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체제의 새누리당은 출세주의자들의 웰빙당 성격을 완전히 벗어날 순 없어도 적어도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만은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없는 것’ 취급하지 말고, 정권의 정치적 축(軸)으로서 충분히 인정해주어야 한다. 새누리당 역시 스스로 능동성을 발휘해, 청와대와 내각 및 관료에 대해 “이건 아니지 않느냐?”라는 이견(異見)을 주저 없이 표출함으로써 정무(政務)적, 정책적 견제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동안 너무 ‘나홀로 주의’에 잠겨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것은 단적인 예로 연이은 인사실패를 자초했고, 심지어는 “대통령과 독대(獨對)해 본 장관 있으면 손들어 봐라”라는 웃지 못 할 현실을 초래했다. 그러면 대체 누가 대통령의 참고인 노릇을 했을까 하고 물으면 “거 왜 있잖아, 주변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비선(秘線)이라는 뜻이었다. 사실이라면 이건 정상이 아니다.
조선왕조 때도 공(公)조직이 비선에 눌렸던 적이 물론 종종 있었다. 왕이 상궁(尙宮) 치마폭에 빠져 그녀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 적도 있었다. 김무성 체제는 바로 이런 사(私)를 바로잡는 공(公)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김무성이라는 조타수의 성향이 과연 어떠냐 하는 것이다. 그는 소신과 원칙의 사나이인가, 아니면 모든 걸 정치적 기교로 다루는 사람인가? 주문을 한다면, 대한민국의 '대한민국다움'을 지키는 문제에 임해선 ‘단호한 원칙’ 위주로 나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철도노조 파업 때 박근혜 대통령과 최연해 사장이 이루어놓은 기반을 일시에 가로채 허물어버린 전례가 있다.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그 동안 새누리당은 ‘단호한 원칙’ 위주로 다뤄야 할 문제에서 ‘밀면 밀려주는’ 이념적 포퓰리즘으로 흐른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밤나무도 아닌 것이 “나도 밤나무” 하는 식이었다.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었다. 겁이 많은데다, 이념적 원칙이라는 게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다. 김무성 체제는 이런 꼴불견을 시정하는 체제가 될 것인가, 증폭시키는 체제가 될 것인가?
김무성 대표는 차기 총선과 2017년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새누리당을 ‘명예의 전당’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폐차장’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지 않은가? 정신차렷, 김무성!
류근일(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