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논설위원
페이스북 친구들 중 40∼50대에 민주당이나 진보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해 내란음모 혐의로 압수수색을 할 때만 해도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내란음모 혐의냐”며 국정원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전쟁 대비’ ‘총 준비’ ‘주요 시설 파괴’ 등의 얘기가 일부 보도됐을 때도 “황당무계하다”거나 “또 빨갱이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석기가 총책인 ‘RO(혁명조직)’의 5월 12일 합정동 회합 녹취록 전문이 공개되면서 주사파(主思派)를 제외한 진보진영 전체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분위기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만약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통진당의 거듭된 말 바꾸기와 이정희 대표의 “농담으로 한 말”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일말의 양심도, 최소한의 공인(公人)의식도 없는 그들의 실체를 파악한 듯하다.
20대들은 이번 사태에 더 화가 나 있다. 중앙일보가 지난 6∼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이 의원 구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20대 71.3%가 ‘잘한 일’이라고 답해 30대(57.5%), 40대(66.5%)보다 높고 50대(78.7%)에 가깝게 나타났다. 녹취록의 증거능력이 충분하다는 견해도 20대가 다른 세대보다 높게 나타났다. 고려대와 부산지역 7개 총학생회가 6일 이 의원과 통진당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통상 20대들이 이런 안보 관련 이슈에 대해 정부를 잘 믿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있다. 20대들에겐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을 적(敵)으로 상정하고 ‘테러’를 모의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군(軍)에 간 친구들이 천안함 폭침(2010년)으로 전사한 것을 직접 본 세대들이라 북한에 환상을 갖고 있었던 40∼50대 초반의 ‘조통(조국통일)세대’와는 시각이 다르다. 3대(代) 세습에 주민들은 굶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김정은 정권이 이들에게 ‘민족’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투쟁 현장에서도 ‘진보하지 않는’ 진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촛불시위 현장에선 ‘반대시위’에 늘 등장해 눈에 익은 인물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장소와 이슈만 달리 했을 뿐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1980∼1990년대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20대의 발랄함과 패기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진보는 달라져야 한다. 예전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 통일 대 반통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종북(從北)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자유, 정의, 인권과 같은 진보 가치에 충실하고 국민의 다양한 생활적 요구에 천착하지 않으면 20대들에게 천덕꾸러기 대접 받기 십상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등 야당의 어젠다를 과감하게 차용하고 보수에게 터부시된 빨간색을 당색(黨色)으로 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무엇이 바뀌었나. 국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노숙·장외투쟁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종북의 그늘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민주당과 진보세력이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야당생활을 상당히 오랜 기간 더 해야 될지 모른다. 젊은 층이 줄고 고령인구가 늘어나는 인구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진보세력에 결코 유리한 국면이 아니다. 진보세력은 듣기 싫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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