건과 맞물려 건국 60주년을 기해 봇물 터지듯 터진, 건국 당시 김구가 보여준 부정적인 행적에 대한 봉합(封合)의 일환(一環)으로 보인다. 신용하 씨의 주장과 같이 전혀 사실이 아니며, 순전한 오해인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김구는 1948년 1월 25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참여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김구뿐만 아니라 한독당 구성원 다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엔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한 소련의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자 한독당은 1월 25일 “소련측이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 감시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했으며, 김구와 임정계가 주도하는 국민회의도 “남북통일선거가 불가능함은 극히 유감이다. 남한만에 국한된 선거이라도 중앙정부로 세계가 인정하는 한 이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라는 성명으로 미루어 김구와 임정계열의 단선에 대한 입장은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 예로 47년 10월부터 조소앙 주도하에 한독당의 일부 간부가 중도파세력 중심의 각 정당협의회에 참가하면서 남북협상론에 동조하자 김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한독당 간부들을 해당행위자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26일,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후 열린 청문회에서 김구는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와 남한만의 선거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에 외군 철수 후의 무정부 상태와 내란을 생각지 않느냐는 UN위원단의 질문에 김구는 “그것은 한국위원단이 해결할 책임”이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무책임한 답변에 프랑스의 마네트(Manet) 위원은 “김구 씨는 UN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군대가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는 핀잔을 하기도 했다.

유엔위원단과의 회견을 마치고 나온 김구는 단선 반대와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 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비록 조건부였지만 그때까지 남한만의 총선 참여를 천명했던 김구와 한독당이 돌변한 원인으로, 첫째, 장덕수 암살사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947년 11월 17일 김구가 당수인 한독당이 주축이 된 각 정당협의회는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며, 남북 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 이 요구는 소련과 공산당의 주장을 지지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11월 21일, 70여 민족진영 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공산당의 대변자로 밖에 볼 수 없다고 규탄하자 김구는 이 주장을 보류하고, 12월 1일 UN 결의안과 이 박사의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12월 2일, 김구의 휘하로 알려진 김석황의 주도하에 한민당의 중진인 장덕수 암살 사건이 발생한 후, 김구의 정치노선은 다시 돌변하여 결과적으로는 공산당과 같은 노선으로 들어선 모습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에서는 장덕수 암살 배후인물로 김구를 지목했다. 그러자 김구 측에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이 박사와 하지의 관계는 견원지간을 방불케 하는 상태였다. 결국, 비서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박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이 박사가 고의로 도움 요청을 회피한 것으로 생각한 김구는 몹시 서운해 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둘째, 1936년 임정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의 등장과 성시백의 공작을 들 수 있다.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도 김구를 추종해 온 조경한에 의하면, “김구는 처음에는 단선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임정 주불외교위원으로 임명되었던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털어 총선거를 하면 북에서도 공산당의 전횡이 심하므로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 박사가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가하려고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단선을 거부하고 남북협상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시백의 김구 회유 공작이 있었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 2면 특집보도에 성시백이 김구를 회유(懷柔)하는 과정을 기술한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 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성시백 동지와 김구 선생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그 사연인즉 ‘상해림시정부’의 간판을 달고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던 김구 선생을 비롯한 ‘림정’사람들이 프랑스 총영사의 지시에 따라 조계지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성시백 동지가 그들을 구원해 준 것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 때 성시백의 소행을 고맙게 여기었으며 그를 출중한 인물로 까지 보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찾아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북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 자주 력량으로 조국을 통일하기위한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개최할데 대한 제의를 내 놓았는데, 이 거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입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 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워할 리야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 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 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 않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 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였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간 다음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 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렇게 말하며,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 선생은 “아니 자네가?…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 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 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 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 선생의 얼굴이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 주실 줄을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기여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1985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의 행적을 소재로 한 <위대한 품>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김일성에게 투항하여 국기와 임시정부 관인까지 바치면서 “황해도 신천에 과수원이나 하나 마련해주면 여생을 장군님에게 의탁하여 살겠다.”고 읍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등 김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품>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2년 12월, 남한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통일 한국인이 보아야 할 북한영화 50선’에 수록되었고, KBS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결국, 김구는 생전(生前)은 물론 사후에도 김일성-김정일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일성 부자로 인해 김구의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김구 추종세력은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하여 부화뇌동하는 희한한 작태를 벌여왔다. 더구나 김구 추종세력의 대다수는 김일성 부자와 친북좌익세력에게는 친화적이며 건국대통령을 비롯한 건국 세력은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작태마저 서슴없이 저질렀다.

