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 논설위원
러시아는 6자회담의 당사국이긴 하지만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서는 외곽을 맴돌아 왔다. 일단 북한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고, 한국과도 그저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6자회담에서 러시아의 입장이 그리 큰 변수가 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고 일각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러시아를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런 러시아가 올해 들어 부쩍 한반도 문제의 중심 무대로 이동했다. 그 하나는 북·러 관계의 급속한 진전이다. 지난 5월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북한 채무를 모두 탕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10월에는 리수용 외무상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11월에는 권력 2인자로 불리는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연이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일각에서는 내년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높게 예측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취임 이후 싸늘해진 북·중 관계와 유엔에서 시작된 고강도 인권 압박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외교적 고립을 탈피해 보려는 북한의 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제재로 막힌 유럽 대신 아시아 진출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의 계산이 맞아 떨어진 측면이 있다.
북·러의 밀월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0월부터 공식화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남·북·러 삼각(三角) 협력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8일 열린 제7차 세계정책회의(WPC) 기조연설에서도 “주요 파트너 국가와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진정한 하나의 대륙으로 긴밀하게 연결해 나가고자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앞서 지난달 27일에는 러시아 석탄 4만5000t이 북한 나진항을 거쳐 국내로 처음 수입됐다.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첫 시범 운송이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첫 결실이다. 한국이 러시아에 지불할 400만 달러(약 44억 원)의 석탄대금과 운송료 중 일부가 북한으로 가기 때문에 5·24 대북 제재조치가 사실상 풀리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 한·러 대화포럼(KRD)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한·러 언론인 포럼’ 참석차 지난 한 주 동안 모스크바를 방문, 정부·의회 및 경제계 관계자들을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서울에서 느끼는 3각 협력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러시아의 인식은 여전히 친한(親韓)과는 거리가 멀었고, 3각 협력 또한 장밋빛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북핵 등 현안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입장이 한층 북한에 경도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정부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자제력을 발휘해 4차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 간 연례적인 군사훈련을 ‘평양 장악’을 위한 대규모의 상륙작전 훈련이라고 단정했다. 6자회담도 전제 조건 없이 즉각 재개할 것을 요구, 비핵화 사전 조치 등을 요구해온 우리와 큰 입장 차를 드러냈다. 외교·군사적 문제에서 북한 편향적인 시각을 보이면서도 한국과의 경협은 적극성을 보였다. 블라디미르 야쿠닌 철도공사 사장이나 알렉산드르 갈루슈카 극동개발부 장관 등 경협 주무 부서 관계자들은 한국 측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야쿠닌 사장은 3각 협력과 관련된 북한 태도에 대해 “여러 어려운 상황에도 북한은 나진-하산 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지원하고 있다”고 북한을 감쌌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균형된 시각을 잃은 러시아가 추진하는 경협 프로젝트에서도 점검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협 프로젝트의 관건은 명분이나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현실적인 경제적 이득이다. 러시아와 북한 측이 우리 기업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지만 러시아 경제가 루불화의 급락으로 ‘제2의 외환위기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섣부른 투자를 했다간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치·군사적으로도 조변석개(朝變夕改) 하는 북한의 태도를 신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투자를 한 이후 개성공단처럼 북한이 문을 닫아 버리고 강짜를 부리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정부 정책에 기업이 경제성을 무시하고 총알받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대박’ 이면에 숨은 ‘쪽박’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출처 문화닷컴