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제발 때리지 마세요/훔쳐 먹다 붙잡힌 죄 크지만/내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세요/사실은 나에게 죄가 없어요/이제 겨우 아홉 살인 철부지 고아/꽃제비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요?/나에게 만약 죄가 있다면/그저 단 한 가지 죄 아닌 죄/조선에서 태어난 죄 밖에 없어요“
백이무. 20대 여성. 현재 중국을 거쳐 제 3국 00에 체류 중. 국제 PEN 클럽, 북한 망명 PEN 회원. 알려진 것은 이 정도다. 인민학교와 중학교 때 이미 ‘문학 신동(神童)’ 이란 평을 받을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 '고난의 행군' 때 부모가 아사하자 두만강을 건넜다. 수 년 간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며 유랑했다. 북에 두고 온 동생들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 현재 제 3국에서 막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썼다. 그것이 어찌 어찌 국내로 흘러들어 와 첫 번째 시집 ‘꽃제비의 소원’으로 출간(도서출판 글마당)되었다. 두 번째(‘이 나라에도 이제 봄은 오려나’)에 이어 올 가을 쯤 세 번째 시집이 나올 것이라 한다.
그녀의 시는 핏물이 뚝뚝 묻어나는 고발문학, 현장문학, 르포문학, 기록문학, 극한체험의 문학이다. 마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보는 느낌, 731 부대의 생체실험장을 보는 느낌, 폴 포트의 킬링필드를 보는 느낌이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체포, 수용소 수감, 고문, 아사, 처형이 있다. 일찍이 이렇게 처절한 현장문학이 또 있었을까.
“찍하면/굶어서 죽고/얼어서 죽고/그것이 모자라면/잡아다가 고문을 가해/때려죽이고/지져죽이고/찔러 죽이고/그마저도 성 차지 않으면/공개로 대중 앞에 세워놓고/총으로 쏘아 죽이고/밧줄로 목매 죽이고/불로 태워 죽이고/오, 힘없이 쓰러져 가는/곧 죽음을 맞이할 민초들이여/죽기 전 하늘땅을 뒤흔드는/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라/내 피 타는 소리를 들으라/그리고 어서 빨리 깨달아/모두 다 각성하여 일떠서라!”
이 구절에서 “한반도 문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보인다. 한반도 문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험대에 누어있는 마루타를 구출하는 일이다. 백이무는 이 절체절명의 어젠다를 피 토하듯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런 백이무의 시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그것은 우리를 위서도 울린다. 우리의 무관심과 한가로움을 위해. 그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를 위해.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 간 교류 협력? 성현(聖賢)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엔 마루타가 보이지 않는다. 마루타를 “때려죽이고, 찢어 죽이고, 찔러 죽이고, 쏘아 죽이고, 목매 죽이고, 태워 죽이는” 학살자들과, 평화 만들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실컷 들 해보시길. 히틀러와 만드는 평화라니, 천지창조 이래 이런 게 일찍이 있었나? 그럼 2차 세계대전이 아예 없었게?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이 있다. 실존철학자들이 한 말이다. 인간, 세계, 역사는 지식인들이 탁상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한가로운 이론이나 관념대로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인 삶 속에 내던져진 인간들의 그때그때의 부조리(不條理)한 반응, 선택, 의지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한반도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살하는 우상 신(神)과, 학살당하는 마루타들의 격렬한 작용-반작용이 발생시키는 북한의 격렬한 실존적 국면들에 대해, 강 건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저, 자칭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의 알량한 ‘이론적 처방’이라는 게 과연 얼마만큼의 적실성(適實性)을 갖는 것일까? 백이무의 시가 진짜 현실인가, 자칭 ‘한반도 전문가’들의 ‘이론’이 진짜 현실인가?
캄보디아 톤레 삽 호수 가에서 맞아죽은 원혼들에게 물어보라. “왜 폴 포트와 평화 만들지 않고 이렇게 죽었느냐?”고. 북한 땅 수용소에서 공개처형 당한 원혼들에게도 물어보라. “왜 김정일과 평화 만들지 않고 이렇게 죽었느냐?”고. 그럼 그들의 답변은 뭘까?
“잘해 보세여”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