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우울하고 일손이 안 잡혀 강가로 산책하였다. 마침 오리 한 마리가 물 표면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한 번 슬쩍 보더니 경계를 풀고 다시 강물 속에 고개를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먹이를 찾는 모양이었다.
“왜 손을 놓고 있나! 주변에 있는 군함들을 불러서 쓰러진 배를 밀어붙이란 말이야! 그러면 배가 똑바로 설 것이 아니냐!” TV화면에서 중년의 남자가 소리쳤다. 진도 바다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 외침을 듣고만 있었다. 영화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착착 진행된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아침에 보았던 TV보도가 저녁 생방송 뉴스 시간에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단원고등학교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유가족은 어떠할까.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은 진도 체육관에서 눈물 흘리는 가족들의 심정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오리가 겉으로는 여유롭게 보여도 보이지 않는 물속의 발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듯이, 겉으로 진척이 느리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대원들은 생존자를 어떻게든 구출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대원들도 무슨 긍정적인 성과가 있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수면으로 나온 부분에 구멍을 뚫어 들어가면 안 되겠냐는 앵커의 질문에 해양전문가가 말했다. 위에 구멍을 뚫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에어포켓의 공기가 확 빠져나올 수 있으며 갑자기 배가 가라않을 수 있으며 위에 구멍을 뚫는다 해도 실종자들이 모여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까지 가려면 100여 미터를 내려가야 하는데… 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100여 미터? 그 길이가 실감이 나지 않아 축구장을 검색해보니 축구장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가 약 100미터이다. 세월호는 146미터이니 축구장 길이의 1.5배 가량이다. 차량 180대를 실을 수 있단다. 도시 거리의 한 블록 거리는 족히 되는 길이이다. 이런 규모의 배를 들이받으면 일사천리로 180도 회전하여 다시 원위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이걸 안 한다고 구조대원을 비난하는 것은 이성없는 감정일 뿐인 것 같다.
강가를 걷는데 또 답답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절제와 규율로 무장된 정신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은 선장과 항해사는 어디에 있는가? 빳빳하게 다림질된 제복은 좌뇌의 활동을 민첩하게 하겠다는 정신자세의 표현이기도 하다. 선장과 항해사가 제일 먼저 구조되는 대열에 있었다는데 구조되는 상황에서 제복을 입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안 보였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선장부터 온통 일용직 노동자들처럼 츄리닝에 잠바 걸친 인간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는 상상이 자꾸 스친다. 최초에 배가 균형을 잃어갈 때 해양청에 신고할 시점에 곧바로 구명자켓을 입게 하고 구명보트를 내리고 선장부터 승무원들까지 모두 일심 단결하여 질서유지에 만전을 기했더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살릴 수 있었다. 구명보트도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착잡하고 참담해진다. 그런데 그 선장은 제일 먼저 구조되는 대열에 있었으며 병원에 앉아서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는 소식도 있었으니 생각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 지폐 쪼가리 몇 장이 눈에 밟힐 수 있는가. 제복도 없고, 민첩하게 깨어있는 이성도 없었다.
청와대 참모진은 국무총리도 물병세례를 받는 상황에서 봉변을 당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의 현장방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아마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악의 욕설을, 박 대통령은 감수했다.) 그럼에도 최고지도자의 방문은 언제나 주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있으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의 현장을 방문한 것은 기본도리를 한 것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한국 교포 조승희가 미국 대학생들 30여 명을 쏘아 죽인 비극이 있었다. 그때 사망한 미국 대학생들의 유가족들은 심지서 조승희에게도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비극, 그 자체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느냐, 는 차분하게 정제된 우뇌, 이성의 작용일진대 그때 그들은 아픈 감성은 감성대로 아픈 그대로 감내하면서 그 감성을 조절하는 이성을 고상하게 유지했다. 일류시민의 교양이고 품격이었다.
사고의 상황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기에 충분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입장에 있건만 유가족들에게 불신감을 부추기고 이성이 더욱 마비되게 하는 것은 쓰레기 행동이다. 그런 행동을 목격했을 때 골이 아파왔다. 문제해결에도 상처의 치유에도 추호도 도움이 안 되는 처신이다. MBN과 한국일보에서였다.