남북 정당대표회의 개최를 위한 북측의 준비과정

1947년 9월경, 북한과 연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없애고, 새로운 민족통일 연합체를 성사시키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남한 정치권의 새로운 통일대오를 꾸리기 위해 자기가 속한 정당에서 정치적 신임을 받고 있던 실무자들인 근로인민당의 최백근(1961년 체포됨, 사형. 사회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서 활동, 애국열사능에 묘비가 있음), 한독당의 안우생, 민족자주연맹의 권태양, 민주독립당 강병찬, 조선인민당 염정권, 삼균청년동맹 김홍곤 등은 미국과 이승만 박사의 단선·단정에 반대하여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연합을 실현시켜 나갔다.

남과 북의 노동당 지도부는 47년 12월 중순과 48년 2월 초순에 열린 ‘정치국연석회의’에서 남한에서 유엔위원단과 단선 반대투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북한에서 북로당 제2차 전당대회가 끝나는 4월 중순에 남북 정당대표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성시백의 서울공작위원회를 통해 김구에게는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1991년 사망.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음)을, 김규식에게는 4월 남북연석회의 남측 대변인으로 대회를 성사시킨 실무자인 권태양(1966년 사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수여 받음), 조소앙은 비서였던 김홍근 그리고 홍명희에게는 그의 아들 홍기무와 비서였던 김기환을 통해 집중 공작하여 남북협상을 성숙시켜 나갔다.

한편 소련도 나름대로 전 한반도 공산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48년 2월과 4월의 ‘레베제프비망록’에 의하면 소련은 ‘전조선인민위원회대회’ 소집을 구상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대회를 통해 남한만의 선거 반대와 분쇄, UN임시한국위원단을 한반도로부터 추방하고 미·소 양군 철수 등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남북 정당대표회의는 김구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의 ‘구국의 결단’이나 명망가들의 서한 왕래로 개최된 것이 아니라 북측의 철저한 사전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과 북한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측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회유했고, 김구 등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북측의 회유에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임시정부 전통 포기하고, 대한민국 건국 반대한 김구

결국, 김구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한 민족지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공산당 집단이 소집한 남북한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미군 철수와 북한에 모인 좌파 56개 단체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남조선 선거 반대와 수립된 정부 불인정을 골자로 하는 4·30 성명에 한독당 대표 자격으로 서명했다. 이로써 자신이 지켜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북측과 함께 새로운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다. 진의(眞儀)야 어떠했던 김구의 행동은 소련과 북측의 의도대로 따라준 결과를 야기했다.

김구는 북한에서 북한헌법과 국기제정 등 공산정권수립의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목도했다. 그럼에도, 공산측에 가담하여 UN이 결의한 선거로 세워질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방해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 불인정, 북한과 한목소리

1948년의 5·10선거로 5월 31일 이승만 국회의장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 국회에서 세워질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과 민국의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었으며, 전 생애를 바쳐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주도해 온 이승만 의장이 민의를 대표하는 제헌국회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밝히는 매우 중대한 선언이다. 이로써 새롭게 세계사에 등장한 대한민국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그 뿌리가 있음을 국내외에 명확히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5월 5일 북한의 연석회의에서 돌아와 4·30성명이 남북요인회담의 성과라고 밝혔던 김구는 이 성명을 금과옥조로 삼고 북한에 동조하여 남한정부수립을 반대하며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6월 7일 4·30 성명을 통해 스스로 임시정부의 전통을 포기한 김구는 “현 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아무 조건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한 7월 1일에는 “대한민국의 국호나 법통도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남북통일정부를 주장했다. 김구는 소련과 북한의 공산집단이 통일을 위한 남북한 선거를 시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반면에 양 김 씨와 함께 북한을 다녀온 조소앙은 7월 10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해서 독립운동의 정맥을 계승하게 한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며 법통승계문제에 긍정적이었다. 공산당이 아닌 임정요인의 대부분도 각자의 시국판단에 따라 5·10선거를 국권회복을 위한 바른 길이라 보고, 국내의 민족진영과 함께 정부수립에 협력하고 있었으나 김구만은 끝내 반대한 것이다.

