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노동당 규약>을 통해 對南赤化(대남적화)통일 기조를 변함없이 고수하면서 1960년대 초부터 聯邦制(연방제) 통일을 주장해왔다. 북한은 이후 시기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연방제’의 의미를 여러 차례 수정해왔으며,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1980년 10월10일 제시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하 고려연방제)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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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연방제는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남한의 국보법 폐지·주한미군철수·공산주의 합법화·남한 내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 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북한 정권의 남한 무장해제를 통한 공산화 통일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인민민주주의 정권이란 과거 소련공산당이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후진국에서의 공산화전략으로 완전한 공산정권수립에 앞서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하는 연립정권(국방·내무 등 핵심은 공산당이 장악)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북한의 의도는 1974년 1월30일 개최된 남북 조절위원회 제3차 부위원장회의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 측 부위원장 류장식은 ‘대민족회의’ 구성문제와 관련해 쌍방 대표단의 인원수를 각각 350명 내지 1천500명 규모로 하고, 남한 측 대표단 속에는 반공정당·반공단체·반공인사들이 참가할 수 없으며 ‘통일혁명당’ 대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또 고려연방제가 ‘주체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혀왔다. 실제로 김일성주의는 역사·이념적 배경으로 스탈린주의에 의존하고 있고,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고려연방제는 레닌주의 혁명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해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연방제는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실시되고 경험된 역사적 사실이며, 고려연방제는 레닌주의의 유산으로 북한이 적용한 과도적 조치로서 ‘북한식 흡수통일론’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이 점을 주체사상에 의존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려민주연방 창안방안은 무엇보다도 주체사상의 원리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으로 일관 되게 관통되어 있다. (고려연방제는) 주체사상과 우리나라의 구체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는 가장 정당한 통일 강령이며, 통일구국 대헌장이다.”(黨 기관지 <근로자>, 1980년 제11호 54면)
예컨대 공산주의 역사에서 민족은 과도기적 형태로 존재하며 그들이 민족주의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이 없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방제는 그들에게 있어 ‘전술적 과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작고한 황장엽 비서는 “북한 통치자들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은 본질상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통일전선전략을 구현한 전술적 방안으로서 그들의 통일전선전략은 계급투쟁론과 무산계급 독재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고려연방제의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는 1국가 2제도다. 이것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다주도하는 평양정부를 중앙정부로 하고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남한의 서울정부를 지방정부로 하여 연합한다는 것으로 북한이 남한을 흡수·병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고려연방제는 과거 중국의 모택동이 주도한 ‘國共合作’(국공합작)과도 매우 유사하다. 1923년 1월 중국의 손문은 소련 특명전권 대사인 ‘코민테른’ 특사 요페와 회동해 ‘對蘇(대소)용공정책’ 수용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부르주아(bourgeois)가 진보적 역할을 하고 있는 한 공산당이 원조해야 한다는 것으로 혁명적 부르주아와의 합작을 뜻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혁명적 부르주아적 정당으로서 손문의 중국국민당이 선정됐다. 이것이 바로 國共合作이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제1차 전당대회는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허용한다”는 ‘連蘇連共’(연소연공) 정책을 발표한 결과 이 대회에서 국민당 중앙위원 1/3을 중국공산당이 장악하게 됐으며, 중국공산당은 소위 ‘국민혁명’의 명분하에 대중조직 공작과 군중투쟁을 전개해 세력을 급속히 확장시킬 수 있었다. 國共合作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이 마땅히 국민혁명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며, 국민혁명의 영수로서의 지위에 서야 한다고 철저하게 ‘양보전술’을 구사했다. 나아가 중국공산 당원은 국민혁명을 위하여 충실한 국민당원 노릇을 할 것이고 공산주의 선전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제2차 國共合作을 요구하는 역사적 書翰(서한)을 보내 혁명적 抗日통일전선 구축을 촉구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우리의 敵으로 하여금 우리의 연합전선 앞에 굴복시켜라!”는 지휘방침을 세웠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37년 모택동은 팔로군 간부들에게 행한 비밀연설에서 “우리의 정책은 국민당과의 항일통일전선 결성 성공에 의해 숨 돌릴 시간을 얻었다…(중략) 이제 우리는 금후 우리세력의 70%를 자기발전에, 20%를 대 국민당 타협에, 10%를 항일 작전에 경주한다”는 투쟁의 계획을 제시했다.