마치 배안에 생존해있는 학생인 것처럼 그리고 구조대원들이 일부러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SNS에 거짓말을 올리고 “퍼 날라 주세요”라고 혼란을 획책하는 무리들은 유가족들에게 처절하게 왜곡된 희망을 안겨주고 또 고마워해야 할 구조대원들에게 적개심을 표현하게 한다. 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니? 빨리 들어가 임마! 이런 식의 말을 들을 때 구조대원들은 그만큼 사기가 꺾일 것이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게 할 뿐이다.
인터넷은 익명성의 공간이므로 방종이 난무할 수 있는 경향을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인정한다고 치자. 그런데 버젓이 이름과 간판을 내걸고 그런 짓을 한다면 세월호 선장과 같은 재판대에 올려야 할 정도로 무책임하다.
자칭 잠수전문 거짓말 정신병자에게 낚인 MBN은 언론사의 자격이 있는가. "(실종자와) 실제 통화된 분도 있고, 잠수부 중에 배 갑판 하나, 벽 하나를 두고 대화를 시도해 대화가 된 분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자가) 나와 있던 사람들(민간 잠수부)에게 한다는 소리가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답니다."-이런 선동은 유가족들에게는 정부에 대한 격렬한 불신의 감정을, 일반 시민들에게는 정부에 대한 경멸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통화를 한다면 유가족들에게 제일 먼저 할 텐데 유가족들도 하지 못한 통화를 누가 어떻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벽 하나를 두고 대화가 되었다? MBN은 이게 진실이라고 믿었는가? 바다 속에서 그 거대한 배의 두툼한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가 가능할까? MBN 기자는 그 바다 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는가? 거짓이었다고 사과했지만 정부를 불신하고 경멸하게 하는 감정의 앙금은 둥둥 떠다니게 하는 오물을 배출하는 짓이었다.
그 다음, 한국일보 4월 18일자, 서화숙 칼럼이다. 지난 1년간 한 번도 읽지 않은 신문이지만 포털에서 우연히 제목이 노출되어 있어 클릭해서 읽었는데, “…근해에 있는 미군이 헬기 2대를 가져와서 구조에 나선다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지켜줄 시스템이 없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미군이 헬기를 가져오겠다고 한 내용, 그것을 막았다는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가? 첫째, 그게 사실인가? 둘째, 그 사실을 누구로부터 들었는가? 셋째, 막았다면 왜 막았겠는가? 그 시점에서 헬기가 와도 소용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면 올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지금 사고 해역 근처에 미군 헬기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항공모함이 와 있는데, 그 항공모함이 구조활동에 무슨 도움이 되기는 하는가? 전혀 안 되고 있다. 미군 항공모함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후좌우 상황을 냉철하게 살피고 무의미한 것은 배제해야 하건만 서화숙 칼럼니스트는 다른 어느 언론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특종처럼 ‘미군 헬기 거절’을 슬쩍 던져놓은 다음, ‘이쯤에서 대한민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물러서는 게 희생을 막는 길’이라고 비약하는 결론으로 대통령을 공격했다.
청와대와 당국은 MBN 방송과 서화숙 칼럼의 경위를 검토하고 거짓을 유포하는 방종의 개입이 있었다면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방종을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국정원 댓글 몇 개를 새발의 적혈구라고 한다면 새발의 규모에 해당한다고 하는 포털 사이트 중에서 네이트에 해괴한 기사가 떠 있었다. 갑자기 jtbc의 손석희 앵커를 찬양하는 기사가 연예 코너의 꼭대기 근처에 어제와 오늘 올라 있는 것이다. 유가족과 인터뷰 하는 도중에 사망자를 추가발견했다는 자막이 올라오자 그 자막을 내리라고 했다는데, 손석희 배려심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기사감이 되는 것이라고 쓴 기자나, 그 기사를 대문 꼭대기층에 올려놓는 네이트나, 그 기사에 손석희를 칭송하는 댓글을 줄줄이 다는 네티즌들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지금 이 판국에 그게 무슨 대단한 배려심이기에 기사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그토록 돋보이는 수준이라면 다른 방송국 앵커들에게는 그처럼 사소한 배려심조차 없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단원고 탁구부 학생들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우승하고도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고 슬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슬퍼하면서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다. 찾지 못한 실종자가 269명이 남아 있다.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을까? 배를 인양하고 사망자가 줄줄이 나올 때 진도 체육관은 어떤 참담한 고통으로 눈물바다가 되어 버릴 것이며, 단원고는 어찌될 것이며, 이 까마득한 상처가 어느 때에 치유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진다. 강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분홍빛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생기가 넘쳤다.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잠시 서 있었다.
조갑제 닷컴 청산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