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시진핑 공동성명,
첫술에 배부르지 않더라도

이게 가장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다.
많이 기대할 것인가,
중간 쯤 기대할 것인가,
아주 조금만 기대할 것인가?
시진핑을 포함한 중국 현세대 지도층에 대해서는 한 가지 흥미 있는 평(評)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의 아버지인 혁명 1세대가 세운 전통을 결코 무너뜨리지 않을 사람들이란 뜻이다.
시진핑은 문화혁명기에 그의 아버지가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 자신도 당연히 변방 으로 하방(下放)당한 [우울한 청춘기]를 살았다.
그런 그는 그러나 훗날 성공한 뒤에 이런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소련이 붕괴한 것은 고르바초프가 깃발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깃발은 그대로 놓아둔 채 무엇을 도모했어야 하는데,
그가 깃발을 내리고 바꾼 탓으로 (유지됐어야 할 소련)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중도적 이념 스펙트럼이 배어난다.
그는 급진적(민간 이니셔티브) 시장파(市場派)와 보수적 문혁파(文革派) 잔재의 중간쯤에
서있는 [국가주도 시장주의]에 제자리를 설정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선은 모두를 끌어 모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 지도노선을 내걸었다.
집권초기일수록 그의 이런 포괄적 자세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중 정상의 <미래비전 공동성명>에 서명한 시진핑의 자세도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공동성명이 북한 핵(核)을 딱히 명시하지 않은 채 그냥 [유관(有關) 핵]이라고만 한 것,
북한 핵 폐기라고 못 박지 않고 북한이 줄곧 말해 온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을 쓴 것은
그의 보수적인 입장이 관철된 것이다.
반면에,
그 자신이 말했을 때는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라고 했는데도
공동성명에는 그냥 [한반도 평화통일]이라고만 돼있는 것,
그리고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를 지지한다고 한 것은
그의 [변화된]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양면적 스탠스(stance)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동성명을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첫술에 배부르지 않더라도...] 정도로 보아두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은 [첫술] 치곤 상당히 괜찮은 첫술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왜?
중국 사람들은 급하지 않고 유장(悠長)하다.
말을 우리처럼 단번에 딱 부러지게 하지 않고
은유(隱喩)적으로, 우회적으로 한다.
그래서 비록 우리 입장에선 충분히 [배가 부르지 않더라도]
이번 공동성명이 북한 식 [자주적 평화통일] 대신 그냥 [평화통일]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 지지를 명시한 것은
지난 날과는 다른 긍정적 사인(sign)이었다고 읽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환대하는 격(格)과 호의는
보도에 의하면 [최상]이었다고들 한다.

왜 그랬을까?
한국더러 미국하고만 붙어 다니지 말고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거리낌 없는] 시위(示威) 효과도 결과적으로 될 것이다.
“봐라, 우린 한국을 이렇게 후대(厚待)하겠다”
북에 대해 일종의 견제구를 날리는 것이다.
한결 더 두드러진 [의도적 연출]이었다고 할 만하다.
이런 중국에 대해서는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
시진핑 중국이 북한을 버릴 것이라고 낙관해선 안 된다.
그러나 그 중국이 자기들의 국가이익이란 관점에서
북한이 너무 잘못 가고 있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것만은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시진핑 중국의 이런 [변하기 시작한] 인식에
“대한민국이야말로 동북아 평화를 향한 진정한 선린(善隣)”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입력시켜 가야 한다.
그러나 국제정치 무대엔 어디까지나 힘에 기초해야만 대등한 선수로 출전할 수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
우리의 실력 플러스 한미동맹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야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