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서문:
제주4.3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빚어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사건의 진상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야 합의로 마침내 지난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제정‧공포됨으로써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를두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위원회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설치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해 분석하였습니다.
이런 작업의 결과, 위원회는 2003년 3월 29일에『제주4.3건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습니다. 위원회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두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접수된 의견들을 검토, 일부 내용을 반영하여 지난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4.3특별법’이 제시하고 있는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03. 12.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국 무 총 리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이삼룡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것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 노출이 안된 것은 그래도 조직이 지켜진 것이다. 4.3 발발 후 나는 정치위원으로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소재한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김시종은 “나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