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재판에 미국식 재판을 가미한다고 해서
도입한 방식인 모양이지만,
이게 한국적 토양에서는
또 하나의 부작용을 빚는 것 같다.
똑같은 사안에 대한 평결이
부산에서는 유죄,
전주에서는 무죄로
나왔다니 말이다.
[한국적 토양]이란 어떤 것인가?
[참여하는 시민들]이
미국과는 달리 덜 객관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왜 그런가?
우선 [객관적]인 태도선택에 있어
우리 한국인들이
아직은 충분한 훈련이 돼있지 않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다분히 집단적이고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사고를 하는데
더 익숙하다.
예컨대,
마을사람들이
“이치가 그렇더라도
그놈은 우리 사람이 아니다” 하면
[그놈]을 두둔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게
우리네 문화다.
반대로,
마을 사람들이
“그 놈이 이치엔 맞지 않았는지 몰라도
그래도 그 놈은 우리 사람이다”하면
[그놈]을 대놓고 나무라는 것도
결코 수월치가 않다.
이게 한국적 토양이다.
게다가,
그 [참여]라는 것 역시
한국적 토양에서는
부작용이 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이 경우의 [한국적 토양]이란 또 뭐겠는가?
우~우~ 주의(主義)가 그것이다.
[참여]란
관료주의와 대의제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근래 한국에서 운위(云謂)되고 있는 [참여]란,
그 정도를 넘어
군중적 함성과 다를 바 없는
[그 나름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래서 [국민참여재판]이라는 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한계와 문제점을 빚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한 말로는
“인민재판과 뭐가 다르냐?”는
볼멘소리도 아마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대안의 하나로는,
[정치성 짙은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참여재판을 하지 말도록 하자는 여론이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을 때는
초기엔 의례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다.
지방자치제도,
교육감 직선제도,
대학총장 직선제도,
아직은 시행착오 단계를 졸업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 장점과 함께
그 부작용 또한
없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민주주의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에 대한
중용(中庸)의 답,
적중(的中)의 답을 얻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엘리트의 몫과 대중의 몫을
적정선에서 분별하는 지혜일 것이다.
한 쪽 극단에는
예컨대 중국식이 있다.
12억을 추리고 추려서
최고 우수분자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중국은 [발전]을 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그 엘리트가 부패하니까
중국이 편치가 않기도 하다.
반면에 요즘 한국에서는
극단적으로 과장하자면
5천만 모두가
“나라고
대통령 못하란 법,
국회의원 못하란 법,
재판 못하란 법
어디 있느냐?”는 식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반대 쪽 극단일 수 있다.
체로 친다는 말이 있다.
쌀을 이렇게 흔들고 저렇게 흔들다 보면
점차 불순물이 날아가고
알짜 쌀만 남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네 민주주의는
아직 더 체로 쳐야 할 모양이다.
다만,
한국인 특유의 [빨리 빨리] 문화에 힘입어
이 체질이 너무 길게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