김구의 패배주의

김구의 완강한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에 1948년 7월 11일, 중국 공사 유어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개석 총통의 뜻을 전하기 위해 김구와 단 둘만의 비밀회동을 했다. 이 회동에서 김구는 “…내가 요인회담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대의 확장을 중지한다고 해도 남한이 전력을 다해서 붉은 군대의 현재 병력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인들은 책잡힐 일 없이 쉽게 남쪽에 대한 급습을 할 것입니다. 당장 여기에 정부가 세워지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며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했다.

김구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소련에 의해 곧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 주장은, 군사력이 우월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에 남한이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는 김구를 포용하고자 노력하며 수차에 걸쳐 포용발언을 피력했다. 그러나 김구는 7월 19일, 항간의 정부수립 참가 소문을 확인하는 기자에게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다시 한 번 완강하게 거부했다.

대한민국 유엔승인 반대운동 펼친 김구

김구와 김규식은 5·10선거 무효화 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48년 6월 7일,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등의 동조세력을 통합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7월 21일 주석에 김구,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앞둔 8월 11일, 이승만 박사는 장면, 장기영, 김활란을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 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으로 파견했다.

이보다 앞선 8월 1일, 통일독립촉성회는 부주석 김규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단을 선정했다. 통촉의 유엔대표단은 남북한의 분단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도록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서영해는 선발대로 파리에 가 있었다. 그러나 김규식이 수석대표직 수락을 거부하는 등, 통촉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통촉의 대한민국 승인 방해 행위에 대해 1948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국회에서는 조속히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금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우리 정부의 정식승인을 획득하려고 만반의 노력을 다 하고 있는 이때 좌익계열은 물론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반정부파에서도 유엔총회에 그들의 대표를 파견하여 현국회에서 수립된 정부는 타당치 못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운동이 최근에 이르러 치열히 전개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은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중간파 인사들이 과반 평양회의에서 귀경한 이래 통일추진문제를 다각적으로 강구하여 왔으나 단시일에 그 성공은 불가능하며 근근 신생정부가 탄생케 됨에 따라 반정부 태도를 최후적 투쟁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동공작은 단순히 중간파만의 단독적 행동이 아니라 남북공산파와의 연락하에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한 정권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는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주었고, 북한의 입장은 도와주는 결과를 야기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공포된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북한 정권을 부정했고, 한반도 주둔 외군철수를 주장하는 등의 발언으로 대한민국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계속했다. 반면 조소앙과 김규식은 정부수립이 공포된 후에는 대한민국 비판활동을 삼갔다.

정부수립 선포식이 있던 8월 15일에도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새로운 결심과 용기를 가지고…강력한 통일운동을 추진해야 되겠다.”라고 했다. 결국,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정하여 김일성을 돕는 일을 벌이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김구와 국회프락치 사건

1949년 5월,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5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이다. 친북좌익세력과 김구추종세력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이 이승만과 합작으로 반민특위 와해를 위해 펼친 방해공작의 최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국회 프락치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친북좌익세력과 김구 추종세력의 주장에 의하면, 구속된 국회의원들은 김구와 뜻을 같이하던 反이승만 계열 의원들로, 반민특위법 시행 강경론자라고 한다. 의원들의 구속 사유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용 또한 남로당의 지시를 따른 행위라고 하나 실증할 만한 근거자료가 하나도 없으며, 단지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 그리고 남로당 7원칙과 일치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에는 성시백이 1948년 가을부터 국회를 대상으로 공작을 펼쳤으며, 그 결과 국회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과, 성시백이 그들을 이용해 ‘외군철회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 신경완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태호 씨가 저술한『압록강변의 겨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미처 남쪽으로 피난하지 못한 주요 정치인·종교인·경제인·문화인·기술자·관리·군인들을 찾아내서 포섭하기 위해 노동당 군사위원회가 ‘모시기 공작’을 결정했으며, 포섭대상을 다섯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다.

첫째 부류는 북한 정권의 수립에 참여한 남한의 정당과 단체로 1949년 6월 25일 남북한의 좌익 성향의 단체로 결성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조국전선)’에 가담한 정당과 단체에 속했던 잔류 인사. 둘째 부류는 남한의 행정부와 국회, 정당, 사회단체에 잠복해서 활동하던 북한의 프락치와 이에 동조한 자. 셋째 부류는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한 정당·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 넷째 부류는 자수 또는 자발적으로 협력해 오는 자. 다섯째는 연행 또는 체포해야 할 인사들이었다.

