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壬亂)의 구국의 승장(僧將)사명대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편단심이 되어 호국의 수호신이 된 분이다. 사명대사는 가끔씩 자신의 비석을 통해 경이로운 기적을 보여준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사명대사의 비석에 백성에게 나라사랑을 촉구하는 것 같은 사명대사의 눈물 같은 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명대사의 비석은 두 곳에 있다. 당시 조정에서 사명대사의 구국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명대사의 탄생지인 밀양에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내리고 사당을 지어 매년 제향을 받들게 하며 비석을 세웠고, 또 사명대사가 만년에 주석하시다 입적하신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사명대사의 진영(眞影)과 사명대사의 행장이 담겨있는 비석이 있다. 두 곳의 비석에서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면 눈물같은 물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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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성사 사명대사의 진영. 사명대사는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부처님의 불살계를 파하면서 구국전선에 나섰고, 나라에 평화가 오고 조정에서는 벼슬을 내려 함께 국정을 보자고 했지만, 미련없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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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고정세작(固定細作)적인 친북 좌파에 의해 정체성이 위협받는 위기의 이때에 사명대사의 비석은 또다시 우리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듯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이번에는 사명대사가 말년에 주석하시다가 입적한 합천 해인사 홍제암의 비석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이번에는 무슨 변고를 경고하는 메시지일까?
나라와 민족의 수호신이 되신 사명대사를 추모하며 사명대사의 행장(行狀)을 생각해본다.
불살생(不殺生)은 불교의 수행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엄한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독사가 인간을 해치려할 때는 불교인은 주저없이 독사를 죽여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독사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의해 패망되고 도륙(屠戮)되는 위기에 처하면 불교인들은 불살생의 계율을 파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길로 나서야 한다. 불교의 대승적 판단이요, 호국불교사상에서이다. 나라와 민족이 없으면 불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명대사도 임진난으로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구국의 원을 세워 승병들과 함께 전쟁터로 향했다.
사명대사의 속성(俗姓)은 풍천임씨(豊川任氏)요,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자(字)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종봉(鍾峯)?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이라 하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한다. 조선조 중종 39년(서기 1544년) 갑진(甲辰) 10월17일에 밀양의 삼강동에서 이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명대사의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이며, 조부는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낸 것을 보아 사명대사의 가문은 소위 족보가 있는 집안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시하여 조사들이 일찍 부모를 사별하여 그 충격으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동기가 되었듯이 사명대사 역시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는 비운을 겪었다.
사명대사가 갑오년 9월에 선조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신은 풍천임씨의 후예로서 조부 때 영남 밀양에 이적(移籍)하여 밀양부민이 되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나이 1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연달아 16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거목무친(擧目無親)이요, 고경혈립이라 드디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한 죄인으로 부평초 같은 신세가 되어 산림에 들어가서 생애를 운조(雲鳥)와 함께 하였습니다.”라는 것을 보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가 되어 불문에 의지한 것 같다. 사명대사는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에 소년시절 입산하여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어 촌음을 아끼어 수행정진 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조정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으로 박해받아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불심깊은 문정왕후가 어린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는 자신이 신앙하는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승려 인재를 널리 구하였다. 문정황후는 승과(僧科)와 도첩을 부활시켰다. 당시 봉은사에서 행한 선과(禪科)에는 서산대사가 급제하여 대선(大選)이 되었고, 이로부터 10년후 명종 16년, 사명대사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선과에 장원급제를 하니 불가의 칭송은 물론이요, 유학계에서도 경탄해 마지 않았다.
사명대사의 일화를 적은 밀양 표충사에 있는 ‘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문’에는 사명대사가 선조 27년(갑오년)4월, 7월, 12월의 3차에 걸쳐 왜군 사령관 가요마사(淸正)을 만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쟁변(爭辨)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가등청정이 사나운 얼굴로 사명대사에게 물었다.
“조선에 보배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습니다. 보배는 일본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보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요?”
사명대사는 손으로 들어 가등청정의 머리를 가리키며 태연히 답했다.
