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의원은 “현대사의 아픔을 덮고 치유하기 위한 4·3 추념식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그러나 화해와 상생이라는 것도 시(是)와 비(非)를 가린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4·3 희생자로 선정된 사람들 중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경력의 소유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며, 4·3 희생자로 선정된 분들 중에는 북한 인민군 사단장을 지낸 이원옥 씨가 포함되어 있다고 예를 들었다.
‘제주 4?3 정립연구유족회’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이원옥 씨는 1947년 가을 입산해 연락임무를 띄고 활동하다 1948년 북한으로 건너가 6.26때 인민군 사단장으로 내려왔고 7천 명을 거느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북한 인민군으로 활동했던 김기추, 북으로 간 후 해주 경찰서장이 됐다는 현만호, 남로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 남로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김완식 씨 등 누가 봐도 제주 4·3 희생자로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하 의원의 설명이다.
또한 이들을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은 헌법재판소 판결문(2001. 9. 27. 2000헌마 238·302(병합) 전원재판부)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되며, 4·3 위원회 스스로도 ①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②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 자는 희생자 범위에서 제외대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하 의원은 이들이 어떻게 4·3 희생자로 선정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당시 선정과정과 세부 심사자료 등을 요청했으나, 해당 자료가 비공개로 분류되어 있어 공개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면서,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선정되었는지 그 이유는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을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시했다.
일례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경우 누가 어떤 이유로 희생자로 선정된 것인지 일반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쉽게 확인이 가능하며, 그들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서적들도 여러 권 출판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 의원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해서 누가 어떤 이유로 희생자로 선정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을 추념하고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다”면서 “당시 4·3 위원회가 자신들의 부실한 심사과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비공개로 지정해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하 의원은 이번 법안이 위원회가 이미 신청사건의 심사를 완료한 후에도 새로운 사실의 발견 등 종전의 결정을 변경할 중대한 사유가 발생하였다고 판단될 경우 직권으로 재심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4·3희생자 선정’에 대한 논란의 소지를 없애고, 진정으로 희생자를 위로하며 국민화합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고 법안 발의 목적을 밝혔다.
아울러 대한민국 정부에도 2001년 헌법재판소가 판결문(2001. 9. 27. 2000헌마 238·302(병합) 전원재판부)을 통해 정확히 밝혔고, 4·3위원회도 스스로도 규정하고 있듯이 희생자로 구분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4·3 희생자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정확히 밝혀낼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다음은 ‘제주 4·3 정립연구유족회’가 공개한 재심의가 필요한 ‘희생자’들 일부 명단이다.
▲ 북한 인민군 사단장 이원옥
1947년 가을 입산하여 연락임무를 띄고 1948년 이북으로 갔다가 6.26때 인민군 사단장으로 내려옴. 7천 명을 거느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
▲ 북한 인민군 김기추
제주 출신으로 1951년 부산 서면 포로수용소에서 목격. 그는 포로 중에서도 똑똑해 소대장급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낙동강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고 말함.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아 공산포로로 남았고, 석방된 후 행방불명. 북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됨.
▲ 북에서 해주 경찰서장 됐다는 현만호
현만호는 제주 좌파의 핵심 인물. 제주에서 폭도로 있다가 6·25때 인민군과 함께 월북해 해주 경찰서장까지 했다는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증언. 현만호를 포함해 노형 출신 12명이 북한에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
▲ 남로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28. 남. 사망)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사령관. 입산 후 1949. 6. 7 이덕구가 체포되고 나서 사령관이 됨. 1953년 4월 무장대를 토벌하던 경찰과 총격 중 사망.
▲ 남로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김완식(23. 남. 행방불명)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48. 6. 16 경찰관을 습격해 죽인 폭도. 무장대 핵심간부로 ‘관음사’전투 지휘. 끝내 산에서 자살.
▲ 무장대 주요 간부였던 허영삼. 김태길. 김영찬. 고인수. 김만옥. 문도공 등
1951년 3월의 무장대 조직은 사령관 허영삼(남로당 제주도 당책 겸임, 안덕 출신), 유격대 부대책 김태길(가명 문호철), 작전 참모 유모씨(이름 미상, 대구 출신), 훈련관 모씨(성명 미상) 등과 제11지대(김영찬, 14명으로 3개조), 제50지대(고인수, 가명은 소형삼, 18명으로 3개조), 제1지대(김만옥, 14명으로 3개조), 제7지대(문도공, 14명으로 3개조) 등 총 64명으로 지휘부와 4개지대로 편성되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