7월 5일, 방학세가 머물던 종로에 있는 건물 2층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권태양, 안우생, 김용관, 임백, 김기환, 홍기무, 이찬영, 김약수, 공기찬, 김병환, 권태희, 박흥문, 조성국, 노일환, 황윤호, 이문원 등으로 노동당 중앙당 서울 지도부 이주상이 보낸 것이다. 이주상이 보낸 사람들은 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민족자주연맹·국민당·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과 국회를 비롯한 통치기관에서 남로당 또는 북로당의 성시백 조직의 프락치로 공작했던 사람들로, 요인들에 대한 정보와 소재 등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권태양은 정보요원 2명과 함께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자주연맹계 인사들의 소재를, 안재홍과 관계가 깊은 권태희와 2명의 정보요원은 안재홍을 비롯한 국민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조소앙의 비서였던 김흥곤과 정보요원들은 조소앙과 사회당 및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최태규, 신성균, 배중혁, 이구수 등은 형무소에서 탈출해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자진 또는 권유에 따라 출두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요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에 협조했다. 이들은 참여파 잔류 인사들로, 이들 대부분은 서울이 점령되자 자진 또는 권유에 의해 자기 계통의 조직을 찾아나서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에 등록한 자들로 납북인사들과 함께 북으로 갔다.

북한은 그동안 ‘국회프락치사건’의 실체를 철저하게 부인해 왔다. 그러나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과 2002년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통일여명 편집국 특집보도(181호)에서 이를 스스로 인정했다.

성시백이 국회의원 포섭공작을 벌였다는 북한 ‘로동신문’ 기술 내용과, 신경완의 증언 내용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친북좌익세력과 김구 추종세력이 주장하듯, ‘국회프락치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김구는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배후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바라본 김구의 행적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미화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김구가 주장하던 ‘평화통일’과 "한반도 주둔 외군철수‘는 북한을 대변하는 결과를 낳았고, 1949에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표출되어 신생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김구가 호언장담했던, 미군이 철수해도 공산군이 남침하지 않는다는 북한지도자의 약속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미군이 철수한 이듬해, 신생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으로 수백만 명이 희생된 6·25사변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아마도 김구 생전에 6·25사변이 발발했더라면 결코 오늘날과 같은 추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북한과 친북좌익세력의 주한 미군 철수는 평화통일을 위한 필수요건이라는 주장은 변함없다. 그러나 친북좌익세력과 김구 추종세력이 금과옥조로 삼는 김구의 ‘평화통일’은 우리의 헌법정신에 배치(背馳)된다. 헌법은 우리에게 좌우합작에 기반한 ‘평화통일’이 아닌 ‘자유통일’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성시백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성시백에게 포섭되어 평양행을 강행한 김구의 행적이 오늘날 대한민국 체제 수호와 정체성 훼손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김구의 평양행이 일편단심 애국충정이나 평화통일의 염원으로 과대평가되는 현상이 지속될수록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은 훼손될 것이다.

김구의 말년 행적은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겨져 대한민국 건국이념을 좀먹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구의 평양행이나 건국 이후의 행적은 反대한민국적이며 대한민국 건국이념과도 배치된다. 우리의 건국이념은 열린 민족주의이며, 반공·반탁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통일만 되면 된다는 김구의 좌우합작 노선과는 달리, 건국 원훈들은 대한민국을 명백한 자유민주 체제로 건설했다.

김구에 대한 찬사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독립운동가로 족하다. 김일성 부자와 친북좌익세력에게 이용당해 조국을 위기에 빠트렸던 김구가 아닌, 애국애족 정신에 투철한 독립운동가로 회자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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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총 성명서]문재인 정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가? [성명서] 문재인 정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가? 문재인 정부는 지난 7월 6일 베를린 선언을 통한 대북정책을 대, 내외 천명한데 이어 7월 19일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앞서 문대통령은 6월 30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하여 대 북한 유화정책(햇볕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속내를 관철하기 위해 사드배치를 반대하지 않는 듯 얼버무리면서, “올바른 조건하에서 대화 및 교류”라는 애매모호한 단서로 애타게 구걸에 성공 한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한미정상회담 후 미국정부와 의회도 문재인 정부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현 정부에 대한 견제를 시작한 듯 보인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① 한미정상회담에서는 한미연합사를 조속히 해체하고 대 북한 유화정책 (햇볕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② 베를린 선언은 반 헌법적인 6.15공동선언 및 10.4선언을 이행하겠다는 것이고, ③ 국정개혁 5개년 계획은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체제로 혁명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피와 땀을 흘려 한강의 기적을 창출한 세계적 모범국가인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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