“장군의 머리에는 큰 상금이 걸려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장군의 머리를 베고자 하니 장군의 머리가 보배이지 않습니까?”
사명대사의 말을 들은 가등청정은 놀라 돌연 얼굴이 창백해지며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사명대사와 가등청정의 대화는 조선과 일본에까지 인구에 회자되었다.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본국의 일본군, 일본의 조야(朝野)에까지 퍼졌다. 일본인들은 점령군의 사령관인 가등청정과 사명대사와의 보배론에 대하여 박장대소를 하고 사명대사를 존칭하여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고 부르며 웃음속에 기개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실권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했다. 일본조정은 조선과 화친하기를 위협적으로 강요해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이 두려워 사신으로 나가려는 정치인이 없었다. 선조 37년 6월, 비로서 사명대사를 통신사(通信使)라기 보다는 불교적의미를 부여하여 널리 일본을 제도(普濟扶桑)한다는 취지에서 파견하는 한심한 외교적 작태를 부렸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자 일본인들은 유명한 “설보화상(說寶和尙)”이 왔다고 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다. 일본의 조정은 물론, 승려들, 귀족, 평민들은 사명대사의 시문(詩文)을 하려고 앞다투었고, 사명대사의 인격과 문장과 설법은 숭앙과 격찬을 받았다. 이에야스의 장자 히데야스(당시 32세)는 사명대사에게 선학(禪學)을 묻고 스승으로 예우를 하였다. 사명대사는 혁혁한 외교성과와 함께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조선의 조정과 백성을 놀라고 감탄하게 하였다. 임금은 사명대사의 초인적인 외교능력과 구국의 단심(丹心)에 보답하기 위해 영의정을 하사했으나, 사명대사는 신하로서 군명(君命)을 어길수는 없다하여 따랐으나 3일만에 관직을 버리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가버렸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야(功遂身退)’한다는 것을 실천해보였으니 어찌 구국의 성사(聖師)라고 존경하지 않을 것인가.
사명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사부대중을 불러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엇하러 번거로이 오가면서 이 허깨비의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죽음에 들어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깨끗이 가사장삼을 입고 정좌하여 고요히 입적하니 세수 67세였다.
사명대사에 관한 기이하고 신통한 전설이 많이 내려온다. 독자 여러분이 사명대사가 열반한 홍제암을 찾는다면, 사명대사의 진짜 영정(影幀)과, 부도전에 가장 큰 비석인 사명대사의 비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석을 살피면 크게 네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볼 수 있다. 비석이 네 조각으로 부서진 사연이 있다. 한일 합방 후 일제 36년 강점기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 서장이 조선사람의 가슴에 살아있는 사명대사의 호국불사상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홍제암 부도전에 모셔진 사명대사의 비석을 큰 망치로 내리쳐 네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날 밤 일본인 서장은 코와 입에서 피를 내뿜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행장에는 기이한 공통점이 있다. 두 분 대사는 지금의 북한 땅에 있는 사찰에서 오랜세월 수행과 전법을 한 분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 주적하다가 입적했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 오랜세월 주석했다. 그런데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상한 유촉(遺囑)을 했다. “장차 이곳 북쪽은 불교의 흥왕을 기약할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고 전제하며 “나의 유품은 불법이 보전되는 남쪽의 대흥사로 옮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산대사의 유품은 모두 지금의 해남 대흥사 유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도 금강산을 떠나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두 분 구국의 성사(聖師)는 훗날 북한 땅에 김일성패들이 불교를 말살하려는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 같다.
끝으로, 이 땅의 사부대중들은 서산,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는 신명을 바쳐 수행정진과 중생구제에 나서고, 나라와 민족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면 신명을 바쳐 부처님의 불살생계를 파하면서라도 구국전선에 나서야 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김일성왕조를 만대에 전하려는 김정일정권의 대남적화의 외침(外侵)과 김정일의 하수인들인 친북 정치인들의 내응(內應)음모로 위기에 처해있다. 2000만 불교인들은 불교의 호국사상으로 총궐기하여 공산도배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