國共合作을 통해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어 냈으며,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전략적 구도를 다음과 같이 체계화할 수 있었다. ▲1단계: 타협단계: 눈을 꼭 감고 표면적으로 국민당 정부에 복종하며 손문의 ‘三民主義’를 신봉하는 체하여 생존과 발전을 꾀한다. ▲2단계: 경쟁과 대립단계: 2~3년 동안 정치력과 무장의 기초를 확보하며 국민당 정부와 대항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린다. ▲3단계: 공세와 진출단계: 중화지구에 깊숙이 들어가 근거지를 설치하고, 국민당 세력을 고립 시켜 주도권을 쟁취한다.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國共合作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동원칙을 전술적으로 포기·양보·은폐시킴으로서 국민당 정부와 ‘抗日연합전선’을 형성, 전략적 세력관계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아 모택동의 중국공산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國共合作을 통한 공산화 통일 방안을 이후 대만과 홍콩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실제로 중국은 모택동 사후 등소평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만통일정책을 ‘무력통일노선’에서 ‘평화통일’로 정책을 바꾼다. 그리고 여기서 구사한 정책이 바로 ‘1국가 2제도 통일방안’이다. 1979년 1월 1일 중국은 ‘대만 국민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1국가 2제도 통일방안을 제안했다. 당시 중국은 이를 구체화해 ‘葉九條’(엽구조)라는 對대만정책을 내놓았다. ‘葉九條’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차 國共合作 형식의 조국통일 ▲3통(通商·統合·通郵), 4류(학술·문화·체육·공예) ▲통일 후 대만은 특별행정구로서 고도의 자치권 부여, 군대를 보유할 수 있고 중앙정부는 대만지방사무소에 간섭하지 않는다 ▲대만의 현행제도 유지 ▲대만당국과 각계의 대표자는 전국 단위의 정치지도자가 된다 ▲대만의 재정은 중앙정부가 보조한다 ▲중국본토 이주희망자는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한다 ▲대만 기업인의 본토 투자를 환영하고, 그 권익을 보장한다 ▲대만 각계의 통일에 대한 제안의 일원화
이상이 ‘葉九條’의 내용이다. 북한 정권의 1국가 2제도 통일방안은 바로 이 ‘葉九條’의 대만통일방안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保守 성향의 대만정부는 대만이 주권국가임을 들어 중국의 대만 흡수 통일방안인 ‘葉九條’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북한의 고려연방제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용어들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족대단결’이란 단어다.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대단결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자주성의 확립’은 대한민국의 親美 성향을 타파한다는 의미와 함께 親日·親美 세력을 배척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연방제에는 ‘독립·중립·非동맹 원칙’이 있다. 이 원칙도 주한 미군의 철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북한 정권이나 남한 내 從北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中立國으로 통일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고려연방제에는 또 ‘남북한 군사대립의 종식과 합동 국군의 창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대한민국 군대를 해체하고 무장 해제시켜 군사적으로 무력화 시키겠다는 의미다. 결국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안은 한반도 공산화 통일의 장애가 되는 韓美동맹을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다음 국군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이 이른바 평화적 통일방안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은 북한과 함께 남한 내 從北세력 뿐이다.
[관련 글] 北고려연방제 하에서 '統一대통령'을 선출하면?
남북한 同數(동수)의 대표, 적정수의 해외 동포들로 구성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기반으로 하는 고려연방제를 통해 통일 대통령을 뽑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북한의 평균 투표율은 99%에 달한다. 2011년 7월24일 치러진 북한의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경우 선거자 명부에 등록된 전체 선거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 해당 선거구들에 등록된 도(직할시), 시(구역), 군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들에게 100% 찬성투표를 했다.
반면 남한의 최근 투표율은 50~60%(2012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율은 54.2%)로 이마저도 4~5개 정당의 후보들에게 표가 나뉘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통일대통령을 뽑는 남북한 총선거를 하면 북한은 99% 투표율에 북한 후보를 지지하는 100% 몰표가 나오게 된다.
반면 남한은 50~60% 투표율에 여러 후보에게 표가 분산되기 때문에 통일대통령은 자연스럽게 북한 후보가 된다. 국회에서도 북한의 노동당이 제1정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