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와 ‘국가반역’ 등 여러 사건들은 장성택과 그 일파가 힘에서 밀리고 있지 않았다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통일연구원 박형중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온라인시리즈 2014-2-17자 ‘장성택 숙청과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 보고서에서, 김정일은 군부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자신의 권력보존에 활용했지만 김정일 사망을 계기로 군부-조직지도부 연합 세력이 재차 발호했고 김정은이 이에 동조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즉 장성택의 득세, 실각과 처형의 배경에 김정은 권력세습에서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던 두 세력(군부-조직지도부 연합과 김경희-장성택 연합)간의 대결이 존재하며, 장성택의 실각과 처형은 두 세력 중의 한 세력이 패배해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2002년 군부 주도 하에 고영희-군부-조직지도부(이제강․이용철) 연합이 세습 후계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김정일은 장성택과 김경희에게 힘을 실어주어 군부-조직지도부의 견제 세력으로 키웠다고 밝혔다.
그리고 당시 김정일이 후계 논의를 중단시킨 이유로, 후계 논의 시작이 김정일의 권력을 급격히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군부가 후계 문제에서까지 주도권을 잡으면 그 후계자가 군부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측했다.
때문에 김정일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을 견제할 권력 게임에 시동을 걸었는데, 2005년·2006년부터 장성택을 내세웠고, 2008·2009년 이후에는 사실상 은둔하고 있던 김경희를 전면에 내세워 조직지도부로부터 행정부를 분리해 장성택이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조직지도부를 견제했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또 2009년과 2010년 장성택과 오극렬 사이의 이권 다툼에서 장성택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정일의 의중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박 소장은 김정남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던 김경희-장성택 연합이 2009년 이후 김정은 후계 체제 수립에서 주도권을 갖도록 지원한 것도 김정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김정은에게 권력세습을 추진하려고 먼저 시작했던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에게는 반전이었다.
그런데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반대파인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김정은의 동조와 2012년과 2013년 김경희의 건강 이상이 장성택 실각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박 소장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부터 2013년 말에 이르는 시기에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 힘을 결집하고 장성택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로 ▲ 이제강의 유고『혁명적 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 가시는 나날에』가 김정일 사망 직후인 2011년 12월에 출간된 것 ▲ 2012년 5월 고영희의 우상화 시작 ▲ 2012년 7월 이영호의 해임, 군부 무역권의 본격적 축소 시도 등으로 군부의 불만이 커진 상태에서 김경희의 건강악화 ▲ 2012년 11월 무역활동 재개로 시작된 군부의 영향력 증대 ▲ 2013년 5월부터 고영희와 이제강 위상 강화 ▲ 2013년 9월 김경희가 건강 악화로 러시아로 출국하자 9월9일 김정은 가족회의에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인 조연준의 2적2개(2敵이란 미제와 남조선 이외에 내부의 적을 만들어 치자는 것, 2開란 경제특구 등 외부개방과 함께 주민들 여행통제의 자유화)개념에 기초해 장성택 숙청 결정 ▲ 2013년 11월부터 장성택 세력에 대한 본격적 공격 시작 등으로 설명했다.
군부-조직지도부 연합과 김경희-장성택 연합이 세습 후계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한 이유는 후계자를 옹위하는 데서 주도세력이 되어야, 후계자 치하에서 독점적 세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